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 제7강
바울이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하는 비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즉 지금이 이방이의 충많나 수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하는 때이고 그 때까지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심자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로 불러오는 때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고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계획을 바우이 어떻게 계시받았느냐? 지나번에 우리가 그 계시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때에 받았다.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 받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나타남의 상황 속에서 특히 이사야에 있어서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나타남의 상황속에서 선지자가 궁전회의,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여해서 그곳에서 자기가 선포해야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계시 받게 됨을 살펴보고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과 이사야의 소명의 체험과 견주어서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받은 계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를 성경적으로 확인받을 것인가? 그런것을 고찰해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들의 사도 부름받음과 이사야의 선지자로 부름 받음이 유사점을 하났기 살포 보았는데 그중에 아마 세개를 한 것 같다.
네번째로 하나님의 회심 가운데 궁정회의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듯이 바울도 αποκαλυτειν(계시한다)는 말과 αποκαλυψις 또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자기가 환상 속에서하나님 우편에 앚아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자기의 복음과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난번 첫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αποκαλυψις라는 언어 자체가 그리고 μυστηριον이라는 언어 자체가 그렇다.
궁정회의에서의 하나님의 דוס(계획)의 드러남을 말하기 때문에 또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들 중 히브리인으로 히브리인으로부터 난 히브리인이라고 바울은 소개한다. 이런 철저한 유대인의 바리새인 신학자가 어떻게 다메세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만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의 모든 신학적인 조류들의 공통적인 이해는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을 받고 지금이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때이다. 이스라엘이 다 회개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신학에서 랍비들은 토론이 많았ㄷ. 왜 이렇게 메시야가 안오고 지체를 하느냐? 모든 이스라엘이 아직 회개를 안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온을 높이고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러면 하나니의 영광의 빛이 시온에서 온세상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면 모든이방인들이 여호와가 진짜 ‘신’인 것을 알고 자기들이 지금까지 섬긴 신들이 전부 우상이며 목석에 불과한 것임을 알며 그것들을 다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또 자기들 속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모시고 시온에 몰려와서 진정한 신인 여호와를 경배하고 그의 구원에 참여한다. 좀 관대한 유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고 그러고 좀 편협하고 못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이방인들은 그렇게 해도 구원을 못받고 그렇게와도 이스라엘의 종 노릇이나 한다고 민족주의로 만들어 놓았다. 무슨 소리냐면 즉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면 메사야 시대가 와서 그들이 구원을 받고 그 연후에야 이방인들이 이런 식으로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온다. 이것은 선지서들에서부터 오는 이른바 이방인들의 종말론적인 순례 이바인들의 시온에로의 종말론적인 순례사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상이다. 이사어 2장 11장 등 미가 5장 2장 등 온갖 곳에 다있는 아주 중요한 사상이다.
이 사상에 근거해서 먼저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메시야의 구원을 받고 그 뒤에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인보다 먼저 구원받는다는 법은 없다. 유대신학에서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철저한 유대의 종말론에 지금가지 고착된 바리새인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이방인들이 사도로 나설수 있느냐? 가령 갈6장6장에 하나님게서 자기에게 아들을 계시했다고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다 회개했는가? 천만의 말씀. 유댕니들이 메시야의 덕을 힘입었는가? 천만의 말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전혀 믿지도 않고 그런데 그들은 제쳐두고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것을 살펴보아도 바울에게 있어서 롬11:25절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구원의 계획을 전혀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구원의 계획을 바울이 그때에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 받을 때에 동시에 계시 받았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있게 이방인들의 사도로 나설 수 있으며 뒤돌아 보지 않고 뒤돌아 보지 않고 예루살렘에 유대 사도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그곳에 보수(바리새)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훼방하고 반대를 해도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또 하나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사야가 그의 부를 때에 이스라엘이 심장을 완악하게 만든 하나님의 뜻을 받은데서 바울은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 같다. 사실에서 바울의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일이다. 복음을 선포하면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는데 이스라엘은 복음에 더 저항한다. 그래서 그들의 심장이 더 완악해진다. 이것이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선포가 이스라엘 심장을 완악하게 했듯이 바울의 복음선포도 이스라엘 심장을 더 완악하게 했다. 또 하나 로마서 11:25에 언제까지 이스라엘의 심장이 완악하게 되냐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이렇게 한시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심장을 완악하게 만든 것이 한시적이다.
이것은 이사야 6:11절과 연관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하고 그들의 눈을 무겁게 하고 귀가 얼게 해서 이사야의 말을 못깨닫고 이사야가 선포하면 선포 할수록 심장이 완악해져서 그들을 심판한다고 하니까 이사야가 묻는다.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심장이 완악하게 함은 항상 한시적이 언제까지니이까? 이질문은 시편에도 여러번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 가운데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게 부르짖는 문장 형식이 이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언제까지 입니까?에 대한 답이 이사야 6장에 주어졌는데 아마 바울도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한다. 너는 유대인간에는 더이상 복음을 선포하지 말고 이방인에게 가서 에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해라. 이렇게 명령했다면 구약에 항상 나오는 이 문장형식에 따라 언제까지니이까? 하고 물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라고 그러는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런 정도 바울의 비밀과 이사야서 6장의 계시와 유사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고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그 완악한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동안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빛이 되어 주의 구원이 땅끝가지 이르게 하여야 한다(사49:1-6). 바로 갈라디아서 1:5에 보면 바울이 사49:1절에 바로 이 ‘주의 종이 부름’을 자기의 부름에 적용하고 있다. 주의 종을 불러서 이방인의 빛이 되게 했듯이 그래서 주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한다는 예언이 자기의 사도직에로의 부름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바울이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해서 이방인의 빛이된다. 이방의 빛이 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다.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말이다. 빛이라는 말은 계시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 또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들어면 완성되어 이빙인의 완전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이스라엘의 완악함도 끝나고 글하여 그들도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긍극적 구원에 대한 소망도 바울은 어쩌면 이사야 6장 13절에서 얻었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이사야 6장 13절이 특히 탈굼을 보면 당시 어떻게 해석이 되냐면 하나님께서 벌하시고 그 뒤에 불로 다 태워버리고 그루터기에서 새로 나는 싹으로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시작한다 해서 탈굼을 보면 지금 우리 구약성경 이사야 6:13보다 훨씬 더 소망있게 훨씬 더 긍정적인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것에서 바울은 완악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이스라엘이 그것이 끝이 나고 그 끝 뒤에는 구원이 있을 것을 확신한 것 같다. 또 이사야 49:5,6절에서도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소망을 확인한 것 같다. 이제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바울의 선교의 여러 형태들의 중요한 바울 선교의 여러 형태들의 요점들을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왜 바울이 유대인 선교를 포기하고 이방인 선교자로 나섰나를 설명할 수 있다. 조금전 이야기 한 것데로 당시 바울에게 알려진 모든 유대 종말론은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유대의 대다수가 거의 구원을 안 받았는데 바울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로마서 11:25절에 확고한 구원사에 대한 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바울이 왜 그렇게 바삐 뛰어다니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하고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나를 설명할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바울은 자기에게 알려진 온 세계를 돌면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다.
세째로 바울과 유대 사도들과의 갈등을 설명할 수 있다. 유대 사도들은 유대교의 종말론에 집착을 한 것이다. 먼저 유대인들이 구원받고 그 나중에 이방인들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자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서 먼저 교회를 세운다. 갈라디아,고린도,빌립보에서 복음을 선포해서 교회를 세우는데 유대 사도들에게 있어서 보면 이게 아주 위태로운 일이다. 이 예루살렘에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나 이런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아마 야고보와 보수 바리새 사도들의 눈에는 이게 아주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 AD 46년 쯤에 예루살렘 교회 leadership이 베드로에게서 야고보로 넘어간다. 베드로가 그곳의 핍박으로 예루살렘을 떠나게 됨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지도력 아래 놓이게 되는데 그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과격히 보수적이 된다. 그래서 바리새적으로 되어간다. 이들이 입장에서 볼때 바울의 이방인들의 선교는 아주 위험하다.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이방인들이 저렇게 다닌다 말이다.
지금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시온이 영광받고 모든 이방인들이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 때까지 지금 현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이 먼저 유대인들이 되어야 할터인데 어떻게 되는가? 할례받고 율법을 수용함으로서 유대인들이 되어서 지금 현재 누릴 수 있는 현재의 구원에 동참해야 할 터인데 바울은 율법과 할레를 깡그리 무시하고 곧장 이방인들에게 먼저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그들의 교회를 세운다. 그러기에 아주 위험하다. 그러니까 이 교회에서 바울의 교회에 대표단을 갈라디아,고린도,빌립보에 보내가지고 너희들은 모든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너희들이 지금 구원받을 때가 아니다. 유대인들이 구원받을 때이다. 그런데 바울이 정통성이 없는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배운 일도 없고 우리와 관계가 없는 자가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 어느 근방에서 자기가 에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엉터리 복음을 선포해 가지고 지금 교회를 세우고 그러는데 여러분들이 이제라도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다 수용하고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이 되고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자로 구원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방교회 침투를 해가지고 문제를 일으켜서 바울은 그게 아니다. 율법을 수용하고 할례를 받는 행위는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를 부인하는 행위라하고 가령 갈라디아서,고린도 후서,빌립보서 에서 보는 격렬한 투쟁과 갈등을 하다.
그래서 유대 사도들 그러면 모순이 있다. 왜그러느냐? 바울은 베드로를 자기 편이라고 본다. 바울과 야고보 일당과의 갈등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다른 이해에서 설명이 된다.
네째로 어떤 바울의 선교의 형태가 설명이 되냐면 바울은 이방 선교를 하면서도 항상 한눈은 예루살렘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가 말하는 이른바 1차,2차,3차 여행 끝에서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기가 로마를 향해서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는 소망이 가득차서 고린도에서 로마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우선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에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지금 자기가 오랫동안 로마로 갈려고 했는데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등에서의 일에 의해서 지체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린도에서의 반란 때문에 바울이 오랫동안 지체했다. 그런데 드디어 고린도의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기쁜 마음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야말로 그렇게 바랫던 로마행 그리고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선교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면서도 그러면 빨리 뛰쳐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바랐으니까. 어디에 써 있는가? 롬1:15절에 다 써있다. 그러면 왜 예루사렘으로 돌아 가느냐? 돌아가는 것도 아주 위험한 여행이다. 자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여행이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끝에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한 기도를 부탁한다. 그 기도 제목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가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유대인들 손에서 구출되도록 이당시에는(AD 57년 쯤) 팔레스틴에서 열혀당 운동이 아주 고조된 때이다. 글서 66년에 드디어 반란전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열혈당 운동은 이방인들에게 적대감도 있었지만 특히 이방인과 교류하는 유대 백성들에 대한 그들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순결을 더럽힌다 해가지고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일차적인 표적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체포될 가능성이 많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잠복을 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 소에서 구출되도를 기도를 부탁한다.
또 하나의 기도제목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 교회들이 헌금을 받아주도록 바울은 이것도 불확실하다. 왜 그러냐면 예루살렘 교회도 야고보와 같이 바리새주의적 지도력 하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인정안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의 교회들이 한 헌금을 받아주지 않으면 이 말은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인정 안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인 세계에서 세운 교회는 큰 문제가 생긴다. 바로 그런일 때문에 바울이 헌금을 열심히 했으며 바울이 헌금을 걷은 것은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었다.
①하나는 바로 아까 이야기한 이방인들 종말론적인 순례이다. 신저지들의 vision에 의하면 종말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시온이 나타나면 영광의 빛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온세상에 퍼지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들을 가지고 온다고 그랬다. 하나님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 영광이 빛을 바울이 전파한다. 이사야 49:1-2절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전파한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어쨌는가? 데살로니가 전서 2:1-0절에 보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께로 왔다. 그 증거로 그들이 헌금을 해서 그들이 보화를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한다는 사도들의 예언에 따라 이 바울이 헌금을 모집한 것이다. 헌금을 모집해서 고린도를 해서 오는데 다시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간다. 각 교회에서 몇 명씩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간다. 왜 ? 그렇게 위험한 상황인데 유대인들이 얼씬만 해도 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아까 이야기한데로 이바인과 교류한다는 가장 큰 핍박의 표적이었는데 바울이 그렇게 위험하면 혼자 변장을 하고 슬쩍 갈 일이지 보란듯이 이방인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는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 이 옛 선지자의 약속(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선포해서 그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섬기기 위해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헌금을 열심히 거둔 것이다. 요약하면 바울의 헌금 목적이 옛 이방인들이 종말론적인 시온에 대한 순례를 완성(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②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제목적도 있었다. 어쩌면 구제목적이 기본적이니까 먼저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사도에 의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특별히 바울에게 그것을 부탁했다(갈2:10).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울도 내가 구제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제 다음에 옛선지자들이 비젼확인.
③예루살렘 교회(유대인들)와 이방인들 교회의 교제(fellowship)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님의 중요한 이유는 곧 이방인들 교회의 정당성 인정문제이다.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가 헌금을 안받는다하면 이제 이방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되는 것이다. 그런 바울은 구원사적인 연속성이 없이 자기가 자기 교회를 세운것 밖에 안돼 버린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로마 세계의 동북구(동반부)에서의 선교를 일단락 짓고 서반부로의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음에 있어서 여기에서의 선교를 결산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원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된 그리스도 교회로 인정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 목적이 있다. ④또 하나의 목적은 로마서 11:13-14절 거기에 “내가 내 이바인들의 사도됨은 영광스럽게 여긴다”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소리가 아니라 자랑한다는 말이다. 아주 자랑한다는 소리이다. 이것을 자랑한다. 목적이 무엇이라고 그러는가?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하게 해서라도 그중에 몇사람을 구원하고자 해서 그렇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자기 이방인 사도직을 유대인들에게 자랑을 하다. 그게 아니고 어떻게든지 유대인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야 되겠는데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로 하여금 시기나게 해서라도 구원시켜야 하는 것이 제일 순위이다. 바울이 대 헌금단을 조직해가지고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다. 이 헌금을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음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나타낸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들은 개 돼지들로서 전혀 구원 가능성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의해서 구원의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표시로 헌금을 가지고 왔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바울이 이방인 사도직을 자랑한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해서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그런 것이다. 유대인들의 대 대수가 언제 구원받는가? 충만한 수(이방인의)가 들어올 때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시키려고 하는데 그방법이 시기나 나게 하는 것이다. 바로 헌금에 이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이 헌금은 바울의 보시는 바와 같이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또는 바울의 선교전략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바울이 헌금을 거둔 것이다.
그런 바울의 선교 형태. 이런 것 그리고 바울이 왜 이방 선교 여행이 끝나면 꼭 예루살렘에 돌아왔느냐? 보는 바와 같다.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는 조건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사람이 이방인 사도 바울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도 바울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급하다. 하루빨리 지금 로마에서 마치고 스페인에 가서 거기서 복음 선포하고 빨리 북부 아프리카에 와서 거기서 복음을 선포하고 알렉산드리아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당시 자기에게 알려진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다. 바로 바울의 이와같은 구원사적인 이해가 바울의 이와 같은 선교형태를 낳게 된 것이다. 오는 우리에게도 바울의 선교전략이라든지 선교이해는 상당히 생소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선표한다는 소리는 각 개인에게 하나하나 다 복음선포해서 말귀 알아들었느냐? 해가지고 말귀 알아들었으면 교회 나와서 합습받고 세례받고 그래서 몇 년 공부 더해야 된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소위 복음화이다. 그런데 바울의 신약의 복음 선포를 보면 대개 큰 도로변에 큰 도시에 가서 거기 몇 사람 회당에 가서 두어번 소리 지르고 그래가지고 믿게 된 사람 몇 사람 해가지고 그러면 너희들끼리 예수 잘 믿어라 하고 딴 도시로 가서 또 회당에 가서 두어번 설교하고 몇 사람 모아 가지고 이제 복음이야 가르치고는 그러면 너희들끼리 잘 해봐. 너희들을 성령께 맡긴다. 그리고는 또 옮겨가고 이랬다. 방루이 언제 거기에 있는 사람에게 다 복음 선포했는가? 바울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에베소와 고린도이다. 그러나 에베소도 2년 정도 햇수로는 3년 정도 머물렀을 것이다. 고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외는 잠깐 머물정도였다. 그래놓고는 바울이 롬 15:10에서는 뭐라고 그러는가? 내가 이지역(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서는 복음을 편안히 전파했다고 한다. 편안히 전했다는 말은 복음을 꽉 채웠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더이상 일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다. 그러니까 내가 새로운 세계로 가야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바울에 이해에 있어서는 소위 오늘날 새로운 개념으로 말한다면 represantative Universalism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다. 그래서 한 사람은 개인이 아니고 그가 속한 족속의 대표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복음을 들었으면 그 사람에 속한 족속이 복음을 다 들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바울이 로마로해서 스페인으로 가서 그 다음은 북 아프리카로 해서 복음을 선포할 모든 굼이 좌절되었을 때 바울은 새롭게 깨닫는다. 하나님의 계획이 자기로 하여금 온 세상에 빙 돌게 한 것이 아니고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받았다. 모든 이방인들의 대표가 누구인가? 로마의 가이사이다. 바울에게 알려진 모든 통치자가 가이사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헌금단을 데리고 왔다. 바울이 우려한 대로 거기서 체포되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이런 온 세계를 다 돌면서 실제로 자기가 복음을 선포할 꿈이 좌절되니까 가이사에게 상소를 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사를 보면 가이사에게 상소를 않했으면 Felix 가 풀어줄 수있었는데 로마 시민으로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로마의 최고시민 가이사 앞에서 바울은 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그러면 왜 석방될 수 있었는데 바울이 쉽게 말하면 뇌물 몇푼 집어주었으면 석방될 수 있는 것으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석방은 안받고 가이사에게 상소하느냐? 그것은 가이사와의 재판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가이사는 이방인들의 왕으로서 세상의 주라고 주장한다. 세상의 주인 가이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재판의 과정을 통해서 증거하려고 한다. 그러면 가이사가 세상의 주,왕으로서 이방인들의 대포자, 즉 이방인의 대표 가이사에게 선포함으로 바울은 모든 이방인에게 선포한 셈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해서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이것이 일리가 있는 것이 가이사 콘스탄틴 대제 한 사람이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여서 로마제국 전체가 기독교화 한것이다.
바울이 이와같이 represantative Universalism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령 고리도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면 아가야 지방 전체에 복음 선포한 것이다. 이런 식을 생각했을 것이다.그러니까 바울이 자기의 모든 이방인들의 복음 선포로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인들이 완악함이 풀리고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또 로마서 11:2절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받아서 어떻게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선포를 수행했는가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첫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바울의 모든 신학은 이와 같은 선교사업의 수행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늘 그의 바울신학의 선지자를 기억하여 공부해야 함.
*바울의 복음*
①계시와 전승으로서의 복음.
복음이란 말 자체가 아주 중요한 말이다. ευαγγελιον말 자체가 아주 신학적인 어휘이다.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소식이 복음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느냐? 이것이 최근에 많은 토론의 대상이다. 편리하게 좀 나이먹은 아티클이지만 G.Friederich의 EDNT사전에 나오는 ευαγγελιον이라는 아티클을 읽어보든가? 아니면 좀더 깊이연구하고 싶으면 P.Stahlmacher의 “Das Plan Evangelum”이라는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복음이라는 말이 생성되었는가? 이것은 어디서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되냐면 예수의 하나니 나라 선포를 복음이라고 그런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O.TT. Betz가 우리에게 누차 강조했듯이 사52:7에 “거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자 또는 샬롬 평화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도다” 하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그복음의 내용은 무엇이냐면 너희 하나님이 다스리신다(사52:7)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심 이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가령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 왜 하나님이 다스림이 기쁜 소식이냐면 그것이 곧 구원의 의미이다. 샬롬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총조를 사단이 차지하고 곧 하나님의 주권,하나님 왕으로서 다스림을 사단이 찬탈 하여서 악과 고난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 사단의 주권을 하나님께서 쳐서 없애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사단의 악과 고난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서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속으로 인간이 들어오게 되니 곧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한다(샬롬).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그게) 복음이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활동을 복음 선포라 할때 그것은 사42:7과 53장 등에서 왔다. 그런데 바울의 사도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하나님 나라가 복음이다(예수에게 있어서) 그것으 이사야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라 한다.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느냐? 즉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연결하는 문제 이것이 신약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주제이다. 또는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마,막,눅,요)들은아주 유대 문학적으로나 헬라 문학적으로나 독특한 장르(문체) 문학형식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어떻게 보면 전기같지만 전기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전기 같다(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기 같다). 그러나 그게 전기와 다른 것은 예수의 생육과 가르침과 행적 이런 것을 그냥 무슨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듯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케리그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결단하는 요구를 우리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보통 전기와는 다르다. 이러한 독특한 문학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문학의 이름을 복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 이때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님 나라와는 어떻게 관계가 있느냐? 이런 여러 문제를 제시해 준다. 그래서 이 복음이라는 낱말 자체는 아주 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사야는 복음을 히브리어로 הרושׁב라고 한다. 그리고 복음 선포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רשׁב이다(피엘형). 그래서 이러한데서 나오는 것에 근거해서 전혀 새로운 기독교적인 용어를 개발했는데 그게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그것을 공부하면 우리가 초대 교회의 신앙의 새로움과 깊은 의미를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상당히 좋은 연구 과제이다.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가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복음을 어떻게 받았느냐?
1)바울은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갈1:11,16)
갈1:11-12
자기는 이것(복음)을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받는다는 것(παραλαμβνειν)은 히브리어의 לכק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승을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한 랍비가 그의 스승 랍비로부터 가르침을 이어받는다는 전문언어이다. 그렇게 자기는 복음을 한 랍비가 랍비의 선배,스승랍비로부터 전수받듯이 인간을 통해서 전수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고, 인간을 통해서 자기에게 전수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왔다. 정반대이다. 전승을 전수받는 것이다. 이것(παραλαμβνειν)은 전적으로 계시받아서 왔다고 말한다. 아마 갈라디아의 교회에서 그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 아마 이렇게 주장한 것 같다. 바울은 원래 예루살렘 사도드로부터 복음을 전수 받았다. 이방인들에게 잘 먹혀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율법과 할례등의 요구를 그 복음으로부터 떼어 내 버림으로서 그복음을 인간적인 복음으로 만들고 왜곡했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바울한테 받은 복음은 인간들에게 잘 먹혀들어가기 위해서 인간들이 율법지키고 할례 받는 이 어려움을 완화한 싸구려 복음이다. 왜곡된 복음이다. 그러니까 그런 복음에 의한 신앙은 잘못된 것이고 그것으로서는 구원이 충분하지 못하니까 지금이라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바울이 아예 원천적인 전제부터 부정을 하는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무슨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어떤 인간으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은 일이 없다. 오로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하므로 16절 그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를 통해서 내가 복음을 받은 것이지 내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인간들로부터 전수받았다고 나보고 그 복음을 왜곡했다고 내가 전수받은 일도 없다. 자기가 갈라디아서 선포한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만 그리고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느니 복음을 자기가 누구한테 전수받아 가지고 그것을 왜곡해서 인간에게 잘 먹혀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왜곡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고스란히 계시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주 그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문제는 고전 15:1-11에까지 보면 갈 1:11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한다. 나에 의해 선포된 복음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배운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것이라고 아주 엄숙하게 선포했다. 고전 15:1도 똑같은 문장 형식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알게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복음은” 여기까지는 갈1:11과 똑같다. 다만 갈 1:11은 수동형에 의해 “나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이라고 했고 고전 15:1은 능동형으로 “내가 선포한 복음” 이것만 다르지 내용형식은 똑같다. 그 다음 완전히 180도 다르다. 나도 그것을 받은 것이고 여러분들이 받은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이 선 것이다. 그런데 구절에 “내가 받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전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 자기가 복음을 받았다. 그 다음에 쓰는 말이 그 복음을 바울이 παραδιδοναν 전승했다. 이것은 παραλαμβνειν 전승받았다. 이것(παραδιδονανα)은 전승했다. 이 두개가 랍비 유대교에서 한 랍비가 그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승해주고 그 제자는 그 가르침을 전승받고 하는 전문언어이다. 바울은고전 15:1-3에서는 이와 같은 랍비들간의 전수하고 전수 받는 전문언어를 동원해서 자기보다 먼저 된 사도들로부터 전승받았다고 그런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누구에게 그것은 똑같은 방식으로 전수했는가?고린도에 전수했고 그러니 큰 문제가 발생했다. 고전 15에서는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승 받았다. 그리고 복음을 고전 11:1-3까지에서 복음은 무엇인가? 전승이다. 갈1:11-12,15 등에 의하면 그것을 바울은 강력히 부인한다. 부인하면서 복음이 계시라고 그런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미국의 경망스런 J.T.Sanders라는 사람은 “바울이 둘 중의 한 곳은 거짓말하고 있다”고 그런다. 이와 갈라디아에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정말 그런가?
그런데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고 둘다 깊은 의미가 있다. 바울은 복음을 계시 받았다. 바울의 복음은 그래서 계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 봅시다. 내책 “Original For Gospel” pp67-70에서 토론을 했다. 그리고 Ladd의 신약신학 영어판 pp386-394에도 토론이 되어 있고 C.Backer의 “바울”이라는 책 pp109-136에도 토론이 되어 있고 Goppelt의 책 “신약신학” 제 28장 3항에도 토론이 되어 있다.
(해결책)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복음의 진리를 인간이 설득해서 설득해서 깨달았는가? 무슨 예루살렘 사도들한테 가서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얻은 (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그의 아들로 계시하셨을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곧 복음의 진의로 터득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고 확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복음을 받았다고 그런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역사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즉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고 해석해서 기술함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역사 속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복음을 우리가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으로 서술함으로서만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의미로 복음은 전승의 대상이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죽고 부활했는가를 아는가?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예수의 죽음과 삶과 부활의 증인들) 즉 예수를 따라 다닌 사람들이 서술해주어야 우리가 아는 것이다. 바울도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예수의 옛 제자들로부터 전수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자기가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고전15:3-5까지 요약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을 설명하는 서술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은 고전 15:3-5까지의 요약대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서술함으로서만 선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전 15:3-5까지의 복음의 서술은 규범적인 것이다. 왜 그러냐면 바울이 11절에서 “모든 사도들이 다 똑같이 그 복음을 선포한다”고 그러다. 나나 저들이나 이렇게 선포하고 이렇게 너희들은 믿는다. 그러니까 모든 사도들이 공통으로 이와 같은 서술 방법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에 당도했을때(고전15:1)에 이 복음을 그대로 넘겨주었고 그 복음 안에 너희들이 지금 서 있다. 그 복음으로 너희들이 구원 받았다. 그래서 고전 15:3-5은 규범적인 복음 서술 형식이다. 이 형식을 바울이 전승으로 받았다는 말이다.
고전 15장의 바울의 관심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게 바울의 관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도드로가 모든 교회가 공통으로 선포하는 복음의 형식을 상기시키는 것이 주요했던 것이다. 고전 15:2에 보면 번역이 좀 재미가 없다. “내가 어떠한 말투로(πινι λογω ευηγγελισαμην υμιν) 상기 시키겠노라”는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자기가 선포하고 모든 사도들과 온 교회가 선포하고 믿는 복음의 문장 형식 하나 하나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전승의 전문언어를 써서 상기키시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에서는 중요한 것이 그게 아니고 복음의 내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만 덧입을 수 있다고 복음이 내용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유대주의자들은 복음보다 율법과 할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갈라디어사는 복음의 문자 형식이 중요한게 하니다. 즉 이것이 issue가 아니다. 이러한 문자 형식으로 전달되는 내용의 해석이 중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해석하는 복음의 진리가 누구한테 전승받아서 왜곡한 것이 아니라 계시로 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계시 이것은 곧 은혜,믿음으로만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래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받는게 아니고 믿음 더하기 율법이라는 복음을 받았는데 그 중에 율법을 떼어내버린 것이라고 유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구원의 사건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은혜 그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피상적으로 보면)보면 바울이 정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둘다 어울리밍 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복음은 계시이면서 전승이다. 또는 전승이면서 계시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진리는 전승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전승이 된다. 사실은 우리에게도 계시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문장 형식은 우리에게 전승된다. 그러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 또는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항상 계시와 전승이다. 바울이 갈 1:15이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받은 3년 뒤에 예루살렘에 가서 게바를 알고 지내러 갔다고 한다.
갈 1:18에 “ιστορησαι κηφαν” 라고 나온다. 이 말을 요새 학자들은 게바에게서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갔다고 확대 해석을 한다. 그래서 게바와 두 주간 같이 지내면서 예수에 관한 정보를 확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을 베드로에게 전승받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기술하는 문장 형식으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계시와 전승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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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하는 비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즉 지금이 이방이의 충많나 수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하는 때이고 그 때까지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심자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로 불러오는 때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고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계획을 바우이 어떻게 계시받았느냐? 지나번에 우리가 그 계시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때에 받았다.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 받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나타남의 상황 속에서 특히 이사야에 있어서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나타남의 상황속에서 선지자가 궁전회의,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여해서 그곳에서 자기가 선포해야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계시 받게 됨을 살펴보고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과 이사야의 소명의 체험과 견주어서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받은 계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를 성경적으로 확인받을 것인가? 그런것을 고찰해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들의 사도 부름받음과 이사야의 선지자로 부름 받음이 유사점을 하났기 살포 보았는데 그중에 아마 세개를 한 것 같다.
네번째로 하나님의 회심 가운데 궁정회의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듯이 바울도 αποκαλυτειν(계시한다)는 말과 αποκαλυψις 또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자기가 환상 속에서하나님 우편에 앚아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자기의 복음과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난번 첫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αποκαλυψις라는 언어 자체가 그리고 μυστηριον이라는 언어 자체가 그렇다.
궁정회의에서의 하나님의 דוס(계획)의 드러남을 말하기 때문에 또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들 중 히브리인으로 히브리인으로부터 난 히브리인이라고 바울은 소개한다. 이런 철저한 유대인의 바리새인 신학자가 어떻게 다메세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만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의 모든 신학적인 조류들의 공통적인 이해는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을 받고 지금이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때이다. 이스라엘이 다 회개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신학에서 랍비들은 토론이 많았ㄷ. 왜 이렇게 메시야가 안오고 지체를 하느냐? 모든 이스라엘이 아직 회개를 안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온을 높이고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러면 하나니의 영광의 빛이 시온에서 온세상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면 모든이방인들이 여호와가 진짜 ‘신’인 것을 알고 자기들이 지금까지 섬긴 신들이 전부 우상이며 목석에 불과한 것임을 알며 그것들을 다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또 자기들 속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모시고 시온에 몰려와서 진정한 신인 여호와를 경배하고 그의 구원에 참여한다. 좀 관대한 유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고 그러고 좀 편협하고 못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이방인들은 그렇게 해도 구원을 못받고 그렇게와도 이스라엘의 종 노릇이나 한다고 민족주의로 만들어 놓았다. 무슨 소리냐면 즉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면 메사야 시대가 와서 그들이 구원을 받고 그 연후에야 이방인들이 이런 식으로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온다. 이것은 선지서들에서부터 오는 이른바 이방인들의 종말론적인 순례 이바인들의 시온에로의 종말론적인 순례사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상이다. 이사어 2장 11장 등 미가 5장 2장 등 온갖 곳에 다있는 아주 중요한 사상이다.
이 사상에 근거해서 먼저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메시야의 구원을 받고 그 뒤에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인보다 먼저 구원받는다는 법은 없다. 유대신학에서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철저한 유대의 종말론에 지금가지 고착된 바리새인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이방인들이 사도로 나설수 있느냐? 가령 갈6장6장에 하나님게서 자기에게 아들을 계시했다고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다 회개했는가? 천만의 말씀. 유댕니들이 메시야의 덕을 힘입었는가? 천만의 말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전혀 믿지도 않고 그런데 그들은 제쳐두고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것을 살펴보아도 바울에게 있어서 롬11:25절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구원의 계획을 전혀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구원의 계획을 바울이 그때에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 받을 때에 동시에 계시 받았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있게 이방인들의 사도로 나설 수 있으며 뒤돌아 보지 않고 뒤돌아 보지 않고 예루살렘에 유대 사도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그곳에 보수(바리새)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훼방하고 반대를 해도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또 하나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사야가 그의 부를 때에 이스라엘이 심장을 완악하게 만든 하나님의 뜻을 받은데서 바울은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 같다. 사실에서 바울의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일이다. 복음을 선포하면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는데 이스라엘은 복음에 더 저항한다. 그래서 그들의 심장이 더 완악해진다. 이것이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선포가 이스라엘 심장을 완악하게 했듯이 바울의 복음선포도 이스라엘 심장을 더 완악하게 했다. 또 하나 로마서 11:25에 언제까지 이스라엘의 심장이 완악하게 되냐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이렇게 한시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심장을 완악하게 만든 것이 한시적이다.
이것은 이사야 6:11절과 연관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하고 그들의 눈을 무겁게 하고 귀가 얼게 해서 이사야의 말을 못깨닫고 이사야가 선포하면 선포 할수록 심장이 완악해져서 그들을 심판한다고 하니까 이사야가 묻는다.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심장이 완악하게 함은 항상 한시적이 언제까지니이까? 이질문은 시편에도 여러번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 가운데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게 부르짖는 문장 형식이 이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언제까지 입니까?에 대한 답이 이사야 6장에 주어졌는데 아마 바울도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한다. 너는 유대인간에는 더이상 복음을 선포하지 말고 이방인에게 가서 에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해라. 이렇게 명령했다면 구약에 항상 나오는 이 문장형식에 따라 언제까지니이까? 하고 물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라고 그러는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런 정도 바울의 비밀과 이사야서 6장의 계시와 유사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고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그 완악한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동안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빛이 되어 주의 구원이 땅끝가지 이르게 하여야 한다(사49:1-6). 바로 갈라디아서 1:5에 보면 바울이 사49:1절에 바로 이 ‘주의 종이 부름’을 자기의 부름에 적용하고 있다. 주의 종을 불러서 이방인의 빛이 되게 했듯이 그래서 주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한다는 예언이 자기의 사도직에로의 부름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바울이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해서 이방인의 빛이된다. 이방의 빛이 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다.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말이다. 빛이라는 말은 계시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 또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들어면 완성되어 이빙인의 완전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이스라엘의 완악함도 끝나고 글하여 그들도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긍극적 구원에 대한 소망도 바울은 어쩌면 이사야 6장 13절에서 얻었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이사야 6장 13절이 특히 탈굼을 보면 당시 어떻게 해석이 되냐면 하나님께서 벌하시고 그 뒤에 불로 다 태워버리고 그루터기에서 새로 나는 싹으로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시작한다 해서 탈굼을 보면 지금 우리 구약성경 이사야 6:13보다 훨씬 더 소망있게 훨씬 더 긍정적인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것에서 바울은 완악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이스라엘이 그것이 끝이 나고 그 끝 뒤에는 구원이 있을 것을 확신한 것 같다. 또 이사야 49:5,6절에서도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소망을 확인한 것 같다. 이제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바울의 선교의 여러 형태들의 중요한 바울 선교의 여러 형태들의 요점들을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왜 바울이 유대인 선교를 포기하고 이방인 선교자로 나섰나를 설명할 수 있다. 조금전 이야기 한 것데로 당시 바울에게 알려진 모든 유대 종말론은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유대의 대다수가 거의 구원을 안 받았는데 바울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로마서 11:25절에 확고한 구원사에 대한 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바울이 왜 그렇게 바삐 뛰어다니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하고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나를 설명할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바울은 자기에게 알려진 온 세계를 돌면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다.
세째로 바울과 유대 사도들과의 갈등을 설명할 수 있다. 유대 사도들은 유대교의 종말론에 집착을 한 것이다. 먼저 유대인들이 구원받고 그 나중에 이방인들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자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서 먼저 교회를 세운다. 갈라디아,고린도,빌립보에서 복음을 선포해서 교회를 세우는데 유대 사도들에게 있어서 보면 이게 아주 위태로운 일이다. 이 예루살렘에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나 이런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아마 야고보와 보수 바리새 사도들의 눈에는 이게 아주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 AD 46년 쯤에 예루살렘 교회 leadership이 베드로에게서 야고보로 넘어간다. 베드로가 그곳의 핍박으로 예루살렘을 떠나게 됨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지도력 아래 놓이게 되는데 그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과격히 보수적이 된다. 그래서 바리새적으로 되어간다. 이들이 입장에서 볼때 바울의 이방인들의 선교는 아주 위험하다.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이방인들이 저렇게 다닌다 말이다.
지금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시온이 영광받고 모든 이방인들이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 때까지 지금 현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이 먼저 유대인들이 되어야 할터인데 어떻게 되는가? 할례받고 율법을 수용함으로서 유대인들이 되어서 지금 현재 누릴 수 있는 현재의 구원에 동참해야 할 터인데 바울은 율법과 할레를 깡그리 무시하고 곧장 이방인들에게 먼저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그들의 교회를 세운다. 그러기에 아주 위험하다. 그러니까 이 교회에서 바울의 교회에 대표단을 갈라디아,고린도,빌립보에 보내가지고 너희들은 모든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너희들이 지금 구원받을 때가 아니다. 유대인들이 구원받을 때이다. 그런데 바울이 정통성이 없는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배운 일도 없고 우리와 관계가 없는 자가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 어느 근방에서 자기가 에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엉터리 복음을 선포해 가지고 지금 교회를 세우고 그러는데 여러분들이 이제라도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다 수용하고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이 되고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자로 구원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방교회 침투를 해가지고 문제를 일으켜서 바울은 그게 아니다. 율법을 수용하고 할례를 받는 행위는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를 부인하는 행위라하고 가령 갈라디아서,고린도 후서,빌립보서 에서 보는 격렬한 투쟁과 갈등을 하다.
그래서 유대 사도들 그러면 모순이 있다. 왜그러느냐? 바울은 베드로를 자기 편이라고 본다. 바울과 야고보 일당과의 갈등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다른 이해에서 설명이 된다.
네째로 어떤 바울의 선교의 형태가 설명이 되냐면 바울은 이방 선교를 하면서도 항상 한눈은 예루살렘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가 말하는 이른바 1차,2차,3차 여행 끝에서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기가 로마를 향해서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는 소망이 가득차서 고린도에서 로마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우선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에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지금 자기가 오랫동안 로마로 갈려고 했는데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등에서의 일에 의해서 지체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린도에서의 반란 때문에 바울이 오랫동안 지체했다. 그런데 드디어 고린도의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기쁜 마음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야말로 그렇게 바랫던 로마행 그리고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선교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면서도 그러면 빨리 뛰쳐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바랐으니까. 어디에 써 있는가? 롬1:15절에 다 써있다. 그러면 왜 예루사렘으로 돌아 가느냐? 돌아가는 것도 아주 위험한 여행이다. 자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여행이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끝에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한 기도를 부탁한다. 그 기도 제목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가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유대인들 손에서 구출되도록 이당시에는(AD 57년 쯤) 팔레스틴에서 열혀당 운동이 아주 고조된 때이다. 글서 66년에 드디어 반란전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열혈당 운동은 이방인들에게 적대감도 있었지만 특히 이방인과 교류하는 유대 백성들에 대한 그들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순결을 더럽힌다 해가지고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일차적인 표적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체포될 가능성이 많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잠복을 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 소에서 구출되도를 기도를 부탁한다.
또 하나의 기도제목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 교회들이 헌금을 받아주도록 바울은 이것도 불확실하다. 왜 그러냐면 예루살렘 교회도 야고보와 같이 바리새주의적 지도력 하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인정안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의 교회들이 한 헌금을 받아주지 않으면 이 말은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인정 안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인 세계에서 세운 교회는 큰 문제가 생긴다. 바로 그런일 때문에 바울이 헌금을 열심히 했으며 바울이 헌금을 걷은 것은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었다.
①하나는 바로 아까 이야기한 이방인들 종말론적인 순례이다. 신저지들의 vision에 의하면 종말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시온이 나타나면 영광의 빛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온세상에 퍼지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들을 가지고 온다고 그랬다. 하나님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 영광이 빛을 바울이 전파한다. 이사야 49:1-2절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전파한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어쨌는가? 데살로니가 전서 2:1-0절에 보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께로 왔다. 그 증거로 그들이 헌금을 해서 그들이 보화를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한다는 사도들의 예언에 따라 이 바울이 헌금을 모집한 것이다. 헌금을 모집해서 고린도를 해서 오는데 다시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간다. 각 교회에서 몇 명씩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간다. 왜 ? 그렇게 위험한 상황인데 유대인들이 얼씬만 해도 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아까 이야기한데로 이바인과 교류한다는 가장 큰 핍박의 표적이었는데 바울이 그렇게 위험하면 혼자 변장을 하고 슬쩍 갈 일이지 보란듯이 이방인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는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 이 옛 선지자의 약속(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선포해서 그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섬기기 위해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헌금을 열심히 거둔 것이다. 요약하면 바울의 헌금 목적이 옛 이방인들이 종말론적인 시온에 대한 순례를 완성(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②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제목적도 있었다. 어쩌면 구제목적이 기본적이니까 먼저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사도에 의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특별히 바울에게 그것을 부탁했다(갈2:10).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울도 내가 구제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제 다음에 옛선지자들이 비젼확인.
③예루살렘 교회(유대인들)와 이방인들 교회의 교제(fellowship)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님의 중요한 이유는 곧 이방인들 교회의 정당성 인정문제이다.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가 헌금을 안받는다하면 이제 이방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되는 것이다. 그런 바울은 구원사적인 연속성이 없이 자기가 자기 교회를 세운것 밖에 안돼 버린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로마 세계의 동북구(동반부)에서의 선교를 일단락 짓고 서반부로의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음에 있어서 여기에서의 선교를 결산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원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된 그리스도 교회로 인정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 목적이 있다. ④또 하나의 목적은 로마서 11:13-14절 거기에 “내가 내 이바인들의 사도됨은 영광스럽게 여긴다”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소리가 아니라 자랑한다는 말이다. 아주 자랑한다는 소리이다. 이것을 자랑한다. 목적이 무엇이라고 그러는가?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하게 해서라도 그중에 몇사람을 구원하고자 해서 그렇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자기 이방인 사도직을 유대인들에게 자랑을 하다. 그게 아니고 어떻게든지 유대인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야 되겠는데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로 하여금 시기나게 해서라도 구원시켜야 하는 것이 제일 순위이다. 바울이 대 헌금단을 조직해가지고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다. 이 헌금을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음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나타낸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들은 개 돼지들로서 전혀 구원 가능성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의해서 구원의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표시로 헌금을 가지고 왔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바울이 이방인 사도직을 자랑한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해서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그런 것이다. 유대인들의 대 대수가 언제 구원받는가? 충만한 수(이방인의)가 들어올 때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시키려고 하는데 그방법이 시기나 나게 하는 것이다. 바로 헌금에 이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이 헌금은 바울의 보시는 바와 같이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또는 바울의 선교전략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바울이 헌금을 거둔 것이다.
그런 바울의 선교 형태. 이런 것 그리고 바울이 왜 이방 선교 여행이 끝나면 꼭 예루살렘에 돌아왔느냐? 보는 바와 같다.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는 조건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사람이 이방인 사도 바울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도 바울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급하다. 하루빨리 지금 로마에서 마치고 스페인에 가서 거기서 복음 선포하고 빨리 북부 아프리카에 와서 거기서 복음을 선포하고 알렉산드리아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당시 자기에게 알려진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다. 바로 바울의 이와같은 구원사적인 이해가 바울의 이와 같은 선교형태를 낳게 된 것이다. 오는 우리에게도 바울의 선교전략이라든지 선교이해는 상당히 생소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선표한다는 소리는 각 개인에게 하나하나 다 복음선포해서 말귀 알아들었느냐? 해가지고 말귀 알아들었으면 교회 나와서 합습받고 세례받고 그래서 몇 년 공부 더해야 된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소위 복음화이다. 그런데 바울의 신약의 복음 선포를 보면 대개 큰 도로변에 큰 도시에 가서 거기 몇 사람 회당에 가서 두어번 소리 지르고 그래가지고 믿게 된 사람 몇 사람 해가지고 그러면 너희들끼리 예수 잘 믿어라 하고 딴 도시로 가서 또 회당에 가서 두어번 설교하고 몇 사람 모아 가지고 이제 복음이야 가르치고는 그러면 너희들끼리 잘 해봐. 너희들을 성령께 맡긴다. 그리고는 또 옮겨가고 이랬다. 방루이 언제 거기에 있는 사람에게 다 복음 선포했는가? 바울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에베소와 고린도이다. 그러나 에베소도 2년 정도 햇수로는 3년 정도 머물렀을 것이다. 고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외는 잠깐 머물정도였다. 그래놓고는 바울이 롬 15:10에서는 뭐라고 그러는가? 내가 이지역(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서는 복음을 편안히 전파했다고 한다. 편안히 전했다는 말은 복음을 꽉 채웠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더이상 일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다. 그러니까 내가 새로운 세계로 가야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바울에 이해에 있어서는 소위 오늘날 새로운 개념으로 말한다면 represantative Universalism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다. 그래서 한 사람은 개인이 아니고 그가 속한 족속의 대표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복음을 들었으면 그 사람에 속한 족속이 복음을 다 들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바울이 로마로해서 스페인으로 가서 그 다음은 북 아프리카로 해서 복음을 선포할 모든 굼이 좌절되었을 때 바울은 새롭게 깨닫는다. 하나님의 계획이 자기로 하여금 온 세상에 빙 돌게 한 것이 아니고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받았다. 모든 이방인들의 대표가 누구인가? 로마의 가이사이다. 바울에게 알려진 모든 통치자가 가이사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헌금단을 데리고 왔다. 바울이 우려한 대로 거기서 체포되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이런 온 세계를 다 돌면서 실제로 자기가 복음을 선포할 꿈이 좌절되니까 가이사에게 상소를 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사를 보면 가이사에게 상소를 않했으면 Felix 가 풀어줄 수있었는데 로마 시민으로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로마의 최고시민 가이사 앞에서 바울은 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그러면 왜 석방될 수 있었는데 바울이 쉽게 말하면 뇌물 몇푼 집어주었으면 석방될 수 있는 것으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석방은 안받고 가이사에게 상소하느냐? 그것은 가이사와의 재판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가이사는 이방인들의 왕으로서 세상의 주라고 주장한다. 세상의 주인 가이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재판의 과정을 통해서 증거하려고 한다. 그러면 가이사가 세상의 주,왕으로서 이방인들의 대포자, 즉 이방인의 대표 가이사에게 선포함으로 바울은 모든 이방인에게 선포한 셈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해서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이것이 일리가 있는 것이 가이사 콘스탄틴 대제 한 사람이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여서 로마제국 전체가 기독교화 한것이다.
바울이 이와같이 represantative Universalism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령 고리도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면 아가야 지방 전체에 복음 선포한 것이다. 이런 식을 생각했을 것이다.그러니까 바울이 자기의 모든 이방인들의 복음 선포로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인들이 완악함이 풀리고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또 로마서 11:2절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받아서 어떻게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선포를 수행했는가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첫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바울의 모든 신학은 이와 같은 선교사업의 수행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늘 그의 바울신학의 선지자를 기억하여 공부해야 함.
*바울의 복음*
①계시와 전승으로서의 복음.
복음이란 말 자체가 아주 중요한 말이다. ευαγγελιον말 자체가 아주 신학적인 어휘이다.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소식이 복음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느냐? 이것이 최근에 많은 토론의 대상이다. 편리하게 좀 나이먹은 아티클이지만 G.Friederich의 EDNT사전에 나오는 ευαγγελιον이라는 아티클을 읽어보든가? 아니면 좀더 깊이연구하고 싶으면 P.Stahlmacher의 “Das Plan Evangelum”이라는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복음이라는 말이 생성되었는가? 이것은 어디서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되냐면 예수의 하나니 나라 선포를 복음이라고 그런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O.TT. Betz가 우리에게 누차 강조했듯이 사52:7에 “거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자 또는 샬롬 평화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도다” 하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그복음의 내용은 무엇이냐면 너희 하나님이 다스리신다(사52:7)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심 이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가령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 왜 하나님이 다스림이 기쁜 소식이냐면 그것이 곧 구원의 의미이다. 샬롬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총조를 사단이 차지하고 곧 하나님의 주권,하나님 왕으로서 다스림을 사단이 찬탈 하여서 악과 고난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 사단의 주권을 하나님께서 쳐서 없애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사단의 악과 고난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서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속으로 인간이 들어오게 되니 곧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한다(샬롬).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그게) 복음이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활동을 복음 선포라 할때 그것은 사42:7과 53장 등에서 왔다. 그런데 바울의 사도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하나님 나라가 복음이다(예수에게 있어서) 그것으 이사야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라 한다.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느냐? 즉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연결하는 문제 이것이 신약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주제이다. 또는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마,막,눅,요)들은아주 유대 문학적으로나 헬라 문학적으로나 독특한 장르(문체) 문학형식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어떻게 보면 전기같지만 전기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전기 같다(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기 같다). 그러나 그게 전기와 다른 것은 예수의 생육과 가르침과 행적 이런 것을 그냥 무슨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듯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케리그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결단하는 요구를 우리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보통 전기와는 다르다. 이러한 독특한 문학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문학의 이름을 복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 이때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님 나라와는 어떻게 관계가 있느냐? 이런 여러 문제를 제시해 준다. 그래서 이 복음이라는 낱말 자체는 아주 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사야는 복음을 히브리어로 הרושׁב라고 한다. 그리고 복음 선포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רשׁב이다(피엘형). 그래서 이러한데서 나오는 것에 근거해서 전혀 새로운 기독교적인 용어를 개발했는데 그게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그것을 공부하면 우리가 초대 교회의 신앙의 새로움과 깊은 의미를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상당히 좋은 연구 과제이다.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가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복음을 어떻게 받았느냐?
1)바울은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갈1:11,16)
갈1:11-12
자기는 이것(복음)을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받는다는 것(παραλαμβνειν)은 히브리어의 לכק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승을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한 랍비가 그의 스승 랍비로부터 가르침을 이어받는다는 전문언어이다. 그렇게 자기는 복음을 한 랍비가 랍비의 선배,스승랍비로부터 전수받듯이 인간을 통해서 전수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고, 인간을 통해서 자기에게 전수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왔다. 정반대이다. 전승을 전수받는 것이다. 이것(παραλαμβνειν)은 전적으로 계시받아서 왔다고 말한다. 아마 갈라디아의 교회에서 그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 아마 이렇게 주장한 것 같다. 바울은 원래 예루살렘 사도드로부터 복음을 전수 받았다. 이방인들에게 잘 먹혀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율법과 할례등의 요구를 그 복음으로부터 떼어 내 버림으로서 그복음을 인간적인 복음으로 만들고 왜곡했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바울한테 받은 복음은 인간들에게 잘 먹혀들어가기 위해서 인간들이 율법지키고 할례 받는 이 어려움을 완화한 싸구려 복음이다. 왜곡된 복음이다. 그러니까 그런 복음에 의한 신앙은 잘못된 것이고 그것으로서는 구원이 충분하지 못하니까 지금이라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바울이 아예 원천적인 전제부터 부정을 하는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무슨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어떤 인간으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은 일이 없다. 오로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하므로 16절 그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를 통해서 내가 복음을 받은 것이지 내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인간들로부터 전수받았다고 나보고 그 복음을 왜곡했다고 내가 전수받은 일도 없다. 자기가 갈라디아서 선포한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만 그리고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느니 복음을 자기가 누구한테 전수받아 가지고 그것을 왜곡해서 인간에게 잘 먹혀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왜곡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고스란히 계시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주 그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문제는 고전 15:1-11에까지 보면 갈 1:11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한다. 나에 의해 선포된 복음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배운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것이라고 아주 엄숙하게 선포했다. 고전 15:1도 똑같은 문장 형식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알게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복음은” 여기까지는 갈1:11과 똑같다. 다만 갈 1:11은 수동형에 의해 “나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이라고 했고 고전 15:1은 능동형으로 “내가 선포한 복음” 이것만 다르지 내용형식은 똑같다. 그 다음 완전히 180도 다르다. 나도 그것을 받은 것이고 여러분들이 받은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이 선 것이다. 그런데 구절에 “내가 받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전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 자기가 복음을 받았다. 그 다음에 쓰는 말이 그 복음을 바울이 παραδιδοναν 전승했다. 이것은 παραλαμβνειν 전승받았다. 이것(παραδιδονανα)은 전승했다. 이 두개가 랍비 유대교에서 한 랍비가 그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승해주고 그 제자는 그 가르침을 전승받고 하는 전문언어이다. 바울은고전 15:1-3에서는 이와 같은 랍비들간의 전수하고 전수 받는 전문언어를 동원해서 자기보다 먼저 된 사도들로부터 전승받았다고 그런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누구에게 그것은 똑같은 방식으로 전수했는가?고린도에 전수했고 그러니 큰 문제가 발생했다. 고전 15에서는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승 받았다. 그리고 복음을 고전 11:1-3까지에서 복음은 무엇인가? 전승이다. 갈1:11-12,15 등에 의하면 그것을 바울은 강력히 부인한다. 부인하면서 복음이 계시라고 그런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미국의 경망스런 J.T.Sanders라는 사람은 “바울이 둘 중의 한 곳은 거짓말하고 있다”고 그런다. 이와 갈라디아에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정말 그런가?
그런데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고 둘다 깊은 의미가 있다. 바울은 복음을 계시 받았다. 바울의 복음은 그래서 계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 봅시다. 내책 “Original For Gospel” pp67-70에서 토론을 했다. 그리고 Ladd의 신약신학 영어판 pp386-394에도 토론이 되어 있고 C.Backer의 “바울”이라는 책 pp109-136에도 토론이 되어 있고 Goppelt의 책 “신약신학” 제 28장 3항에도 토론이 되어 있다.
(해결책)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복음의 진리를 인간이 설득해서 설득해서 깨달았는가? 무슨 예루살렘 사도들한테 가서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얻은 (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그의 아들로 계시하셨을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곧 복음의 진의로 터득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고 확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복음을 받았다고 그런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역사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즉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고 해석해서 기술함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역사 속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복음을 우리가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으로 서술함으로서만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의미로 복음은 전승의 대상이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죽고 부활했는가를 아는가?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예수의 죽음과 삶과 부활의 증인들) 즉 예수를 따라 다닌 사람들이 서술해주어야 우리가 아는 것이다. 바울도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예수의 옛 제자들로부터 전수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자기가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고전15:3-5까지 요약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을 설명하는 서술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은 고전 15:3-5까지의 요약대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서술함으로서만 선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전 15:3-5까지의 복음의 서술은 규범적인 것이다. 왜 그러냐면 바울이 11절에서 “모든 사도들이 다 똑같이 그 복음을 선포한다”고 그러다. 나나 저들이나 이렇게 선포하고 이렇게 너희들은 믿는다. 그러니까 모든 사도들이 공통으로 이와 같은 서술 방법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에 당도했을때(고전15:1)에 이 복음을 그대로 넘겨주었고 그 복음 안에 너희들이 지금 서 있다. 그 복음으로 너희들이 구원 받았다. 그래서 고전 15:3-5은 규범적인 복음 서술 형식이다. 이 형식을 바울이 전승으로 받았다는 말이다.
고전 15장의 바울의 관심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게 바울의 관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도드로가 모든 교회가 공통으로 선포하는 복음의 형식을 상기시키는 것이 주요했던 것이다. 고전 15:2에 보면 번역이 좀 재미가 없다. “내가 어떠한 말투로(πινι λογω ευηγγελισαμην υμιν) 상기 시키겠노라”는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자기가 선포하고 모든 사도들과 온 교회가 선포하고 믿는 복음의 문장 형식 하나 하나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전승의 전문언어를 써서 상기키시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에서는 중요한 것이 그게 아니고 복음의 내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만 덧입을 수 있다고 복음이 내용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유대주의자들은 복음보다 율법과 할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갈라디어사는 복음의 문자 형식이 중요한게 하니다. 즉 이것이 issue가 아니다. 이러한 문자 형식으로 전달되는 내용의 해석이 중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해석하는 복음의 진리가 누구한테 전승받아서 왜곡한 것이 아니라 계시로 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계시 이것은 곧 은혜,믿음으로만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래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받는게 아니고 믿음 더하기 율법이라는 복음을 받았는데 그 중에 율법을 떼어내버린 것이라고 유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구원의 사건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은혜 그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피상적으로 보면)보면 바울이 정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둘다 어울리밍 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복음은 계시이면서 전승이다. 또는 전승이면서 계시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진리는 전승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전승이 된다. 사실은 우리에게도 계시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문장 형식은 우리에게 전승된다. 그러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 또는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항상 계시와 전승이다. 바울이 갈 1:15이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받은 3년 뒤에 예루살렘에 가서 게바를 알고 지내러 갔다고 한다.
갈 1:18에 “ιστορησαι κηφαν” 라고 나온다. 이 말을 요새 학자들은 게바에게서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갔다고 확대 해석을 한다. 그래서 게바와 두 주간 같이 지내면서 예수에 관한 정보를 확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을 베드로에게 전승받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기술하는 문장 형식으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계시와 전승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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