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사도신경이 서방교회 안에서 선포되던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에 성령이라는 고백이 굉장히 파편적으로 한 줄에만 나와 있습니다. 동방교회가 고백하던 니케아 신조는 성령에 관한 교리가 굉장히 길고 자세합니다. 루마니아 그리스정교회라든지, 러시아정교회는 니케아 신앙고백을 합니다. 로마교회가 주도했던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암송하죠. 사도신경은 보시다시피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는 잘 설명되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돼 있죠. 그런데 성령은 성부하나님과도 관련이 안 돼 있고 성자 예수님과도 관련이 안 돼 있습니다. 매우 부족합니다. 사도신경을 우리는 완전한 교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4세기 때 로마교우들이 고백하다가 순교한 고백이라고 믿어야 하고, 니케아신조 칼게돈신조 등 교회사에 풍성한 신앙고백의 유산과 합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은 강해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셔서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셔야 하고 성령이 이 자리에 임해야 하고 성령께서 지적 설명보다 임재를 통하여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성령은 가끔 하나님께서 신적임의성을 가지고,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처럼 신적 임의성을 가지고 예측불가능하게 움직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지는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신적임의성에 따라 움직이는 독자적인 영임과 동시에 성도가 성령 받기를 간구할 때 임하는 영이기 때문에 신적임의성 + 인간의 열망, 인간의 고조되고 초점 잡힌 기도에 응답하는 영이기 때문에 성령 받기를 갈구해야 합니다. 또 심지어 사도적 증언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합니다. 사도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고, 공동체의 예배를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성령은 어떤 인간적 매개 없이도 신적임의성의 원칙으로 아무에게나 부는 바람과 같다, 또한 성령은 성도의 열망에 응답하여 성도의 열망에 정조준하여 임하는 인격적 응답의 영이기도 하기 때문에 성령 받기를 신적임의성에만 맡기면 안 된다, 성령 받기를 갈구해야 한다, 성령은 신적임의성과 매개 없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매개를 통해 역사하는데 사도적 증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이 임하고, 사도적 안수 또는 공동체적 친교의 몰입, 찬양과 기도의 몰입, 극한 순종의 현장에 동참함을 통하여 성령을 받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산소가 많은 곳에 들어가려면 숲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숲속에 들어갈 때 맑은 산소를 마실 수 있고 오존을 마실 수 있죠. 신령한 원시림 같은 공동체에 들어가야만 성령의 산소 같은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거죠. 성령의 역사는 공동체적 삶의 아우라에서 뿜어 나오는 선물임과 동시에 영적 광채입니다. 우리가 좋은 교회를 다녀야 하는 이유, 좋은 영적인 사람과 부단한 영적접촉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 즉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쁜 교회를 다니는 것은 하루에 100만원씩 손해 보는 것과 같습니다. 나쁜 목사님께 헌금 갖다 바치고 안수 받으면 하루에 천만 원씩 은행잔고가 빠져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참 어려운 말입니다. 그래서 좋은 교회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고, 우리는 가향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칭찬하거나 추천하지 못합니다. 불완전한 지상의 순례교회입니다. 어딘가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좋은 교회가 있을 것을 믿고 부단하게 찾아야 하고, 지혜의 땅을 향해 순례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런 양면성이 있기 때문에 성령에 관한 설교를 듣는 것도 사도적 증언, 공동체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경청하는 것도 하나의 성령의 역사에 노출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성령에 관한 글을 일단 읽어야 합니다. 찰스 피니나 부흥운동가들은 부흥은 신적임의성에 맡겨져 있지 않고 인간적 기회에 맡겨져 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정말 부흥회 때 은혜 받으려면 하늘만 바라보면 안 되고, 받을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마이크 음향도 조절해놓고, 이런 모든 걸 완벽하게 할 때 진짜 성령이 더 강력하게 임하더라,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인간적인 기여가 앞서간다고 느끼기 쉬운데 성령 받기를 갈구하는 사람의 노력과 분투가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요한복음 14장 26절, 15장 26절, 16장 7절은 성령이 삼위일체 삼격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어디 있느냐 물으면, 요한복음 14장 26절, 15장 26절, 16장 7절이 삼위일체를 결정적으로 증거하는 본문이라 말해야 합니다. 그다음 에베소서 1장 3-12절이 완벽하게 삼위일체를 증거하는 본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완벽하게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증언록입니다. 사도행전 2장 22-38절 삼위일체가 어디 있느냐면 세 가지 본문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읽은 요한복음과 달리 에베소서 1장 3-12절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다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과 성령과 하나님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이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착석하시자마자 아버지께 요청하여 보내주실 성령, 이런 말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자마자 내가 보낼 성령,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14장 26절,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여기가 니케아신조에서 유명한 필리오케 논쟁이 나옵니다. 혹시 들어 보셨어요? 안 들어보셨겠죠.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에 가면 제가 숭실대학교에서 한 <기독교사상사> 강의록이 있는데, 그 강의록 앞부분에 있습니다. 그 강의록은 제가 숭실대학교 학생들에게 강의했던 강의록을 그대로 올려놓은 겁니다. 거기 보면 필리오케 논쟁이 나옵니다. 필리오는 라틴어로 아들입니다. que는 라틴어로 and 입니다. and son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니케아 신조,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and son이 필리오케 논쟁입니다. 1054년에 이 논쟁 때문에 동서교회가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왜? 니케아신조에다 서방교회 교부들과 주교들이 이걸 집어넣은 겁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이걸 집어넣은 이유가 요한복음 14장 26절과 15장 26절 때문입니다. 이걸 넣자마자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완전히 분열되었고 1948년에 화해했습니다. 교회가 한 번 싸우면 천년은 대개 갑니다. 진짜 무서운 겁니다.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먹고, 교인들이 술 담배를 평소에 하면 한 번 싸우더라도 진창 마시면서, 괜히 술도 안 먹으니까 담배 한 대만 주고받아도 화해가 될 것을 천 년간 싸움합니다. 몰트만이 루마니아 대주교를 만나서 동방정교회의 성령론을 받아들이면서 <삼위일체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라는 책을 쓰면서 화해가 일어났습니다. 이게 교회사적으로 1948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논쟁은 불필요한데 둘 다 어리석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출원하신다, 그리고 아들로부터 출원하신다, 이 말을 집어넣은 이유는 아들은 교회를 상징하고 아버지는 국가를 상징합니다. 서방교회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동등하다는 걸 과시하기 위하여 교황권과 황제권의 동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집어넣은 겁니다. 그런데 동방교회는 그런 게 없고 국가와 교회는 항상 구분되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3-12절에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누구를 통하여? 아들 하나님의 순종을 통하여 창조했습니다. 아들 하나님은 이 세계의 창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순종을 하여 아버지 뜻을 준행하여 이 세계의 뜻에 끊임없이 continues process 합니다. 창조합니다. 창조주 우리 하나님은 명령으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 아들 하나님은 명령을 받들어서 끊임없이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유지하고 maintenance 수리하시는 분, 성령 하나님은 이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만든 이 세계가 더 나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도록 구원과 진보를 위해서 끊임없이 감동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모든 설계자시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은 이 모든 아버지의 설계를 완벽하게 수행하여 지금도 이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학 안에서는 장애인은 없습니다. 아직도 창조가 덜 끝난 사람만 있는 겁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창조는 영원토록 계속되는 일입니다. 만일 창조가 한 번 일어난 창조라면 장애인은 영구적으로 해명이 안 되는 부조리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신앙을 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사십년 째 눈을 감고 비렁뱅이 생활을 하는 부조리한 일도 일어납니다. 창조의 다층적 층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자 아들 하나님의 끊임없는 명령과 순종을 통하여 이 세계를 이렇게 멋지게 유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걸 볼 때 하나님이 손을 써서 이만큼 된다고 하면 여러분은 믿지 않죠? 불평하는 사람들은, 세계가 이렇게 엄청난 인구가 몇 천 년 동안 문명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유지된 것 자체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이 끊임없이 순종과 위임을 통하여서 이 세계를 지탱해 왔다는 것, 안 믿으려고 하는데 엄청난 거거든요. 하나님을 알고 나면 너무 놀라운 일이에요.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성자 하나님이 순종하도록 도와주는 숱한 도우미들이 천군과 성도입니다. 백성입니다. 그 백성 개개인에게 가서 예수님의 뜻을 일대일로 멘토링 해주고 컨설팅 해주고 상담해주는 영이 바로, 이런 미분화된 순종을 적분하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individualizing spirit입니다. 우리에게 individual하게 진리를 적용해줍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까지는 알지만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모릅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걸 알겠는데 성령 받기 전에는 그 십자가에 달린 사건이 내 가슴속에 일어난 나를 위한 사건이 아닙니다. 성령 받아야만 되는 겁니다. 역으로 성령을 받고 나면 내 가슴 속 한복판에 일어난 죄사함의 사건이 우주적 사건이고 온 세계 만민을 위한 사건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세계 선교에 돌입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보면 우주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모든 반역하는 세력들이 언젠가 그리스도적 순종으로 귀결되고 수렴될 것을 확신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생깁니다. 이런 선순환이 계속 일어나는 것, 그래서 마지막에 성령은 약속의 인치심의 영입니다. 이 말은 반드시 하나님이 설계한 그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어,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고 나를 창조했는지를 해명하실 날이 온다고 믿는 그 날이 올 것을 믿는 약속을 실현시킬 보증물, 안전보장감, 약속의 실현감을 끊임없이 증가시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인 쳐진 미래만 있습니다. 성령 받자마자 미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것이고 구원 받은 성도의 것으로 확 바뀝니다. 지금 현재는 내가 어둠의 세력에 포획돼 있다 할지라도 인 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자마자 나는 굉장히 미래지향적인 존재가 되고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은 존재가 되고, 새로 나를 창조하실 그 모습을 보고 질주하게 됩니다. 이런 미래로 나를 한 없이 끌어가고 종말의 완전지점으로 끌어가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면 과거에 발목이 잡히거나 지금 현재 질서를 장악하는 어둠의 세력들을 과대평가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1장 3-12절을 백 번 천 번 암송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하실 때만 미래가 밝아집니다. 암송하지 못하고 몇 장에 있더라, 이래가지고 안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은혜 받지 못한 이유가 암송이 안 돼서입니다. 암송이 안 된 사람은 성경이 없는 사람과 같은 겁니다. bibleless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 보세요. 얼마나 좋은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 신령한 복은 언제 우리 것이 됩니까? 제일 마지막에, 1장 12-14절 '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은 번역이 잘못돼서 애매모호합니다. 이건 원래 분사구문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번역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내용으로 말하면 성령 받으면 나를 새 하늘과 새 창조의 빛 아래서 바라보게 됩니다. 성령 받으면 원수 사랑할 수 있고 죽지 않고 부활한 내 모습을 앞당겨 맛 볼 수 있습니다. 왜? 약속의 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내 모습을 미리 나에게 보여주시고 미리 실현시켜 주시기 때문에 약속의 인치심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여의도에 있는 밤섬처럼 외롭게 떠 있는데 사도신경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교회사를 교조적으로 정당화하지 말고 역사적으로 맥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사도신경도 교조적으로 이것이 유일하게 최고다, 라고 말하지 말고 니케아 신조와 비교해 봐야 합니다. 니케아 신조는 굉장히 길어서 IQ가 나쁜 사람은 일단 따라가지 못하고 하다가 지쳐 버립니다. 그래서 길을 잃기 때문에 사도신경은 우리 머리에 딱 맞습니다. 니케아신조는 굉장히 장엄하고 시적입니다. 빛에서 나오신 빛이신 하나님, 이렇게 계속 시적입니다. 사도신경은 대한민국 국민교육헌장 외우다 진 뺀 우리에게 딱 맞습니다. 그런데 외롭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외롭죠. 다시 중간 요약하자면, 성령을 아들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면 지금 WCC를 결사반대하는 자들의 입장이 됩니다. 성령이 아들의 요청으로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고 하면 WCC 같이 됩니다. 이게 어떤 함의가 있느냐? 만일 성령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역사적 제도권 교회와 상관없는 자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들의 요청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성령이 역사하니까, 그런데 성령이 아버지께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왔다고 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그 사람안에서 배타적으로 역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1991년에 WCC가 호주 캔버라에서 총회를 하면서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1990년에 유명한 문서가 바아르 statement입니다. 스위스에 있는 작은 마을 바아르에서 만든 문서인데 이것은 종교 간의 대화 문서입니다. 지금 WCC를 결사반대하는 사람들이 이걸 가지고 시비를 거는데, 이 바아르 문서내용이 그리스도 예수와 상관없이 살아 있는 종교인들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건 바로 동방정교회 또는 동방교회, 즉 니케아 종교에서 성령의 포괄적 역사를 생각하면 약간 이 말도 무시하기 힘듭니다. 윤리적 자비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모든 고등종교가 악령의 소생이라고 보느냐? 이렇게 볼 때는 악력은 아니다, 그럼 무엇이냐? 감히 성령이라고 해도 된다, 라고 해서 그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한다고 봤습니다. 여기가 끝나지 않은 싸움입니다. 이게 과연 옳은지 30년 더 봐야 합니다. 적어도 50년 더 봐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볼 때 WCC 결사반대자가 분명히 잘못됐다고 봅니다. 다만 바아르 문서를 발생시킨 그 사람들이 타 종교를 얼마나 면밀히 심층임상경험하고 했는지는 모릅니다. 저는 타 종교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타 종교 안에 성령이 역사한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일단 스님들을 보면 분명히 성령이 역사한다는 확신이 안 드는데 또 인도에서 20년 30년 선교한 사람들 전부다 인도의 깊은 브라만 사상에 성령이 역사하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임상경험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이걸 섣불리 단정할 수 없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20년 40년 해외선교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논쟁에 우리가 크게 끼어들 필요는 없지만 WCC가 하도 문제가 많기 때문에 질문 이메일이 저에게 많이 옵니다. 제가 짧게 한 문단으로 이론적으로 대답해드립니다. WCC는 성령의 역사를 굉장히 포괄적으로 보고, 다시 말해서 세계의 모든 종교를 기독교의 제2중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제일 반대하는 사람이 힌두교입니다. 뭐라고? 우리 성령 없어, 힌두교도들은 드디어 종교다원주의라면서 결국 기독교적 agenda를 가지고 모든 종교를 평가하고 평준화하려고 하네, 성령이 임하니까 남녀차별이 없어졌다, 성령이 임하니까 계급차별이 없어졌다, 그리고 너희 종교도 성령이 있다고 말하니까 힌두교는 대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카스트제도, 윤회를 믿고 전생을 믿는다, 그러니까 오히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타종교를 기독교적 가치로 줄을 세우는 종교이기 때문에 타종교인들도 이걸 싫어합니다. 아하 이제 보니까 종교다원주의라고 양보를 해놓고 기독교가 종교의 에센스를 대표한다고 믿고 우리한테 카스트제도를 은근히 비판하네, 그러니까 힌두교가 안 나오려고 합니다. 결국 종교다원주의는 이 세상에 있는 고등종교를 문명과 야만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적어도 기독교적 표방을 해야만 성령의 역사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교회는 잃는 것이 없습니다. 왜 잃는 것이 없느냐? 힌두교의 윤회나 카스트제도는 분명히 악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벌써 틀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종교에 성령이 있다고 말하면 그 종교는 성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종교다원주의는 서구 기독교제국주의입니다. 멍석 깔아주고 와서 회의하자고 하는데 알고 보니까 교회 중심, 이걸 cristo centric, 기독교중심의 syncretism, 그리스도 중심의 혼합주의, 바아르 문서에 나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중심의 혼합주의라고,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 기분이 나쁘고 흥분이 됩니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결국 세계 모든 종교들을 기독교 신학 안에 맥락 안에 자리매김, position을 두면서 우리가 control 할 수 있는, 통제할 수 있는, 힌두교 같은 타밀의 전통종교가 매우 여성에 대해서 억압적이고 핍박하니까 그걸 고치라고 요구하는 셈이 되는 거죠.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이 됩니다. 힌두교에 가서 카스트제도 없애려고 수십 년 노력했던 사람이 네슬린 뉴비긴입니다. 타밀 선교사 있죠. 그렇게 했는데 영국과 미국 보니까 아직도 힌두교보다 더 나쁜 카스트 제도, 저임금제도, 이게 바로 노예제도거든요. 이게 그대로 있으니까 인도나 맨해튼이나 똑같구나, 여전히 서구는 선교의 대상이다, 이렇게 나오는 거거든요. 제가 이번에 구약학에서 논문을 하나 발표했습니다. 하나 발표한 논문은 인데 아브라함 종교가 지역 토착종교와 끊임없는 대화와 교섭을 하면서 드디어 참된 하나님 신앙으로 발전해갔다는 걸 밝힌 논문입니다. 제가 논문 나오면 올려놓겠습니다. 지금은 아직까지 잡지에 나오지 않아 올려놓을 수 없고,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낸 영이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냈다는 말을 안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는 성령이거든요. 모든 타 종교의 성령이 임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그 성령의 내용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진리라면 그건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겁니다. 타종교에 성령의 역사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그 말들이 갖는 위험성과 도발성에 주목하지 말고 어떤 내용이 성령의 역사란 말인가를 예의주시 하면 됩니다. 성령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비움과 대속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대종교든 옴 진리교든 어떤 종교건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말하려면 십자가의 진리를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로 오해를 받아도 성령은 예수를 증언하는 영이거든요.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사람에게 영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사형수가 아니라 비참한 운명의 피해자가 아니라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 되어서 지금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만주, 만왕임을 고백하는 것이 성령이거든요.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왜?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를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 고백하는 것은 맨 정신이면 안 됩니다. 그건 성령이 임해야만 합니다. 그런 가치전복 표상이 완전히 전복되는 말이니까, 십자가에 못이 박힌 사람이 세상의 운명을 지배하는 통치자가 된다, 이건 우리가 믿기 힘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나사렛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았습니다. 엄청난 대반전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십자가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거든요. 십자가의 하나님은 사랑의 대반전을 믿습니다, 정의의 대반전을 믿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폭력과 불의를 궁극적으로 이길 것을 믿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를 믿는 겁니다. 그런 믿음이 예수의 성령을 받자마자 생기니까,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말은 모든 부조리와 폭력이 판치는 곳에 사랑과 정의가 모든 나쁜 체제를 몰아낼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이란 말이에요. 예수를 믿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과정에 십자가의 굴욕적 죽음을 참아낸 예수를 믿기 때문에 십자가의 굴욕적 패배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하고, 폭력을 단념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믿는 우리 때문에 올리브 크롬웰처럼 칼을 가지고 찰스 왕을 죽일 필요가 없어요. 그건 너무 지나친 거예요. 내가 진리를 확신하면서 내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내 진리를 적대하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은 십자가의 원리가 아닙니다.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같은 단두대주의입니다. 나의 적수를 단두대에 목을 날리는 것은 절대로 십자가주의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내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원수가 썼던 폭력의 무기가 쓸데없다는 것을 설복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이김이 아닙니다. 시누이가 올케한테 전화로 15분 퍼부었습니다. 내 동생 네가 타락시켰다, 아파트 어쨌냐? 이번에 추석에 보낸 10만원이 돈이냐? 막 퍼부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올케가 다시 받아서 25분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교회집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의 도로 이겼습니다. 전화의 폭력으로 이겼습니까? 25분간 퍼부었더니 다시는 시누이가 언어적 도발을 안 해왔습니다. 이긴 겁니까? 메뚜기가 하루살이랑 교차로에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메뚜기가 도약할 때 하루살이가 지나가다가 하루살이가 척추를 다쳐서 힘든데 메뚜기가 I'm sorry를 안 해서 하루살이가 성이 났습니다. 200마리를 불러서 포위했습니다. 메뚜기가 뭐라 했습니까? 내일 싸우자,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못 사니까 내일 싸우자. 우리가 진짜 힘을 갖고 있는 폭력을 너무 무서워해서 폭력으로 무장하고 싶은 유혹이 있거든요. 이 사람을 이번에 말로 제압 안 하면, 추석 명절 전화가 올 텐데 큰일이다, 하나님 한 번만 폭력 쓰겠습니다, 한 번만 빌라도의 철퇴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다음부터는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빌라도의 철퇴를 맞고 영구적으로 끊어지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는 거거든요. 화병으로 죽어버리면 어떡해요?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옳지만 모욕을 참고, 내가 옳지만 주님이 일으키신 반전을 믿고 부조리한 손해를 감수하고 언어적 도발적인 공격을 감수한다는 거거든요. 이것이 세상이 못하는 것이고, 세상이 못하는 유일한 공격은 참는 거거든요. 전부 다 힘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잘하는 겁니다. 그건 조지 W. 부시도 잘하고 박근혜도 잘합니다. 이 모든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하나님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주실 것을 믿는 것은 세상이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사탄은 절대 못 따라오거든요. 십자가는 하나님이 숨겨 놓는 모든 폭력의 원천 제거자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폭력 모든 공격과 불의, 이 세상에서 사탄이 쓸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전부 다 원천 해체해버린 겁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거예요. 진짜 무서운 사람은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에요. 십자가를 지신 그분이 만왕의 왕 만 주의 주라는 말, 그걸 믿는 것이 성령이니까 성령은 가치전복 대반전의 영을 믿는 거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믿으면 어떤 모욕적인 상황도 하나님이 일으키실 반전에 극복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있는 거죠. 십자가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어마어마하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요즘 제가 정말 복음을 깨달은 것은 전 세계 만민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청년들도 기독교 신앙의 위력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교회사도 모르고, 엄청난 2천년의 풍성한 교회사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를 믿고도 신앙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모르고 교회가 얼마나 엄청난가를 모릅니다.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빼버리면, 이 역설적인 진리를 빼버리면 어설픈 몇 가지 명제의 조합이 아닙니다. 그걸 믿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성이 수긍하는 정도의 윤리와 도덕을 믿는 게 아니라 이성도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초이성적 논리 앞에, 대반전 앞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주를 경배하는 것,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을 경배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이고, 내가 지상에서 보내는 모든 생애는 삼일 후에 반전 일으킬 부조리입니다. 내가 앞으로 지상에서 받는 모든 손해 모든 피해는 삼일 밤 안에 있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안에, 무덤 안에 있는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있는 시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삼일 안에 반전을 일으킵니다. 그게 바로 진리 앞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사람, 진리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분이 주님이라 봅니다. 하나님의 진리 앞에 죽기까지 복종하여 마침내 진리의 힘으로 삼일 만에 대반전을 일으키셔서 모든 억울함과 앙갚음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앙갚음보다 더 좋은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분, 그분이 저는 우리 주님이라 보거든요. 그 주님을 믿는 것이 기독교이고, 그 주님을 믿는 기독교인의 동아리가 교회에요.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진리의 보배, 진리의 보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무능력하고 이렇게 우리가 아직까지 존재감이 없는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주를 성령의 감동으로 영접하지 않아서 그렇다 볼 수 있거든요. 영접하자마자 어마어마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주님 때문에 빈털터리가 됩니까? 세계 만민의 재산이 제 재산이 됩니다. 제가 제 것의 집착을 놓는 순간 하나님 것이 제 것이 됩니다. 제가 이것을 잡는 순간, 내가 이 교회만 잡는 순간 이 교회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집착과 소유를 벗고 우주적 공교회를 잡고 있으면 영적 영향력이 커집니다. 가향교회는 우주적 공교회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붙어 있으면 우리 자신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지나간 생애에 한탄이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 옛날에는 제게 이렇게 뜨겁게 해주시지 않으셨어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이 파송하셔서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미리 맛보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모욕당하면서 영광을 생각합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 미래의 부요를 생각하고요. 지금 고독함 속에서 의인의 회중에 들어갈 생각을 합니다. 생각해보면 너무 간단합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동 터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만세, 만주의 주 만세 세 번, 이 기쁜 소식을 찬양 세 번, 암송, 출근 돈 벌러 가는 것, 갖다 와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주말에는 친구를 불러서 밥 먹는 것, 주일에는 모여서 찬양하는 것, 사랑하는 형제자매의 얼굴을 살피는 것, 근심 있는 것 살피는 것, 중보기도 하는 것, 돈을 팍팍 쓰는 것, 시간을 써서 재능을 바치는 것, 이렇게 계속 누적되다 보면 사랑의 영역이 커지고 내가 필요한 사람이 내게 나타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고 이웃 사랑을 늘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 누군지 생각 못하는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 반드시 이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저 이웃 사랑하고 싶은데요, 이웃이 일단 너무 많아요, 151번 타면 300명 앉아 있죠, 2호선 타면 1만 명 앉아 있죠, 누가 내 이웃이죠? 이 사람은 이웃 사랑할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웃 사랑할 때 한 명씩만 나타나게 해주세요. 그런데 이웃 사랑을 하고 싶은데 누가 이웃인지 모른다? 그건 성령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궤도 탈선해서 그래요. 우리 하나님은 아침마다 저녁마다 시시때때로 나에게 우주적 교신을 통하여, 김회권 가산톨게이트로 뛰어가라, 거기 내시 한 명이 벤츠를 타고 있다, 빨리 가서 성경을 가르쳐라, 이런 지시가 신속하게 옵니다. 가산 톨게이트를 가면 내시 한 명이 엄청난 달러를 가지고 헌금하고 싶은데 어떡하면 좋겠느냐면서 이사야 53장 4절을 펴놓고, 이 뜻이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럼 벤츠 앞자리에 타서 예수님을 가르칩니다. 도림천에 가서 세례 받읍시다, 그런 고도의 영적감흥이 텁텁해버린 서울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영적감흥 속에 사는 것이 영 안에 사는 겁니다. 영인입니다.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너무 재미있고 amazing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진짜 좋으십니다. 성령 하나님, 약속의 인을 쳐 주시는 하나님,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확신시켜주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저는 성령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삼일 만에 대반전을 이루실 그 하나님을 확신시키는 그 성령을 믿는 것, 그것이 대반전과 폭정을 끝내고 이 어두운 현재의 시간을 상대화시켜서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미리 반기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 치시는 성령을 믿는 겁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현실은 어둠이 지배하고 나의 과거는 과거의 제가 발목을 잡을지라도 약속의 영이신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반전을 내 허무하고도 허탈한 삶속에서도 일으켜주셔서 믿을 거리가 있게 하시고, 사랑할 이웃이 나타나게 하시고, 속하여 연대할 공동체 동아리를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신경에서 성령론은 섬처럼 고립돼 있습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사이에는 절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부자지간이 딱 드러납니다. 그런데 성령에 오면 아무런 부자지간이나 영적 친인척 관계가 진술되지 않고 바로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이렇게 돼 있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성령론이 교회론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고백 사이에 있습니다. 사도신경 안에 있는 서방교회 전통, 로마교회가 서방교회 전통을 이끌었고 알렉산드리아가 동방교회 전통을 이루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이집트에 있는 그리스 말을 쓰는 공동체였죠. 이 알렉산드리아 전통이 동로마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지금은 이스탄불이죠. 이쪽으로 가서 9세기경에 러시아정교회가 생기면서 정교회신학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방교회의 니케아종교 신앙고백에 비해서 서방교회의 신앙고백이었던 사도신경, 즉 로마교회가 고백했던 사도신경이 성령론이 한 줄밖에 없는 것이 굉장히 문제가 됐습니다. 그래서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서방교회 성령론의 결핍을 동방교회를 통하여 극복했는데, 동방교회에 오랫동안 남아 있던 성령론을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세 성령론이라고 말합니다.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는 어거스틴 시절에 어거스틴과 거의 동시대 사람들입니다. 터키 갑바도기아 동굴에서 기도했다고 해서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라고 말합니다. 갑바도기아 세 교부의 성령론이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많이 읽으면 성령론이 발달되고 마태복음과 로마서를 읽으면 기독교 윤리가 발달되고 실천력이 많이 발달됩니다. 서방교회는 마태복음과 로마서의 교회이고, 동방교회는 요한복음의 교회다, 이렇게 말합니다. 삼위일체론은 요한복음을 읽어야만 나옵니다. 마태복음만 읽어서는 삼위일체교리가 확증이 안 됩니다. 로마서를 읽어도 성령은 주변적으로 다뤄집니다. 그런데 성령이 독자적으로 예수님을 대신하는 또 다른 보혜사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요한복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어야 결정적으로 삼위일체론 중에서 성령론이 온전해집니다. 성령론이 온전하지 않으면 지금 WCC 주최측과 대립자 사이에 있는 갈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방교회에서는 1054년에 니케아 종교회의를 이렇게 고쳤습니다.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출원하신다, prociese 라는 단어 출원입니다. 그런데 서방교회 주교와 교부들이 이렇게 붙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그걸 라틴어로 필리오퀘입니다. 필리오는 아들입니다. 퀘, que 는 and입니다. and 필리오, 라틴어는 그걸 역순으로 읽습니다. 필리오퀘라고 해서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성령이 나온다, 성령을 교회의 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고백의 일부분으로 축소시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나온 영인 성령은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에게는 역사할 수 없는 영이 된 겁니다. 그런데 필리오퀘 라는 추가삽입구절 때문에 1054년에 드디어 교회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영구적으로 분열합니다. 서방교회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 WCC가 이해가 안 됩니다. WCC는 성령을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역사한다고 주장하는데 비해서 원래 오리지널 니케아 종교회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내용을 내용적으로 알고 그것을 실천하고 이해하는 사람들 가운데라면 종교와 상관없이 역사할 수 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1990년에 스위스에 있는 작은 도시 바아르라는 곳에서 바아르 statement라는 종교간 대화위원회의 문서가 나왔습니다. 이 문서의 핵심은 성령은 살아 있는 고등종교 안에도 역사할 수 있고 심지어 살아 있는 많은 신앙인들 사이에도 성령은 역사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엄청난 격분을 일으켰고 다시 말해서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중요합니다. 성령이 다른 종교에도 역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종교다원주의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타종교인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발 그런 말 쓰지 말아달라고 하면서, 힌두교가 드디어 종교간 대화에서 탈퇴하기 시작한 겁니다. 타종교에도 성령은 역사한다고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은 여성 차별을 반대하시고 노예제도를 반대하시고 카스트제도를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결국 기독교의 성령 역사를 가지고 모든 종교를 평탄화하고 평준화하려고 하니까 힌두교가 굉장히 부담을 가지고, 이제 종교간 대화는 그만하자, That's enough, 나오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기독교가 엄청 양보를 했는데 자세히 보면 세계의 모든 고등종교를 기독교 중심으로 통일하는 겁니다. 종교다원주의에 공격성과 방어성이 동시에 있습니다. WCC를 반대하는 사람은 전반적으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거의 정규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두 번째로 그렇게 창피를 주면서 모여서 하는 게 아니라 논문을 써서 발표해야 합니다. 이번에 가서 논문발표를 신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논문 쓸 실력은 없고 데모할 실력은 있기 때문에, WCC 주최측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더 효과적으로 자세한 안내를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타 종교에도 성령이 역사한다는 말은 동방교회 니케아 종교회의적 관점에서 볼 때는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나온다고 하니까 성자를 거치지 않고 나가는 영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한테는 이렇게 역사하지만 기독교적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내용은 기독교적인데 방식은 다르게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니케아종교, 동방종교의 성령론입니다. 이런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2천년 교회사를 균형적으로 공부해본다면 종교다원주의는 조심해야 하고 매우 면밀하게 숙고해야 하지만 종교대화를 거부하고 타종교인에게도 개종의 대상이라고만 한다면 그건 굉장히 무례할 수 있다, 전쟁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런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요즘 메일이 참 많이 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 그냥 책 한 권 읽었다는 이름으로 계속 메일이 옵니다. 제가 답변 써서 계속 복사해줍니다. 그 많은 질문 때문에 제가 이번에 이라고 해서 구약학계에 논문발표를 했습니다. 그게 나오면 홈페이지에 올려놓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저작권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일반 공개는 못합니다. 제가 발표한 핵심은 만일 타종교 안에 성령의 역사가 없다고 하면 타종교는 전부 다 악령이 됩니다. 타 종교가 악령이라면 악령도 굉장히 자비를 강조하는 영이 돼버립니다. 불교와 힌두교가 악령의 소행이라고 말하면 간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악령의 소행 안에서 간디가 나온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두 가지 역사입니다. 예수를 입술로 주라 고백하는 사람 가운데 역사하고, 두 번째는 입술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님의 가치를 자신도 모르게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묵시적으로 비지시적으로 성령이 역사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면 안 된다, 그런 정도로 하는 게 낫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역사한다는 말도 타종교를 면밀히 연구해서 확신에 이르기 전까지는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임상경험이 필요한데, 타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다고 저는 비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원이 기독교적 구원이라면 힌두교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힌두교는 카스트제도가 전생과 카르마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누구의 비참한 삶을 도와주는 것 자체를 한계가 있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위선이라고 봅니다. 그건 그 사람이 업보를 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계급제도, 차별을 가감하게 하는 것은 훨씬 더 혼란이 옵니다. 힌두교 구르가 이런 말을 합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마세요, 이 모든 인도의 12만 민중이 평등을 주장해보세요, 인도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운명의 이름으로 계급분화가 됐기 때문에 사회가 돌아가는 겁니다, 어차피 안 되는 것을 너무 극단적 이상주의로 밀어붙이는 것은 폭력의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이렇게 나갑니다. 그리고 카르마와 전생과 윤회를 믿습니다. 섣불리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걸 다 안 믿기 때문에 즉각 카스트제도는 없애야 하고 노예제도는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바로 도우려고 하죠. 저는 기독교 복음이 옳다고 믿습니다만, 타 종교와의 대화는 숙고가 필요하고 심지어 타 종교 안에 구원이 있다는 주장은 WCC가 지나치게 나간다고 봅니다. 저는 타 종교 안에 일부 부분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있다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가 있는 그것 자체가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 제가 예수 믿기 전에, 주를 고백하자마자 성령이 역사했을까요? 주를 고백하는 준비과정에 하나님이 나를 도우셔서 서서히 내 마음을 뜨겁게 하는 모든 역사도 성령의 역사였을까요? 보세요. 제가 79년 11월 17일에 예수를 주라 고백했는데 이때 성령께서는 한 번도 그 전에 역사하시지 않다가 제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순간 놀라서 우주 저 편에서 와서 역사했구나, 이렇게 했겠습니까? 아니면 서서히 내 마음과 주변을 변화시키고 내 지성과 감정을 변화시켰다가 절정과 임계점에 달했을 때 고백이 일어나게 했을까요? 내가 고백하기 전에도 성령이 역사했기 때문에 타 종교 안에 예수 고백 없어도 성령이 역사한다는 말을 믿을 때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다. 지금 선교사가 갈 수 없는 곳에 어떻게 하나님이 개종을 일으키느냐면 갈릴리 랍비의 꿈에 세 번 연속 예수님이 나타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선교사가 못 가는 곳에서는 이슬람 내에서 자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이 일어납니다. 이것 보세요. 선교사가 가야만 다 하는 것 아닙니다. 제가 이걸 간단하게 말씀드린 이유는 너무 많은 형제자매들이 WCC가 무엇이냐고 묻고 그래서 간략하게 답변했고, 혹시 더 급해서 논문 나올 때까지 못 참겠다고 하면 카피를 해드리겠습니다. 유출하지 마시고 보시면 제가 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신적임의성, 바람이 부는 대로 성령이 불기 때문에 성령은 사람의 욕정과 종교적 권력 안에 종교적 통제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성령은 바람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성령의 임의성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임의성은 다른 본문 누가복음 11장 13절에 의하면 임의로 불지만 열망하는 자에게 임한다, 성령은 갈구하는 자에게 임한다, 성령은 갈망하는 자에게 임한다, 성령은 예수를 고백하고 갈망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그것이 나와요. 따라서 성령은 신적임의성과 신적자유에 의해서 불고 싶은 대로 불고 인간의 욕정에 매이지 않지만 또한 인간의 성령 받기를 갈구하는 그 마음에 응답한다, 이게 참 모순입니다. 성령은 마음대로 바람처럼 분다, 원하시는 곳에서 분다, 제1명제, 또 2명제 그러나 성령은 누가복음 11장 13절에 따르면 갈구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썼을 때 성령이 임했거든요. 미국 학생운동 초장기에 건초더미아래 소나기를 피했던 5명이 성령 받기를 갈구했을 때 임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성령이 필요한지도 모르는 에베소에 있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은 성령이 있음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우리에게 엄격한 요구를 일삼는 세례요한의 엄격한 요구는 알았지만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던 그들은 사도의 안수와 복음전파를 통해서 성령이 임했거든요. 이 말은 성령은 사도적 증언과 사도적 안수 또는 공동체적 현존, 성령충만한 공동체에 노출된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과 19장에 보면 성령이 갈구되는 곳에 성령이 폭포수처럼 임하고 성령을 들어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영적인 갈망을 깊이 가졌던 에베소에 있는 열두 제자에게는 사도적 증언과 사도적 안수를 통해서 성령이 임했다, 이렇게 말하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에 속하기 때문에 성령은 이슬람교나 힌두교의 랍비에게 불어도 우리는 아무도 성령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성령이여 불지 마십시오, 그건 타종교입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긴 이슬람이에요, 이렇게 말할 수 없어요. 성령의 임의성 때문에, 두 번째는 갈구하는 자에게 강력하게,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갈구하는 심령 속에 임한다, 세 번째로 내가 성령 갈구했는지 잘 몰랐지만 사도적 공동체에 홀연히 참여했다가 사도적 공동체와 접촉을 유지했다가 성령이 임하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제일 중요한 것은 성령 충만한 동아리에 빈번히 출입하면 성령 받습니다. 제가 볼 때 가장 확실한 건 이겁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 가운데 들어오면 반드시 성령 받습니다. 제가 12년 동안 campus ministry에서 불신자만 전도해봤지 않습니까? 안 믿는 사람을 전도해보니까 성령충만한 공동체 하나가 엄청난 사람에게 영적 파급력을 가지고 서서히, 어떤 사람은 4개월 만에 어떤 사람은 1년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결국은 성령의 역사에 노출되면 전부 다 고백을 하게 되더라고요. 사도적 증언이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하나님이 삼일 만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부활시켜서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혔음을 확신시켜 주는 그 사실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22-38절이 사도적 증언입니다. 예수의 공생애 십자가 돌아가심 부활 승천 하나님 보좌우편착석 성령 보내주심, 제가 지난주에 그랬죠. 성령을 받기만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계셨음을 확신하게 된다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계셨음을 확신하는 것은 나를 통치하시고 이 교회를 통치하시고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성령께서 지배하시고 온 세계를 우리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확신한대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령은 어머니의 영과 같기 때문에 모든 고대 교부들은 성령을 어머니와 연결시켰습니다. 시리아라는 동방교회는 성령을 어머니의 영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 메타포가 왜 발달하지 못했느냐? 여신숭배랑 관련돼 있기 때문에, 제가 볼 때 성령은 확실히 어머니적 영입니다. 성부하나님은 명령자입니다. commander입니다. 성령은 항상 낙하함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메타포를 쓰려면 성부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라 하고 성령하나님은 어머니 하나님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그걸 메타포로 쓰면 됩니다.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 명령을 준행하다가 고난 받거나 아버지 명령을 따르다가 십자가를 지는 굴욕에 처할 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품에 안고, <피에타>라는 작품이 묘사하듯이 그 아들의 고난을 끌어안고 자기도 그 고난에 동참하듯이 예수의 신음을 자기신음으로 받아들이는 영이 성령 어머니 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영이 성령의 영이기 때문에 가르친다, 위로한다, 함께 한다, 하나님의 feminity 모성애가 너무 강한 단어가 성령에 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시리아 교부들이 했던 것처럼 해도 괜찮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너무 강력하면 질서는 강조되는 교회지만 어딘지 섬세한 자발성이 떨어집니다. 성령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이 강조되면 질서가 없고 너무 자유분방한 spoiled children 이 너무 많습니다. 순복음교회에 가면 약간 그런 게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설교도 4시간씩하고, 인간이 치우치는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성자를 너무 강조하면 전부 순교자 콤플렉스에 빠져서 온통 십자가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썼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힐 때 성부 하나님은 십자가에 고통당하는 아들로 갈가리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성자가 못 박힐 때 아버지도 못 박혔습니다, 성자가 신장이 파열됐을 때 하나님 아버지도 파열됐습니다, 그럼 성령 하나님은 어디 있었냐? 예수의 신음 속에 있었다, 예수의 절망과 탄식 속에 어머니 성령이 함께 했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진 그곳에 성령이 임한다, 로마서 8장 26절 아닙니까? 굉장히 강력한 메타포죠. 성령은 위로자입니다. 성령은 예수의 길을 따라가다가 고아처럼 신적 유기감, 버림받았다는 느낌, 종적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집어던져 졌을 때, 즉 내가 십자가의 굴욕을 참고 그 어둔 밤과 암흑과 직면하여 진리의 길이긴 하지만 암흑의 길을 삼일동안 걸어가야 하는 무시무시한 미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예수 안에 성령은 신음의 형태로 통곡의 형태로 함께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아까 14장에 보면 보혜사라는 말은 파라클레토스, 파라는 옆입니다. 클레토스는 옆에 있는 위로자입니다. com은 함께입니다. com은 라틴어 쿰에서 나옵니다. 쿰라우디 하면 박수소리, 이런 뜻이죠. com 함께, fortress하면 요새입니다. 함께 있는 강력한 요새가 누굽니까? 포르티시오, 우리가 피아노 forte할 때 그 forte입니다. comforter 하면 성령입니다. 함께 계시면서 내가 약해서 절망에서 자맥질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무시무시한 순간, 어둠의 순간 영혼의 밤에 함께 계셔서 내 신음과 함께 그 인생의 고개를 넘도록 도와주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 하나님 위로를 받는 사람은 위로자가 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위로를 임상적으로 많이 맛 본 사람이 또 자기가 다른 보혜사 성령의 역사를 매개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명령자만 있고 목표 제시자만 있는 게 아니라 목표제시를 하다가 실패한 자의 아우성과 그 실패의 두려움을 앞두고 있는 실패자와 함께 어둠속에 자맥질 하는 영혼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교회 안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명령하시는 하나님과 그 명령을 수행하다가 고난 받는 아들과 고난받는 아들의 탄식 속에, 으깨어진 으스러진 뼛속 깊이 영혼 깊이 탄식하는 성령이 교회 안에 있는 거죠.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참 너무 좋아요. 참 신비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하나님에 관해서는 말로 표현하면 안 되죠. 현존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성령을 오래 설명하면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를 맛보게 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못 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다가, 부조리한 세상의 폭력에 짓이겨져서 버림 받고 성문 밖에 거적때기 안에 집어 던져져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자기 존엄성에 대해서 영구적으로 의심이 들 때, 내가 이 세상 살아서 뭐해? 자기의 값어치와 자기 존재 가치에 대해서 한없이 의심이 드는 그 사람들에게 생명의 영 어머니의 영 살리는 영으로 으깨어진 그 존재, 그 파괴된 자존심 안에 계시면서 괜찮다, comforter 함께 계시면서 힘을 공급해주시는 분, 그래서 성령을 에베소서 1장 13-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맛보게 될 위대한 반전, 지금 굴욕과 모욕과 십자가의 창에 찔리는 고통이 위로로 바뀔 그 날을 앞당겨 맛보게 만들면서 위로를 주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약속의 인치심의 영, 성령을 받으면 미래의 우리가 받을 약속에 대해서 굉장히 낙관적이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과거의 어둔 죄에서 해방되고 현재 어둠의 시간에 포획된 내 영혼이 미래로 질주하게 됩니다. 성령은 약속의 인을 치시는 영이거든요. 종말을 앞당겨서 맛보게 해주거든요. 하나님 나라를 성령 안에서 맛보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3절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라는 말이 나오는 거거든요. 우리가 사도적 증언을 일삼아야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 사형수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됐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계속 선포해야 하고 그 선포가 사도적 증언이거든요. 내가 어떤 이유로든지 내 죄 때문에 심판에 직면하더라도 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부활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걸레가 되고 누더기가 되고, 도덕성이 만신창이가 돼서 어떤 도덕성도 1cm도 남아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 더럽고 추악한 내 모습이 예수의 보혈로 깨끗케 될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에요. 감히 그걸 믿는 것이 성령이거든요. 도덕적 만신창이가 된 내 자존심, 구겨져버린 내 인생, 내 인생의 이력서에서 빼고 싶은 무시무시한 악몽 같은 사연들이 전부 다 영적으로 표백되며 재해석 되며 새롭게 해석될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이에요. 저주가 축복이 될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겁니다. 꼭 훌륭한 일만 십자가가 아니란 말이에요. 본회퍼나 전태일 같이 내가 누굴 위해서 죽어야겠다, 그런 것만 아니라 내 무시무시한 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는 잘못 살아버린 내 인생, 예수 안에서 주홍 같이 붉은 죄가 하얀 눈처럼 바뀔 것을 믿는 것, 그 삼일간의 대반전을 일으켜 주실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 믿는 것이고 그 예수를 믿도록 용기주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말이죠. 성령 받으면 7전 8기 신앙이 생깁니다. 성령 받으면 현재 어둠의 시간이 지배하는 내 인생이 미래의 빛과 사랑의 왕국으로 들어갈 것을 믿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성령 받으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몸처럼 내 몸이 내 영혼이 내 자존심이 삼일 만에 부활하여 재활 복구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 새 힘으로 구비될 것이다, 이걸 믿는 것이 성령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제가 정말 50대 중반으로 갑니다만, 2009년부터 지금까지 제 설교를 잘 들어보세요. 제가 얼마나 교회에 대해서 낙관적인 말을 많이 하는지 보세요. 제가 전통적 기독교에 대해서 엄청난 긍정의 사람으로 바뀌었는가 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주에 <뉴스앤조이> 설교하러 가긴 합니다. 자기편인 줄 알고 오라고 하는데 저는 <뉴스앤조이>와 많이 다릅니다. 폭로보다는 선을 이유로, 2009년 1년 동안 유럽에 가 있으면서 8주 동안 유럽을 여행했습니다. 프라하부터 로마까지, 오펜아스트라 2500 유로 주고 사서 안 다니는 데가 없습니다. 내비게이션도 없는데 파리부터 기독교 유적지를 다 찾아다녔습니다. 장발장이 숨었던 몽파르나스부터 시작해서, 다니면서 일단 그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 루터의 하숙방에 가서 1600년대 책을 보면서 놀랐고, 조직신학 책을 보면서, 성가곡을 보면서, 토마스 키르케라고 하는 멘델스존과 바하가 했던 그 곡을 들으면서, <마테수난곡> 78곡을 들으면서,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면서 서구문명이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기독교가 어마어마하구나. 문학, 예술 건축 양식 법 국가, 2차 세계대전에 기독교 문명국끼리 전쟁을 하고 독일을 재활복구시키기 위해서 독일 신학자 목사들을 길러낸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신학교육,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이 세계에 어떤 나라가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자기 나라가 옛날에 잘못했다고 영토 7분의 1을 양보합니까? 대프로이센, 칸트가 살았던 케닌스부르크는 원래 독일 땅입니다. 지금 러시아 땅 됐어요. 잘못했다고 양보 다했어요. 폴란드에게 영토의 7분의 1을 다 주었어요. 그걸 설득한 사람이 몰트만입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너무 괴롭혔기 때문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영구적으로 폴란드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 오데르강을 다 줬어요. 폴란드는 45만 km², 매 맞고 땅 얻은 겁니다. 전부 다 평지입니다. 폴란드는 매를 엄청 맞다가 땅이 45만 km² 엄청 넓은 영토가 됐어요. 독일은 60만 km² 넘었는데 38만 km²로 땅을 다 잃었어요. 그게 기독교목사님들이 설득한 거래도요. 독일국민들을, 이러면 안 된다고, 이스라엘의 모든 농산물을 누가 다 사줘요? 이스라엘의 모든 꽃 무화과 바로 독일 사람들이 사줘요. 독일 튀빙겐에 가보면 예수님이 드시던 갈릴리 무화과를 바로 맛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해서 무화과를 먹었습니다. 하은이가 깔깔 웃더니, 그게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너도 먹어 보면 알아, 주님이 이 무화과를 드시다가 화가 나신거야, 이건 기독교만 가능한 겁니다. 간디가 산상수훈을 유일하게, 비스마르크도 거부했고 칼 슈미트 독일 수상도 포기했던, 어떻게 나라의 독립을 비폭력으로 찾나? 산상수훈의 예수가 가르친 길로 가겠다, 세계 최초로 산상수훈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나라가 간디와 인도입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대단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좋겠습니까? 저는 올바로 교회가 진짜 성령충만한 교회가 돼서 기독교 중심으로 성령님이 확장되면 타 종교는 교회 중심의 진리관으로 통일 될 수밖에 없고 교회가 제시한 그 성령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 말에 양보했다고 실망할 필요 없어요. 우리 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다가 자기가 0이 돼버리고 자기가 마이너스가 돼버리고 자기 피와 살이 다 찢어져버린 그분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미래라는 것, 미래는 무한히 낙관적이라는 것, 지금 내 몸이 콩가루처럼 부서지더라도 그 미래에서 다시 헤쳐모여 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굴욕과 고난을 참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약속의 인을 치신 성령을 받은 거거든요. 여러분 미래는 주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주님이 기다리는 미래로 가는 우리의 길은 탕자의 대반전의 길이 되겠죠.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약속의 성령,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신적유기감 버림받음을 느끼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공동체를 통하여,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사도적 증언을 통하여, 신적임의성을 통하여, 나의 갈구를 통하여 내 마음을 뜨겁게 하셔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바로 교회를 통치하시고 우주의 하나님 보좌에 앉으셔서 세계를 통치하심을 믿는 것, 이런 엄청난 감격이 우리공동체에 넘치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진짜 예수 믿는 게 정말 좋습니다. 저는 목사인 것이 정말 좋고, 이 본문을 영원토록 전파하는 messenger가 된 게 정말 좋고 말씀 보는 게 정말 좋고 아침마다 새벽기도 하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 만세 주님 만세 세 번 부르고, 세상 모든 욕망과 나의 모든 정욕은 십자가에 못을 박았네, 그 찬송을 부릅니다. 김포 30km 그 지루한 자유로를 2200번 버스를 타면서, 돈 벌러 가세, 돈 벌러 가세, 집에 들어올 때는 안식의 잠이 기다리고 있고 얼마나 좋아요. 하나님 오늘 제게 사랑할 이웃을 한 명만 주시고 내 역량껏 주시고 제 양심에 맞게 이웃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성령께서 신령한 감흥을 통하여, 김회권 지금 가산톨게이트로 벤츠 한 대가 간다, 거기 한 분이 이사야 53장 4절을 펴놓고 죽을 고비다, 빨리 가라, 신속기동군이 돼서 빨리 가면 거기 또 내가 도와야할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영의 세계,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걸 믿습니까? 정말 좋습니다. amazing합니다. 기독교는 진짜 대단합니다. 기독교복음이야말로 온 세상 만민이 알기만 하면 하나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을 옳게만 전하면 온 세상 만민은 행복해질 수밖에 없어요. 이슬람과 힌두교도 제가 아는 하나님을 전파해주고 싶습니다. 사랑으로 전파하고 싶습니다. 무식하게 그들을 도발하면서 무례하게 전파하고 싶지 않고 사랑으로 전파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우리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에서 2015년부터 제가 여러분을 유럽기독교문명을 탐사하는데 인솔해보고 싶습니다. 돈 좀 모아놓으셔야 합니다. 4성급 호텔에 자지 않고 3성급에서 자면 싸게 다닐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대부분 걸어 다니면 됩니다. 예루살렘은 480km입니다. 많이 걷고 주님이 많이 걸으셨던 길을 걸어가 보는 것, 여러분 백두산도 가보고, 여러분 모두가 성령께서 우리를 신적유기감으로 내팽개치지 않고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에 결속됐다는 느낌을 확고부동하게 individually 성령이 역사하신다면 여러분은 아마 천하를 얻은 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허무하죠. 천하를 얻지 못해도 우리 하나님께 구원 받은 영혼으로 산다면 이 세상은 호구지책으로 사는 게 아니라 파송 받은 선교지에요. 이 세상은 무엇으로 바뀔까요? 성령이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셔서 이 성령으로 예수를 따르려고 하는 그 고독한 가운데 으깨어진 탄식 속에 성령 어머니는 함께 하시고 예수를 따르려고 하는 분투 속에 십자가의 버림 받았다는 느낌 속에 성령이 함께 하셔서, 내 죄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함 속에 성령이 함께 하셔서 삼일 동안 어둠의 시간을 지나게 하셨다가 반전을 일으켜주십니다. 이런 성령을 믿습니다. 대반전의 영을 믿습니다, 미래의 종말을 앞당기는 내게 미리 기쁨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게 바로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세상은 성령의 부단한 감화감동 없이는 살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야수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성령의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공동체가 없다면 우리는 파편적인 단자적인 녹슨 쇠붙이처럼 세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면 우리는 종말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간 자가 되고, 모든 굴욕과 죄책감 이길 수 있고 모든 실패감 이길 수 있고 모든 고독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 보혜사 성령님을 이 시간 부어주시고, 각인의 심령에 뜨겁게 작동하도록 역사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많이 힘든 여건 속에서도 일터에 나가서 소득을 벌어서 하나님께 감사 감격으로 바쳤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교회 안팎에 하나님 백성 살리는데 이 헌물이 아낌없이 사용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 필요한 곳에 아낌없이 낭비되도록 용기를 주소서. 한 데나리온 벌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이 많은데 한 데나리온 벌 수 있는 일터를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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