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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신학(김세윤)

바울신학 제11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8.
바울신학 제11강


전 시간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살펴 보았다. 바로 이와 같은 interpretatio Christian 에다가 초대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를 항상 예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썼다.


사실은 εστιν(be 동사)가 Ιησους와 χριστος 사이에 생략되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다”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썼다. 어떤 예수를말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가 정의한 대로 그리스도를 말한다. 이 신앙고백이 또는 이렇게 되는 하나님이 이름이 되어 버렸다. 특히 메시야란 말을 헬라 문자 그대로 원어에 의하면 Χριστος라는 말이 Χριω라는 ‘기름 부음을 받는다’ 동사에서 나온 말로써 헬라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구약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하나님게서 ‘종으로 위임한다’는 표시로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던 그런 구약적인 종교사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에게 χριω 로부터 나온 Χριστος란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점차 헬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란 말이 예수의 두번재 이름으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원래 칭호적인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씩 그리스도와 예수의 제2이름으로 쓰이기도 하면서도 칭호적인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또 하나의 칭호가 같이 오는 법이 없다. 주라는 칭호와 주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같이 오지 않는다. 항상 다른 기독론적 칭호와 그리스도의 칭호를 쓰려면 그 가운데 예수란 이름이 함께 온다. 또는 우리를 낀다. 그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라든가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주이다’ 항상 ‘우리’란 말씀,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또 하나의 기독론적 칭호들과 같이 막바로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면 서로 정립이 안된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우리 주라는 말이다. 그래서 χριστος 우리 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두개의 칭호를 한꺼번에 겹쳐 쓰지 않고 그렇게 해서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이름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칭호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칭호와 다른 기독론적 칭호들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N.T.에 예수의 칭호가 여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예:인자,말씀,문,왕....) 영국의 신학자 V.Taylor “N.T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들”이란 책을 썼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어디서 사용되느냐 하면 믿음이 형식 쓰인다. 그래서 믿음과 선포라는 말이 늘 같이 나온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관계해서 쓰고 있다. 앞으로 생각해보겠지만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고 말하며 또는 그리스도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혹은 메시야적 사건.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서 그리스도라 칭호가 쓰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선포를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하는데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하는데 십작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항상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쓰고 믿는다는 말과 선포한다는 동사는 그리스도라는 함께 쓰였는데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다른 칭호가 무엇이 있는가?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가장 기본된 칭호이고 곧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고 그리하여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사를 성취하신 분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가 가장 기본된 칭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자이라는 뜻이고 구약과 연관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구약의 구원사와 연관된 칭호이다. 다른 기독론적 칭호들은 예수의 그리스도됨의 다양한 면들을 특별히 부각시키는 칭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기독론적 칭호-즉 하나님의 아들,인자,아담,지혜 등-들을 예수의 그리스도 됨의 여러측면들을 특별히 부각시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론 칭호들 중 그리스도가 가장 기본이다. 다른 기독론 칭호의 기능은 예수의 그리스도됨의 여러 면들을 부각시키는 칭호라는 말이다


*예수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 어떻게 발생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고도서 O.Cullman “신약의 기독론”-‘주’칭호 부분
H.Marshall “Origiens of N.T Christis the”
page 97-110까지 The Origins of New Testament Christalogy
W.Kramer 영문판 page 65-107,152-182 “Christ,Lord,Son of God”
W.Bousset “Ktruos Christos”
F.Hahn “Christologishe Hoheistitel”


1.배경


1)헬라 사상 속에서 κυριος의 의미


헬라의 세속적 언어에서 κυριος말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또는 재산을 많이 가졌거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부름이 형식이었다. 영어식으로 한다면 Sir master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이것이 종교적 사용법에서 신들에 대해서도 쓰였는데 이집트나 시리아나 소아시아에 퍼졌던 신비종교들의 신들에게 썼다. serapis osiris mithra,isis 이런 여신들과 남신들에게 쓰였는데 여신들에게는 그것의 여성형인 κυρια로 썼다. 남신들에게는 κυριος로 부르고 이런 신들을 숭배하는 신봉하는 자신들을 δουλος δουλοσια(종) 이라고 사용했다.


정치적인 사용법에 있어서 통치자를 κυριος라고 불렀고 특별히 로마 제국의 동반구에서는 벌써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숭배사상이 벌써 1세기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신들로서의 로마 황제들을 κυριος라고 썼다. 유대교적인 배경으로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히브리어된 M.T 구약성경의 הוהי를 유대인들이 거룩한 이름을 죄악스런 입술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에 나올때마다 הוהי발음하지 않고 נדא(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번역하면 ‘나의 주’라는 뜻이다. 이런 관습에 따라서 LXX가 번역되었는데 הוהי를 항상 κυριος로 번역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LXX의 관례에 따라 야훼라는 말이 나오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 항상 κυριος로 번역했다. 이런 증거들을 우리가 볼 때 신약시대에 헬라어를 보는 diaspora유대인이 הוהי 하나님을 κυριος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람어의 배경에서 ארמ가 헬라어의 κυριος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말이었다. 원래 세속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언어인데 선생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에게 쓰는 경의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의 호격이 ירמ ‘나의 주’아도나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ארמ라는 말이 하나님을 부를때로 썼고 지체높은 인간을 부를 때도 사용되었다. 지체 높은 사람을 부를 때는 영어의 Sir ,master에 해당하는 말이다. 또 사해문서 11Qtg(11번째 쿰란에서 나온 표제의 아람어 사본) 욥 24:5-7에 보면 ירמ 절대혀으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헬라어 κυριος와 마찬가지고 아도나이의 절대형인 히브리어로 ןידא과 아람어 רמ(마라,마레)로 쓰인다. 원래 일반적으로 높은 사람은 경칭ㅇ어로 쓰여서 점차 신에게도 썼던 말이다. 결국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마로 쓰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릴 수있다. 지금까지는 언어적 배경을 말했다.


2.예수가 주라는 칭호


신약신학 1 ‘간접 기독론’에서 무엇을 다루느냐면 ‘예수의 절대적 권위 주장(독어로는Vollmachtsanspruch,영어로는 claim to Authority’이다.


예수의 독특한 말,버릇,행적,가르침을 통해서 예수가 간접적으로 자기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이것을 공관복음서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가령 예수의 독특한 말 버릇 두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한가지가 ①아멘이다. 우리는 보통 아멘을 맨 끝에 쓴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 끝에, 기도 끝에, 하나님의 찬양 끝에 사용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요 진실이다. 신실하다고 발음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의지의 표시임을 나타내면서 아멘 했다. 그런데 유댕니도 우리와 같이 썼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 후에 기도후에 찬양 끝에 ‘아멘’하고 응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와 정반대로 사용했다. 항상 ‘아멘’을 쓰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하고 중요한 말씀을 선포할 대 이렇게 아멘을 거꾸로 썼다. 이것이 이런 용법은 예수의 전에도 없었고 당시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이렇게 말버릇을 정확히 고찰하면 예수가 어떤 자기이해를 나타냈는가를 헤아릴 수가 있다. 이런 독특한 예수의 말버릇을 또는 가르침,행적을 독특한 것으로 살펴보아서 ‘예수의 자기 이해’를 규명하고 ‘예수의 권위 주장’하는 것을 간접 기독론이라고 한다. 우선 아멘의 사용법을 알기 위해서는 형식면세어는 비슷한 선지자들의 선포형식,구약에서 선포형식이 어떻게 되는가? 구약에서 선지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 ‘여호와가 말씀하신다’‘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했다’고 말하는데 선지자의 이런 서문은 무슨 의도로 말하고 있는가?


자기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인 권위,자기 말이 아니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청중들의 관심을 인간인 자기에게 돌려서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기 위해 자기가 선포하는 선지자적 메시지의 신적인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도 중요한 말씀이 서문을 다셨다. 그런데 서문을 다는 그 점에 있어선 비슷한데 그 의도는 정반대이다. 선지자는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하나니께 돌리고 하나님이 자기 말씀에 진지됨을 보장하게 하신 것이지만 예수는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셨다. 누가 말하냐면 하나님이 말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로 말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됨을 아멘성은 말하지만 예수는 누가 증명하는가? 내가! 예수는 자기가 선포한 말씀에 아멘해요. 우리 나라 번역에 진실로 내가 말하노니 진실로란 말이 원래는 아멘이에요. 헬라어로 쓰여진 우리 신약성경에 히브리말 아멘이 그냥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의 독특한 말버릇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번역하면 안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예수가 어떠한 자기이해를 나타내느냐면 우선 선지자와 비교할때 선지자를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선지자가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자라고 하며 자기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자란 말이다.


자기말의 진리성, 권위 있음을 자기 자신이 아멘 함으로 자기가 보장한다. 아멘이란 이와 같은 용법에는 예수의 신적 자기 이해, 권위를 포함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자라고 권위 주장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동격이다. 쉴리어란 신학자가 킷텔 사건에 썼다. 이 신약학자는 아멘이란 한마디에 신약 기독론 전체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멘이란 이 한마디에 우리의 예수에 대한 모든 신앙고백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아멘은 예수의 신적인 자기 권위 주장이다. 또하나의 예수의 독특한 말씨는 아빠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아빠라 하지 않았다.


②언약사상에 의해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언약사상에 의해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구약의 중요한 사상이다. 출4:22 이하에서부터 줄곧 나오는 중요한 사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아비가 아들을 돌보듯이 돌본다는 사상이 구약성경에 들어 있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문서에서 특히 하나님에 대한 칭호들을 많이 발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예가 기도문서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아빠란 말은 원래 집에서 어린 아이가 육신의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다. 우리 나라 아빠와 같다. 다만 다르다면 조금 확대해서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친구나 아주 친근한 선생님에게 도 사용했다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라고도 불렀다. 아빠란 말의 원래 의미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친근감,경외심,신뢰심,전적으로 의로횜 그리고 순종심을 다포함해서 나타내는 말이 아빠였다. 아빠란 말을 감히 하나님께 쓴다는 것은 경망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하난ㅁ이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란 언약사상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감히 아빠라 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수께선 하나님을 아빠라 불렀다. 기도 가운데도 항상 아빠라 불렀다. 그러니까 아빠란 말속에도 독특한 의미가 있었다. (아멘이란 말처럼)


아멘이란 말속에 독특한 자기이해가 숨어 있듯이 아빠란 말도 그렇다. 그런데 예수 자신만 이 말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서도 아빠로 싲가한다. 그래서 이게 예수의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심지어 바울도 헬라 말을 쓰는 로마 그리스도인,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때 하나님을 아빠 하고 그 옆에 아버지 하고 번역을 한다. (롬8:16/갈4:6). 이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 귀중한 가르침, 심지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헬라말을 쓰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하나님의 자녀 되어 그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이시기에 심지어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렇게 사용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독특한 점은 또한 자기와 제자들을 구분했다. 하나님 우리 아빠라 하지 않고 아빠란 말 사용하는데 하나님 나의 아빠 너희들의 아빠라고 구분했다. 자기와 제자들을 아빠란 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구분했다. 더불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 하면 이러한 세가지의 현상을 관찰하는데 아빠란 말과 예수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추종자들에게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됨,곧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있는 특권을 마련해 주는 분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했다.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는 자로 스스로를 이해했다. 또 예수의 권위주장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예수의 죄를 사해주는 권위를 주장하는데 나타난다. 가령 막2:1-12까지 보면 예수가 중풍병 든자에게 “소자여 네 죄가 사하여 졌다” 거기에 앉아 있는 신학자들이 참람하다. 즉 하나님을 신성모독했다.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죄 용서는 하나님의 독특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죄 용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심판관이며 하나님만이 창조주이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그의 피조물이 그의 창조의 뜻에 옳게 살았나 옳게 살지 않았나 하나님만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기에 그만이 궁극적인 심판관이고 그가 궁극적인 심판관이기 때문에 그만이 죄를 용서해주실 수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예수가 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를 주장한다. 물론 유대의 유대종교의 틀안에서는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회개와 속죄의 제사에 근거해서 그런 제사를 받친 자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선언했다. 그런데 예수는 대제사장도 아니고 성전의 무슨 제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아무 그런 것과 관계 없이 죄용서를 선언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하나님의 대권을 침범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뭐라 했냐면 막2:10에 인자가 땅위에서 죄사함에 대해서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인자로서 권위를 어디서 받느냐면 단7:14에 한사람의 아들 같은이 곧 인자에게 하나님께서 권세와 영광과 왕권을 위임한다. 인자가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한다. (죄용서 하는 권위다) 곧 신적 권위위 주장을 한다.


또 어디서 예수의 권위 주장이 나타나냐면 모세율법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나는데 산상 수헌의 반대 어법 마5:17,19,21 읽어보면 거기에 “너희가 옛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무시하고 욕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로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게 된다. 너희가 옛사람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그의 마음에 이미 간음ㅎ나 것이다.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게 된다. 반대 어법이다. 실인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 이것은 십계명이다. 모세 율법의 총정리가 십계명이다. 그런데 예수가 형제를 무시하고 미워하는 행위,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행위,이것은 행위의 최소한을 규제하는 계명이다. 형제의 목을 치거나 간음행위 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이다. 예수의 법은 행위이전의 마음의 상태,심장에서의 동기를 규제하는 것이다. 이것을 동기의 최대한 행위의 최소한 그러니까 자기가 이러한 말투로서 모세와 예수 자신을 비교 대조 시킨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그 내용으로 예수가 모세를 능가하는 행위의 회소한 만을 규제하는 모세의 법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동시의 최대한을 규제하는 완전한 법을 선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세를 능가하는 것을 나타내고 이제는 아멘의 말버릇에서 선지자를 능가하는 여기서 모세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법에 계시자라. 그러니까 모세보다 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법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계시하는 자라. 자기 이해를 나타낸다. 내가 모세보다 잘났다고 직설법으로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모세보다 훨씬 잘낫다 이말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틀 안에서 모세보다 더 능가하는 자가 없다. 모세 다음은 하나님이다(유대교 안에서). 심지어 메시야도 모세의 밑에 있다. 모든 선지자들과 랍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메시야도. 왜냐하면 심지어 메시야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다. 모세가 품꾼이다. 신18:25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다. 탈굼 사53장의 탈굼판에 보면 메시야가 모세 율법을 잘 가르쳐서 백성으로 하여금 의롭게 하는자이다. 모세 율법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러니까 메시야도 모세 밑에 있다. 그런데 예수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예수가 모세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에 있어서 자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들여오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기와의 관계에 의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못들어가고 하는 걸로 표시한다.그러니까 예수가 인긴의 운명의 결정자라고 스스로를 지금 나기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들여오는 분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킨 분으로 인가이 그와의 관계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혹은 못들어가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엄청난 권위 주장을 했다. 그를 믿고 이런 엄청난 권위 주장을 하는 예수를 제자들이 따라 다니면서 그 주장에 걸맞게 부르려면 어떻게 불러야 겠어요? 주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것과 동의어인 랍비란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래서 주여란 뜻고 되고 선생이라고 제자들이 보통 불렀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3개의 예수의 말씀 가운데 ‘주’라는 칭호가 지금 보통 아람아로 사람들의 지체높은 자에게 권위있는 사람들에게 썼던 랍비 이상으로 더 의미 있게 쓰여진 경우가 다음과 같은 3개가 있다.


①막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가 입성할 때에 그 제자들에게 가서 당나귀 하나를 붙들어 오라고 하는데 그 사람에게 가서 어디 가면 당나귀가 메어 있느냐? 당나귀를 풀어 오라. 누가 말을 하면 왜 그것을 풀어가느냐 하면 “주께서 쓰기겠다 하라” 이것이 암호라고 할 수 있다. 성경마다 구구절절 기적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여기도 기적으로 보고 예수가 어디에 나귀가 묶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와 당나귀 주인과의 비밀이 약속이 되어 있다. 어느 곳에 나귀를 만들어 놓고 예수가 제자들을 보내어 주면 왜 가져가느냐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예수가 보낸 것으로 비밀리에 이루어 약속되었다. 그리고 이루어졌다. 예수가 아주 위험한 상황속에 입성하고 있다. 모든 일은 비밀리에 예수의 최후의 만찬고 비밀리에 예약되어 있다. 그런 상황이다. 여기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이 주라는 말은 아마 ‘마리ירמ’보다 좀더 깊은 의미가 있지 않느냐?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이 스가랴 9장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서 입성은 그러니까 적어도 메시야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②막12:35-37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대한 시비이다. 왜 서기고나들이 유대 신학자들이 메시야가 왜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나단의 예언(삼하7:12) 나오는 메시야 전승에 의하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다. 예수가 거기에 시비를 건다. 왜 메시야가 하나님의 이들이라고 하느냐? 시110:1절에 다윗이 메시야를 무엇이라고 부르냐면 나의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보다 낮은 다윗의 아들이 되겠느냐고 시편 110;1절을 들어서 당시 주된 메시야 사상을 예수가 시비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말이라고 아직도 주석가들의 논란이 많다. 여기서 예수가 당시 메시야 사상을 부인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윗의 아들됨을 부인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윗의 아들됨이 부족하다는 것이냐? 메시야를 그는 인간적인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과 같은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과 같이 이방인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태평성대를 가져올 분, 그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우편에 높힘받은 자로서 만유의 주제,그렇게 말하기 위해서 시비하는 것이냐?여러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하여간 여기서 시 110:1절을 인용해서 다윗의 아들에 대한 대칭해서 ‘주’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다윗보다 권위 있는 하나님보다 더 높임 받은 인자로서 그의 ‘주’됨을 나타낸다. 은근히 예수가 다윗왕쪽보다 더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 받은(시110:1) 주 되심을 은근히 말한다.


③눅6:46을 읽어보라


제자들이 예수를 랍비,마리라고 이렇게 불렀다. 그러면서도 시편 110:1절의 말은 숭종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왜 주여 주여 하면서 내가 가르치는 것을 듣지 않느냐? 이 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제자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의 ‘주’도 인간적인 스승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가 간접 기독론을 통해서 ‘주’라는 칭호의 의미있는 사용으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나타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을 최소한대로 예수를 마리 또는 랍비 나의 주여 정도로 최소한도로 그 정도로 밖에 표시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 정도로는 표시해야 했다. 그래서 그에게 완전한 순종을 했었다. 그러면 예수가 κυριος라는 신앙고백을 어떻게 발생했느냐? W.Bousset가 그의 책 ‘크리스토스 큐리오사’란 책에서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지금 온 우주를 통치하는 ‘주’라는 신앙고백을 제일 처음 안디옥에서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예 종교에 간섭대로 예수를 예배하는 체험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원래 팔레스틴의 유대교에는 예수를 재림하는 인자로 기다리는 것을 그들의 신앙의 내용으로 삼았으나 안디옥에서 헬라 기독교인들이 보로서 예수를 예배하게 되고 예배이 대상으로서 신격화된 예수에게 자기들의 옛 종교를 이시스 등의 신비종교애서 신을 κυριος라 했듯이 이제 기독교에서 예수에게 예배하면서 예수를 κυριος라고 부르면서 그가 지금 주권을 행사하는 자라 믿고 고백하고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 이론은 현대 20세기에 자유주의자들이 신약 기독론 이해의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 됐다. 불트만에 의해서 완전히 수용이 되었고 크라머 한은 계속해서 부셑의 이론을 약간씩 변형해서 계속 개진하고 있다. 바로 이점을 명백한 오류로 지적하고 길게 설명하는 것이 오스카 쿨만의 신약기독론에 잘 서술되어 있다.


이 헬라 사람들이 κυριος란 말을 신에게 적용하고 헬라 유대인들이 구약의 야웨를 κυριος로 번역하여 부른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에 대한 κυριος로의 신앙고백의 언어적인 면으로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언어적으로 헬라인들이 신을 κυριος라고 부르고 헬라 유대인들이 야웨를 κυριος라고 부른 것이 신약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κυριος라고 고백함이 언어적으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면 헬라 기독교에서 예수를 κυριος라 지칭하는게 점점 더 많아졌고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주’라는 사실은 부셑이 말한대로 헬라인들에 의해서 안디옥에서 처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틴에서 아람 말을 쓰는 예수의 유대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의 부활 직후 발생한 것이다. 그걸 이제 좀 증명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에 대한 예배가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이 된 것이 아니고 팔레스틴에서 예수의 부활 직후에 발생했던 것이다. 이것을 쿨란의 책에서 잘 보여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자 제자들이 흩어지고 예수가 부활하여 그들에게 나타남으로 그들을 다시 모았다.(그날이 안식일 다음날). 그날 그들은 예수의 최후이 만찬을 기념하여 떡을 뗐다. 그때에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여 있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부활하시고 높임받은 ‘주’로 스스로를 나타냈다. 그래서 그렇게 안식일 다음날 예수의 부활에서 나타난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그날 모여서 ‘주’로 최후의 만찬을 되풀이 함으로서 최후의 만찬으로 말미암아 절정에 달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fellowship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에 대한 에배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그 예배에서 안식일 다음날 주의 날에 그들에게 항상 잔치를 베풀었던 최후의 만찬에 절정에 이르렀던 잔치를 베풀었던 부활하신 영적으로 자기들과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서 부활하신 영광 받으신 분으로 나타나서 그들과 새롭게 교제를 하는 주와 더불어 만찬을 하는 그 체험에서 초대교회가 안식일 다음 주일날 바로 부활해서 나타난 주를 기념해서 (그가 실제가 되게 그들의 체험속에 실제가 되어 나타나게 하는 그런 예배를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날 예수의 부활이 나타난 날 또 그날을 기념하는 날 주의 날이라고 하고 그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예배하는 날로 정하고 그때에 나누는 최후의 만찬을 주의 만찬이라 그래서 첫째로 예수에 대한 예배중 κυριος라는 칭호는 부활과 예배와 관계된 것이 사실ㅇ니데 예배가 안디옥에서 헬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고 헬라 종교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예수의 부호라에서 그들에게 높임 받은 자로 나타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헬라 종교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제의,만찬과 더불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의해서 절정에 이르렀던 그의 제자들과의 fellowship이 부활한 예수와 더불어 새로와짐에 의해서 생겼다는 것이다.


둘째로 고전 16:22 “μαραναθα” 라는 말이 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μαραναθα라는 아람어로 썼는데 아주 중요한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 어디에서 끊느냐가 중요하다. 그 정신을 존중해서 우리 신약성경에도 그렇게 써야 하는데 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번역했다. 그것은 틀렸다.


μαραν/α/θα
① ②
①서술어:주께서 오셨다(한글개역)
또는 주께서 오신다. 이렇게 되면 신앙고백이 된다.


②기독형식으로 ‘주여! 오소서’ 라는 기도가 된다.


그러면 어떤 것이 맞는가?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μαρανα/θα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주여! 오소서’라고 읽어야 한다. 그의 증거는 요한계시록에 ‘아멘 주여! 오소서’라고 끝난다. 그리고 또한 디다케라는 책 10장에 성만찬에 바로 “마라나타” 기도로 나온다. 그래서 요한계시록과 디다케에서 ‘주여 오소서’라는 기도가 초대교회의 중요한 기도였다.


사실을 알며 주의 재림,성령으로 예배에 오심을 부르는 한편으로 종말론적 기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반론적으로 우리 신약 성경에서 신앙고백을 ‘주’로 번역이 되었다. 대개 예수가 우리 주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였다는 번역이 되었다. 그러나 기도문이나 예배의식의 말은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되었다. 아빠도 기도때에 부르는 말이다. 그래서 ‘마라나타’가 기도문이기 때문에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예수를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종말이 오는 심판 주로 보았으며 예배시에 주로 오셔서 예배를 받으시는 분으로 인식하였다. 영국의 A.J.Rawlinson 사람이 바로 ‘마라나타’가 W.Bousset의 이론을 반박하는 아킬레스건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느냐하면 원래 예수의 생전에 그의 절대적 권위 주장에 상응해서 그를 mare 또는 rabbi라고 불렀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하시고 높힘 받은 형체로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내심을 보고 그를 한 차원 높게 더 심오한 의미로 그를 ‘주’라고 부르며 떡을 떼는 fellowship을 중심하는 예배에서 부활하셔서 나타난 ‘주 예수’ 그의 현재적 주권의 행사를 체험하고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가 절대적 의미로 신적의미로 κυριος라는 신앙고백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Bousset나 Bultmann의 이론이 정면으로 반박되고 ‘예수가 주다’ 는 신앙고백은 생전의 예수의 절대주장과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곧장 팔레스틴 그리스도인에게서 생긴 사건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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