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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내적 증거 -- 칼빈의 정경관 --/변종길교수

by 【고동엽】 2021. 11. 11.
고려신학대학원이 칼빈 출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신학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신학포럼은 신대원 교수들이 전공분야를 살려 다양한 주제로 칼빈 신학과 사상을 조명하고 있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본보는 고신교회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개최하는 이번 포럼의 내용을 요약하여 지상중계 한다.[편집자 주]

대구경북 지역 신학포럼 내용
(2009년 5월 4일 동일교회당)

성령의 내적 증거 -- 칼빈의 정경관 --

성경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1권 7-9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먼저 ‘교회의 결정’을 생각할 수 있다. 교회가 이런 저런 책을 정경(正經)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신적 권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는 것일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렇다고 본다. 그러나 칼빈은 이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교회의 동의에 의해 인정되는 한에 있어서만 성경이 중요하다(권위를 가진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오류이다.”(I,vii,1).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결정에 의존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칼빈은 에베소서 2:20을 든다. 곧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 먼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존재했었다. 이것들이 없었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 있다는 주장, 곧 교회의 동의에 의해서만 성경의 확실성이 의존한다는 생각은 허구이며 매우 불합리한 생각이다. 교회가 성경을 받아들일 때에는 의심스럽거나 논란되는 것을 권위 있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라고 ‘인정(認定)’한 것에 불과하다(I,vii,2).


그러면 우리가 교회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칼빈은 성경은 자기 스스로 그것의 진리됨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의 자증(自證)’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자기 스스로 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사람들이 정경으로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정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읽고 인정하기 이전에 이미 정경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의 판단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교회의 결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증거’에 의한다(I,vii,4). 이것을 칼빈은 ‘성령의 내적 증거’ 또는 ‘내적 설득’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성령의 내적 증거’가 무엇인가? 이것은 음성이나 환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령은 어느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성령의 내적 증거란 신자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성령의 내적 증거는 인간의 판단이나 이성보다 훨씬 우월하다(I,vii,4-5).


우리가 성령의 내적 증거를 정경성의 요소로 인정하면 ‘주관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이유로 정경성의 요소로 인정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있다(Grosheide, Ridderbos 등). 특히 리덜보스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정경의 범위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경성의 기준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과 같이 성령의 내적 증거를 정경성의 원리로 인정해야만 한다(Du Toit). 성령의 내적 증거가 어떤 책이 정경임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주관적인 인정 근거는 된다.


이런 점에서 1913년에 있었던 화란의 두 신학자 H. H. 카이퍼(아브라함 카이퍼의 아들)와 S. 흐레이다너스의 논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이들은 정경의 ‘인정 근거’가 무엇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흐레이다너스는 정경의 인정 근거는 ‘정경 자체’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성경 바깥의 기준이나 잣대를 가지고 정경을 비판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카이퍼는 이에 반대하여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증거’가 정경 인정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성경 신앙의 근거는 ‘성경’도 아니고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도 아니며, 다만 우리가 성경에 대해 가지는 ‘지식’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흐레이다너스는 성령의 증거는 우리가 성경을 그렇게 인정하도록 인도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두 사람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다고 본다. ‘성경’과 ‘성령’은 대립 구도에서 볼 것이 아니다. ‘성령’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 한다. 성령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느끼고 고백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그러나 성령은 성경을 젖혀 두고서, 성경 바깥에서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말씀과 함께’ 역사한다. 따라서 성령과 성경 사이에는 밀접한 협력 관계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권위의 우열을 따질 수 없듯이, ‘성령’과 ‘성경’ 사이의 관계도 대립적으로 볼 수 없다.


칼빈은 이 둘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지 아니하고 함께 사역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한편으로는 ‘성경의 자증’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결정적임을 계속 말하고 있다(I,vi-viii). 칼빈에게는 이 ‘두 원리’가 모순되지 않고 서로 배척하지 아니하면서 동시에 나타난다(I,ix). 이것은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의 두 축이다(헤르만 바빙크). 어느 한 편도 희생되거나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칼빈에게서 ‘성경’과 ‘성령’ 사이에 가장 균형 잡힌 견해를 보게 된다. 이것은 개혁 교회와 개혁 신학의 귀중한 유산이며, 칼빈 출생 500주년이 되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중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둘 다 강조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말씀’과 함께 또한 ‘기도’를 강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보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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