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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제10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8.
바울신학 제10강


지난 시간에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를 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바울의 배경을 살폈고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됐으며 사도가 되었는가? 그리고 그의 사도로서의 면모를 살펴보았고 그 다음에 바울의 복음을 토론하기 시작해서 계시와 전승으로서의 복음을 토론했다. 그것과 관련해서 왜 바울에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이 거의 전혀 인용이 안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점에서 출발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예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울의 신학은 예수의 가르침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바울 신학의 독특한 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적으로 말하면 독특한 점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형상 기독론이라고 하는데 고후 4:4-6/골1:15/고후3:16-18 등에 나오는 εικουν(image)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라는 아담 기독론과 하나님의 지혜다 하는 지혜 기독론이 나온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과 지혜 기독론을 포함하는 형상 기독론이 바울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보겠지만 형상 기독론과 아담 기독론과 더불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론도 바울의 독특한 신학이다.


이것은 아담 기독론과 관계 있다. 그러니까 기독론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독특한 점이 형상 기독론이다. 그러나 가령 지혜 기독론은 바울에게도 나오지만 신약의 다른 부분에도 많이 나온다. 특히 요한복음에 아주 중요하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도 조금 강조되어 있다. 또 신약의 다른 저자들과 공유하면서도 바울이 특별히 강조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더 심화된 신학적인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들 기독론이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더욱 심화됐다.


그래서 아들 기독론에서도 바울 신학의 독특성이 나타난다고 볼 수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요한복음과 비슷하다. 또 구원론적으로 바울 신학의 독특성을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작의 죽음을 하나님의 의”에 나타남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우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의 카테고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하는 이것이 또한 바울 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다. 신약의 다른 저자에게서 별로 볼수 없는 바울 신학의 독특한 점들이다. 그래서 바울의 기독론, 구원론, 인간론,교회론 등을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주로 바울신학의 독특점을 특히 강조해서 살펴 보겠다 그러나 바울 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만 국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신약의 저자들과 공유하는 점 가운데 이러 독특한 점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둘다 다 살펴보겠다.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서 토론하고자 한다. 그런데 지난 학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일부 겹치는 데가 있다. 그러면 ‘바울 기독론’ 해가지고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형상 이런 순서로 전개해 나가겠다.


*바울의 기독론


1.서론


바울은 그의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구원론적으로 정의한다. 기독론적으로 정의하는 성경구절은 롬1:2-4/고전1:23/15:3-5/갈1:12-16/고후4:4 등등 이런 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정의한다. 또 롬1:16에서는 구원론적으로 정의한다. 기독론과 구원론은 두개의 분리된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리이다. 기독론은 구원론의 근거가 되는 것이며 구원론은 기독론으 ㅣ인간과 세상에 대한 적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은 분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기독론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이 구원론이다.


최근에 불트만이나 또 그보다도 더 과격한 H.Braun같은 자는 바울의 진정한 관심은 인간론이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이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상수이고 기독론은 변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인간론과 인간의 구원을 논하는 구원론이 우선하고 기독론은 인간론이 어떻게 설정되고 인간에게 필요한 구원이 어덯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가변적인 것으로 변수로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런데 현대의 상황화의 이름하에 도는 토착화의 이름하에 이런 식의 신학이 많이 전개된다. 그래서 가량 1970년 방콕에서 열릴 WCC 회의에서 “Salvaioin Today”라는 주제로 회의가 열렸다. “오늘 구원이 무엇이냐”를 설정한다. 오늘 인간들이 구하는 구원이 무엇이냐?그리고는 바로 이런 구원을 가져온 분이다 하고 그리스도를 정의한다. 이런 식으로 자유주의 써클레서 전개된다. 가령 남이에서 남미인들이 희구하는 구원이 무엇이냐? 정치적,경제적 해방이다.


이것이 오늘날 남니인들이 희구하는 구원이다. 먼저 남미 사람들이 희구하는 구원을 정의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이러한 구원을 가져오는 분이다고 그리스도를 정의하다. 즉 남미에서는 해방자로 정의한다. 정치적 해방자로 이렇게 구원을 설정한다. 한국에서는 한국의 해방신학이 이른바 민중신학 형태로 나타나는데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 무엇이냐? 민중 신학자들에 의하면 민중을 억압하는 독재자들 집권층,재벌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구원인데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민중의 상징으로서 민중의 해방을 가져오는 분이다. 이런 식으로 기독론이 전개된다. 1976년 WCC Ecumeical intitut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신학”이라는 주제로 토론이 열렸을 때에 아프리카 WCC대표는 ‘아프리카에서는 그리스도를 추장이라고 고백해야 의미가 있다며 추장 기독론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추장이다고 해야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희구하는 구원은 전통적으로 종족인 추장이 구원을 가져왔다. 가물때 비를 오게 하고 병도 고치고 백인의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싸워서 종족을 보존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을 전통적으로 추장이 하는 것으로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희구하는 구원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며 바로 그리스도가 그런 추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추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인도의 대표자는 인도의 상황속에서는 그리스도를 Krishan 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한다. Krishan 기독론을 해야 한다고 신학을 전개했다. 이것이 왜 틀렸느냐면 인간론,구원론을 우선하고 보기 때문에 틀린 것이다. 신약전체에서 그리고 바울 신학에서 기독론이 중심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의 규명이 우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추궁할 대 비로소 구원론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어떤 인간으로서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갖게 된다. 그래서 신약 전체 특히 바울 사상에 있어서 기독론이 우선이고 기독론이 중심이다. 그리고 인간론, 구원론은 기독론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앞에 이야기한 옳지 않은 신학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그리고 바울 신학에서 신학이 거의 기독론 중심이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서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들은 전부 기독론적 신앙고백이다.(고전15:3-5/롬1:3-4/3:25-26/4:25/빌2:6-11/골1;15-20 등 등) 무수히 나오는 초대 교회 신앙고백들은 전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즉 그의 인격과 하신 일에 관한 것인데 그것에 인간론적인 적용이 구원론이다 .원래 초대교회 신앙고백은 기독론 중심이다. 그러다가 점차 신앙고백이 두 부분으로 발달한다. 원래는 한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이제 이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으로 발전한다. 가령 고전 8:6 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두분으로 되어 있다. 전치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구분한다. “하나님과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으며 그를 목표로 존재한다(εκ εις)” 그리스도는 그를 통해서(δια) 만물이 빚어졌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그리스도가 창조의 수단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수단으로 점차 두 member로 발달한다. 그 다음 삼위일체를 즉 성령을 덧붙여서 세 member로 특히 예배언어에 발달한다. 그래서 우리가 축도로 쓰는 고후 13장 끝부분에서 삼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기독론적인 신앙고백,그 다음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 다음에 성령을 덧붙이는 삼위일체론적으로 발달한다. 이런 것을 보아도 초대교회 그리고 바울 신학에 있어서 기독론 중심-예수가 그리스도다,예수가 주다, 하나님의 아들이다-이라는 신앙고백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했다 등의 기독론 중심에 우선에 그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되고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 인간은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기독론이 우선하고 기독론의 인간론적 응용 또는 적용이 구원론이고 기독론에 근거해서 신론,성령론,교회론,종말론이 펼쳐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 바울 신학 전체의 기독론 우선의 중심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트만이나 H.Braun의 인간론,구원론 우선의 신학이 잘못되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신학자들이 현대의 Kerygma 신학과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신학이 많이 틀렸다.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바울은 부활하시고 높임받으신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통해 그의 복음을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그이 신학 형성에 있어서 다메섹 도상의 체험은 하나의 본질적인 그리고 구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기독론과 구원론을 공부함에 있어서도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계시의 체험 부활하고 높임받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체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펼쳐가는가를 추구하면 우리는 그의 기독론,구원론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바울은 주로 구약과 유대교, 2차적으로 헬라 종교사가 제공하는 해석의 카테고리들 그리고 언어 수단들을 동원해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계시를 해석해서 나온 것이 바울의 신학이다. 바울의 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이 다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어떻게 구약과 유대교에서 제공하는 해석의 범주들로 해석해가고 펼쳐가는가를 살펴보면 바울 신학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순서를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이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 체험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울 스스로가 주장한다(갈1:12/16). 그러나 그것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자리에서 우리가 그의 편지들에서 보는 신학 전체를 한꺼번에 터득했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 신학은 점차 발달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구약과 유대교의 해석의 범주들과 언어 수단에 의해서 다메섹 도상의 계시를 해석해감에 따라 점차 발달했고 또 선교의 현장에서-고린도 교회에서 갈라디아 교회-부딪히는 문제 그리고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토론 등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때 받은 복음의 빛 아래 해결해 감에 따라 그의 신학이 발달을 하고 그이 신학이 예리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바울 신학의 발달 과정에 있어서 물론 지난번에 우리가 계시로서의 복음과 전승으로서의 바울의 복음을 살펴보았다. 초대교회의 전승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초대교회의 전승을 물려받고 또 선교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사고함에 있어서 바울에게 항상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 것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복음의 계시였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모든 신학은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의 체험에 물들여져 계시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모든 구약과 예수의 전승과 선교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 모든 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복음의 계시의 빛 아래 보고 해석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울 신학이 다메섹 도상의 계시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때한꺼번에 다 나왔다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그의 신학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항상 다메섹 도상의 체험의 빛 아래 보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바울 신학의 모든 요소들이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연결되었다는 의미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게 볼 수 있는 그런 신학이 어느 때쯤 완성되었을 것인가? 대개 연대를 잡아 볼 수 없을 것인가? 아마 예루살렘 사도회의 또는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때 까지는 지금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는 바울신학의 면모가 확실히 형성되었을 것이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M.Hengel 교수의 중요한 논문중에 “기독론과 신약의 연대”라는 논문이 있다. 원래 독일말로 쓰였는데 최근에 Hengel의 여러 논문에서 묶어 나온 영어판이 있다.


1960년 불트만의 영향으로 신약에 있어서 신앙고백의 발전을 불트만은 두단계로 보았다. 원래 그의 선생 Muller,W.Bousset 영향으로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 이 두단계를 거쳐서 바울과 요한의 신학이 발전했다고 보았다. 유대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다시 올 인자로 그 사람으 아들로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 주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헬라 기독교에 와서 헬라인들이 자기들이 종교사에서 나오는 신화들 또는 개념들 또는 카테고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해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등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영생에 참여한다는 등 또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등 성만찬의 신학은 다 헬라 기독교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들이 다 헬라 기독교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과 요한이 받아서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의 영향을 받은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여기 한단계를 더 넣어가지고 삼단계로 본다. 팔레스틴 유대 기도교 그리고 헬라 유대 기독교 그 다음 헬라 이방인들 기독교 이렇게 3단계를 통해서 신약의 바울과 요한 신학이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F.Hahn, R.H.Huller 등 이들은 이런식을 주장했다. 그래가지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여러기독론적,구원론적 신앙고백의 쳐어 칭호들,사상들을 헬라 기독교에서 나왔다고 그런다.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는 예수를 다시 오신 인자로만 기다렸다고 그런다. 그러니까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고 그와 연합해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그런 것들은 다 헬라 기독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가령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은 헬라유대교이다. 그래서 매 단계를 거쳐 가면서 기독교가 완전히 변모해 버렸다. 그렇다면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또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의 근본을 이루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다. 우리 전통 교회의 신앙고백이 주로 바울과 요하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진정한 창시자는 누가 되어버렸느냐? 예수가 아니고 바울이 되어 버렸다. 이 따위 신학이 흥행하던 때에 M.Hengel 교수가 말하기를 “신학적으로 삼단계로 발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느냐?” 우리가 역사가로서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보고자 해서 기본적인 것부터 생각한다.


①바울이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예수가 AD 30년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면 바울 32-34년 여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바울이라는 사람이 아주 훈련된 신학자가 초대교회 초창기부터 참여한 것이다. 연대를 정신 바짝 차리고 살펴보자.
②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편지가 다수 의견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전서라고 한다. AD49년 쯤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F.F. Bruce를 중ㅅ미으로 한 소수의 의견에 의하면 갈라디아서가 제일 먼서 쓰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AD 48년 쯤 기록되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49년도에 열렸다. 그런데 48년 쯤에 세계 전도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48년쯤에 부터 바울 신학을 확실히 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전서와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면 벌싸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 들어 있는 기독론,구원론이 다 들어 있다. 그러니가 바울 신학이 48-49년 쯤 즉 그의 세계 전도 여행 시작 무렵까지는 바울 신학이 거의 지금 우리가 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30년대에서 48년까지는 18-19년 차이이다. 이 사이에 언제 기독교가 3단계를 거쳐서 발전할 단계가 있어 시간적으로 게다가 처음에 고려한 것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훈련을 받은 신학자로서 아주 초창기부터 했다. 그러면 총창기 기독교 형상이 있어서 바울은 무엇하고 있었느냐? 아라비아에서 묵상만 하고 있었냐? 묵상했어도 신학을 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바울 신학이 다메섹 도당에서의 체험 직후부터 형성되어서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가지는 오늘 우리가 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신학이 거의 다 완성, 형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나중에 선교의 장에서 문제들 특히 유대주의자들이나 고린도의 성령받았다고 하는 광란주의자들,자유주자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신학이 더욱 예리하게 되고 확실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늦어도 선교 여행 무렴 대개 48-49년 쯤 신학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2.본론


1)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 이런 칭호들은 다 바울 전의 교회에서 이미 나사렛 예수에게 적용했던 칭호들이다. 진정한 의미로 바울 전의 칭호들이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그리스도를 주로,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핍박한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높임 받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에 대한 선포가 옳음을 확인하고 그대로 그들의 예수에 대한 칭호-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들을 수용했다. 그러면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의 칭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미,예수의 우리를 위한 의미를 표현함에 있어서 바울의 특별한 신학적 공헌이 무엇인가? 이것을 살펴보면 유익할 것이다.


W.Kramer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세 칭호들이 신약 성경에서 어떻게 쓰이느냐? 어떤 구문속에서 쓰이느냐? 어떤 뜻을 나태내도록 쓰이느냐?를 연구한다. 그래서 바울 전 소위 바울전의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칭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쓰이고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이어받아 더 심화시키고 발전시키고 그랬느냐를 따지는 것이 W.Kramer의 “Christ Lord Son of God” 이라는 책이다. 바울 전 단계의 사상은 어디서 어떻게 아느냐? 주로 바울 서신들에 남아 있는 바울이 인용한다고 보는 신앙 고백들을 살펴봄으로 안다. 가령 대부분의 학자들은 빌 2:6-11까지를 바울전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이어받았다고 그래서 인용했다고 본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안본다. 또 롬 1:3-4에 확실히 바울전의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롬3:24-26까지도 바울 전의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것들을 살펴봄으로서 바울 전단계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고백되었고 그것을 바울이 이어받아서 어떻게 더 발전시키고 심화시켰는가? 또 M.Hengel의 좋은 연구가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와 더불어 우리가 특기할만한 것은 바울 전 단계에서 벌써 소위 interpretatio christiana(그리스도적 해석)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야임이 드러나자 예수의 유대 추종자들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들을 예수에게 다 적용했느냐? 많은 사람들은 다 적용한 것으로 말한다. 그래가지고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니까 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했다면 그들은 에수에게 구약과 유대교의 다양한 메시야 사상을 다 예수에게 적용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니냐 하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신약성경에 그려진 예수 그리고 신약성경의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 메시야 예수가 당시 묵시문학의 메시야 사상과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당시 민속 메시야 사상은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이 아주 다양한 소위 연결되지 않는 복잡한 메시야 사상이 있었는데 그래도 주된 메시야 사상이 민속 메시야 사상(frek medio iunism) 이다. 삼하7:12-16에서 나오는 나단의 예언에서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아들인 다윗 왕조를 재건할 군사적 정복자요, 정치적 왕을 메시야로 보았다. 이것이 주된 메시야 사상이다. 그런데 우리 신약성경에 예수를 메시야라고 초대교회에서 주장을 하나 예수를 전혀 그런 식으로 그리지 안고 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 W.Wrede 그후 Bultmann 같은 사람도 신약성경에 있어서 공관복음에 있어서 예수는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는 다르다.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었고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붉구하고 교회는 예수가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었던 역사적 진실과 그를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역사적 사실과 신앙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가가 이른바 복음이라는 것을 서서 예수가 메시야였다. 그래서 그의 메시야 됨이 초자연적인 존재들에게는 다 이해되고 악령들도 이해했고 예수를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도 대개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지지 않은 이유는 예수가 스스로 메시야됨을 비밀로 소문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마가가 이야기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소설이다. fiction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였나? 그럼데도 불구하고 그의 메시야됨이 안알려지고 비밀에 쌓여 있었나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른바 메시야 비밀이라는 이론이 W.Wrede에 의해 처음 나온 것이고 마가복음이 이 메시야 비밀을 중심으로 하는 소설이고 다른 복음서도 이어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불트만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것이 다 어디서 시작하느냐면 예수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또 신약성경에 선포된 예수의 사상이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다음과 같은 전제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무슨 전제인가? 예수가 메시야라면 예수에게 구약과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이 완전히 전가되었을 것이 아니겠느냐? 그게 아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는 구약의 메시야적인 예언들을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그래서 우리 신약신하 1에서 그것을 쭉 살펴보았다. 어떻게 예수가 유대교의 당시 주된 메시야 사상의 뿌리인 나단의 예언을 이렇게 정치적 군사적 왕으로서가 아니고 이사야 42장부터 53장까지 예언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서 성취하는 것이다. 또 어떻게 다니엘 7장에서 예언된 인자,그 사람의 아들 역할을 감당함으로 성취하는가? 이렇게 예수는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의 text를 당시 유대교 묵시문학의 해석과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과 흔적은 처음부터 끝가지 그의 메시야됨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당시 구약의 메시야 text를 예수와 달리 해석한 유대교 사상에 찌들은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 그러나 예수가 정치적 왕으로 주장하는 자로 곧 가이사에게 맞선 반역한 자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다가 예수가 부활했다 . 이 부활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킨 사건도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인정한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예수의 주장, 가르침이 옳다고 확인된 것이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유대교에서 해석한대로의 메시야는 아니지만 은근히 메시야라고 주장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킴으로 예수가 앓다고 인정하셨다. 그의 메시야 주장만 옳은게 아니고 그의 구약의 메시야 text에 대한 해석이 옳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메시야의 행위가 유대교에서 기다리는 정치적 군사적 정복과 혁명과 다윗 왕조의 재건함이 아니고 대속의 제사로 스스로를 바쳐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이사어 42장에서 53장에 의거해서 메시야적인 과업으로 보았다. 바로 그 예수의 메시야 사상이 옳았고 예수가 그 메시야적 임무를 감당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예수가 자신이 어떤 메시야인가를 가르쳤다. 이사야 42장 53장의 보면 대속의 죽음을 감당함으로서 그리고 다닝레 7장의 예언을 감당함으로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단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야로 가르쳤다.-과 가르침이 긴가민가 했다. 왜?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유다 같은 배신자가 나타났고 결국 다른제자들도 다 도망가버렸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서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인정하심으로 예수가 메시야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는 무슨 깨달음이 왔느냐? 그것은 예수가 메시야이다. 그런데 유대 메시야 사상은 틀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메시야 사상을 옳다고 인정했으니까 그래서 초대 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했다. 헬라말로 하면 χριστος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에 있어서 메시야와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더이상 유대교적인 사상을 내용으로 채운 것이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과 하신 일로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의 내용을 채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What Jesus was(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 그리고 “What Jesus did(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 가 예수가 메시야라 그리스도라 할 때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메시야가 뭐라고 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inter pretatio christiana(그리스도적 해석)이라고 그러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초대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선포할 때 그 메시야 사상이 일부 유대교 메시야 사상과 겹친 부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초대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할 때 그 내용을 예수가 어떤 분이었으며 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 그래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메시야됨의 내용이다. 예수의 메시야적 과업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할 때 무슨 일을 감당한 자로 말하는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므로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로 메시야는 구원자이다. 즉 정치적 해방을 가져오는 분이 아니고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분이다. 어덯게 해서 이러한 새로운 메시야 사상이 나왔느냐면 바로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가ㅗ 부활에서 나왔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메시야 사상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예수가 어떤 분인가? 무슨 일을 했는가가 예수의 메시야됨의 내용이다. 이런 것을 inter pretatio christiana라고 한다.


이러 아주 기초신학적인 ABC에 해당하는데 신학을 몇십년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몰라 가지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가령 지난번 살펴본 고린도 후서 5:16같은 ‘위대한 천명’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민족적 해방자로 정치적 왕으로 알았다. 그것을 바울이 육신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한 메시야 사상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제는 무엇을 깨달았으냐면 그런 메시야가 아니고 예수가 하신 일이 진짜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해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이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것이고 바로 예수가 그런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분이기에 그분이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것을 좀 정리하면 “에수는 스스로를 속죄와 새언약을 세우는 일 제사로 바치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단7:13에 인자로서 그리고 삼하 7:12 나단의 예언에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메시야 과업으로 보았다. 그러한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되자 초대교회는 그의 추종자들은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가 정의한 그의 메시야적 과업을 감당한 사건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가 자기의 메시야적 과업을 스스로를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로 바친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자기의 메시야로서의 과업이다. 다윗의 아들로서 그리고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적인 과업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자 부활의 빛 아래 봤을 때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의 그러한 메시야의 과업을 감당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바로 메시야다. 예수가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분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 초대교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라는 선포는 그러므로 예수 안에 또는 그의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로 바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됨은 항상 그의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과 부활로 정의한다. 그래서 이른바 πιστις-formula(믿음의 형식)이 형성된 것이다. to believe that christ did(혹은 was juised) for us(our sins)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 복음이다. 이때 항상 쓰는 칭호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분,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쓰인다. 그것이 메시야적 그리스도적 행위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는 것이 복음이다.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고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킴 받은 분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구원을 담당한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 믿음과 선포의 내용이다. 그래서 πιστις-formula의 약식이 뭐냐면 to believe in Christ 그리스도를 믿는다. 또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바울이 고전 1:18에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냐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음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전체 약자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기술한 약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이냐?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음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십자가에 스스로를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바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소리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이것은 유대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메시야 사상하고 판이하다. 그러나 오묘하게도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적 행위의 빛 아래 구약의 예언들을 다시 보면 예수의 구약 해석이 훨씬 더 옳았다. 구약의 메시야적 사상을 진정으로 성취한 것이다.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에서 유대묵시문학적 메시야 사상이 나오고 예수의 메시야 사상이 나오는데 다르다. 그러나 뿌리는 같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리스도의 행위를 체험하고 보았더니 에수의 가르침이 옳았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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