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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신학(김세윤)

바울신학 제9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8.

바울신학 제9강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가 심각하게 대두된 것은

 

첫째로 바울이 서신들의 예수에 예수의 가르침을 거의 인용하지 않고 있다. 예수이 말씀이 인용됨직한 곳에도 예수의 말씀들이 거의 인용이 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말씀들이 바울 서신에 거의 전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에수의 가르침의 중심 개념 즉 하나님 나라라든지 또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든지 이런 가르침들이 바울 서신에는 거의 안 나타난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선포했는데 바울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했는데 바울은 에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그래서 바울과 예수의 관계는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큰 테두리 내에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많은사람들은 왜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이어받지 않고 인용하지 않느냐? 그래서 극단적으로 Bultmann은 “바울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 또는 예수의 역사는 예수가 유대인으로서 율법 아래서 낳았고 살았으며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할 뿐 역사적 예수의 다른 점들=그의 가르침이라는 그의 행적=가령 하나님 나라 선포라든가 또는 치유,이적이라든지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또 예수이 역사-예수가 어떻게 체포되었고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혔고 또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돕고 어떻게 병자를 치유하고-이런것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그래서 Bultmann의 용어로 하면 예수가 살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 그것에만 바울은 관심이 있었다.

 

이것만으로 바울신학이 충분하다는 것이다.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was)? 바울에게 있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에수가 유대인으로 살고 또 율법아래 살고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만 바울신학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에 대해서 이것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바울이 무시해버린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Bultmann의 신약신학 책을 보면 처음 에수에 관한 것이 30page밖에 안된다.

 

그의 책 신약신학이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신약신학의 전제이지 신약신학의 내용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600-700page 되는 그의 신약 신학 책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해서는 불과 30여 page로 요약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바울 신학에 있어서 예수가 살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전제로서 이것만 중요하지 예수가 어떤 분이었느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전혀 보고를 하지 않고 반영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전혀 인용하지 않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다. 그래서 이것이 상당히 문제이다.

 

그러면 바울의 Kerygma가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바울의 케리그마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확보하는가? 바울의 복음이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그의 하나님의 죽음의 빛 아래 비춰본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유래하지 않으면 이 바울의 복음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불트만에 의해서 바울의 케리그마라는 것이 주로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 적용해서 역사화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죽고 부활했다는 등등이 다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적용을 해서 역사화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케리그마적 신학이라고 한다. 즉 케리그마를 강조하는 신학을 말한다. 이런 케리그마적 신학이 오늘 한국에서까지 유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우리 삶의 정황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우리의 문제를 규정을 한다. 그래서 가령 남미에서의 필요는 정치적,경제적 해방이다 라고 규정한다. 그러면 예수는 구원자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need는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고로 예수는 해방자이다. 이런 식으로 신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예수가 우리 죄를 속하는 속죄제사는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하여서 죄의 용서를 가져오고 우리와 하나님과 올바른관계를 가져오고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우리를 하나님 자녀되게 하고 이런 우리의 성경적 카테고리는 다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당시 바울의 정황에서는 그런 것이 의미가 있고 communication 하고 다 중요했는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의 삶으 정황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need는 해방이다. 그러면 예수는 구원자이므로 고로 예수는 해방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런 신학이 바로 민중신학이다. 토착화신학이 다 이렇다. 삶의 정황(context)에서 먼저 문제를 정의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예수는 구원자이다. 고로 예수는 해방자다라는 것이다. 1976년 제네바의 W.C.C. Eccumenical institute에서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자들의 토론이 열렸는데 하루는 거기서 가나 출신 W.C.C. 상당히 높은 고관이 말하기를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구원자 이것은 아주 무의미하다’ 는것이다. 그런데 제국주의 선교사들이 이런 신학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주입시켜 가지고 아프리카 교회가 그런 무의미한 신앙고백을 자주 되풀이 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사람드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기독론은 어떻게 펼쳐지느냐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민족 해방을 하고 인종 차별 주의자들로부터 해방을 하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과 지금 살아 있는 후손들과 중계하고 또 가물고 기근이 들때에 비르 내리도록 하고 있는 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통적으로 아프리카에서는 종족의 추장이 그런 역할들을 했다고 본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기독론은 예수가 추장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가 추장으로서 무엇을 하느냐? 가물때 비를 가져오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의 영혼과 살아 있는 후손과 중계하고 종족의 삷을 위협하는 제국주의자들과 싸워서 종족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추장이라고 고백을 해야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의 정황에서 그들의 구원의 의미를 미리 정하고 예수가 구원자이므로 고로 예수가 바로 그런 구원자 즉 추장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날 인도 사람이 일어서 가지고 긴 강연을 한답시고 복잡하고 자기도 모르는 소리로 강연을 해대는데 그 중에 자신이 아는 소리 몇마디는 이런 것이다. ‘인도 사람들도 죄를 용서하고 초월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고 의롭게 하고 하는 것으로 무의미하다. 인도의 힌두교 즉 범신론에 세뇌되고 이것 밖에 모르는 이들에게 올바른 기독론과 구원론은 예수가 krishna(인도 힌두교의 범신의 환생의 한 형태를 가리킴) 라고해야 한다. 그래서 우주와 합일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논지는 인도에서 기독론은 krishnalogy로 밖에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인도의 방갈로에 유명한 에큐메니칼 신학교인 U.T.C라고 있는데 이 학교의 교문 정문에는 십자가에 힌두교의 krishna가 못박혀 있다. 이게 이른바 토착화신학이다. 이것도 kerygma 신학이다. 예수가 추장이다. 예수가 krishna이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예수가 민중이다. 남미에서는 예수가 해방자이다. 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적용시킨다. 그래서 70년대 한동안 토착화 신학에 이름하여 유행했던 것이 WCC 써클에서 하는 수련회나 학회 가면 항상 매번 주제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의 질문을 이런 식으로 이용한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그리스도라고도 하고 주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했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니까 너희의 삶의 정황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을 엘리야,세례요한 이라고 답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식으로 그리고 서양신학(교회의 신학)에서 이 사람들이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라고 고백해 왔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면 가이사랴 빌립보 사람들이 당신을 엘리야라고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수준에 머문다는 것이다. “네 말로 해보아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중입니다. 추장입니다. 해방자입니다. krishan입니다.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토착화 신앙고백이고 이 세대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러듯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신앙고백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면 예수가 뭐, 뭐다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아무런 근거없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런 신앙고백은 미신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를 우리가 믿는 아무런 실제(reality)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들이 신학을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느냐면 신약성경에 특히 바울을 보면 어디 역사적 예수에 근거하냐? 바울 서신에 보아도 하나님 나라는 몇번 나오느냐? 그리고 예수가 그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한번도 안나온다. 또 예수가 열심히 병자를 치유하고 그러는데 그런게 어디가 있느냐? 바울도 그리스도는 주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몰라가지고 지금까지 이런 칭호들도 헬라 세계에서 온 창조들로 보았다. 그러니까 자기의 이방 선교 지역에서 필요에 따라 그 문화에서 얻은 칭호들을 가지고 예수에게 신앙고백하고 죽을 때에 케리그마로 선포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못할 것 뭐있냐?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해 왔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를 중요시 다루어야 한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들은 예수를 선포했는가? 어덯게 선포자가 선포이 대상이 되었느냐?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했다. 사도들은 예수를 선포했다. 선포자가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하나님이 아버지되심). 사도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관계가 있느냐? 이런 것을 규명하는 것이 신약신학 제 1권 촛점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예수의 자기 이해를 규명하고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보았을 때 어떻게 사도들의 선포로 다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가? 어떻게 선포자가 선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나? 왜 사도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에 집중하게 만드나 하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것이 신약신학 제 1이다. 이중에 혹시 강의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89년도판 가을호 신학지남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관한 논문이 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여기 다룬 문제의 핵심들을 깨달을 수 있다.

 

지금 이 문제가 큰 문제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하나의 변형으로 또는 한 조각으로 바로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가 토론이 되는것이다. 그런데 그게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절실하게 토론이 도어야할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한데로 바울 서신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그의 가르침이 거의 인용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제를 먼저 제기했다. 먼저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복음은 바울전 교회를 중계자로 해서 그들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사역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앞부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계시에 근거해서 초대교회의 기독론적 그리고 구원론적 신앙고백과 케리그마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그의 가르침과 행적으로 보았을 때 발생한 것이다.

 

첫째로 바울의 복음은 초대교회를 매체로 해서 역사적 예수와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의 계시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어덯게 일어났는가? 예수의죽음과 부활의 빝 아래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서 발생한것이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에서본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유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바울은 가령 갈 1:18 같은데서 암시하기를 “베드로와 예수를 직접 알고 예수의 가르침 직접 받고 예수의 목격자인 사도들로부터 예수의 전승을 이어받았음을 암시한다” 갈 1:18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후 3년만에 예루살렘에 갔다. 간 이유는 갈 1:18에 베드로를 방문하기 위해서 갔다고 되어 있다. 거기에 쓰인 동사가 헬라어로 ιστορησαι ετερον 되어 있는데 이 동사는 ‘베드로 알고 지내기 위해서’조금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베드로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걸 강조하기 위해서 Oxford에서 가르쳤던 신약학자 G.D.Kilpatrick은 다음 주장을 한다. 헬라어로 ιστορησαι κηφαν이 G.D.Kilpatrick에 의하면 ‘심방하기 위해서’‘알고 지내기 위해서’‘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근거에 의하면 바울은 베드로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갔다고 볼 수있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가서 주로 무슨 정보를 얻었겠는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Bultmann 은 이 이야기 한데로 바울은 예수가 유대인으로 살았다는 것과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가 어떤 가르침과 어떤 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불트만과 쌍벽을 이루는 금세기 위대한 신약학자 C.H.Dodd는 말하기를 갈 1:18에 바울은 2주간 동안 베드로를 심방했다. 고 말한다.

 

그래서 갈 1:18은 바울이 예수의 목격자인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전승을 상당히 받았을 것을 암시한다. 특히 베드로의 전승을 받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이다. 마침 마가복음이 신학이 바울 신학과 상당히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암시를 받을 수있는데 베드로와 같은사도를 통해서 바울이 예수의 전승을 받았을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고전 15:3-5을 바울은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전수 받고 또 이말은 랍비들이 그의 선생 랍비로부터 가르침을 한자도 빠짐없이 그대로 전수(전승)받고 자기 제자에 그대로 전수(전승)할 때 쓰이는 전문언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랍비용어이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바울이 복음을 랍비 언어를 동원해서 전수받고 전승했다고 그러는데 그렇다면 복음의 요약자체가 랍비식의 요약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쓸수가 있다.

 

그러면 랍비식의 요약은 무엇인가?

 

이것은 ןמס이라고 한다. 이것은 암기가 중요한 문화 속에는 암기술이 발달한다. 그런데 랍비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암기해야 그대로 전승할 수 있는 것이다(그 당시에는 책이 흔하지 않고 전부 머리 속에 있다) 또 그 당시의 가르침은 그대로 암기시키는데 있었다. 우리 한국 교육인 서당 교육이 그대로 암기시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암기시킨 교육이 아루어져 시험내면 암기한 것ㅁ나 쓴다. 조금 생각하게 해서 쓰는 것은 잘못쓴다. 이런 암기식의 교욱이었을 때는 암기술이 발달을 한다. 그러니까 전체 내용을 줄이고 또 줄이고 줄여서 암기하게 한다. 그래서 내용을 한마디로 간추리는 제목이거나 아니면 이 내용중에 두드러진 개념 하나 딱 말하면 일사처리로 거기에 관련된 것이 다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 ןמס이라고 한다. 제목이든지 또는 한 사상을 기술하는 것에 중심 개념이든지 우리에게 두드러지게 연상력을 빨리 발휘하도록 하는 그런 개념이든지 이런 것을 자주 개발하도록 해서 암기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랍비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베드로 같은 사람에게 받아가지고 ןמס식으로 암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전 15:3-5에 보면 ①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성경대로 죽었다②그리스도가 장사되었다③사흘만에 성경대로 부활했다④게바와 12제자에게 나타났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 οτι라는 절로 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첫째로 고전 15:1-2에서 “여러분들이 제일 처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선포한 복음을 상기키시겠다”고 그런다. 어떤 말투로 내가 그것을 선포했는가를 상기시키겠다고 그런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가 고린도에서 선포한 복음을 어떤 말투로 선포했는가를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대로 지금 바울이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선포한답시고 이렇게만 하고 끝났겠는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 장사되었다.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했다. 그리고 게바에게 나타나고 12제자에게 나타났다고만 하고 말아버렸겠는가? 그럴리가 없다. 그리스도가 어던 분이며 무슨 일을 했기에 또 무슨 가르침을 했기에 어떻게 원수들한테 체포되어서 어떻게 로마사람들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되었는가?

 

즉 예수의 수난사를 다 말했을 것이다. 이것의 요약이 ןמס이다.

 

또 어떻게 집 한칸도 없이 유리방황하는 이분을 그이 추종자들이 장사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아리마대 요셉이 무덤을 빌려주어 가지고 또 어떻게 향유와 모든 장례 재료들을 다 가지고 와서 절차를 밟고 어디 무덤에 묻혔는가 그러니까 고전 15:1-5까지는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관한 것을 많이 알았음을 암시한다. 사실은 마가복음 자체가 예수의 수난사를 이루고 있다. 어던 학자가 말하기를 “마가복음은 긴 서론이 붙은 예수의 수난사”라고 한다.

 

막8:27부터서는 계속 예수의 수난에 관한 것 뿐이다. 예수가 어떻게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고 어떻게 예루살렘 입성해서 성전에서 소란피우고 체포되고 재판받고 처형되었는가가 긴 수난사이다. 그 앞에 것은 서론이다. 왜 예수와 그의 원수들과 conflict가 일어났는가? 수난사 중심으로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말한 복음도 수난사 중심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가 수난받음을 이해될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신 서론이 붙을 수 밖에 없다. 예수가 무슨 가르침을 하고 무엇을 했기에 체포가 되고 죽게 되었는가? 그래서 바울은 복음은 마침 고전 15:1-2에서 랍비식으로 전수받고 전승된 것으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고전 15:3-5은 한마디 한마디가 랍비식의 ןמס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 15:3-5의 한마디 한마디는 복음서에 볼 수있는 수난사라든지 장사,부활,나타난 이야기를 더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곧 바울이 편지에는 역사적인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안 썼지만 이런 걸로 살펴보건데 첫째로 적어도 바울 스스로 역사적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해 많이 알았고 둘째 교회 개척하는 상황에서 복음 선포할 때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자세히 설했을 것이다.

 

둘째로 고후 5:16

 

불투만은 그의 모든 바울 신학을 바로 이 본문에 근거했다. 불트만은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면 바울이 뭐라고 그러느냐? “보라 우리가 과거에는 육체대로의 그리스도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를 그렇게 알지 않는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바울이 여기서 부인하는 것은 육신적 그리스도 곧 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뒷받침할려고 하는 것은 신앙 없는 짓이다. 선포를 그냥 무조건 믿어야 그것이 신앙이지 그 선포의 역사적 근거를 찾으려는 행위는 믿음없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인 증거가 우리의 신앙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역사적 뒷받침으로 증거하겠는가? 이것은 신앙에 대한 오해이며 왜곡이다. 방루 스스로 여기서 육신적 그리스도,곧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배격하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불트만은 자기의 케리그마에만 집중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무시를 고후 5:16말로 정당화한 것이다.

 

그러면 불투만이 구절을 잘 이해했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이 구절은 아주 쉬운 헬라어이다. 불트만은 아주 유명한 헬라어도 능통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못읽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헬라어에 대해서는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대 헬라 고전 작품에도 아주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헬라어를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왜 오해했느냐면 자기 신학적인 전제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자기 신학에 이 성경을 두드려 맞추려다가 미련한 짓을 한 것이다. 문제는 ‘육신대로 κατα σαρκα’ 가 두번 나온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απο του νυν’ ‘우리가 아무도 육신대로 알지 않는다 ουδενα οιδαμεν κατα σαρκα’ ‘전에 그리스도도 육신대로 알았으나 κατα σαρκα εικαι εγνωκαμεν κατα σαρκα Χριστον’ ‘이제는 αλλα νυν’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는다 ουκετι γινωσκομεν’ 여기에서 불트만은 κατα σαρκα를 위에 ουδενα와 Χριστον 하고 같이 가는 말로 보았다. 그래서 육신적 그리스도,육신적 그리스도를 알지 않는 걸로 해석했다. 그런데 실제로 κατα σαρκα는 명사형을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아니고 동사οιδαμεν εγνωκαμεν를 수식하는 부사구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도 육신적인 방법으로 알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육신적으로 알지 않는다는 말이다. ‘안다’는 말을 수식하는 부사구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문장 구조로 그렇지만 의미로도 그렇다. κατα σαρκα Χριστον에 상응하는 말이 ουδενα οιδαμεν κατα σαρκα 이다. 불트만식으로 한다면 κατα σαρκα Χριστον를 육신적 그리스도 그래서 역사적 예수로 해석하고 싶으면 ουδενα οιδαμεν κατα σαρκα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도 역사적인 존재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아무도 육신적인 존재는 우리는 알지 않는다. 말이 되는가? 의미로도 헬라어 문장구조로도 말이 안된다. 우리는 육신이다. 그러니까 κατα σαρκα는 둘다 ‘안다’는 동사에 걸리는 부사로 보아야 한다. 무슨 뜻이냐면 역사적 예수,또는 육신적 예수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바울이 여기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적인 척도로, 또는 육신적인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신적인 평가,척도,시각,관점에서 알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육신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부자이면 정상적인 척도이면 존경해야 하는 것이고 학위가 많아도 존경한다. 이랬던 것이 다 육신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것이다. 부,약식,미모,권력 등 다 육신에 속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육신적인 평가방법,육신적인 가치관,시간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잘났다고 종경하고 어떤 사람은 못났다고 무시하고 그랬는데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는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뒤부터는 그렇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자로 곧 성령을 받아서 영적인 존재가 된 뒤부터는 영적인 가치관, 시각에서 사람을 평가하지 이 세상 육신적인 평가 방법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는 심지어 그리스도도 육신적인 세상적인 관점에서 육신적인 가치관으로 척도를 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바울이 여기서 배격하는 그리스도를 육신적인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평가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자기가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 전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 전에 ‘자기가 유대교에서 가졌던 메시야 사상,그리스도 사상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앎이다’

 

이렇게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메시야를 민족적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로서 이방인들을 다 정복하고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영광을 자유를 번영을 줄 분으로 생각했다. 바울이 이러한 유대교적 메시야관을 육신적으로 그리스도를 앎이라고 지칭히는 것이다. 이것을 배격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트만이 고후 5:16에서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근거할려고 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안병욱 교수의 글을 읽으면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안 가지고 배격했다고 고후 5:16을 불트만 식으로 해석하고 인용하면서 그러기에 바울은 민중을 위해 산 예수를 왜곡했다고 바울을 열심히 욕한다. 그런데 불트만이 이렇게 기초적인 헬라어를 몰라가지고 딴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데 그사람들이 몰라서가 아니고 자기들의 신학적인 이해를 위해서 그런다. 그래서 하나님 진리를 왜곡하고 난리를 펴서 한동안 교계를 어지럽히고 오도하고 그런다.

 

세째로 바울 서신 안에 역사적 예수의 전승이 아나도 없느냐? 얼마 없고 빈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 이 빈약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상과 비교를 해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설교문의 요약들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바울의 편지는 곧 설교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편지들의 케리그카 성격과 비슿한 사도행전에 있어서의 설교를 분석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행전에는 역사적 에수의 가르침이 많이 나오는가? 많이 인용되는가? 사도행전에 있는 설교문에도 안되어 있다.

 

또 바울 외의 신약의 서신을 베드로 전후서라든지 히브리서라든지 요한 서신등을 보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많이 인용되어 있느냐? 여기에도 안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연설문에 있어서는 상당히 심각하다. 왜? 사도행전을 틀림없이 제 3 복음서의 저자가 썼다. 즉 제 3복음서 저자 누가가 썼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 복음을 저술한 분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철두철미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을 쓰면서 설교문에는 자기가 누가복음에서 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혀 반영하지 않느냐 말이다. 또 마찬가지로 요한일서에도 전혀 반영이 안되어 있다. 또 AD 2세기 중반의 설교인 제2서신 Clement의 저자 D.Clement는 복음서 전승의 내용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 편지인 제 2클레민트에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 지금가지 우리가 똑같은 현상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 서신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인용이 안되었다고 해서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몰랐다든가 또는 관심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하게 성격이 똑같은데 비록 context가 다르지만 그러니까 1960년대 70년대에는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비판학자들이 그냥 난도질을 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사도행전이 역사성이 없는 1세기 말의 작품으로서 교회의 신앙과 경건성을 북돋으려는 책이고 구원사의 책이지 이것이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의 살교들을 요약하고 초대교회의 성장과정,선교과저을 요약한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으 독일의 Conzelmann, E.Henchen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늘 이유를 무엇으로 대했냐면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바울의 설교라고 요약된 부분이 여러 곳에 있는데 그게 바울의 신학과 다르다. 또 바울의 가르침을 전혀 반영치 않고 있다. 바울의 중심개념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에서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설교의 동행자였다면 바울이 언제 어떤 편지를 썼는가를 기록할 뿐 아니라 그 편지들에 담긴 바울의 가르침도 바울의 설교에서 반영을 해야 될텐데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서신에 대해 일체 언급도 없고 또 바울 서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일체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을 몰랐고 바울 서신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이런 식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데 지금 사도행전의 저자가 분명히 누가복음의 저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에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의 전승이 안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련의 사실들에서 우리가 사도행전의 기독은 예수의 말씀이 반영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예수의 전스을 몰랐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전승을 몰랐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전승을 많이 써 놓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역사적 예수의 전승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거나 관심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논리로 사도행전에 바울서신이 인용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 서신을 몰랐거나 바울 서신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바울이 앞에서 이야기한 첫번째 이유 즉 베드로를 알고 지내고 정보를 얻으러 가서 보름 동안 날씨만 이야기하고 지내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베드로로부터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었고 또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하는 것을 보면 당시 랍비 학교의 전승과정을 염두해 두면 바울이 역사적인 예수에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복음 선포할 대 그것들을 많이 인용했을 것이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에 인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냐? 그 이유는 다른데서 찾아야 한다. 바울이 몰라서가 아니고 아마 편지라는 문학장프에 gattung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야기한 제2의 Clement에 그는 분명히 복음서를 많이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에는 구가가 복음서의 내용을 다 알면서도 설교에는 별고 안스고 있다. 바울서신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흔히 나오지 않는 이유는 편지라는 문제(gattung)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이미 자기가 복음 선포해서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앞에 이야기한 고전 15장을 우리가 분석해 보건데 바울이 처음 복음 선포할 때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많이 전수했다. 그 뒤 그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들에게 신학적인 원칙을 적용해서 조언을 한다.

 

편지가 바로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편지들에는 예수이 가르침과 행적이 많이 인용이 안되었을 것이다는 말이다.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불렀다. 그런데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들에게 약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게 하겠다는 그 약속을 성취했다.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초대장을 발부한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드림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제의(제사의식)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십자가의 대속적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드림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한 구원의 성취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백성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이다. 그래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은 곧 죄인들을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만듦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한 구원의 성취이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교회는 자연히 설교와 관심이 어디에 집중하겠는가? 약속에 집중하겠는가? 아니면 약속의 성취에 집중하겠는가? 당연히 약속의 성취에 집중할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예수가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나님 나라 선포했다는 것은 쏙 들어가고 그의 죽음이 대속의 새언약 세우는 죽음으로서 우리를 하나님 백성 되게 했다. 우리 죄를 속하고 우리를 의로운 자로 만들었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해서 일어날 구원을 향해서 갔다. 그러면 그 구워을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약속을 했다. 초대 교회는 이 약속의 성취를 뒤돌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 대속의 죽음과 새언약의 성취를 뒤돌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과 새언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그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렇게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더이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는데 집중했다. 이것이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 우리를 하나님 백성 되게함 그리하여 우리들을 하나님 자녀되게 하고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해서 영생을 얻도록 한 사건으로 거기에 집중을 한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서론으로 필요했지 이것은 계속 되풀이되는게 아니다. 바로 이와같은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에서 우리는 바울이 왜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가르침(하나님 나라)을 더이상 많이 인용하지 앟는가를 설명할 수있다.

 

둘째로 그러나 구원론이나 기독론 말로 윤리적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주 예수의 가르침으로 주의 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으로 재천명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사실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예수의 가르침이 사실은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 재천명이구나 하고 왜 우리가 빨리 감지하지 못하냐면 여기에도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전의 예수의 상황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후 특히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상황과의 차이점에서 똑같은 예수의 가르침의 원칙이 조금 변형되어서 바울 서신에 적용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 서신에서 곧장 예수의 가르침을 인식하지 못하나 표면을 조금 열고 자시히 분석하면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아주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 예로 롬12:7/살전5:15/벧전3:9 등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오는데 이 세곳(두속의 바울 서신과 한 곳의 베드로 서신)에 서는 같은 형태로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눅6:27/마5:44의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미는 같으나 약간 변형되어 나온다. 그러니까 롬,살전,벧전에서 바울과 같은 형태로 나온다. 그러나 이 세곳 모두 예수의 산상수훈과 약간 변형되어서 나오다. 왜 이 변형이 이루어지는가? 복음서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가 회개하라는종말론적인 부름이 표현으로 나타나다. 그러나 서신들에 있어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윤리적 가르침은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종말의 상황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상황 속에서는 아직 종말의 구원이 일어나지 않았다(십자가의 죽음 전). 그래서 이 죄인들에게 종말의 구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나 바울의 상황속에서는 종말의 구원을 덧입은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로 상황이 변하므로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인용하는데 약간 변형해서 인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혼문제도 그렇다. 고전 7:10에 예수의 이론에 관한 가르침이 직접 인용이 되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이 직접 인용된 것은 참으로 드문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마 5장,19장에 이혼을 무조건 금했다. 매태의 소위 예외규정에서 간음을 제외하고는 이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마태의 예외 규정이다. 원래 이혼을 금했다. 그런데 고전 7:10에서 바울은 마태복음이 이혼을 금하는 말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약간 변형해서 적용하느냐? 이혼 안하는 것이 좋은데 만약에 상대방이 불신자라거 이혼하자고 끝까지 주장하면 이혼해도 무방하다고 변형해서 적용한 것이다. 왜? 바울은 지금 헬라적(이방인의 상황) 상황에서 복음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유대인의 공동체 (모세 율법하에 있는 공동체)에서 이혼을 전면 금지한 주님의 가르침의 상황과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헬라 공동체에서 바울이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섞여 사는 사회에서 에수이 이혼의 가르침을 원칙을 적용하되 그 상황의 특수성에 의해서 약간 변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바울 서신들에서 이와 같이 약간 변형된 모양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참 좋은 연구이다. 최근에 이런 연구가 상당히 많다. 이 연구들은 윤리적인 가르침에서 굉장한 많은 성공을 기약한다. 그러나 바울의 중심개념에 있어서 가령 튀빙겐 대학의 조직신학자 E. Jungel의 박사 학위 논문인 ‘바울과 예수’라는 책에서 ‘바울의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의 언어가 전적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해석학적 연속이다’고 본다. 약간 변형된 모습으로 그러나 그 가르침은 신실하게 선포한 것으로 본다. 사실 그렇다. 그래서 바울을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예수의 가르침을 잘 알았을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정신을 아주 신실하게 누구보다도 더 이어받은 분이다.

 

그래서 A.Schlatter라는 아주 경건한 신약학자는 기독교의 창시자가 바울이 아니라(바울과 예수가 자꾸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다음 결론 바울이 기독교 창시자라고 한다) 바울이 스스로 주장하듯이 Der Bote Jesus 예수의 심부름 꾼 이었다. 예수의 사도, 예수의 사자, 그래서 예수의 메시지를 성실하게 전했다. 우리가 바울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정신을 신실하게 전승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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