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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5경 녹취 1

by 【고동엽】 2021. 10. 28.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는 모세오경의 본문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하고 다음 주에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하겠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공부하는 내용을 모세오경이라 하는데, 오경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일반적 인식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한 단락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신학적 주장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4경, 5경, 6경, 9경 등이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봐야 된다 이것이 4경입니다. 4경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는 ‘그리고’라는 순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가 50장으로 끝나는데 출애굽기 1장 1절에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가 ‘그리고’ 입니다. 레위기 1장 1절도 ‘그리고’ 입니다. 민수기 1장 1절도 ‘그리고’ 입니다. 창세기가 끝나고 ‘그리고’ 하면서 출애굽기가 창세기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민수기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신명기 1장 1절에는 ‘그리고’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4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5경 입장은 모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모세의 출생이 출애굽기 1장에 나옵니다.

모세의 죽음이 신명기 34장에 나옵니다. 모세라는 사람의 태어남,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역한 내용, 그의 죽음을 끝으로 해서 한 시대가 저물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부터 시작되는 여호수아서를 새로운 단락으로 보는 겁니다. 모세 5경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를 중심으로 해서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6경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부터 여호수아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보는 겁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면서 두 가지 축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후손들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이 번성케 해주겠다는 것이 하나,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이 약속이 궁극적으로 성취된 시점이 가나안 정복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여호수아서에 나옵니다. 약속과 성취라고 하는 도식을 가지고 이해하면서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서까지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는 것이 6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요즘 신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9경입니다. 9경은 창세기부터 열왕기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처럼 후손도 번성하고 가나안땅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그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지난번에 공부했던 것처럼 땅신학에 근거했을 때 하나님이 모든 땅의 주인이시고 특정한 민족과 공동체에게 그 땅에 거주할 기회를 주신다, 민족과 공동체는 그 땅의 주인이 아니라 임차인으로 거주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 땅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임대료를 납부해야 한다, 그 임대료가 미쉬파트와 체데카다 라고 했습니다. 미쉬파트는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고, 체데카는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임차인들이 그런 사회를 건설하게 되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임차인들이 그곳에서 자신에게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며 그들로하여금 그 땅에 계속하여 거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땅의 임차인들이 미쉬파트와 체데카가 구현되는 공동체를 건설하지 못하면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임대료를 체납하는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임대료가 체납되게 되면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십니다. 이런 경고를 듣고도 임차인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기존의 임차인들을 내어쫓고 새로운 임차인들을 그 땅에 거주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땅 신학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성실하게 임대료를 납부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또 하나의 애굽을 건설한 겁니다. 여기서 애굽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상징합니다. 애굽적 세계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약한 자는 울부짖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위에 또 하나의 애굽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가나안 땅으로부터 내어쫓김을 당하고 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그 땅으로부터 내어쫓김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렇게 끝나게 되는 건가요? 열왕기 제일 마지막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여호야긴이라는 왕이 37년 만에 감옥으로부터 석방되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예우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실패, 포로생활, 제일 마지막은 감옥에 있던 왕이 풀려나고 바벨론 왕에게 예우를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에 대한 소망으로 열왕기가 마무리됩니다.

9경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부터 열왕기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 이스라엘의 실패, 그 실패를 초극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회복 여기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봐야된다는 주장이 9경입니다. 상식적으로 알아둘 것이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모세 5경에 대한 입장을 강조합니다. 모세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그 죽음을 통하여 한 시대가 마감된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우리는 보통 하나의 단락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모세 5경이라 합니다. 신학계에서는 단락을 이해하는 경향이 조금 다릅니다.

4경, 6경, 9경이 있습니다. 4경은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를 한단락으로 보는데 근거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1장 1절이 ‘그리고’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6경은 창세기부터 여호수아까지를 한단락으로 보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나오는 창세기부터 약속이 성취되는 여호수아서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봅니다. 약속과 성취라는 맥락 속에서 단락을 이해하는 것이 6경입니다. 9경은 더 확대된 것인데 약속과 성취는 이뤄졌지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셨던 것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나안 땅에 살게 된 이스라엘은 그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실패합니다. 그 실패의 결과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고초를 당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혔던 여호야긴 왕이 풀려나고 회복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이스라엘의 실패, 그 실패를 초극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회복을 하나의 단락으로 보는 것이 9경입니다. 이처럼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하나의 단락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4경, 5경, 6경, 9경이라는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5경을 강조하기 때문에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5경이라는 맥락 속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 시간과 다음 주에 다섯 개의 본문을 두 시간 안에 공부하다 보니까 상세하게 살피기는 어렵습니다. 그 기회는 이후에 가지기로 하고 이번에는 본문 안에 있는 중요한 내용 가운데 잘못 이해하거나 새롭게 알아야 될 내용들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시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별히 1장 28절을 문화명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잘 돌보고 다스리고 지킬 것을 명하십니다. 이것을 보통 문화명령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 이후 천당에 가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 곳곳에서 온전히 구현되는 것을 소망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화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죽은 후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잘 돌보는 것, 다스리는 것, 지켜내는 것 이런 사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이를 떠나서 기독교 신앙인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공통 주제가 생태와 환경에 대한 주제입니다. 죽은 후 우리는 천당갈 것이기 때문에 이 땅이 어찌되건 관심 없어 라고 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나서 당신의 백성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땅의 피조물들을 잘 돌보고 다스리고 지킬 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피조세계가 지금도 탄식하고 있는데 이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말합니다. 이 아들들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피조세계를 잘 돌보고 다스리고 지켜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전세계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 세계에 대한 무한 책임적인 자세를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은 5장 13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 속에는 세상이 어둠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절대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 세상이 썩었네, 부패했네 이런 것 때문에 신앙인들이 절망하거나 탄식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미 성경이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라고 명하신 겁니다. 모든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신앙인들이 진짜 탄식해야 할 것은 세상이 너무 썩고 타락하고 부패한 것 때문이 아니라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빛이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고 그 빛을 비추지 못하는 이 땅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탄식해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종교 가운데 이 세계에 대한 무한 책임적인 자세를 기독교만큼 강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 땅의 빛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늘 돌아보면서 어떻게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교회가 거기에 걸맞은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세기 9장 25-27절에 노아의 말이 나옵니다. 노아가 술이 깬 후에 자신의 세 아들이었던 셈, 함, 야벳에게 한 말인데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왜 중요하냐면 오랜 기간 동안 이 노아의 말을 근거로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먹은 겁니다.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한 포도를 먹고 취합니다.

이것을 함이라는 아들이 제일 먼저 봅니다. 당시 노아는 술에 취해 하체를 벗고 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함이 보았지만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나머지 형제들에게 아버지가 옷을 벗고 자고 있다고 고자질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셈과 야벳이 옷을 들고 뒷걸음질 쳐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줍니다. 노아가 잠이 깨고 세 아들이 자기에게 했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세 아들에게 복과 저주를 선포합니다.

9장 25-27절에 보면 노아가 셈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원하고 야벳도 창대해지길 원하는데 함의 후손들은 저주를 받을것이라고 말합니다. 백인들은 이 말을 어떻게 해석했냐면 여기 야벳의 후손이 오늘날 백인이고 함의 후손이 오늘날 흑인들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입을 통하여 백인들에게는 축복을 흑인들에게는 저주를 그리고 백인들의 장막에서 흑인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셨다,

이런 식의 해석을 하면서 오랜 기간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으로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먹은 것입니다. 백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정당한 것인가요? 이 부분을 함께 살펴봤으면 합니다. 먼저 창세기 9장 25~27에 나오는 노아의 말이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노아의 말처럼 하나님은 백인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흑인들은 저주하셨는가,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이것을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해서 전제할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제가 질문을 드려볼게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습니까? 여러분 만약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다면 매일 점을 치는 사람들처럼 오늘 나에게 주실 말씀은 뭐지 하면서 아무데나 펴도 되겠죠? 그렇게 펴서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이 말씀을 주셨구나 이렇게 생각해도 무방할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사탄의 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을 떡이 되게 만들라,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이것은 사탄의 말입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 옳다 인정받지 못한 욥의 세 친구의 말도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될 것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디를 펴든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아니고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지만 사탄의 말도 있고 하나님께 옳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말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아브라함이나 노아처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했던 말과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거나 대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노아가 했던 모든 말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 겁니까?

노아가 한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대항한 겁니까? 그렇지 않죠. 노아가 술에 취해 하체를 벗고 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대행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중에 이스라엘이 최고의 신앙인물로 간주했던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밧세바라는 여인을 범한 것이 하나님의 뜻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죄를 은닉하기 위해서 우리야라는 사람을 죽인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했던 말과 행동이 100%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거나 원하시는 바를 대행한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노아의 말이라고 해서 그것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겁니다. 세 번째 설령 창세기 9장에 나와 있는 노아의 말이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한 번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무궁토록 효력을 가지는 것일까요? 이것이 세 번째 질문입니다. 제가 세 가지 질문을 던졌죠. 첫째,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 사탄의 말, 하나님께 옳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말도 있습니다. 두 번째, 믿음의 사람들이 했던 말과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거나 대행한 것인가,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습니다. 노아의 술 취함이나 다윗의 불륜과 살인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노아의 말을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무궁토록 유효한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 하나님이 주셨던 많은 율법들, 특별히 제의법들은 신약에 가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 단번에 완성됩니다.

더이상 신약 교인들은 동물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지 않습니다. 불연속성을 경험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한번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씀이라고 해서 영원무궁토록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12아들에 대한 축복과 저주의 유언을 선포합니다. 거기서 야곱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두 아들이 있습니다. 시몬과 레위입니다. 세겜 사람들을 학살한 것 때문에 시몬과 레위는 야곱에게 저주를 받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명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죽기 전에 12지파에 대해서 축복과 저주의 유언을 선포합니다.

모세의 유언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창세기 9장의 노아의 말,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말, 신명기 33장의 모세의 말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 것이라 받아들여 봅시다. 한 번 하나님께서 레위를 저주했다고 해서 그 저주가 끊임없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입을 통해서는 저주하셨지만 모세의 입을 통해서는 레위를 축복하십니다.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백인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 백인을 축복하시고 흑인을 저주하셨다 라는 주장은 설령 하나님의 말씀을 노아가 대언한 것이라고 해도 한번 선포했다고 해서 시간을 초극하여 영원무궁토록 그 말씀이 유효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9장의 노아의 말을 근거로 해서 오랜 세월 백인들이 흑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노예로 부려 먹은 것은 성경에 대한 심각한 오해, 잘못된 적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성경에서 많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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