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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모세오경 녹취 2

by 【고동엽】 2021. 10. 28.
창세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족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헬레니즘이 말하는 믿음은 다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헬레니즘이 말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죠?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보여준 겁니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 내 인생을 거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내 인생의 주인 삼는 겁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 삼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명하신 바대로 온전히 순종한다는 겁니다.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내 인생에 주인되신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시면 기꺼이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너무나 하고 싶지만 하나님이 하지 말라 명하신다면 기꺼이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 뜻대로 살지 않고 내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그 하나님께 내 인생을 거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할 때 아브라함은 기꺼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동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헬레니즘은 어떤 문장, 명제에 대해서 인지적으로 동의하거나 수용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자이시다” 이것을 믿니 라고 했을 때 뭐를 믿음이라고 생각하냐면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자이시다라는 문장 그것을 인지적으로 동의하거나 수용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이것을 믿니 라고 했을 때 뭐가 믿음이냐면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인지적으로 동의하고 수용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머리로만 믿는 겁니다. 머리로는 믿지만 몸으로는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헬레니즘에서 말하는 믿음에는 이런 괴리와 분리가 많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의 신앙인들도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이 아니라 헬레니즘이 말하는 인지적 동의와 수용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며 자기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야고보가 한 말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습니까” 하면 사람들이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뭘로 믿는겁니까? 머리로 믿는 겁니다. 야고보는 그 정도 믿음은 귀신들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 “잘하는도다”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조롱입니다. 귀신들이 뭘 믿는겁니까?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자 라는 사실, 세계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귀신들도 다 압니다. 인지적으로 머리로는 다 동의합니다. 마가복음 5장 7절을 보면 거라사 귀신이 예수를 보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예수가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것이 귀신들의 믿음 수준입니다. 하나님과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다 알고 있지만 삶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겁니다. 그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는 것이 귀신 수준의 신앙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무수한 말씀들이 나와 상관있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삶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참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믿음의 조상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두 번째는 이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중 가장 존재감이 약한 사람이 이삭입니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이삭은 에서만 몰래 불러 축복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리브가와 야곱이 듣고 야곱이 에서인 것처럼 위장해서 에서의 복을 가로챘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창세기 27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야곱이 속이긴 했지만 에서가 받을 복을 야곱이 가로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러한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창세기 25장 23절을 보세요. 리브가가 아이들을 잉태를 했는데 태내에서부터 두 아이가 싸웁니다. 너무 걱정이 돼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이삭과 리브가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두 국민과 민족이 리브가의 태에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국민과 민족이라는 표현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을 자녀의 번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리브가라는 한 여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두 아이를 잉태케 하셨는데 두 아이 모두가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겁니다. 둘 다 자손의 번성이라는 큰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고대 근동사회의 일반적인 장자 중심의 가치관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처음부터 끝까지 보시면 중요한 특징이 장자와 차자가 있을 때 항상 차자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카인과 아벨 가운데 아벨, 에서와 야곱 가운데 야곱, 르우벤이 장자인데도 최고의 복은 유다가 받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가운데서도 에브라임이 보다 큰 복을 받습니다. 창세기의 중요한 특징이 장자와 차자가 있을 때 장자가 아니라 차자,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 이게 창세기의 특징입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이때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의 일입니다. 리브가가 두 아이를 잉태했는데 두 아이 모두가 큰 민족을 이룬다, 두 아이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다만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섬긴다는 겁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데 작은 아이가 보다 더 큰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 하나님께서 이삭과 리브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한 명을 복 주시기 위해서 다른 한 명을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두 아이 모두에게 복을 주십니다. 다만 작은 아이가 더 큰 복을 받는 겁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1절에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둡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 눈이 어둡다는 것은 시력이 안 좋다는 말이 아니고 분별력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이삭이 분별력을 상실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망각하고 도리어 장자에게 모든 복을 몰아주기 위한 기도를 하려고 한 겁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이 하려고 한 행동 자체가 창세기 25장 23절에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에 대한 망각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두 아들 모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두 아들 모두가 복을 받지만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이 더 많은 복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창세기 27장의 이삭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가치관처럼 큰아들에게 복을 몰아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리브가와 야곱이 이삭을 속였습니다. 큰 아들에게 몰아주려던 복을 둘째였던 야곱이 가로챕니다. 그리고 나중에 에서가 옵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하니까 이삭이 말하기를 너에게 빌어줄 복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에서에게는 저주를 퍼붓습니다. 창세기 27장의 이삭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25장 23절에 나오는 겁니다. 창세기 27장의 이삭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로섬의 하나님으로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얼마 없어서 A라는 사람에게 +5만큼의 은혜를 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B라는 사람에게는 –5만큼의 저주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제로섬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오해한 사람이 이삭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두 아들 모두에게 복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작은 아들이 큰 아들보다 많은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두 아들 모두가 복을 받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더 적은 복을 받는 사람은 억울하거나 기분이 나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 비유를 보시면 주인이 종들에게 차등적으로 달란트를 나눠줍니다. 이 달란트라는 것이 내가 소유하고 끝나는 것이라면 적게 받은 종은 기분이 나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달란트는 은사입니다. 은사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내가 그것을 사용하지만 내가 유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유익을 누리는 것이 은사입니다. 하나님께 달란트를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받은 달란트 만큼의 몫을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5달란트 받은 종은 5달란트를 남겨야 합니다. 2달란트 받은 종은 2달란트를 남겨야 합니다. 1달란트 받은 종은 1달란트를 남겨야 합니다. 그러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5달란트 받은 종이 2달란트만 남긴다, 2달란트 받은 종이 1달란트만 남기게 된다 라고 한다면 주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달란트를 받는 것은 은혜이지만, 내가 받은 달란트 만큼의 몫을 남겨야 하는 것은 책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 야곱과 에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더 많은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복을 야곱이 소유하고 끝나는 것이라면 에서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죠. 이것을 달란트 비유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은 자는 받은 복만큼의 몫을 남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받은 만큼 은혜를 흘려보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 이삭이 이해하는 것처럼 누구 하나에게는 복을 주고 누구 하나는 저주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기 25장 23절에 나옵니다. 둘 모두에게 복을 주시는 겁니다. 다만 동생이었던 야곱에게 더 큰 복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글 번역 성경에 우리를 오해하게 만드는 번역이 있습니다. 말라기 1장 2~3절입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번역은 편견에 근거한 오역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기 25장 2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습니까? 아닙니다. 에서와 야곱 모두가 민족과 백성, 국가를 이룰 수 있도록 둘 모두에게 후손의 번성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다만 동생에게 더 큰 복을 준 겁니다. 그런데 말라기의 번역은 마치 하나님은 제로섬의 하나님처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처럼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 ‘미워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가 ‘샤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미워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덜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미워하다’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덜 사랑하고’로 번역해야 합니다. 이런 번역의 아쉬움이 신명기 21장 15절에도 나옵니다. 한 남자가 두 명의 여인들을 아내로 데리고 있는데, 한 아내는 사랑하고 한 아내는 미워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러분 미워하는 아내를 뭐하러 아내로 데리고 있겠습니까?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내어 쫓았겠죠. 이것도 미워했다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레아와 라헬처럼 사랑하는 아내고 있고 더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으로 번역해야지 ‘미워했다’라고 번역하게 되면 본문의 내용과 맞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에서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창세기 25장 23절에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망각한 이삭이 하나님을 제로섬의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렇게 이해하면서 말라기 1장, 신명기 21장에 보면 우리도 마치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처럼 번역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더 사랑하고 에서는 덜 사랑한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에서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야곱은 더 사랑하고 나는 덜 사랑하냐 라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등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비유가 달란트 비유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고 은사를 받는 모든 것을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얼마 만큼의 복을 받느냐에 있지 않고 내가 받은 복 만큼의 몫을 남겼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는 것은 은혜이고 받은 만큼 몫을 남기는 것은 책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5달란트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내가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며 끝날 것이 아니라 내가 은혜받은 자답게 살고 있는지, 받은 은혜의 몫 만큼을 남기고 있는지, 받은 은혜만큼 흘려보내고 있는지를 스스로 성찰하고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 야곱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야곱은 삶 자체가 너무나 드라마틱 합니다. 야곱을 볼 때마다 현대인의 표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낸 사람입니다.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났는데, 장자권을 갖고 싶다 마음 먹으면 마침내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라헬이라는 여인과 결혼하고 싶다고 마음 먹고 나서 마침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고수였던 라반 삼촌, 10번이나 자기를 속였던 그 삼촌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야곱은 통쾌하게 복수를 해냅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한 인물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인의 표상 같은,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주목해야 할 것은 뭐냐면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일궈냈지만 창세기 47장 9절에 보면 바로가 야곱에게 질문합니다. “당신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야곱이 이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나이가 130입니다”라고 하면서 “조상들에 비하면 내가 연소하지만 내가 참 험악한 인생을 살았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야곱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냈지만 자기 인생에 대해 정말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이렇게 고백하지 못하고 내가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라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현대인들이 오늘날 이루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이뤄지지 못하면 얼마나 낙담하고 절망합니까? 그런 의미에서 뭔가를 성취해야 만이, 그런 성취를 통해서 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 땅이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데, 야곱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많은 것들을 일궈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 합격할 수 있는 인생, 많은 것은 못 누리지만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신앙인의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이것이 야곱을 통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신앙적인 고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번째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에게서는 믿음이라는 것은 인지적인 동의와 수용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생을 걸고 주인 삼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삭에게서는 한국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창세기 27장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는 이삭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오해이고, 하나님의 뜻은 창세기 25장 23절에 나온다고 강조했습니다. 야곱은 현대인의 표상같은 인물입니다. 많은 것을 일궈냈지만 스스로 행복하다고 평가하지 못하고 험난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던 야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네 번째가 요셉입니다. 요셉은 17살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리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30세에 총리가 됩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보디발이라고 하는 집안에서 가정 총무로 일하다가 어느 날 그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그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유혹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께 순종했던 요셉을 기다리는 것은 면류관이 아니라 감옥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도 있습니다. 죄악으로 충만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면 도리어 미움받을 수 있고 내가 원하지 않는 고난과 핍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불의가 편만한 이 땅에서 끝까지 정의로움을 주장하면 사람들에게 박수받지 못하고 도리어 미움받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는데, 그런 인생의 여정에서 많은 고난을 경험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에게서 하나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이 추락하는 경험에서도 단 한번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믿음이라는 것을 에무나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대로 잘 풀린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진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해 냉담해진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요셉입니다. 우리가 요셉을 통해 그 믿음을 배우고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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