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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제12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8.

바울신학 12강

 

지금까지 ‘예수가 주다’는 신앙고백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살핌.

 

이 신앙고백의 의미 살핌 אר אנרמ 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기도이다. 주여 오셔서 빨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소서.

 

동시에 이 기도는 Didache 10:6(1세기의 책,12사도들이 가르침이라는)에서 예배 특히 성만찬을 중심으로 한 예배에서의 기도이다. 마18:20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약속(유대인에게 하나의 회당이 하나의 예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남자 10명이 있어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집단의 최소단위 두세 사람이면 예배공동체가 됨.)

 

그 약속에 근거해서 주의이름으로 모인 우리에게 특히 주의 만찬에서 fellowship을 기념하는 그 모임에 부활하셔서 나타나셔서 그 교제를 갱신하셨듯이 지금 우리 가운데 주로 오셔서 만찬 테이블에 주석을 차지하소서. 그래서 계 3:20에 쓰여진 그 말씀을 체험하게 하소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배때에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주와 더불어 나누는 만찬을 성만찬이라 주의 만찬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중요한 의미 하나를 발견케 된다. 예배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교제, 잔치의 현재적 실현이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현재적 선취.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잔치라고 즐겨 표현,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 종말에 참여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미리 체험되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때 오시는 주는 종말에 재림할 주의 또는 종말에 주로서 재림함의 선취이다. 즉 예배때 주의 오심은 종말의 현재적 선취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에 파루시아 하시는데 지금 벌써 현재 예배때 파루시아 한다. 우리와 함께 임한다. 이래서 우리 주 예수의 주권을 지금 예배 통해 체험할 수있는데 예배 통해 체험하는 그의 주권이 오실 주에 대한 기다림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볼때 마라나타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①주라는 칭호는 부활하시고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이다.

 

②이 주라는 칭호가 쓰는 두가지 context 상황은 예배와 종말론적인 소망이다. 이제 보겠지만 하나 더 있는데 예수의 현재적인 통치. ‘예수가 주이다’는 신앙고백의 의미 두번째.

 

(2)이 신앙고백과 더불어 시110:1의 중요성

 

신약성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성경말씀이다. (롬8:34/고전15:25/골3:1/엡1:20/히1:3/8:1/10:21/벧전 3:22/행2:34/5:31/7:55/계3:21/마22:44,46 등)

 

그런데 예수가 이 구절을 어떻게 인용했나? 메시야가 왜 다윗의 아들이냐?

 

다윗이 스스로 그 시에거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메시야가 다윗보다 더 높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 주되심. 시110:1 ‘주께서(처음 주-여호화) 야웨 하나님께서 나의 주 메시야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를 나의발 앞에 굴복시킬 때가지 나의 우편에 앉으라’ 가지 대권자가 되라.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대권을 휘두르는 자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높이심을 말함.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바로 이와같은 에수의 시110:1의 사용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높이심을 이 구절의 성취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킴-자기 우편에 앉게 하셔서(대권을 위임하는 행위사건)-그리하여 그가 주가 되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자가 되었다.

 

예수의 부활에서 그의 제자들은 그가 절대적 신적 권위 주장했음이 하나님에 의해 옳다고 인정되었음을 보고 또 그들의 רמ 마레,주가 영광 가운데 높임받은 것을 보고 시 110:1을 예수께 적용하여 그가 하나님의 우편에 하나님의 대권 위임받은 자로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 행사 하는 자로 높임받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예수가 주라는 칭호는 시110:1의 의미를 띠게 된다. 주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자이다.(부활해서)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분이라는 의미로 빌2:9/딤전3:16같은 신앙고백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빌2:6-11의 그리스도 찬송시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고 즉 하나님의 이름 야웨(הוהי-ינרא,κυριος 라고 부름)를 예수에게 주었다. 자기 우편에 앉혀 대권 위임했으니까 이름을 준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이나 온 우주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했다. 고백하게 했다. 그래서 예수가 만유 위에 군림하는 주가 되었다. 심지어 야웨의 이름을 갖는 분이 되었다. 딤전 3:16도 비슷한 뜻.

 

이래서 초대 교회 교인들은 구약성경의 야웨에 대한 구절을 예수에게 적용했다. 신약성경에서. 그래서 구약성경의 야웨에 대한 구절들을 신약성경에서 인용할 때 거의 예수에 대한 말씀으로 인용한다(예외-몇번 하나님 아버지를 두고 말할 때). 그래서 예수가 심지어 하나님에게만 드려져야할 예배를 받는 분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만유가 그에게 무릅을 꿇고 모든 사람들의 입술이 그를 주로 고백하게 했다.

 

(3)예수의 주권의 기간

 

예수의 주권은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시작하고 즉 그의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로의 높임으로 시작하고 그의 재림으로 더불어 끝난다. 고전 15:24에 바울은 그의 재림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모든 힘을 다 때려 부수고 그리고 나서 즉 이 세상의 하나님의 통치에 반발하는 세력을 다 평정하고 하나님께 그의 왕권을 아버지께 돌려준다. 이리하여 하나님이 만유 위에 군림하시는 분이되게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마땅히 이 세상의 통치자, 주이시다. 그런데 이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한 사단의 수중에 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일군으로 써서 사단의 통치를 완전히 없애고 뒤집어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회복하는 자로 모든 사단의 권세를 쳐부수고 언제? 그의 재림 때,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결정적 승리를 했고 그리고 그의 재림과 더불어 그 나머지 잔여 세력, 최후 발악하는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고(이 그림=사단의 세력을 자기 발등상으로 만듬. 발로 딛고 서는 상으로 만듬,완전히 발아래 굴복시킴) 그러면 이 세상이 하나님이 대한 반란 끝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만유위에 군림하시도록 통치권을 돌려드리면 최초의 샬롬이 회복된다. 그렇게 되어 하나님이 이제 만유 위에 통치하게 된다.

 

예수님의 주권은 그의 부활과 승천에서 시작하여 그가 이 세상의 모든 반란세력을 다 집압해서 하나님께 왕권을 돌릴 때까지의 기간이다. 그러니가 예수의 주권기간은 현재부터 그의 재림때까지이고 그의 재림 이후 기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예수의 그 사역을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실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대권을 대신 행사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파루시아 때에 세상의 반란 세력이 다 진압되어서 하나님께 왕권이 돌려짐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의 통치하심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그래서 예수의 통치,주권 기간은 그의 승천과 그의 재림 사이의 현재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전 15:24,25. 신약성경에서 시 110:1을 인용할 대 우리는 신약성경의 독특한 ‘벌써와 아직도’의 종말론적 긴장을 항상 엿볼 수 있다. 시 110:1을 예수의 승천에 적용할 때 예수의 주권에 적용할 때 예수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벌써 이 모든 사단의 세력을 굴복시키고 하늘의 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벌써 그의 주권을 행사한다.그러나 아직도 이들이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악과 고난이 흉흉하고 예수의 주권이 아직도 거스려진다. 그의 파루시아 재림때에 그가 드디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굴복시킬 것이다.

 

그래서 벌써 dimension을 παρουσια 때 완성될 정복과 연결해서 말하고자 할대에는 사단을 꽁꽁 묶었다든지 등뼈를 분질렀다든지 등의 그림을 쓸 수밖에 없다.

 

이 그리스도의 주권의 기간 즉 그의 승천과 재림의 기간이 바로 교회의 기간이다. 또 그 기간은 성령의 역사의 기간이다. 성령이 구원의 첫 열매 απαρχη 롬8:24, 보증금αρραβυν 고후 1:23/5:5엡1:13 곧 성령이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첫열매이고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우리에게 확실히 보장된다고 하는 보증금 역할을 함으로써 벌써와 아직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1)그리스도의 두 주권의 영역

 

이것은 두개의 동심원으로 나타낼 수있다.

 

빌2:9-11 까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벌써 시110:1의 성취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만유위에 주로 군림한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한다. 벌써 온 세상 위에 주로 군림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 세상에서는 사단이 주행세를 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골4:3) 예수의 주되심을 모르고 그를 주로 고백하지 않고 도리어 마치 사단이 주인인양 사단의 주권아래서 산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으로 예수의 주되심을 깨닫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이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 사단이 진짜 주가 아니라 예수가 진짜 주임을 깨닫고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통치영역에서 벗어나거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으로 넘어온 자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됨, 곧 구원받음은 주권의 바뀜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곧 사단의 악과 고난으로 흑암으로 다스리는 흑암의 주권,권세의 영역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주권의 영역으로 옮겼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세례 곧 세상의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여역 교회로 들어오는 의식인 세례의식이 사단을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사단을 주로 고백하던 옛자아가 죽어버리고 장사됨을 상징해서 물로 빠지고 예수의 주권으로 새롭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을 상징해서 물에서 씻긴 몸으로 나오는 극을 한 것이다. 롬10:8 “너희가 입술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켰다고 믿으면 구원 얻는다” 이것이 세례의식. 세례때 고백하는 믿음이다. 그 세례 때 바로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 그 고백전에 사단을 부인하는 의식이 있다.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서 악과 고난과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다의 영역에서 의와 사랑으로 생명으로 다스리는 예수의 주권에의 영역으로 transference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교회와 세상이 어떻게 다르냐? 둘다 예수님의 주권아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이고 세상은 예수가 진짜 주이나 그의 주권을 모르거나 부인하고 대신 사단의 주권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사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주권은 교회를 중심으로 행사되며 교회에서 더 강도높게 나타난다. 왜? 교회들이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니까 이 세상에서는 항상 변증법적으로 행사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예수의 주권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사단의 주권을 따른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 만유의 주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주권에 거스리고 사단의 주권에 순종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나 예수가 불순종을 이용해서라도 자기 주권자적인 뜻을 성취해 나가는 영역이 세상이다. 변증법적으로는 그러나 교회에서는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수의 주권이 더 강도있게 행사된다. 더 분명하게 행사된다.

 

그러니까 교회의 멤버들은 벌써 에수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므로써 그의 주권의 축복을 누리나 세상 사람들은 그의 주권을 무시하거나 무지하거나 불순종하는데 사단을 도리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순종하는데 예수가 사단을 이긴 주이기 때문에 사단에 대한 순종 곧 불순종을 예수가 이용해서라도 자기의 주권자의 뜻을 이룬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듯에 의식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뜻에 반해서 순종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주권의 축복을 직접 누리지 못한다. 이런 세상과 교회의 관계 예수의 주권의 영역 세상과 교회가 이렇게 다르다. 그러나 교회도 세상 장으로 말하면 이렇게 두개가 있는데 시간적으로 말하면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 속에 있다. 그래서 교회자체도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속에 있다. 그래서 교회 자체도 예수의 주권을 알고 그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지만 그래서 예수의 주권이 벌써 행사되고 나타나고 그의 주권의 축복,구원이 벌서 나타나지만 아직도 완성이 안된 상태에서 그래서 교회에서도 아직도 예수 주권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없고 그의 구원의 축복이 완전히 체험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세상과 교회가 비슷한 점이 있다. 교회의 예수 주권에 대한 변증법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럼 정확히 교회와 세상의 다른 점을 어떻게 나타내야 되느냐? 정도의 차이냐? ①알고 모름-예수의 주권에 대한②예수 주권에 대한 의식적 순종,무의식적 순종. 그렇기에③예수 주권의 축복을 누림,못누림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자체도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면에서는 세상과 별 차이가 없게 된다. 그래서 최근 신학에서는 교회가 세상 차이를 자꾸 약화시키는 그런 운동이 자꾸 벌어진다. 특히 카톨릭 신학에서 K.Rahner, 한스 퀀 같은 사람들의 신학적인 마더를 써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우주적인 그리스도,그리스도가 교회의 그리스도,주만이 아니고 온 세상의 구원자이고 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시고 주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만 그의 주권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벌서 세상은 그의 주권아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자들도 벌써 그의 주권 아래 있다는 의미로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개념을 발달시킨다. 그래서 교회밖 타종교의 사람들도 우주의 주로 이미 군림하시는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자들로서 벌써 그의 심판과 그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도 모르지만 그들은 벌써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하면 그것은 그들의 종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는 모르지만 그들은 벌써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와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하면 그것은 그들의 종교를 통해 역사하시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진정시켜 불교들에게는 불교를 통해서 희두교도들에게는 희두교를 통해서 이 예수의 주권이 행사되고 그 주권에 대한 순종이 일어나고 그런 것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 종교간의 대화이다. 그래서 대화의 신학이 발달한 것 dialogue 기독교, 불교, 흰두교도들이 다 같이 앉아서 어떻게 흰두교도들은 희두교의 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나타나고 그것에 순종하는가?를 봐야 된다 해서 대화의 신학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이론들이 어디서 틀렸냐하면 예수의 주권과 사단의 주권(이 세상이 예수의 주권 아래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주권 아래 놓였다) 에 거부하고 사단의 주권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순종하고 그의 불순종을 이용해서라도 자기의 주권을 성취하는 그런 의미로만 예수가 그들의 뜻에 반해서 그의 주권에 순종케 한다는 그 사실을 그러니까 변증법적 긴장을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함. 그래서 사단의 세력의 실제를 부인하고 무시하는 그런 결과를 갖는다. 그래서 이런 신학을 그리스도 일원론식의 신학이라 한다. 마치 이 세상에 작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주권만 작용하는 것처럼 사실 사단의 세력도 막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이 세상이 사단의 주권아래 있다. 사실은 예수와 사단이 서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자기 주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각축을 벌이는 장이 이 세상이고 세상의 각사람이다. 그런데 그것을 망각하고 마치 그리스도만 주로 군림하는 것같이 한다. παρουσια 때 그럴 것이지만 지금 but not yet의 상태 속에서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와 사단의 주권의 각축장이고 그래서 세상 사람의 예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은 변증법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사단을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의결단,그리고 그러한 결단이 세례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인 교회의 성원이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익명의 그리스도인 있을 수 없다. 성립안된다. 이런 개념이 있으면 선교가 개종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종교내에서 이미 벌써 다 그리스도인이다. 불교도는 불교에서 흰두교는 흰두교에서 선교는 오직 대화로만 존재한다. 대화로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종교의 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가 서로 확인하는 것으로만 존재하다가 이런 선교신학이 한세대를 풍미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 신약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결단,회개와 사단을 부인하는 일 이제까지 사단을 순종했던 삶을 청산하는 일, 거기서 돌이켜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 신앙고백이 있고 그것에 근거한 세례라는 극화를 통해서 세상에서 교회에 들어오는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주권의 변화가 일어나는 일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을 개종이라고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모든 민족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에로 부른다. 롬1:5 바울이 모든 이방인들을,모든 민족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으로 불러오도록 명령받았다고 사도직을 받았다고 했다.

 

(5)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됨의 표증이다.

 

롬10:9/빌2:9/고전12:3/롬10:9 “네가 네입술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켰다고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또 고전 12:3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면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고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하면서 예수가 저주받으 자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자는 성령을 받은 자이다. 곧 그리스도인,구원받은 자이다. 오순절신학 영향,방언,환상등 난리해야 성령받았다 한다. 신비한 이상한 체험 해야 한다고 하나 성령받은 증거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함에 있다. 예수가 저주받은 자이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신21:23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거짓 선지자이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사형감. 그래서 ‘네가 그리스도가 저주받았다고 해라’ 강요했던 것 같다. 바울 스스로 핍박자로서 행할 때에 예수가 저주받은자라고 선언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했던 것 같다. 또 헬라로마 관원들은 그리스도교들이 붙잡혀오면 예수가 저주받은자이다. 로마 황제에게 대항한 조인이었기에 총독 빌라도가 십자가에 사형집행한 자라고 인정하면 무죄석방해주마고 예수가 저주받은 자라고 강요했던 것 같다. 그런 핍박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주라고 신앙고백해야 된다. 그런데 아마 항상 어느 시대에서나 있듯이 이런 극단의 핍박의 상황에서 그 핍박을 모면하기 위해서 예수가 자저븓을 자이다고 순순히 핍박자의 요구를 들어주어 놓고는 나중에 핍박이 지나간 후에 교회에 모여서 아 그때 성령의 인도함으로 살짝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있었던 모양. 바울이 성령에 의해서는 그런말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령이 그 순간 그렇게 말하게 해서 내가 말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가 주이다고 말하게 한다.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는 예수의 주권으로 들어가서 구원받고서 한 고백이고 교회의 멤버가 된 고백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됨의 표증이다. 이것이 핍박의 상황에서 test가 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군림한 예수에게 스스로를 종으로 그에게 속하고 매인바됨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그에게 그의 주권에 순종하겠다는 것을 서약한 행위이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주 에수와 종된 우리의 법적인 관계를 성립시키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주로 예배와 윤리의 상황에 적용된다. 바울은 원래 핍박자로 시작했기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놀림받은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그의 종으로 인정하는 체험의 극적인 성격 때문에 자신을 주에 대해서 말할 때 상당히 독특한 강도를갖고 말한다. 가령 빌3:12에 보면 바울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징집되었다(우리말:붙잡힌바 되었다). 그래서 그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δουλος 종이 되었다.

 

롬1:1/고후4:5/갈1:10/빌1:1 등 특히 빌3:8의 언어를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가장 고상한 가치를 두고 있다. 바울이 보통 편지에서 ‘우리’라고 자기를 두고 말할때는 문체적인 복수를 쓴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나’란 말이 자주 나온다. 아주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면서 자기 신앙의 절실해진 상황에서 그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절실함을 잘 나타낸 말이다. ‘나의 주’독특한 개인적인 dimenson 은 잘 나타낸다.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 아주 personal 한 주 예수와의 관계의 강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가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됨의 표증이다.

 

(6)주라는 칭호는 윤리적인 가르침에 많이 쓰인다.

 

예수가 주라고 신앙고백은 우리와 주종의 관계를 법적인 관계로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주권에 완전히 순종해야 되는 종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윤리적인 context에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바울은 주라는 칭호를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또는 교회 내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 가장 많이 쓴다. 이 맥락에서 우리들은 바울이 흔히 쓰는 ‘주 안에서’라는 문장 형식을 이해해야 된다.

 

가령 빌 4:2 유두게하고 순두게가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열렬한 집사였던 것 같다. 이들을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가 조금 분열의 위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한 마음을 갖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주안에서’이런 윤리적인 가르침,그리고 또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주라는 칭호를 쓰는데 그때 쓰는 문장형식이 주안에서이다. 이 말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하는 그의 주권의 영역에 든 사람들로서 살라는 말이다 그들이 왜 다투냐? 자기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둘다 예수의 주권 아래 있는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주권의 영역 속에 그의 주권에 절대적으로 순종애햐 하는 종으로 존재한다. 그러헥 생각했을 때는 그들이 자기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 위에 같은 주이신 예수의 주권자적인 뜻을 추구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주 안에서, 예수를 수로 고백하는 자들로서, 그의 주권의 영역에 있는 그의 종들로서 한 마음을 품으라. 그러니까 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결정과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분이고 그분의 주권자적인 뜻에 따라 행동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인 가르침의 상황에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의 가르침 상황에 주라는 칭호를 가장 많이 쓴다. (자세히 알려면 W.Kramer의 책 참조.자세히 쓰여 있음)

 

(7)주라는 칭호는 그러나 확신과 위로를 줄때 쓰이는 칭호이다.

 

교회와 교회의 성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의 세력을 꺽고 승리하신 주 예수 에게 속하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다만 확신을 갖고 기쁨을 갖어야 한다. 그래서 주는 우리에게 순종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축복하고 안위하고 승리케하고 구원하시는 분이다. 이런 context 속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라는 말을 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확신과 위안을 주시는 분 사단의 세력을 꺽고 승리하신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란는 뜻을 나타낼 때는 ‘주안에서’라는 말을 쓴다. 그래서 빌 4:4 “주안에서 기뻐하라” 이 세상안에서는 기뻐할 것이 하나도 없다 .빌리보 교인들도 바울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어떠면 사형선교 받을 가능성이 많은 상태이다. 빌리보 교인들은 가난에 찌들은 상태에서 외부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다. 내부적 분열이 있고 그런데 주안에 기뻐하라. 주가 어째서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이 모든 악과 고난을 갖다주는 사단의 세력을 꺽고 이기어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줄 그런 능력 사랑을 가지신 분을 우리가 주로 모시고 있다. 그 주의 권세 아래서 우리의 십자가 우리의 구원이 확신이므로 우리가 위안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주 안에서’라는 문장형식이 한편으로는 윤리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의 주권에 순종한 자들이라는 말, 또 한편은 사단의 세력을 꺾고 이기신 주에 속한 자들로서 그의 주의 승리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라는 말. 그의 구원에 참여하는 자들로서라는 말. 이렇게 두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혀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덧입은자들로서(그리스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쓰임) 그 죽음과 부활에 구원의 사건을 덧입은 자로서라는 말이다.

 

(8)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예수의 신성을 함축하고 있다.

 

빌2:9-11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혀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 야웨 이름 주셨다. 그래서 예수, 야웨,주라는 이름 가졌다. 그러니까 예수가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이름에 주 모든 무릎을 꿇게 했다는 것은 시 45:23의 인용이다. 사 45:23을 보면 야웨 이름 외에 어떤 다른 이름에도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는 것. 예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전통적으로 예배하는 자세가 무릎 꿇는 것) 야웨외에 어떤 신에게도 그런데 이 구절을 이제 예수에게 적용한다. 왜? 예수가 야웨란 이름을 받았으므로 예수가 사 45:23. 야웸나 배타적 예배를 받을 수있는 분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예수의 신성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함축한다. 이렇게 해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성에 높임받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높임받았음을 함축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 이름을 주시고 자기의 대권을 위임하셨다는 확신 가운데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서 야웨에 관한 말씀들을 다 예수에게로 적용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가 히1:10 이하에 나타난다. 주로 이 우주의 창조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와 분명한 구분을 초대교인들은 잊지 않았다. 고전 8:6 에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아버지-εκ 만물이 그로부터 났고 그가 창조의 기원,창조주 -εις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해서 존재. 만물의 존재목표가 그에게 영광돌림이다.

 

그 다음에 I-‘주’-δια 만물이 그를 통해서 났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origin goal 이고 ㅇ예수는 하나님 아버지가 쓰는 수단 일꾼이다. 이렇게 구분했다. 하나님의 아버지와 주를 그러면서 동시에 여기서 예수님의 선재를 천명한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되도록 창조되었은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되도록 창조되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그러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일군 노릇을 했다. 창조의 수단 노릇,그러니까 창조전에 있었다 .선재설. 예수가 주이다는 신앙고백은 그가 선재함을 내포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함축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와 정확히 구분하는 이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원래 기독론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고백에서 이럴 때 이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이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으로 발달한다.

 

하나님의 이름인 주가 예수에게 적용됨으로 말미암이 구약성경에서의 하나님에 관한 다른 칭호들이 예수에게 다 적용된다. ‘주’라는 이름과 더불어. 그래서 가령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 왕,그런데 예수가 이스라엘의 목자, 왕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의 목자이고 왕ㅇ시다. 하나만 빼놓고는 ‘아버지’! 자. 에수가 주라고 신앙고백이 어떻게 발생했고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살펴 보았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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