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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어디로 가고 있는가? (Quo vadis, Calvine?) / 문병호(총신대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by 【고동엽】 2021.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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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어디로 가고 있는가?(Quo vadis, Calvine?)
돌아감, 극복, 혹은 돌아감으로 극복하기


문병호(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1. 들음으로써


필자는 기독교 강요를 가르치면서 칼빈의 신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실감한다. 가득한 강의실의 후미진 곳에서 몇 몇 학생들이 청강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듣고 있다. 그들은 진정 칼빈을 듣기를 원한다. 칼빈이 대안인지, 근본인지, 돌아갈 곳인지, 아니면 그곳을 이미 우리가 거쳐 나온 것인지, 묻지 않는다. 그들은 칼빈을 극복하고자 하는가? 돌아감으로, 아니면 그냥 넘어섬으로?


우리는 한 번이라도 칼빈을 진지하게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의 신학을 서너 개의 진술로 우리의 작은 메모장에 가두지는 않았는가? 그냥 우리가 정의하는 몇 가지 조목대로 칼빈은 존재해야만 하지 않았는가? 그의 당위성에 우리가 기초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그의 당위성이 확보되지 않았는가? 칼빈의 신학을 통해서 성경적 진리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그들은 질문하기 전에 듣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개개인이 칼빈 신학에 정초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므로.


다만 명증한 것은 우리가 듣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들음은 감동이며 움직임이며 변화이고 죽으므로 사는 것, 곧 회개며 중생이다. 칼빈이 즐겨 사용하는 어구인 경건의 체험(experientia pietatis)에 문의해 보자. 과연 눈물 없이 칼빈을 읽을 수 있는가? 달리 말한다면, 과연 눈물이 없이 칼빈을 읽은 사람이 칼빈을 말할 수 있는가?






2. 자리매김: 진리와 개혁


칼빈을 논외로 개혁신학을 논함이 불가함은 자명하다. 오늘날 인구에 회자하는 개혁신학이라는 말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곳에서 흥왕했던 특정한 신학적 경향 혹은 사조를 특정해서 지칭하지 않는다. 개혁신학이라는 말은 오히려 귀납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는데, 이를 ‘개혁적 신앙을 개혁적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에 마땅한 신학’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필자는 이를 ‘칼빈의 신학에 기반하고 이로부터 유래한’이라고 또한 잠정적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성경적 칼빈신학의 진실성과 부요성에 대한 필자의 확신으로부터 기인한다.


‘칼빈의 신학에 기반하고 이로부터 유래한 신학’이라는 개혁신학의 정의의 적합성을 논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칼빈신학의 성경적 적합성에 대해서 문의(問議)하여야 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개혁 신학의 요체는 네 가지 모토로 개설(槪說)된다: 오직 그리스도로(solo Christo),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네 가지 모토는 서로 기대고 있으며 의미상 분리될 수 없다. 예컨대 다음 고백은 이 네 가지 모토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


루터는 이 네 가지 모토를 주창함으로써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다. 그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으로 사용되던 성문 문짝에다 내건 95개 조항은 썩은 수사들의 구체적인 행태에 대한 구체적인 질책을 넘어서서 ‘진리와 자유’라는 성경적 원리를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마다 구원에 이른다. 이 진리로 자유케 된 사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이것이 만인제사장주의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핵심이었다. “Christianus homo omnium dominus est liberrimus, nulli subiectus. Christianus homo omnium servus est officiosissimus, omnibus subiectus.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가장 자유스러운 주인이므로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을 가장 충실하게 섬겨야 하는 종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종교 개혁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역설이 아니라 성경적 계시로 수납(受納)한 참 기독교인들의 참 교회(ecclesia vera) 운동에 다름 아니다. 참 교회는 구성상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무리로서, 구조상 그리스도를 머리(caput)로 하여, 기능상 그리스도에게로 자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상기한 종교 개혁의 네 가지 모토가 루터로부터 발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적 진리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에 비추어 철저히 성경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예컨대 칼빈이 신학 작품들과 주석이나 설교 등에서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 읽기에 충실함으로써 성경의 문자적-역사적-영적인(삼위일체론적이며 기독론적인) 의미를 추구함에 있어서 성경 원저자(auctor originalis)의 뜻을 원래대로(originaliter) 밝히기 위해서 성경을 구절대로 해석함에 역점을 두었다면, 루터는 주제 중심의 강해에 치중해서 시종 지나치게 예표론적인(typological) 해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경향은 루터를 계승한 멜랑흐톤과 부써와 쮜리히의 쯔빙글리나 불링거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칼빈 신학의 고유성을 논함에 있어서 오직 그만이 참으로 sola Scriptura의 원리에 충실했던 신학자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3. 주관과 객관


오버만(Heiko A. Oberman)은 칼빈의 제네바 종교 개혁을 피난민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며 루터의 독일 종교 개혁과 부써(스트라스부우르)와 쯔빙글리의 도시 종교 개혁과 구별했다. 작고한 이 저명한 역사 신학자는 칼빈의 성경적 신학의 요체는 지상의 나그네(viator)로서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 사는 성도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갈파했다. 칼빈은 스스로 고백했듯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꺼이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De me non libenter loquor”). 그는 숱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과도한 핍박을 받았으나 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명하는 글을 쓰지는 않았다; 다만 말씀의 해석으로, 즉 신학으로 말하고자 했다. 칼빈의 초기 생애에 정통한 가녹지(Alexandre Ganoczy)가 말하듯이, “칼빈의 ‘나’는 불가분리하게 그의 교리에 부착해 있다. 루터의 경우, 주관적 요소는 종종 어떤 진술에 나타난 객관적 요소를 변모시킨다. 정반대로, 칼빈의 경우, 객관적 요소는 주관적 요소를 압도한다. 그러나 주관적 요소를 압도함으로써, 객관적 요소는 주관적 요소의 실체를 보존한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을 차치하고 칼빈의 생애를 알고자 하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전통적 으로 루터란들과 카톨릭 신학자들의 칼빈의 신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의 바탕에는 그의 생애에 대한 그들의 왜곡된 이해가 깔려 있었다. 칼빈은 비사교적인 폐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교제한 사람들은 당대를 움직인 정치가들, 지식인들, 종교인들을 망라했다. 칼빈은 가부장제에 매인 봉건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가장 가정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성경 해석은 부부의 평등과 가정의 중요성을 시종 일깨우고 있다. 또한 칼빈은 편집증에 빠진 사상가가 아니었다. 셀베투스(Michael Servetus)는 제네바에 이르기 전에 이미 화형을 언도받은 수배자였다. 셀베투스의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반삼위일체적 이해와 유아세례에 대한 제세례파적 이해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은 칼빈이었지만 그를 화형에 이르게 한것은 제네바의 정치인들이었다.


발트와 그의 지도를 받은 추종자들이 이와 같은 루터란들과 카톨릭 신학자들의 주관적 이해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고 칼빈의 ‘교리(doctrina)’를 재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신학은 지나치게 독단적이었으며 칼빈을 칼빈 자신의 텍스트로부터 읽기보다는 자신들의 변증적 신학에 맞추고자 했다. 그들은 기독교 강요의 첫 줄에 선포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대한 교리 부터 곡해했다. 최근에 칼빈 신학교의 신학자 멀러 교수(Richard A. Muller)가 그의 책 제목으로 삼았듯이 그들은 ‘각색되지 않은 칼빈(the unaccommodated Calvin)’을 추구하지 못했다. 비록 역사적인 접근이기는 하지만 오버만으로부터 스타인메츠(David Steinmetz)와 멀러에 이르는 신학자들이 발트의 신학으로부터 칼빈을 구출하고자 한 것은 치하할 일이다. 그들은 워필드와 바빙크가 그랬듯이 성경의 진리로부터 칼빈신학의 적합성을 조명함으로써 칼빈 신학의 고유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단의 노력을 경주했다. 사실 이러한 노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예컨대 정통 화란 신학자들과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은 칼빈 신학을 있는 그대로 읽음으로써 장로교 신학을 수립하고자 오늘날까지 면면히 노력해 왔다.






4. 칼빈, 칼빈신학, 칼빈주의


그렇다면 칼빈의 ‘신학’을 그 자체로(in se) 그 자체를 통해서(per se) 추구하고자 했던 신학자들은 누구였는가? 여기서 우리가 ‘칼빈주의자들(Calvinists 혹은 Calvinians)’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은 마땅하다. 이 말은 기원상 도르트(Dort) 신경의 형성 과정에서 알미니안들과 대립하면서 칼빈의 신학을 추종했던 신학자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통상 칼빈의 제네바를 계승한 베자(Beza)로부터 시작되는 후기 종교 개혁 개혁주의자들(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ians)을 통칭하는 말로 폭 넓게 사용된다. 칼빈주의자들의 신학인 칼빈주의(Calvinism)는 칼빈의 신학에 정초한 신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는 칼빈의 sola Scriptura 원리에 정초한 신학이어야 하고, 그로 말미암아 부요함과 역동성이 있는 신학이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교훈적이며(pedagogical), 신경적이며(credal), 변증적(apologetic)이어야 한다. 그것은 종교 윤리적이라기보다 신앙 교육적(catechetical)이어야 한다. 그것은 상황 논리적이라기보다 성경 텍스트적(bibical textual)이며 성경 콘텍스트적(biblical contextual)이어야 한다.


칼빈주의로부터 칼빈의 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항상 그릇된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이 합당함은 칼빈주의가 칼빈의 신학에 온전히 기초했다는 전제 가운데 그렇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예정론과 섭리론(doctrina praedestinationis et providentiae)이 칼빈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언약 신학(theologia foederis)이 칼빈주의의 역사를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참다운 칼빈주의는 칼빈 신학에 통전적(通典的)으로 기초한다. 그것은 수동적이거나 완료적이지 않다. 그것은 진행적이며 역동적이다. 그것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할 개혁신학이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적인 칼빈신학의 부요성을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협소하게 이해된 칼빈의 칼빈주의(Calvin’s Calvinism)가 아니라 칼빈의 신학 자체, 굳이 말하면 칼빈의 칼빈신학 이어야 한다.






5. 칼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Deus ad nos)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pro nobis)이시다. 하나님은 뜻하신 즉 이루시고 이루신 즉 의로우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능력을 주신다. 곧 저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두려움이며 짐이나, 우리에게는 그를 아는 것이 즐거움이며 자유이며 능력이다. 저들의 짐은 굴레이나, 우리가 지는 그리스도의 멍에는 자유이며 진리이며 사모할 것이다.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가르친다. 오직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만나며 대화하며, 그의 상 주심과 징계하심에 순종한다. 칼빈이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삼위 하나님으로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믿음으로, 그가 우리가 모르는 뜻에서조차 자신에게 충실하실 때, 그것이 곧 우리를 향한 사랑임을 믿음으로, 우리는 그의 신실하심을 찬양한다. 우리는 칼빈을 통하여서 성경의 진리를 함께 나누기를 원하며, 내 속에서 고백되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혹은 칼빈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Quo Vadis, Calvine)? 그로 돌아감이나 그를 극복함이나 그로 돌아감으로 극복하기를 말한다면, 그가 말한 바는 무엇인가? 칼빈신학의 중심 주제로 Calvin’s Calvinism이라고 명명된 예정론과 섭리론이 주로 논해졌다.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나, 루터란들과 카톨릭 신학자들과 더불어서 일부 언약신학자들이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으로 비판해 왔듯이, 그가 엄격한 하나님의 의지만을 신학의 주제로 삼아서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한 것은 아니었다. 칼빈 신학의 중심으로 전체 축자 영감 성경론,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인의 삶, 성령론, 교회론 등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나, 필자는 다음과 같이 칼빈 신학의 요체를 잠정적이나마 총체적으로 정리해 본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영으로 중생한 성도가 그의 중보로 그의 의를 전가 받아서 영감된 말씀을 성령으로 조명되어 감화 받은 심령 가운데 믿음으로 받아서 부요한 신지식에 이르고 또한 전체 구원 과정을 통하여서 처음 언약 가운데 약속 하시고 후속 언약들 가운데 예표하시며 새 언약 가운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부활의 권능을 보이신 영생에 이르는 하나님의 오직 그리고 전적인 은혜와 그로 말미암은 성도의 교회와 사회의 삶.’ 이는 필자의 관점에서 칼빈의 기독론적·삼위일체론적 성경 이해를 푼 것에 다름 아니다.


칼빈의 신학을 반추함으로써 우리가 가야할 혹은 돌아 가야할 목적지가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중심적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이 주변에 칼빈 읽기의 달콤함(suavitas)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입술로(ore)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말씀의 객관성을 드러내는 가르침임을 믿음으로. 그것은 말씀과 성령으로 신학을 수놓아야 할 원리로서 칼빈이 개진한 진정한 Sola Scriptura로부터 나온 진리라는 신뢰로. 개혁 신학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계속 개혁되어 져야 함(theolog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을 믿음으로. 오히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으로. 온전히 믿기만 하면 가장 부요한 지식에 이르며, 성경적 고백은 그 자체가 이미 큰 체계임을 확신함으로. 그와 함께 우리는 모두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나그네임을 깨달음으로. 우리가 모두 십자가지기임을 고백함으로, 오직 이로써 감사함으로




[출처] 칼빈, 어디로 가고 있는가?(Quo vadis, Calvine?)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2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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