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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3 (마가복음 8:27-34) -- 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by 【고동엽】 2021. 10. 28.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


우리가 대항 대조 대안할 때, 대안의 핵심은 폭력에 대한 사랑의 대항이거든요. 폭력으로 효율성으로 제국을 건설하는 자들에 대해서 사랑으로 천천히, 인격적 설득을 통해서 나라를 건설하는 것,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감동시키셔서 완전히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동의할 때 성령을 보내주시거든요. 이 세계의 모든 제국의 건설자들은 설득의 과정 없이 바로 폭력으로 건설한단 말이에요. 복종을 요구하죠. 우리 주님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을 요구한다는 말은 전인격적 설득이 되거든 Say Amen, 아멘으로 대답한다, 그러면 당신을 내 나라로 삼겠다, 인격주의 대 폭력주의, 이게 바로 대안입니다. 대조도 마찬가지죠. 어둠의 질서 대 빛의 질서, 대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시위를 통하여, 사랑을 고취하는 방법으로 그 시위에 참여할수록 사랑의 고결한 가치를 눈 뜨는 시위, 폭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시위, 지금 이 세상에 있는 폭력은 항구적 폭력성인데 그 폭력에 맞서는 방법이 매우 폭력적 질서에 가까워졌어요. 빛과 어둠의 전쟁이 되려면 보다 더 빛스러움이 훨씬 더 드러나야 하는데, 방송이 언론조작을 통해서 빛스러움을 충분히 부활시키기 보다는 그냥 갑과 을의 갈등이 아니라 갑과 작은 갑의 갈등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전투경찰이 진열하는 장면과 시위대가 진열하는 장면을 대등하게 묘사합니다. 실제로는 아니거든요. 그럼 어떻게 대조 대항 대안 공동체를 만들어가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인가,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은 사랑의 인자들, 사랑의 사람들이 충분한 수가 확보되면 각 영역에서 빌라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와 빌라도의 대결입니다. 동정녀 마리아, 순결한 마리아와 빌라도의 대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한 가지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톰 라이트가 쓴 책인데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라는 책입니다. How God Became King The Forgotten Story of the Gospels, 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사도신경을 비판한 책입니다. 사도신경을 비판하면서 왜 사도신경에는 하나님 나라가 빠져 있나? 이런 내용이거든요. 구약학자가 썼습니다. 이 사람이 사도신경의 구조를 좀 더 봤다면 빠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본디오 빌라도는 복음서의 처음과 끝이죠. 처음과 끝이 다 고백돼 있으면 공관복음서가 이 안에 다 들어 있는 거거든요. 신앙구문 안에, 조항구문 안에 산상수훈이 빠지고 하나님 나라가 없다고 이것을 비판한 겁니다.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좋아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완상 교수, 한신대 류장현 교수, 독일 아돌프 폰 하르낙, 저는 정반대입니다. 이 안에 동정녀 마리아와 본디오 빌라도가 수미쌍관으로 돼 있다는 말은 복음서 전체가 압축돼 있다는 말이거든요. 여기 하나님 나라가 들어 있는 거거든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기 때문에 유발된 현상이라면 이 안에 내포돼 있는데, 그걸 모르고 이 조항에 산상수훈의 그런 조항이 덕지덕지 붙어 있지 않다고 그걸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일차원적인 단세포적인 사고라는 거죠. 톰 라이트는 저한테 이렇게 비판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김세윤 박사와 맞짱 뜨는 사람인데, 제가 볼 때 서구학자라도 다 옳은 게 아닙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가 예수님의 인간생애를 압축했는데,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입니다. 동정녀 마리에게 나셨다, 여기서 우리는 과학적 동정생식의 가능성을 자꾸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던 과학에서는 이것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에 따르면 모든 우주는 인과법칙의 사슬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라든지 많은 현대 물리학, 첨단 물리학에서는 법칙이 손닿을 수 없는 빈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 세계는 이런 겁니다. 인과법칙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불확정한 빈틈으로 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뉴턴의 기계론적 법칙에 의하면 인과법칙으로 모든 게 설명이 안 되면 그건 법칙이 깬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그렇게 만들지 않고 인과법칙 플러스 인간이 추적할 수 없는, 해명할 수 없는, 추론할 수 없는 신비한 당신의 작동원리, 그걸 우리는 신비라고 말할 수 있고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고 빈틈 물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김충성 교수, 제가 예전에 일산두레교회 목회할 때 교인이었고 지금도 교인입니다. 김충성 교수는 구글이나 위키피디아에도 나올 겁니다. 유명한 학자로서 입자 플라즈마 물리학의 대가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저는 신학에서 공부하고 그분은 물리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해보니 비슷하니까 이 분이 오후 2시에 하는 신앙 강좌시간에 두 시간 반에 걸쳐 공식을 써가면서 강의 했습니다. 어쨌든 이해를 초월하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과학에 대한 관심이 참 많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종교적 입장에서는 말하지 않는 이성입니다. 순수이성은 인과법칙만 다루는 학문입니다. 인과법칙을 넘어가면 순수이성이 판단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신비와 인과법칙으로 구성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양자들의 세계에 중력의 법칙이 적용 안 됩니다. 너무 작은 원자 밑에 10의 33분의 1 크기의 양자에게는 중력의 법칙이 적용 안 됩니다. 충성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 위를 걸어가면 인과법칙이 적용돼 물에 대부분 빠집니다. 그런데 수천 번 수만 번 실험하면 안 빠질 때가 한 번 옵니다. 빈틈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순간에 물을 걸어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빈틈 물리학적으로 볼 때 괜찮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갈 때 그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이 분의 말은 뉴턴의 기계론적 법칙 우주관에서는 기적은 법칙을 깬 거지만 우리 하나님은 로마서 11장 33-36절에 보면 His ways unsearchable, unreasonable 추론할 수 없다고 돼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과학자가 이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과학적 법칙을 발견하는데 유리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내장해놓은 빈틈 물리학적 세계, 그래서 동정생식이 저는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왜 안 가능합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주님의 말씀, 주님에게는 아무 것도 불가능이 없습니다. Nothing is possible with God, 이것은 누가 한 말이냐? 빈틈 물리학자가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가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익숙한 사람들은 우리하나님은 아무 것도 못하시는 게 없다는 걸 압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늘날 최첨단 물리학자가 인과법칙 너머에 무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역사는 동정녀 몸, 즉 순결하신 마리아의 몸에 우리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되는 사건, 이런 기적의 사건이 요소요소 세계사에 일어났습니다. 이 세계사에 보면 동정녀의 몸에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사건과 유비되는 사건이 수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역사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인간의 폭력성이 역사를 다 절단 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생애에도 보세요.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한 홀연한 구원, 하나님의 신비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여러분 인생에 문득 문득 일어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동정녀 마리아가 아이를 밸 수 있냐는 논쟁은 오늘날 시대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동정녀가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집에 가셔서 제가 설교요약문 쓴 걸 다시 읽어보십시오. 읽어보시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동정녀는 야훼 신부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집체적 인격의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야훼 신부로 불렀죠. 야훼 신부였던 동정녀가 잉태 했다는 말은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의 모태, 이스라엘 역사라는 자궁 안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라는 구원사가 1500년 동안 누적된 역사적 맥락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구 학자들의 초점은 매우 잘못됐습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에서 구원역사를 가지고 있으면 이 동정녀가 야훼 신부인 이스라엘 민족의 집체적 인격의 대표자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걸 일부러 무시하기 위해서 동정녀 탄생은 불가능하다면서 기적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면서 다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서구 정신 자체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매우 반하나님적이고 악독한 영의 소유자들입니다. 신학자들은 악독한 영에 사로잡힌 겁니다. 구약역사를 쭉 보면 이 여자는 바로 아가서에 나오는 야훼 신부인 그 여자임과 동시에 출애굽기 14장에서 야훼 신부로 인정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구나,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신부라고 말하는 아가 예레미야 이사야가 이해가 되는 거거든요. 이사야에서는 이스라엘백성을 뿔라 헵시바, 나의 사랑하는 처녀, 나의 사랑하는 연인,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은 feminine collective, 여성 집단명사로 쓴 것이 동정녀 마리아로 나타난 겁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됐다는 말은 이스라엘 역사라는 그 큰 모태 안에, 그 맥락 안에서, 그 자궁 안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를 모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태교한 것이 아니라 1500년 이스라엘 역사가 예수님께 태교한 겁니다. 1500년간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구원역사가 예수님의 태입니다. 그 태안에서 아브라함부터 다윗 사무엘 쭉 가는 그런 역사 안에서 잉태된 예수, 그렇게 보는 것이 성경신학적으로 너무나 타당합니다. 서구인들은 자기들 편견에 사로잡혀서 동정녀 탄생이 불가능하다고 욕을 하면서 같잖게 여겼습니다. 아닙니다. 성경보다 자기가 낫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자기만 쳐다봐야 합니다. 성경 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해야 성경을 읽으면 은혜를 받지, 서구 학자들은 내가 성경보다 한 수 위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성서신학은 불가능합니다. 고집신앙만 가능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했다는 말, 다시 요약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모태에서 탄생하신 예수님, 야훼 신부이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이런 해석은 어디를 봐도 없더라고요. 제가 사도신경책을 읽어 봤는데, 이건 구약성경을 오래 읽은 사람만 가능합니다. 어떤 누구의 책을 봐도 이런 해석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구인들은 이미 전제가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얀 밀리치 로호만이라는 체코 신학자가 사도신경에서 가장 유명한 책을 쓴 사람입니다. 칼 바르트, 판넨베르그, 이게 3대 사도신경 저술가들이죠. 누구도 이걸 이스라엘 역사와 생각하지 못하고 동정녀 탄생했다는 말은 인간의 몸에서 탄생했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너무 철학적이고 추상적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집단 feminine, 여성 인격화된 이스라엘, 야훼의 신부가 된 이스라엘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라는 자궁 안에 태어나신 예수님, 그러니까 마리아가 하는 말들은 구약 예언서의 압축본 아닙니까? 마리아의 찬가 보세요. 마리아가 찬가 하는 장면을 보면, 누가복음 1장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너 성령 받고 하나님 아들이 됐죠?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아들로 입양되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마리아의 태속에서 그대로 한 겁니다. 1장 46-48절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이 비천한 계집종은 이사야 예레미야에 나오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이스라엘을 복 있다고 하는 것은 이사야 40-66장에 나오는 엄청난 반복 표현이죠.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이건 이사야 12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 능하신 큰 하나님이 큰 대사를 우리에게 행하셨으니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온 세상에 퍼진단 말이죠.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이건 이사야 40장 10-11절입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체제전복적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게 바로 구약역사의 압축본입니다. 체제전복적 하나님 나라가 마리아의 찬가에 나온다는 말은 예수님이 구약성경 엑기스를 뱃속에서 태교 당한단 말이에요. 구약성경의 핵심을 태교로 지금 가르친다는 거예요. 누가요? 마리아가 찬가를 불러서요.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보세요, 이스라엘을 도우사,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의 찬가를 보니까 이 마리아야 말로 그냥 비천한 여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여성 예언자의 집단인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알 수 있습니다. 저처럼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언제 저는 이걸 깨달았습니까? 사도신경만 일곱 번째 강의입니다. 사도신경을 끊임없이 연구하다가 조금씩 깨달아갑니다. 제1차 강의보다 지금이 더, 그래서 사도신경 책을 내지 못합니다. 원고를 실컷 해놓고 출판사에 책을 넘기기 전에 또 다시 깨달아지기 때문에 영원히 책을 못 낼 것 같습니다. 유현미 집사가 3,4년 전에 원고를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고쳐야 합니다. 영원히 내지 못합니다. 3년 전 제 원고는 이게 없었습니다. 일산두레교회 원고에서도 없었어요. 이건 최근 가향버전입니다. 이것을 연구하고 연구하다가 깨달은 것은 서구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탄식이 깊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궁핍한 이해를 하고 신학자로 불렀을까? 판넨베르그 칼 바르트가 누굽니까? 축구로 말하면 메시급입니다. 메시급 선수가 이렇게 궁핍한 책을 써놓고 죽었다는 것, 저는 써놓고 원고를 보면 다 가짜가 됩니다. 이걸 쓸 수가 없을 겁니다. 사도신경 책이 안 나오면 죽는 순간까지 새로 버전업했다, 제 해석을 한 가지 서포트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12장입니다. 해를 입은 여자가 아이를 잉태해서 용의 공격을 받아 광야에 가서 아이를 낳고 용과 싸우는 이야기, 그게 바로 마리아와 예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한 비천한 시골여자, 동정은 생물학적 동정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야훼신부로써 이스라엘 역사가 자기 사명을 다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한 때는 고멜처럼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고멜처럼 음란한 이스라엘이 정결케 됐습니다. 새롭게 됐습니다. 그래서 동정녀가 된 겁니다. 태생동정녀가 아니라 갱생 동정녀가 된 겁니다. 우리는 태생동정녀가 아니라 갱생동정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리아처럼 순결합니다. 교회는 사상 개개인 성도 몇 개교회가 잘못될 수 있지만 우주적인 교회, 주님의 신부된 교회는 절대로 타락한 여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동정녀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인물을 잉태합니다. 순결한 교회일수록 그 안에서 기가 막힌 생각이 잉태되고 위대한 인재가 잉태됩니다. 교회는 어마어마한 가치입니다. 좋은 교회 하나는 천문학적 가치입니다.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사야 58장 12절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역대의 파괴된 기초, 엘리트가 우리 민중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구조, 이건 우리 대한민국 항구적 죄악이고 인류의 항구적 죄악이죠. 국정원 보세요. 청와대 보세요. 검찰 보세요. 이 모든 조직은 근본적으로 선을 행하기에 무력합니다. 왜? 그 사람이 누군가와 상관없이 조직 자체가 부패한 인간을 그렇게 만듭니다. 우리 또한 그 자리에 가면 별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가 그 개개인에 대해서 비난과 욕설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고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도우려면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된 예수 같은 성령으로 잉태된 인물들이 무진장 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순결하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한 아들, 그 자궁에서 큰 아들은 반드시 일대일 압제자와 맞대결을 펼치게 돼 있고 고난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내용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은 것은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 탄생은 십가가가 이미 들어 있는 것이고, 본디오 빌라도에게도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어요? 여러분 <빌라도 보고서>라는 소설을 한 번 봐 보세요. 생명의 말씀사에 가면 찾아보세요. 빌라도의 양심고백서입니다. 소설인데 빌라도가 예수의 재판기록을 복기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예수의 인상을 기록하면서 유사한 신앙고백까지 도달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소책자인데 초신자들이 읽으면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 같은 교회에서 큰 사람은 반드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는다, 본디오 빌라도는 압제자 또는 압제자의 중간관리자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총독이 아닙니다. 총독은 시리아에 있습니다. 시리아 총독 하에 있는 특별법무장관이 프라이토리온입니다. 로마기록에 보면 법무장관 석에 앉았습니다. 프라이토리온은 총독석이 아니라 유대법무부 장관입니다. 시리아 총독이 진짜 총독이고 그 총독 2인자가 유대총독인데, 시리아 총독과 유대법무부장관이 왜 대등했느냐? 유대라는 지방 자체가 워낙 반역이 심했기 때문에 법무부장관 그 자리가 총독과 맞먹어서 빌라도 총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해서 빌라도가 어디 앉는가 보세요. 마태복음에, 프라이토리온에 앉습니다. 프라이토리온이 법무부장관이라는 뜻이거든요. 항상 인간의 항구적 악과 폭력성은 법을 의지한다는 겁니다. 지금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항구적으로 악의 집행자가 되기 쉬운 이유가 법무부장관석에 앉아 있는 빌라도거든요. 프라이토리온에 앉아 있는, 압제자 빌라도는 법을 빙자하여 합법적으로 악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지금 강정이나 밀양은 국가기관이라는 폭력을 동반하여 개인의 사적 토지를 수용하는데 적절한 절차 없이 하는 것 아닙니까? 만족을 못 시키는 거죠. 정의는 누가 만족합니까? 정의롭다는 것은 을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거거든요. 갑과 을이 정의를 담론할 때 갑의 정의가 정의가 아니라 을의 입에서 정의가 나와야 합니다. 놀부가 자기 자신에게 내린 평가는 참 평가가 아닙니다. 흥부 입에서 나온 놀부가 참 평가입니다. 너희 형 어땠어? 우리 형 정말 좋은 형입니다, 정말 제가 근면성실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저에게 양식을 하나도 안 주시고 저의 인간성을 단련하시고 형의 사랑은 깊습니다, 놀부가 나는 흥부 이놈이 인간성이 더러워서 훈련시키려고 정말 눈물을 머금고 잔인한 척 했습니다, 나는 의롭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밀양 송전탑은 밀양 주민들이 국가와 한전 행위가 합당하다고 해야만 화해가 되거든요. 구럼비의 강정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국가는 효율성 신속성 거기에 공사하는 자들의 이권, 공사하는 자들이 주는 돈에 눈 먼 관료들, 이 자들 때문에 폭력적인 행위가 합법화됩니다. 삼성건설이 용산 31조 프로젝트를 따지 않았다면 그렇게 신속하게 경찰이 출동하지 않습니다. 만일 뇌물을 많이 안 주는 기업이 이걸 맡았다, 그러면 경찰이 전혀 안 도와줍니다. 그런데 삼성은 모든 영역에, 저 빼고는 다 받았을 겁니다. 전부 다 돈을 뿌리고 무차별 살포하기 때문에 삼성이 들어간 공사는 폭력적인 경찰집압하면 반드시 경찰청장이나 누군가에게 사례금이 오거든요. 그런 구조기 때문에 삼성이 개입되면 그렇습니다. 송전탑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기기관은 빌라도라는 법을 위장한 자들의 폭력성 때문에 법이 항상 폭력의 궁극적 원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법을 무력화시켜야 하고, 법을 집행하는 자들의 인격을 바꾸어야 하는데 법을 집행하는 자들의 인격을 할 수 있으면 힘으로 제압하는 건 괜찮습니다. 선거입니다. 힘으로 제압하는 건 선거거든요. 선거로 제압할 수 없을 때 빌라도의 폭력성에 맞서기 위해서 빌라도에게 더 큰 폭력으로 맞서면 그건 빌라도의 논리에 지는 겁니다. 빌라도의 폭력성을 인류의 보편적 양심과 자비로 인간의 혼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저항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이고 간디의 방법입니다. 고난을 받으사, 이건 굉장히 적극적입니다. 고난을 저항하지 않고 받으사 라는 뜻이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빌라도와 맞짱 떠서 물리적 시위를 통한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말이 아니라 빌라도가 주는 폭력을 무기력한 것처럼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passion이라는 말은 passive라는 말과 같습니다. 수동태 passive, passion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수난은 폭력의 수동태가 수난입니다. 폭력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건 고도의 단련이 필요합니다. 폭력을 받자마자 active가 되거든요. 한 번 폭력을 경험하면 바로 폭력적이 됩니다. 그런데 폭려을 경험하자마자 passive sentence 수동태처럼, 폭력의 묵묵한 수용자가 되는 건 엄청난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받으사, 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빌라도의 폭력에 빌라도스러운 반응으로 응대하지 아니하시고 그 빌라도의 부조리한 폭력에 피해자가 됨으로써, 그런 뜻입니다. 이게 실제로 너무 어렵습니다. 왜 어렵냐? 폭력은 우리를 야수적인 능동성으로 바꿉니다. 폭력을 경험하면 내가 야수가 됩니다. 폭력을 경험하고 온유 모드로 가는 것은 너무나 깊은 단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뜻이 동정녀 마리에게 나시고 세상의 중간관리자 최고 압제자의 똥개 노릇하는 빌라도에게 법적 이름의 폭력을 경험하셨지만 그 부조리한 폭력을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주심, 이것은 굉장히 큰 능력입니다. 여러분 폭력을 겪고도 참는 그 passive한 폭력수용적 전능성을 길러야 합니다. 이게 참 안 되더라고요. 선한 사람들 옆에 있을 때는 되는데 진짜 악의 진면목과 마주치면 내가 악한 사람이 되더라고요. 내 입에서 악한 말이 나오려고 해요. 악한 말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주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태에서 마리아의 찬가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마리아의 찬가 같은 이런 노래를 태속에서 10개월 동안 280일 동안 들은 분이 어떻게 불의와 화해할 수 있습니까? 마리아의 찬가 46-55절 이 노래를 뱃속에서 들은 사람, 우리 아버지가 저를 어떻게 교육시키셨느냐? 절대로 나서선 안 된다, 회권아 지금은 난세다, 너무 잘난 체해서도 안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항상 선두에 나서지 마라,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담대하게 훈련을 시키셔서 선두에 서게 됩니다. 저도 그래서 항상 저희 아버지 말씀을 듣고 데모할 때 항상 선두에 서지 않고 한 3열에 있었습니다. 항상 3열에 서면 제가 선두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1, 2열이 도망을 갔기 때문에, <모던 타임스> 라는 영화에 나오는 채플린처럼 깃발을 서고 있어요. 사진이 제일 많이 찍혔더라고요. 잡혀가서 보니 전부 다 제 사진이에요. 방망이로 머리를 치는데 신나게 치더라고요. 그걸 제재 안 하면 머리가 깨지겠더라고요. 제가 병을 깨서 찌르고 싶더라고요. 병을 깨서 찌르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폭력을 당하니까요. 병을 깨서 찔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두환의 얼굴에 찻잔을 집어 던지고 싶었어요. 83년에 전두환을 만났습니다. 군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어요. 제가 커피 잔을 가지고 전두환 앞에 가서 주는 역할을 한 겁니다. 이걸 던지는 순간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을 했어요. 총이 확 날아오겠지, 두 번이나 제가 전두환에게 커피 잔을 던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생각했어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그런데 제가 커피를 타 가니까 은침을 집어넣더라고요. 독이 있는가를, 두 번이나, 은으로 된 침을 경호원이 집어넣어요. 전두환에게 들은 말, 고맙다, 이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면 폭력과 맞서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폭력이 수동적 온유 모드로 폭력을 받으사, 고난을 받으사, 이게 너무 어렵다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 조심해야 합니다. 가족관계에서도 빌라도가 있죠. 고모가 빌라도일 수 있고 큰언니가 빌라도일 수 있고, 오라비가 빌라도일 수 있고 가족관계가 빌라도가 될 수 있고 직장상사도 빌라도가 될 수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 뱃속에서 교육 받은 아들이 아니면 본디오 빌라도와 동역하지 고난 안 받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난 사람이 고난을 받게 돼 있습니다. 이건 운명입니다. 이건 법칙입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가서 법무부장관 사임합니다, 당신을 만나고 나니 정말 힘듭니다, 이렇게 되기 쉽지 않습니다. 이건 영국 총독이 간디에게서 느꼈던 인상입니다. 간디는 영국이 다스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간디의 인도는 우리가 다스리지 못합니다, 간디 그는 영국을 넘어섰습니다, 이건 총독이 댄디 소금투쟁에서 간디와 그의 추종자들이 매를 맞고도 저항하지 않고 계속 380km 소금행진을 했습니다. 1931년, 때리니까 첫줄 맞고 쓰러지고 둘째 줄 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면서 아무도 저항하지 않으니까 총독이 영국 여왕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영국 왕이 조지 6세인가요? 영국은 간디를 통치할 수 없습니다, 떠나는 것만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거대한 인도를 보고 통치할 수 없는 무기력, 바가바드기타의 무진장한 온유, 폭력을 무효화시키는 수동성 앞에 놀래버린 거죠. 지금 우리 제주 강정마을에서도 한 1천 명 정도 끌려 감옥가면 됩니다. 유명한 사람이 끌려가면 됩니다. 제주대학교 총장부터 시작해서, 제주도 사람부터 시작해서 감옥을 가득 채우면 됩니다. 그리고 매를 맞는 장면이면 더 좋습니다. 시위해서 매를 맞고 끌려가는 폭력수용적 영성, 폭력감내적 영성이 있으면 반전이 일어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것은 그 당시 맥락에서는 이겁니다. 예수가 진짜 인간이었다, 예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아니었다, 가현설이라고 하는 이단과의 투쟁에서 이런 변종적 기능이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게 아닙니다.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 즉 이스라엘 역사라고 하는 동정녀 마리아적 야훼 신부의 몸에서 났다가 야훼 하나님 통치를 280일 동안 태교로 교육받았다가 이스라엘 역사의 큰 원칙인 하나님의 역사원리를 알았다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있는 통치자, 그 밑에 있는 중간 지배자들과 선한 갈등을 일으키다가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폭력수용적인 삶을 살다가 죽었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난 사람만이 폭력의 반역성, 폭력의 반 하나님적 본성에 감지능력을 갖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 만일 교회에서 거룩한 하나님 말씀을 받지 못하면 폭력수용적인 존재가 되고 폭력환영적인 존재가 됩니다. 빌라도와 매우 교통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역사,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 역사, 의로우신 하나님의 인간통치 원리를 많이 알면 알수록 본디오 빌라도와 우리는 화해할 수 없고 본디오 빌라도와 사랑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속한 자리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본디오적 압제자, 다른 사람을 객체화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가지고 시위하면서 다른 사람을 물 먹이는 본디오 빌라도적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부터 우리가 하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내 안에 본디오 빌라도적 압제자의 본성, 다른 사람을 수단화시키면서까지 내 인생을 부요하게 하려는 모든 악한 유혹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부터 하는 것이 본디오 빌라도를 이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 폭력에 노출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됨으로 폭력적 인간성으로 바뀌지 않는 감내, 폭력을 수용하지만 폭력을 감내하지만 폭력에 영향 받지 않는 고도의 온유한 영성, 하나님을 믿는 영성이 필요하겠죠. 그래야만 다음 주에 공부하는 장사한지 삼일 만에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엇으로 경험합니까? 제가 작년 11개월 동안 내 마음에 너무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제 신앙 안에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우리 일산두레교회에 전도사였던 분이 제가 주례를 했던 분입니다. 굉장히 순결한 동정녀 마리아 같은 자매입니다. 이 자매가 결혼을 했는데 작년 11월부터 이혼을 요구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시부모에게 불손한 말을 했다는 것과 평소에 당신 이러면 이혼할 수밖에 없어, 라는 말을 자주 한 것, 자기 신부의 아버지께 돈을 받아서 수원에 집을 샀는데 그 모든 재산을 압류할 뿐 아니라 위자료를 한 달에 60만원 씩 청구하고 아들청구권까지 다 가져가는 소송을 걸었습니다. 이 순결한 자매는 자기 아버지 재산이 5천만 원 들어간 집도 빼앗기게 되었고 시부모에게 불손한 말을 한 사람이 됐고, 아들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변호사가 3명 붙었습니다.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받은 소식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너무 순결하였기 때문에 제가 그 자매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아 시험에 들었습니다. 이 자매가 만일 잘못돼서 저 모든 재판에서 지게 되면 나는 정말 검은 구름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변호사를 소개했습니다. 제 아는 제자 변호사, 이혼 전문 변호사, 500만원만 받고 해주는 변호사, 굉장히 인권적인 착한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이 자매가 나이가 많은 50대 되는 자매인데, 너무나 친절하게 저의 소개를 해주면서 제가 법정에 설 마음으로 증인신청을 제 이름으로 했습니다. 내가 그 분을 압니다, 긴 글을 써서 법정에 제출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끝이 안 보이는데 재판에서 모든 게 끝나는데, 상대는 변호사가 3명이 달라붙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 남자가 빚이 굉장히 많은 걸 알게 됐습니다. 카드빚을 내서 시부모를 돕는 줄 알았는데 모텔 출입을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계속 규칙적으로, 그것이 우발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완전히 재판이 다 뒤집어 지고, 외도 불륜사건으로 이 사건이 극적으로 반전돼서 집도 찾고 양육비도 70만 원 받게 됐고, 그 형제는 재판에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이 자매랑 결혼하려고, 여자는 외모가 탁월하기 때문에 이 자매랑 결혼하기 위하여 거짓말로 신앙이 있는 것처럼 했습니다. 그 엄마 아빠도 교회를 다니긴 하는데 낭비벽이 너무 심합니다. 어제 제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들도 그 남자의 뒤를 캐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마지막에 한 번 채무관계가 얼마나 된지 보려고 하다가 모텔 출입기록이 있는데, 보니까 똑같은 모텔에서 계속 잠을 잔겁니다. 카드로, 이 사람이 어리석은 거죠. 이런 세계가 있는 걸 모른 거죠. 법정에서 판사가 그랬답니다. 이런 데는 카드로 쓰는 게 아닙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코멘트를 한 겁니다. 그래서 재판에 이겼습니다. 물론 재판은 이겨도 이 자매가 입은 상처는 큽니다. 남편이라고 결혼한 놈이 그렇게 나쁜 놈인데, 우리도 그 사람이 그렇게 나쁜 놈인 걸 몰랐습니다. 일단 눈도 쌍꺼풀이고 키도 크고 잘 생겼기 때문에 눈 쌍꺼풀 악인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이 형제가 돌아오길 기대하면서 이 자매는 재혼하지 않고 그 형제가 회개하길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전이 있습니다. 끝까지 이 자매는 착하게 했습니다. 저도 법정에서 그 형제를 칭찬했습니다. 저는 이 가정이 이혼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 형제도 회개하길 바랍니다, 이 형제는 원래 좋은 사람입니다, 그 형제를 한 번도 나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굳게 확신할 것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 동정녀 마리아 같은 동아리에 속하여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를 확신하면 확신할수록 압제자와 충돌이 불가피하다, 그 압제자와 충돌은 사랑으로 폭력을 당하지만 폭력스럽게 바뀌지 않는 상태로 이겨야만 반전이 있을 수 있다, 이걸 굳게 믿읍시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지 않아서 폭력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히려 폭력을 반전으로 이끌 능력이 있기 때문에 폭력을 견뎠습니다. 주님 우리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지금 내게 가해지는 이 모든 부조리한 모욕감, 폭력, 모함, 십자가에 나를 꽁꽁 매다는 고통들 감내할 수 있고 우리 마음 악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과 같은 교회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폭력과 불의 앞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괴롭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이기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의 압제를 필연적으로 자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아무런 잘못도 없지만 부조리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면서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본디오 빌라도 같은 압제자 밑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소서. 도와주소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그 경험이 이야기의 종결이 아니라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는 것이 마지막 스토리인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의 피해가 나에게 운명적인 피해가 되지 않게 도와주시고 세상에 공의를 펼치는 부조리한 경험이 되게 하시고 세상의 공의를 세우는 십자가의 모멸감 되게 하여 주소서. 굴욕과 모멸이 당시 나를 치명적으로 쓰러뜨릴 것 같지만 우리 주님은 은혜의 덮어쓰기를 통하여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부조리한 직장에서 벌어들인 소득의 일부를 감격으로 바쳤습니다. 소득의 일부를 드리기 원하지만 생업이 불완전하거나 주님의 포도원을 아직 얻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살려주소서. 일거리를 주소서. 인간의 존엄성을 고취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새 생명을 잉태케 하시고 길러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교회에 있는 모든 엄마들을 축복해주시고 활동하는 자녀들 때문에 그들의 뒤를 종종걸음 따라가기 위해서 지쳐 버린 엄마들을 안식일날 위로하여 주시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우리 자녀들을 길러주셔서 본디오빌라도가 다스리는 세상 안에서 예수의 길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부하가 되지 말게 하시고 물리적 대적자도 되지 말게 하시고 본디오 빌라도의 폭력과 압제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십자가의 사도 되게 도와주소서. 보선 형제가 수술 끝에 과료중입니다. 온전한 회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해외출장중이거나 몸이 아파 나오지 못한 지체들 있습니다. 우리 이강희 선생님의 발가락을 완전히 치료해주시길 기도하고 결혼을 앞둔 마음을 두드리는 아들딸들 있고, 직장에서 불안정한 아들딸들 있습니다. 낱낱이 기억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새 건물을 찾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주시옵소서. 종교개혁 기념강좌를 우리 예배당에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형제자매들 결혼도 우리 예배당에서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장소를 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싼 곳을 허락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접근하기 좋고 안전하며 우리 어린 자녀들이 와도 친화적인 환경을 주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오늘 예배드린 모든 가향의 지체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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