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
사도신경은 그 자체가 체제전복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며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백한다는 뜻은 이 역사가 언젠가 종결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핵 위기와 생태적 위기를 걱정하는 이 역사가 언제까지 지속가능할 것인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1971년 로마클럽이래로 지구가 성장한계에 부딪혔으며 지구 안에 감추어진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있다, 석유위기가 끝나고 원자력이 지구 멸절을 가능하게 할 만큼 일상화되고 있는 때가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 재림과 상관없이 기후생태학적으로 지구문명의 종말을 말하고, 스티븐 호킹은 인류가 살아남는 길은 지구를 탈출하는 것이다, 7개월 걸린 여정 끝에 화성 같은 데로 탈출하는 것이다, 이런 말까지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대답은 지구재갱신 프로젝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주를 어떤 모습으로 재편하실지 모르지만 이 지구를 천국으로 리모델링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4장, 요한계시록, 베드로후서 3장 등에는 지구가 옷을 안팎으로 바꿔 입듯이 새롭게 된다고 했고요. 요한계시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지구적 연속성과 새 하늘과 새 땅적인 불연속성이 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했고요. 지구가 태양의 빛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에 의존하는 시대, 낮과 밤이 없는 시대가 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특수한 현존으로부터 오는 빛은 달마다 과실을 맺고, 만민을 지배하는 약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천국의 크기가 12000 스타디온, 2220km의 장방형의 구조를 갖습니다. 2220km면 굉장히 올라갑니다. <그래비티>라는 영화를 보니까 지구 600km위에 있는 우주선에서 일어나죠? 그 4배만큼 올라갑니다. 보통 우주정거장이 지구상공에서 380km에 있다고 합니다. 2220km까지 올라가는 엄청 높은 하늘과 2220km 가는 긴 정사각형의 도시가 천국이라는 거거든요.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속에 숱한 사람들이 산다고 말하거든요. 문자적으로 믿어야 할지 참, 초대교우들은 문자적으로 믿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 명민하고 그리스철학에 정통했고 스토아 철학에 정통했고 이성의 사람이었던 사도바울도 재림을 문자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홀연히 나팔을 불 때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다 변하여서 영화롭게 된다, 그렇게 탁월했고 명민했던 이성의 사람 바울이 한 말이었기 때문에 정신없는 사람들, 열광주의자들이 아니라 지극히 논리적이고 정상적인 지성을 가졌던 바울이 한 말이기 때문에 쉽게 이걸 배척하기 힘듭니다. 저는 바울의 문자적 재림사상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 당시에도 재림을 믿지 않고 성령의 강림이 재림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성령의 병 고치는 은사, 방언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다양한 은사가 나타나니까 예수님이 재림한 것이고 성령의 은사를 누리는 우리야말로 이미 하나님 우편 보좌에 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고린도교회야 말로 하나님 우편보좌에 있는 예수님의 통치거점이다, 라고 말하면서 재림은 없다, 부활은 없다, 지금 이것이 부활이다,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자체는 정통교회로부터 완전히 주변화된 교리가 됐습니다. 요즘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혹시 소행성 충돌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물과 귀금속 같은 것이 소행성 같은 데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영국의 한 학자는 물은 우주에서 왔다, 지구적 자생물이 될 수 없다, 물은 외부에서 온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어쨌든 새 하늘과 새 땅이 위로부터 온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읽을 때는 지구적 원자로 + 외부에서 오는 엄청난 충격, 지구를 파국적 멸절로 몰아갈 듯한 엄청난 충돌이 되면서 지구가 새 지구와 합성됩니다. 그럼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고, 그러면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가는 사람이 누구냐? 이게 문제입니다. 천국이 그렇게 좋다면 그 천국에 딸린 지옥도 괜찮겠지? 스웨덴 감옥 정도는 되겠지, 스웨덴 감옥은 좋잖아요. 스웨덴 감옥은 대한민국 20대 대부분 원룸보다 좋습니다. 화장실 있고 TV있고 식사량 자체도 워낙 좋습니다. 윤구 형제가 먹는 것보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선진국의 감옥도 그 정도 좋다면 마음씨가 좋은 하나님이 관리하시는 지옥도 어쨌든 천국의 행정구역이니까 최소한 지옥에 내가 갇히더라도 간수는 멋진 사람 아니겠나? 간접적으로 천국에 가는 거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부정하기 힘들죠.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지옥마저도 천국적인 아우라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재림이 정통교회에서 주변화되고 여호와증인과 제칠안식일교에서 중심 교리가 된 것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역설적인 signal 이라고 봅니다. 신학자들 중에서 하나님 나라 사상에 정통한 바젤 대학교의 에르슈트 슈트렉헬렌이라는 사람은 여호와증인은 하나님 나라 운동사상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단이라고 보죠. 제칠안식일교를 합동 신학교에서는 이단이라고 보고, 합동 신학의 영향을 받은 최삼경 목사 같은 사람은 이단이라고 보는데 그 사람들이 훨씬 이단입니다. 제칠안식일교는 이단이 아니라 고집이 센 사람들입니다. 토요일만 강조하는, 그러나 그들의 재림사상과 천국관은 오리지널 성경사상과 훨씬 가깝습니다. 여호와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리우스파처럼, 아타나시우스파처럼 하지 않고 less divine God, 하나님의 아들이긴 아들인데 하나님 아버지보다는 파생적인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아리우스파 이단입니다. 그런데 세계 신학계에서 과연 아리우스파를 과연 이단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런 논쟁이 있을 만큼 아리우스파는 이단이 아니라 다른 견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거든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는 신성 또는 직분 또는 무언가에 관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 차이를 강조하면 아리우스파가 되는 겁니다. 저는 그래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보지 말고 연구대상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리우스파, 그런 아리우스파의 반 삼위일체적 분류가 마호메트를 만나서 이슬람이 된 겁니다. 이슬람은 삼위일체를 믿지 못했고 추방되어 동방으로 피난 갔던 단일신론자, 또는 반 삼위일체 주의자들 때문에 이슬람이 나왔습니다. 이슬람은 삼위일체를 가장 극복하기 힘든 교리라고 봅니다. 왜? 유일신 사상과 연결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아리우스파를 잘 이해하면 이슬람 신학자들과 대화할 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재림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야말로 훨씬 이단에 가깝다, 누가? 여호와증인과 제칠안식일교가 더 이단에 가깝나? WCC를 비난하고 있는 한 무슨 총 집단이 이단인가? 저는 단연코 한 무슨 총이 이단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굳이 비교하자면, 그러나 한 모 총에 가는 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천사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걸 통째로 이단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표방하는 가치는 이단에 매우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렇게 오랫동안 재림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재림은 없다, 더디 온다, 재림지연설, 재림불능설, 이런 이야기가 초대교회, 베드로후서 3장에 벌써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재림이 오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재림이 더디다, 왜 약속된 하나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느냐? 벌써 2천 년 전에 재림이 더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재림 자체가 정통기독교 신앙의 일부임을 재림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의 편지로 역설적으로 알 수 있고, 재림을 믿는 것이 정통기독교에 더 맞습니다. 재림을 믿으면 어떤 효과가 옵니까? 문명의 종결,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가는 문명은 끝난다는 걸 믿는 겁니다. 이런 방식의 탐욕과 압제와 아담 인류의 죄성이 지배하는 주류문명은 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접목된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한 번 제 2차 아담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life in the age to come. 오는 세상에서의 생명이 영생입니다. 이건 톰 라이트가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라는 책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영생, eternal life라는 뜻 자체가 이런 겁니다. 성경에서는 오뉴월의 엿가락 늘어지듯이 계속 무시간적인 삶이 아니라 새로 시작되는 나라에서의 삶, living in the age to come, 앞으로 올 세상, 로마서 12장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할 때 이 세대는 fading age, 이제 사라지는 세대, 탐욕과 갑과 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가 지배하는 나쁜 세계는 사라지는 세계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다가오는 세대를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새로 시작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지속가능하고 용납 가능한 삶입니다. 그 영생,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담금질 된 사람들에게 합당한 사회생활이 유지됨으로 말미암아 그 합당한 사회생활에 담금질 되고 연단된 사람들만이 실험해보는 삶입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인류가 천사들과 우주 앞에서 하나님이 왜 아담을 창조했는지, 만천하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옳았음을 우리가 입증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님과 경합하던 열등한 대적천사들 등 정사와 권세자들 앞에 어떤 놀라움을 안겨주느냐? 아담창조가 하나님의 대 실패 프로젝트라고 비난했던 정사와 권세 대적 천사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심사숙고 끝에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 어떤 죄의 유혹에도 이겨가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으뜸성을 실천하는 장면을 보면, 정사와 권세가 놀라고 입을 가리며 잘못했다고 소리치며 줄줄이 하나님께 항복하고 들어오며, 설복당하며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순복하는 사태가 온다는 거죠. 정사들과 어두운 우주적 반역천사들을 누가 굴복시키느냐? 아담인류의 새로운 삶에서 시작되는 공동체생활입니다. 사회생활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잘 읽어보면 어떤 시나리오가 나오느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우리를 지상에서 훈련시켰다가 천국 갈 사람들을 뽑아서 천사들과 함께 우리를 데려다가 2200km 공동체 안에서 모든 우주적 천사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제가 볼 때 그 때는 중력의 법칙이 상당히 없어서 우주유영 같은 게 가능하지 않겠나 봅니다. 우주선과 전자파의 방해 없이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놀랄 만한 세상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장면을 볼 때 아담을 창조하여 실패하고 죄와 파괴적인 인간성으로 얼룩진 옛날 역사를 복기하면서 하나님을 비난하고 조롱했던 반역천사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돌아오는 날들이 옵니다. 그게 바로 빌립보서 2장 10-11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건 아담 인류의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사와 권세자들을 굴복시켜서 하나님의 우주적 왕국에 순복을 유도하는, 우리가 일종의 앞잡이가 되는 거죠. 천국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 새 하늘과 새 땅, 지구적인 질료와 metal, 문명의 질료, 우리가 이루었던 성취물, 이런 것과 창조적인 융합을 해서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려면 지구적인 기억이 보존돼야 합니다. 만일 역사 안에서 억울한 일이 보존 안 되면 눈물을 씻겨준다는 말이 안 됩니다. 지구적 기억을 완전히 망각하고 새로운 혹성 타이탄에 가서 살겠다고 하는 SF영화 같은, 요즘 어떤 영화 있죠? 타이탄으로 이주 가고 지구 문명을 다 떠나라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 떠나지 않고 살아남는 이야기 있습니다. 무슨 영화인데 기억이 안 납니다. 우리가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 가서 살면 지구적인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도 다 모르고 한일합방 아베의 정신 나간 소리도 다 모르고, 정신대 위안부 할머니도 모르고, 우리가 딴 사람이 돼 있습니다. 연체동물 비슷하게, 이렇게 되는 사태가 아니죠. 타이탄에 가서 중력의 법칙도 없고 울렁울렁 날아다니며, 우리가 어디서 왔죠? 이런 게 아닙니다. 지구적 기억이 그대로 보존된 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해야지, 저 안드로메다 별자리에 가서 할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안네 프랑크 앞에 히틀러가 무릎 꿇는 날이 온다는 거죠. 아홉 살 아이가 굶어 죽었잖아요. 나가지 못해서 굶어서 죽었거든요. 나치를 피해 방에 숨어 있다가 마침내 굶어 죽은 이 아이가 히틀러의 용서를 빌며 무릎을 꿇는 그 모습을 봐야만 눈물이 씻어지는 거죠. 그래야 망각이 되는 거죠. 히틀러 앞에 안네 프랑크가 용서를 선언해야만 하나님이 눈물을 씻어주는 거예요.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만행 앞에서, 일본의 기시 노부스키, 아베의 외할아버지였던 나쁜 놈들이 했던, 미츠비씨 아주 악한 놈들이 했던 모든 죄를 낱낱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게 하고 그 죄를 뉘우치게 만들고 그 죄를 신원해주셔야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정받는 하나님이 됩니다. 저는 이 일이 지구에서 일어나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이곳에서만 그것이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 말은 여기가 여전히 지구적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바다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천국은 요한계시록 7장 7-9절에 보면 모든 민족의 ethnic identity가 그대로 보존됩니다. 천국 가면 헬라어로 말한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굉장히 무식한 세대주의자입니다. 천국 가면 우리가 다 히브리어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자체가 가나안 방언입니다. 히브리어가 시돈 사람이 썼던 언어입니다. 성스러운 언어가 아니라 성경이 기록될 때 coincidentally 우연히 성경 언어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각자 언어를 쓴다고 돼 있습니다. 우리의 ethnic identity가 바뀝니까? everybody 눈꺼풀 바뀌어요? 아시아인은 대부분이 그대로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약간 미학적인 미세조정을 해주시겠지만 제가 볼 때는 전부 다 만족할 만한 자기 얼굴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서로 identity를 알아봅니다. 왜?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 내가 당신과 옛날에 자녀관계였고 부부관계였던 것이 말소되고, 자매님 안녕하세요? 악수하면서, 이건 아니죠. 우리가 부부관계를 배타적으로 유지하지 못했을지라도 배타적 1차원적인 핵가족을 유지하지 못했어도 그 모든 인연은 창조적인 발전을 한 거죠. 아기를 낳고 인구증감이 없기 때문에 사랑은 오늘날 육체적인 방식의 사랑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사랑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 사랑은 분명히 성스러움을 누적시키고 증가시킬 사랑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지구적 연속성이 많은 아름다운 축제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이를 간다는 것은 여러분께서 너무나 가고 싶은 그 클럽에 내가 입장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무시무시한 고독감, 그것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를 가는 장면입니다. 이를 간다는 말은 슬퍼하고 후회한다는 말이거든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를 간다는 말은 복수 절치부심, 이런 거잖아요. 성경 언어에서 이를 간다는 말은 땅을 치고 통곡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은 본문에 보면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으시고 나서 그 앉으신 시점부터 시작해서 지구를 감찰해오신 모든 데이터에 근거하여, 이런 뜻입니다. 거기로부터 오신다는 말은 주님이 하나님의 우편보좌의 초월적인 감찰의 지점에서 다 보고 나서 그걸 근거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온다는 겁니다.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우편보좌에 예수님이 앉으셨음을 입증하는 길은 간접적인 추론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 26절, 15장 26절, 16장 7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보혜사성령이 여러분을 덮치는 그 순간 내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았음을 기억하고 내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어달라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주님의 부활과 승천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말은 주님의 부활은 믿는 사람에게만 나타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변명할 수 없어요. 주님의 성령파송하심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날 아침 9시에 일어난 사건이고,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마저도 본 사건이고, 9시에 새 술에 취한 사람처럼 각자 난곳 방언으로 말하는 숱한 세계인들의 바벨탑의 저주가 풀어지는 이런 기이한 현상은 만민이 다 경험한 거거든요. 여기서 추론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았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님을 받자마자 예수님이 우편보좌에 착석 하셨음과 우편보좌에서 통치하심을 믿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았음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지성의 논리가 명증하게 정돈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우편보좌가 믿어집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우편보좌가 믿어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시는 증거 때문에 나에게 매일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대상을 적절하게 배치해주시고 앞과 뒤에 내 사랑을 쓸 사람을 보내주심으로 내가 이웃 사랑을 매우 구체적으로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토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 자체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편보좌에 계신 그리스도와 나의 신앙고백이 합치를 이루지 못하고 내 신앙고백은 내가 혼자 하는 염불수준으로 떨어지고 하나님과 우주적 교신이 이뤄지지 않으면 내가 무얼 해야 할지 모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영과의 교제가 없는 겁니다. 어떤 사람도 내 이웃이 누군지 몰라서 사랑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거듭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내 역량을 배려해서 적절하게 이웃을 보내주시고, 내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 구체적 맥락을 제시하십니다. 제가 경험해보니 100% 맞습니다. 제 신앙초기에 도대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제 경험과 이웃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의 경험을 종합해보건대, 모든 신실한 성도들은 이웃 사랑을 하기에 이웃이 누군지 몰라서 이웃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전부 다 매일 순종단위가 제시됩니다. 오늘 네가 이 순종을 해야 한다, 거룩히 인도를 받습니다. 그런 인도가 없으면 하나님 자녀가 아닌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서울역 대합실에서 표를 끊으려는 사람이지, 아직까지 표를 끊고 기차 안에 타지 않은 겁입니다. 우리가 경부선 표를 끊고 타야 하잖아요. 그러면 두 시간 있으면 부산에 도착하죠. 어디 가는가 표 끊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진짜 말씀을 펼쳐도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말씀과 사하라 사막의 모래알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을 펼치자마자 나에게 우주적 교신을 불러일으키면서 내가 어디에 순종해야 하는가, 순종의 마디, 내가 당면한 순종의 과제를 딱 집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런 말이 가능한 겁니다. 로마서 8장 5-11절이 참 중요합니다. 내가 영의 사람인가 육의 사람인가는 하나님이 나에게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 내가 하나님의 영토 안에 들어가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영토 안에 들어가자마자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수준에서 반드시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감청능력을 영구적으로 닫아버리십니다. 기도와 찬양이 없고 말씀을 아침마다 읽지 않고 날마다 말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 감청능력이 없기 때문에 16-20000 데시벨의 소리만 들리잖아요. 우리 귀는 16-20000데시벨의 소리만 들리는데 하나님 말씀을 영구적으로 감청할 능력이 없는 겁니다. 시편을 읽어보세요. 하나님 말씀이 안 들리면 안 들린다고 부끄러워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저는 하나님 말씀을 펼쳤는데 내가 정말로 깨달음도 없고 공감도 안 됩니다, 그러면 영토 바깥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쓰시마에 있으면 일본사람 말이 들립니다. 쓰시마에 가면 일본방송이 들려요. 그러나 독도에 가면 한국방송이 들립니다. 쓰시마는 일본 영토이기 때문에 방송을 틀자마자 일본 아베 수상의 말이 들리고, 여기 대한민국은 한국사람 대통령 말이 들립니다. 그 이유는 영토와 주권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 백성인데 하나님 음성이 안 들려온다? 하나님 백성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무엇인지 기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눈을 감았는데 성도들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과업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스캔이 되지 않는다, 그건 영토 바깥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으셔서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성령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착석하심과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을 수 있고요. 내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걸 믿으면 교회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걸 믿을 수 있고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걸 믿으면 온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복속될 것을 믿는 담력이 생깁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우편보좌에서 무얼 하실까? 첫째 성령을 보내주셔서 숱한 순종, 하나님의 친 백성을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일을 합니다. 죄 사함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이 땅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복속하실 때까지 쉼 없는 성령파송하심과 죄 사함의 역사를 계속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새로 믿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고 거듭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고 세례 받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면 하나님 통치의 증거입니다. 둘째 의인의 회중이 굳건하여 열매를 맺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 공동체가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어서 만국을 치료하는 약제, healing community가 되고 이 세상의 중심과제, agenda를 설정하고 추진하는 핵심기관으로 떠오른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교회의 영적용량과 부피가 축소되고 교회의 agenda가 형편없으면 도덕적 하나님 통치를 영구적으로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때 발생하는 무신론자는 누가 발생시킵니까? 믿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심판이 엄청나게 큽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더 큽니다. 셋째 창조주 하나님이 일반 역사를 포괄적으로 통치합니다. 세 번째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도 오시기 전에 이 세계가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영구적으로 이탈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계 모든 문명, 세계 모든 고등종교와 철학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만 말할 수 있는 사상을 다 말해왔습니다. 세계 모든 고등종교의 특징은 사랑과 자비의 으뜸성과 하나님은 마땅히 공의로워야 한다는 일반적인 선이해를 다 피력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인디언 추장의 말, 마추픽추의 제사장 언어, 세계 모든 종교인들의 신관념을 합성해보면 놀랍게도 성경의 언어와 99% 같았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걸 믿지는 못합니다. 이 세계가 포괄적으로 이성과 양심의 통치 아래 있고, 이성과 양심을 만드셔서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을 일으켜주셔서 역사가 완만하게 선을 지향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옛날에 왕들은 세습시대, 운명적으로 왕조의 아들로 태어나면 왕이 됐죠? 지금은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인민이 왕을 뽑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인민이 왕을 뽑는 시대로 가면서 자유 평등 박애가 세계역사의 향도이념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이 없다면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이 없는 겁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처음으로 왕을 단두대에서 목을 날리고 공화국적인 인민의 의사로 지도자를 선발하기 때문에 이렇게 공화국적인 정치실험에서는 가면 갈수록 악한 지도자는 통치를 못합니다. 예수 그리심도의 통치만이 영구적으로 인정받습니다. 유능하고 완벽하게 정의롭지만 지배하지 않는 왕, 이 왕이 인류가 찾고 있는 왕입니다. 이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의 자유 평등 박애의 중심방향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평행선을 이루며 달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의 통치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향점을 모릅니다. 인류의 중심적인 방향자체가 엎치락뒤치락 하면서도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적 통치를 목말라하는 쪽으로 포괄적 단순화입니다. 이 포괄적 단순화가 숱한 증거로 뒷받침 되고 있다고 봅니다. 반대로 인류는 점점 나빠지고 있다, 그렇게 말해도 됩니다. 왜? 인류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측면은 요한계시록적 묵시록적 재난으로 몰려가기 때문에 맞습니다. 다만, 인류가 요한묵시록적 엄청난 악인과 지고지순한 선한 의인과의 결승전을 준비하고 있는 건 맞습니다. 요한계시록 14-19장까지는 어린 양의 인을 받은 지극히 순한 거룩한 백성들과 거대한 용들과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종국을 두 가지 다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역사는 분명히 인류문명의 선악간의 큰 싸움에 결승전에 오를 악인을 준비시키고 악인을 연단시키는 과정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촉진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유발할 수 있는 어린 양의 인 맞은 자들, 지극히 순결한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통치를 입증하는 겁니다. 주님의 통치가 시작됐기 때문에 악은 점점 소멸되고 선이 보편적으로 대파국적인 혼란 없이 선한 사회가 되는 것, 이것을 우리는 후천년설이라고 말합니다. 이 후천년설이 제가 볼 때 굉장히 문제가 있는데, 인류는 분명히 악한 자들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이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해결될 문제이지, 개선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는 후천년설보다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믿는 쪽입니다. 역사는 어린 양의 인 맞은 자들과 정말로 극악무도한 악인들이 결승전에 올라 대파국적인 미래를 직면하게 되는 때가 온다, 저는 이것이 성경이 그려주는 큰 그림의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봅니다. 디테일하게 일대일로 매칭 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나 큰 그림은 맞는 겁니다. 보십시오. 이걸 칼 하임이라는 신학자는 악의 종말 진압이라고 말했습니다. 악의 종말진압이라는 이론은 보통 쿠데타는 초동진압을 합니다. 어떤 쿠데타도 초동 진압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은 악의 모든 카드를 다 쓰게 만드십니다. 악의 모든 무기를 다 쓰게 만드시고 악이 더 이상 동원할 수 없이 무기가 바닥났을 때 악을 항복시키는 게 아니라 악을 설복시키기 위하여 종말 진압합니다. 이것이 칼 하임이 말하는 종말진압설입니다. 이 종말진압설에서 악은 극댓값을 다 발휘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악의 극댓값, 극한 위력을 누가 맞상대해주느냐? 어린 양의 인을 맞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수하지 않고 모든 희생의 내용을 감내하면서, 악과 싸우면서 악을 안고 논개처럼 죽어야 합니다. 악을 안고 악과 함께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그런 역사가 저는 진행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말한 것은 저는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있고 주님의 재림은 역사의 모든 진행과정을 감찰한 결과 이뤄지기 때문에 절대 공평무사할 것을 믿고 있고 비로소 산 자와 죽은 자를 반드시 갈라놓을 것을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섞여 있기 때문에 참세상은 좋습니다. 아무리 사장님이 돈을 다 삥땅하고 분식회계해서 비자금으로 돌려도 착한 사원들이 무조건 일하기 때문에, 우리를 절망시켰다가 순식간에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인간들도 있습니다. 안철수 문재인 박근혜,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절망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순식간에 기이한 의인들이 나타나서 지구는 살만하다, 이렇게 됩니다. 음악가로 말하면 쇤베르크의 교향곡만 들으면 묵시록적 재난만 생각나는데,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지구도 살만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쇤베르크가 히틀러의 무시무시한 악을 경험하고 나서 작곡을 해서 그렇게 음악이 무섭다는 평론가의 글을 읽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구별이 안 됩니다.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은데, 아무튼 우리 모두가 이 세계가 주님의 재림으로 동화 같은,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시고 중력이 없는 빈 공간을 통해서 승천하셨다가 낙하산도 안타시고 내려오시겠다고 하는데, 동화 같은 이 그림을 믿습니다. 제가 이걸 안 믿으려면 다른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제가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올라가는 그 모습 그대로 내려온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연구를 더 많이 해서 좀 가르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승천한 걸 그대로 믿습니다. 저는 중력이 없는 빈 공간으로 주님이 올라가셨다고 믿고 있고 제자들이 나자빠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걸 보고 못 믿었습니다.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박해한 자도 보리라, 예수님이 재림할 때는 회개하고 넘어졌습니다. 산채로 포획당합니다. 재림 전에 회개하는 것은 마음에 설복을 통해서 주께 전향하는 겁니다. 찌른 자가 예수님을 보는 순간 유죄 상태로 포획당하기 때문에 심판이 있습니다. 여러분 전혀 무서워하지 않네요. 재림한대도 안 무서운 걸 보니까 둘 중 하나입니다. 아예 인생을 포기했거나 구원의 확신 속에 있거나, 여러분은 후자가 되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과학적 세계관에 무장된 우리가 볼 때는 기이하게 승천하시고 올라간 그 모습 그대로 온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무리 현대과학이 발전하고 천체우주물리학이 발전해도 지성인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여 하늘로 올랐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은 쉽지 않고, 또한 그대로 내려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도 쉽지 않지만 우리가 달리 대안 없이 이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모습의 확실성 때문이 아니라 주님 인격의 신실성 때문입니다. 주님 이 파국적 대단원으로 치닫고 있는 역사를 종결시켜 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저희를 초대해주셔서 정사와 권세와 반역천사들 앞에 우리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성취되는 과정을 우주에 모든 영물들 앞에서 피조물 앞에서 다 공인되게 하시고, 옳다고 인정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는 마음으로 우주적 교신을 통하여 내가 구체적으로 주님의 통치권 아래 머문다는 확신을 나날이 더하여 주소서. 성령으로 인도함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우편보좌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사도신경 신앙고백 제5조입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감찰하셨던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모든 자료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산 자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재림과 심판의 고백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 제20권에서 최후심판 전에 하나님은 항상 중간심판을 끊임없이 해오셨다고 말합니다. 최후 심판 전에 국가를 통하여, 부모를 통하여 또는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 죄를 심판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가기관을 통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심판들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님을 통해서 심판 받습니다. 그래서 국가기관과 공동체와 가족 안에서 받은 심판은 충분히 완전하고 공평한 심판을 예기하는, 기다리게 만드는 심판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그동안의 하나님 심판이 끊임없이 있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중간심판의 불충분성을 일괄정산하고 일괄 해결하는 심판입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중간 심판, 하나님께서 그동안 해 오셨던 심판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을 충분하게 하는 심판, 둘째로 지상의 권력자들에 의해서 잘못 이루어진 심판을 교정하는 궁극적 심판입니다. 최후의 심판에는 불충분한 심판을 충분한 심판으로 바꾼다는 뜻도 있고 잘못되고 공정하지 못한 심판을 바로잡는 심판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심판한다는 뜻은 구분하여 갈라놓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데 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와 하나님의 요구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죽은 자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걸 우리는 영인과 육인 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5-11절에 따르면, 영의 생각을 하고 영을 따르며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순복하는 사람이 영인입니다. 육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요구를 묵살하면서 자신의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충동성 아래 지배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섞여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산 자가 죽은 자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면서 이 세상을 사람답게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회사 사장이 회사돈을 빼돌려서 아무리 악한 짓을 하더라도 회사돈을 빼돌리지 않는 정직한 사원들이 회사를 계속 꾸려가기 때문에 기업체는 유지됩니다. 그런데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아니라 완전히 극악무도한 죄수들이 가득 차 있는 감옥을 생각해보십시오. 극악무도한 죄수들만 있는 곳, 단테의 <신곡> 제1편 지옥편 첫마디가,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다 희망을 버려두고 오라, 지금부터 지옥에서 펼쳐지는 모든 장면들은 희망 갖는 것을 조롱하게 된다,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에 갔더니 지옥에 있는 고통을 아무리 겪어도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동정심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 고통이 가장 큰 것처럼 여기고 서로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교감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지옥경험을 하면 지옥경험이 일생 동안 따라다니기 때문에 산 자의 땅에 나와서도 지옥에서 보았던 무시무시한 충격 때문에 정신 건강이 심각하게 손상됩니다. 외상후 스트레스입니다. 프리모레비라고 하는 유명한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작가는 <이것이 인간>이라는 책에서 아우슈비츠의 잔악한 학살, 단테의 <신곡>보다 더 무시무시한 학살장면을 기억하면서 엄청난 잔악한 행위가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전달해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이해 못하니까 그가 책을 쓰고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문학상을 받자마자 자살을 합니다. 왜? 자기가 받았던 이 충격을 5월에 피는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서 전원에 가서 파티를 하는 사람들은 영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 지옥경험을 전달할 길이 없어서 죽음으로써 전달합니다. 아우슈비츠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그 잔악한 감옥살이는 끝났지만 나는 이 아우슈비츠의 악령에 시달리면서 자살한다, 하면서 죽었어요. 똑같은 포로수용소였는데, 독일의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벨기에 포로수용소와 스코틀랜드 영국포로수용소 두 군데에서 약 5년을 보냈는데, 아우슈비츠와는 전혀 다른 수용소입니다. 친절이 넘치고 존엄성을 고양시켜주는 기독교적 감옥입니다. 독일의 젊은 19살 되는 소년포로를 영국 스코틀랜드의 이모 삼촌 아버지 같은 군인들이 얼마나 친절하게 대우했는지, 파괴된 고향 함부르크의 상처를 잊게 만드는 친절을 맛봅니다. 이 기막힌 사랑을 경험하면서 무신론자 집안에 태어났던 함부르크의 열아홉 살의 소년, 물리학자가 되길 원했던 위르겐 몰트만은 신학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자랐습니다. 그게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5년간 포로생활입니다. 똑같은 포로생활인데 몰트만처럼 기독교적 친절을 경험하고, 영국 포로생활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독일이 영국군의 폭격으로 무너졌지만 독일이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히틀러를 제압하기 위해서다, 독일 사람은 우리와 형제자매다, 앞으로 전후 독일의 교회를 누가 회복하느냐? 독일의 영적지도자가 누가 되느냐? 여러분 중에서 독일의 전쟁복구를 서두를 수 있는 영적지도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이 없느냐? 공부 다 시켜주겠다, 하면서 포로수용소에서 신학교육을 시켜줍니다. 수능시험 치게 만들어줍니다. 자기는 고향 땅 함부르크에서 맛보지 못했던 친절을 스코틀랜드에서 맛봅니다. 그래서 자기를 돌보았던 포로 간수들과 일생동안 의전이 계속됩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섞여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은 절망 죽음 자살 등을 강요하는 무시무시한 죽은 자의 공동체도 있고,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살하려고 했던 열아홉살 소년의 마음을 목련꽃처럼 피어나게 만드는 친절도 있습니다. 앞으로 천국에는 이런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겠다는 겁니다. 너무 무서운 겁니다. 산 자의 공동체와 죽은 자의 공동체를 갈라놓는 그 일, 역사적으로 악인은 형통하고 번영하고 의인들은 씨가 말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상적인 우리 경험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약간 과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글픈 신문기사를 읽을 때, 한국 공무원들 다 나쁜 놈들이야, 쓸 만한 인간 아무도 없어, 그렇게 과장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쓸 만한 공무원이 더 많다고 봐야 합니다. 선생님들 다 엉망이야, 엉망이 아닌 선생님들이 더 많습니다. 목사들 다 엉망이야, 아닙니다. 엉망 아닌 목사들이 약간 더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장을 합니다. 나쁜 경험을 하면 모두 다 엉망처럼 들립니다. 시편 1편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의인은 울울창창한 달마다 가실을 맺는 상록수 같은 공동체가 된다, 그런데 역사의 경험을 보면 의인이 악인의 지배적 양상 앞에 항상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는 정도로 감질나게 하나님의 의에 굶주리게 만드는 역사가 대부분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 감사하느냐? 그렇게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을 어디서 그렇게 많이 불러내서 공직으로 불러들입니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것 같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추잡하고 더러운 사람을 불러 올려서 우리를 창피케 하고, 대한민국 사람들 너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된다, 이렇게 훈계를 해줘서 너무 감사하고 제게 목마름을 크게 더해줬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삶 자체를 볼 때 저렇게 지저분한 사람도 대통령이 되는 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치마 두른 박정희라는 이름을 가진 현 대통령은 유신태자당의 자녀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여서 모든 장관을 다 맡깁니다. 병역을 거부했거나 세금을 내지 않았거나 논문을 표절했거나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나쁜 질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나라 대한민국 공직자로 추천합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를 간절하게 구합니다. 내가 이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한 번은 왜 대한민국이 이런 사람밖에 없는가를 더 사무치게 한탄하면서 대한민국에 옳은 인재를 길러내지 못한 영적지도자로써, 대한민국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타락하게 만든 공동체 일원으로써 내 책임이 너무나 크구나, 내가 너무나 잘못 살았구나, 이런 느낌을 갖게 만들어줬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만들어준 데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심판 전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인생의 장엄한 드라마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순식간에 구분하여 갈라냈습니다. 시편 73편과 37편은 존재감이 많고 온 세계를 뒤덮은 것 같은 악인도 하룻밤 새 없어져 버리고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존재감도 없고 겨우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의인들은 갑자기 보니까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엄청 자라 있고, 큰 의인의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여서 묘한 매력이 있는 세상에서 다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섞이지 않고 산 자는 산 자대로 죽은 자는 죽은 자대로 갈라놓는 심판을 하러 우리 주님께서는 오십니다. 주님은 근거를 가집니다.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감찰하신 결과를 가지고 모든 개개인을 심판대 앞에 세웁니다.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섭니다. 심판대 앞에 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은 우리는 우리 죄가 주님 앞에 십자가 안에 못 박힌 이래로 고린도전서 5장 10절에 나오는 각기 심판대 앞에서 자기 행한 것을 고하는 자기 인생의 모든 행위를 낱낱이 기억해서 아뢰는 통과의례가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고백했고 일괄 정산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심판대 앞에 서지 않습니다. 그러면 신자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상을 주기 위하여 분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아시고 우리를 심판대 앞에 세워서 상을 주십니다. 이것이 의롭고 거룩하게 산 개개인과 공동체에게 주시는 위로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점점 악인의 비중이 커져 가는 세상에 살면서 기회주의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찬 우리를 항상 깨어 있게 만들기 위해서 심판의 확실성을 들려주시고 심판의 미래를 반드시 보여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다 감찰하고 계십니다. 내가 사는 삶의 동선을 아시고 내가 하는 행위들의 경중을 달아보시고 내가 남들이 다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했던 선과 악도 다 아십니다. 그런 모든 것을 일상적으로 일괄하여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은 개인단위의 심판이면서 국가 단위의 심판이면서 공동체 단위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이 더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 주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분명히 역사 안에서도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믿는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믿는 쪽에 속합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그대로 오실 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저는 문자주의자입니다. 바울과 누가는 허튼 사람이 아닙니다.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금도 명민한 이성을 가진 우리가, 과학적 법칙을 믿는 우리가, 천체물리학적 우주법칙을 다 믿는 우리가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시고 하나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지성의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는 공간을 이용해서 낙하산 타지 않고 내려오실 것을 믿습니다. 이성의 사람, 과학적 세계관에 세뇌당한 우리가 이걸 믿으면 순진하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마저도 저를 보고 순진하다고 합니다. 너는 그게 다 믿기냐? 저는 다 믿깁니다, 아이고 순진하다, 우리 어머니가 보기에도 제가 순진하답니다. 그걸 다 믿으니까요. 이렇게 믿는 길 외에 달리 믿는 길이 있으면 믿겠지만 어머니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심판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지 않고 기독교적 원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진짜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심판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진짜 심판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믿는다는 것은 의인의 회중에 들기 위해서 도덕적 분투를 일삼는 것을 가리킵니다. 의인의 회중에 들기 위해서 도덕적 분투를 하는 과정에는 어떤 시험거리가 있느냐? 예레미야 12장 1-3절에 나오는 시험거리가 있습니다. 악인이 형통하여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된다는 것, 훨씬 악인이 더 잘 되고 있고 기회주의적인 습성을 가진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원리적으로 믿고 있는, 우리가 무식하며 매우 어리석은 자임을 조롱하는 것 같은 악인의 번성과 번영이 우리에게 시험거리가 됩니다. 우리에게 시험거리를 안겨주는 악인의 형통함과 줄을 대고 인맥을 대서 협착과 모든 사기를 동원하여 출세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볼 때, 너무 기독교를 순진하게 믿었나? 내가 존재감 없이 사는 것이 순전히 신앙 때문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피해의식이 가득 찰 때 그런 것을 막아주는 것이 도덕적 감수성, 영적 감수성입니다. 의인의 회중에 드는 것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런 도덕적 분투, 이것이 바로 심판을 믿는 하나의 현재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얼 근거로 우리를 심판하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근거는 요한복음 5장 27절에 나옵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우리 주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 죗값을 갚았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채권자입니다. 우리에게 채무를 갚으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 채권자입니다. 주님은 creditor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주님처럼 살도록 느끼는 부담감을 줍니다. 왜? 주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다 일괄 정산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용서를 받는 순간 주님을 닮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는 존재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 한 사람에게 빚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 죄를 심판하실 유일한 근거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 죄가 주님 안에서 심판 당했음을 믿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내 죄 때문이라고 믿는 순간 죗값, 채무를 다 청산한 것이라고 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고난을 보고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를 당했는가, 내 죄 때문이고 내 저주 때문이고 내 죄 때문에 비참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믿는 순간 내가 주님을 향해서 모든 채무를 청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다시는 심판자로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럼 주님은 우리에게 왜 옵니까? 우리를 산 자 안으로 골라내기 위해서 오십니다. 우리를 산 자 공동체, 의인의 공동체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재림하십니다.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세계를 통치하시고 통치하신 그 결과 데이터를 가지고 재림하실 텐데, 주님이 우리 가운데 통치하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계셔서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산증거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을 때 우리는 세 가지를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 순전히 영적인 확신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15장 26절, 16장 7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사건은 과학적으로 입증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은 예수님의 적대자들도 모두 다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120 예루살렘 문도가 아침9시부터 술 취한 사람처럼 방언하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추론하건대 성령이 임한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으셨음을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앉으셨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편보좌에 계셔서 왕적 통치를 행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왕적 통치의 제일 첫 번 스텝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 율법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감동 없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만일 성령의 감동도 없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강요된 명령을 받으면 정신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당하고 내 존재가 떨어집니다. 내 몸무게가 40kg밖에 안 되는데 100kg짜리 물건을 지고 가라고 도덕적 강제노역장에 간 인부와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의 부단한 감동과 지성의 조명과 의지를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는 총체적 능력을 구비케하신 후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는 개념, 매우 추상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어떻게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내가 하트를 만들어 담배연기를 뿌려가면서 I love you God, 이렇게 하는 겁니까? 이렇게 추상적으로 들리는 계명이 성령을 받고 나날이 성령의 감동 속에 사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건 비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는 순간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뜻이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을 만나게 되고 사태를 만나게 되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요, 소말리아 해적이 제 이웃인가요? 요덕스토리에 나오는 북한도 이웃인가요?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묻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말장난에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 사랑할 이웃을 한 사람씩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추상적으로 들리죠?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추상적인 게 아닙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상생활에서 친히 경험하게 됩니다. 이건 신비로운 일입니다. 순종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런 계명을 듣고 어떻게 내가 다 이웃을 사랑해, 이웃이 벌써 103호 105호 벌써 10명인데, 누구를 사랑하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웃 사랑할 준비가 안 돼 있는 겁니다. 딱 한 사람만 주십니다. 내가 이웃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만큼, 내 힘을 다하여 내가 이 맥락 안에서 힘을 다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방식으로 이웃 사랑을 하게 하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이런 신비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이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아시아가 내 이웃입니까? 저 아프리카의 빈민이 이웃인가요? 이렇게 물으면 하나님은 조롱 빈정거리는 말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에 감동 받고, 하나님 정말 저는 제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뜻이 알고 싶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를 실천을 통해서 확증하고 싶으니까 제게 이 말뜻을 이 성경구절을 납득할 수 있도록 사건을 일으켜주시고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하면 전화가 옵니다. 형 한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돈을 요구하는 사람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 함께 있어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다 나타납니다.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가 김승옥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그 소설의 첫 장면이 오늘 자기 아내를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아내를 사고로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이 준 돈을 가지고 포장마차에 온 사나이의 넋두리로 시작합니다. 포장마차에는 친구 두 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오늘 밤에 나랑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고 소리칩니다. 아내를 잃고 마음이 너무 황량한 이 사람이 죽고 싶은 이 사람이 묘하게도 포장마차에서 만난 두 사람과 우정을 나누고 싶어 있어 달라고 하는데 이 두 사람은 포장마차에서 술만 얻어먹고 여관까지 갔다가 잠을 자지 않고 나와 버립니다. 이 사람이 계속 있어 달라고 한 게 이상해서 다시 가보니까 자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겁니다. 참 놀라운 것은 한 시간만 내게 흉금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으면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는데, 그때 한 시간을 요청 받는 사람이 이웃 사랑의 요청을 받는 거거든요. 한 그릇 국밥을 사 주는 사람, 옆에 있어주는 것, 그런 것이 이웃 사랑이니까 절대로 신비한 영적감흥의 세계에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한테는 너무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이렇게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 amazing 하신 분입니다. 진짜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기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알게 해주십니다. 이게 심판을 믿는 것이고 재림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첫째 내가 부단하게 성령의 내적 감화감동을 받아 가면서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나날이 해 가는 이 과정 자체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계신 산 증거입니다. 둘째 누가복음 24장 47절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통치하는 증거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회가 죄 사함의 복음을 잘 전파해서 구원 받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면, 교회가 이 사회 중심 agenda를 잘 설정하여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이름으로 사회의 sociological한 evangelical한 복음의 outreach를 많이 하고 손을 많이 뻗을수록,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세계를 통치하는가 보구나, 확신이 듭니다. 죄사함의 복음, 사회적 개인적 구조적 죄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일어나는가 보다, 라고 생각합니다. 윌버포스라는 사람과 존 피터라는 서로 정당이 다른 젊은 하원의원이 약 30-40 년에 걸쳐서 1807년에 노예무역제도를 폐지하고, 1830년대에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약 40년이 걸렸습니다. 영국이 미국보다 30년 먼저 노예제도를 폐지했습니다.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진짜 노예가 많이 필요할 때 영국 기독교인 때문에, 노예가 너무나 많이 필요한 1830년대 노예제도를 폐지한 나라가 영국입니다. 누가 했습니다. 샤프트 베리 윌버포스, 클래팜이라고 하는 일련의 기독교 청년동아리, 30년에 걸친 우정의 산물입니다. 영국 사람들이 엄청 불평했습니다. 옛날에 하녀가 하던 설거지를 교수가 하고, 역사가 후퇴했다고 했습니다. 노예제를 폐지하니까 노예가 설거지를 안 해주니까 옥스퍼드 대학 교수들이 설거지를 하면서, 교수가 설거지를 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인가? 이러면서 빈정거립니다. E H 카아가 <역사의 진보> 5장에서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역사의 진보가 어떤 사람에게는 퇴보처럼 보인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때 영국 교수는 자기가 설거지를 하면서 역사의 퇴보를 개탄하지만 사실은 노예 해방의 대가거든요. 역사가 진보하면 내 소득이 감소하고 내 불편이 더 드러날 수 있어요. 역사가 진보하여 5개 면의 식수를 고갈시키는 골프장을 대한민국에서 못 지으면 골프 치는 사람들이 감질나서 막대기만 보면 정신적인 우울증에 걸려요. 우리나라에서는 골프장이 식수원을 고갈시켜요. 그래서 골프를 치면 안 됩니다. 치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치지 않습니다. 저도 골프 좋아합니다. 한 번도 안 쳐 봤지만 좋아합니다. 그러나 저는 대한민국에서는 안 칠겁니다. 골프가 그렇게 좋은 운동이라면 천국은 진짜 천연 골프장, 농약 치지 않아도 되는 골프장, 식수원을 고갈시키지 않는 골프장이 있을 거라고 보고, 우주를 무대로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생 동안 골프 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게 총장이 골프채를 공짜로 줬습니다. 실장님도 가자면서, 저는 안 갔습니다. 차라리 돈을 주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총장이 골프채를 통째로 주면서 같이 가자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 말고는 다 치기 때문에, 교목실장이 안 가니까 불경한 마음이 든다면서요. 지금은 동사무소 과장만 돼도 골프를 칩니다. 저는 골프를 치고 싶지만 못 치는 그 마음을 하나님 나라에서 칠 것을 믿으며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을 때 칠 것을 생각하면서 참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내게 불편을 감수하게 했고 내 욕망의 억제, 내 삶의 무게중심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의 우편보좌에서 세계를 통치한다는 증거는 내 개인의 삶을 신령하게 인도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부단하게 모험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는 그 자체가 큰 증거입니다. 둘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구조적 죄사함, 나쁜 제도의 철폐, 악한 사회구조의 철폐, 악한 법들의 폐지, 상처 입은 개인들의 인격적 영혼회복, 이런 구령 탑이 광범위하게 일어날 때 하나님의 통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셋째 역사 문명의 큰 물줄기를 잡는 키워드가 성경의 용어랑 같아지는 겁니다.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고, 볼셰비키 혁명 같은 것은 육체노동자가 역사의 중심무대에 서는 것을 표방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프랑스 대혁명과 볼셰비키 대혁명 같은 것은 왕들은 마음대로 압제하지 못한다, 육체노동자가 언제든지 단결하면 왕을 단두대에 보낼 수 있다, 이런 크나큰 선언입니다. 이건 앞으로 왕은 군림하지 않고 섬기는 사람만이, 유능하고 섬기는 지도자만이 인민의 지지를 영구적으로 받을 수 있다, 일종의 기독교적인 통치자, 섬기는 리더십, servant 리더십에 대한 항구적인 갈망을 표현한 겁니다. 모든 압제적 지도자는 단두대로 보낸다, 이건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이잖아요. 이런 문명의 큰 줄기가 기독교적 가치를 자신도 모르게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 주님이 역사 안에서 통치권을 행사하는 증거입니다. 넷째로 굳이 더 하자면 세계문명의 포괄적인 세계 모든 고등종교와 철학과 사상이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적 가치, 공평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이런 것을 은근히 지향하고 수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오기 전에도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세계의 모든 고등종교가 기독교적 용어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런 신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복수의 성깔 넘치는 신을 찬미하노라, 잔인무도한 신을 찬미하노라, 어떤 인디언 종교도 보면 기독교적인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겸손하신 하나님 다 돌보시는 하나님 새들의 먹이를 주는 하나님, 이건 기독교적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이 믿는 신을 보면 하나님과 닮아 있습니다. 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괄적으로 통치해왔음을 입증하는 겁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은 이런 모든 통치의 결과를 가지고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겠다고 하십니다. 저는 굳게 믿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굳게 믿으면 저에게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이루어진 불충분한 심판이 교정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안네 프랑크와 히틀러의 관계가 역전될 것을 믿습니다. 아홉 살 소녀 안네 프랑크를 굶어죽게 만들었던 히틀러의 만행이 최후의 심판 때 가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정될 것을 믿습니다. 안네 프랑크 앞에서 히틀러가 용서를 빌고 땅에 입술을 대면서 용서를 비는 장면이 눈물을 씻겨 주는 장면이라고 봅니다. 모든 불충분한 심판의 완전한 집행, 모든 어긋나고 잘못 내려진 역사적 심판의 교정이 최후의 심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김구가 안두희 손에 넘어간 것, 김구가 누가 죽였는지 재판받지 못하고 살인마 안두희는 심판도 받지 않고 지나간 것, 장준하가 포천 약사봉에서 떨어졌다고 하는 그 사건, 두개골이 망치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덮어주는 정부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뒤집어질 것을 믿습니다.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 이런 슬픈 사연, 영구적으로 신원 받지 못하고 지상에서 생애를 끝낸 귀한 누님들 할머니들, 이 귀한 역사가 반드시 교정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재림입니다. 저는 12000 스타디온으로 구성된 천국, 지금으로 말하면 2200km의 장방형 가로 2200km 세로 2200km 높이 2200km 엄청난 크기의 천국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로 받고 어린 양의 통치를 받는 날이 올 것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단련되고 담금질된 그 백성들이 온 천군천사 앞에서, 심지어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았던 불순종했던 천사들마저도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셔서 이렇게 온전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면을 보기만 하여도 하나님께 순복하여 모든 입술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날이 올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대해서 약간 환상을 품으면 안 됩니다. 지옥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니까 스웨덴 감옥정도는 안 되겠나, 지옥에 사람이 많지, 하나님이 운영하는 지옥이니까 기본적으로 알래스카 같은 중범죄자들이 가는 감옥은 아니겠지, 아마 지옥도 뭔가 천국의 혜택을 보긴 볼 거야, 최소한 지옥 간수도 천국에서 파송된 사람일 테니까, 이런 낭만을 품으면 안 됩니다. 일단 지옥이 굉장히 무섭다고 돼 있고 견딜만한 곳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김회권 목사 당신은 인류의 특정부류가 지옥에 꼭 가야 속이 시원하겠소? 좀 속이 넓고 더 인도주의적인 너그러운 마음 안 되겠소? 저는 하나님 보다 더 너그러울 수 없습니다. 저는 지옥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지옥에서 어느 정도까지 훈련받아야 할지는 모르지만 역사에 있는 악은 간단하게 교화대상이 될 수 없다면 지옥에 가서 하나님의 공의를 뼛속깊이 배운 후에 지옥이 잠정폐쇄되는 건 찬성합니다. 그러나 지옥이 없다고 하는 건 반대합니다. 여기서 존 파이프와 존 스토트의 논쟁이 있습니다. 지옥이 한참 있다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믿는 존 스토트와 지옥은 영구적으로 존속돼야 한다고 믿는 존 파이프의 대결이 있습니다. 저는 존 스토트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언젠간 지옥도 불필요해질 만큼 우주적 전도가 일어나서 모든 반역을 한 천사마저도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순복되는 날들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옥이 없다라는 말은 틀렸다고 보고요.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심판의 효력을 믿고 있고요. 그것이 나에 관한 윤리적 함의를 믿고 있습니다. 내가 심판받을 것인지, 내가 산 자의 땅에 있는지 죽은 자의 땅에 있는지 감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매일 듣는다, 내가 성경 말씀 펼치자마자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요구가 매우 specific하게 구체적으로 다가오는가? 그럼 제가 볼 때 산 자의 땅에 있습니다. 둘째 내 옆에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의인의 회중인가? 내가 개인적인 확신은 모자라지만 내 주변에 있는 공동체의 회중들이 구원 받은 성도들이며 의로운 회중인가? 내게 개인적으로 성령의 내적음성은 약하더라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회중이 의인의 회중이라면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셋째 내가 성령의 내적 감화감동을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큰 방향에서 볼 때 중대한 전환을 해서 산 자의 땅 안에서 내가 점차적 전진을 하고 방향을 틀었는가? 회개했는가? 이 세 가지가 있다면 산 자의 땅입니다. 그런데 내 주변이 모두 다 도덕적으로 파산된 자들로 가득 차 있는가? 하루 종일 내 생각의 물줄기는 초점 없고 열매 없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가? 성경을 펼치고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렸는데도 전혀 감화감동이 없는가? 이런 세 가지가 동시에 나타난다면 그는 구원 받지 못한 자고 하나님 나라 영토 바깥에 있는 자고 바깥 어두운 데 가서 이를 갈고 후회할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판의 엄숙성을 굳게 믿습니다. 바깥 어두운 데서 이를 간다는 말은 복수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히브리적 개념으로는 부러워하면서 후회한다, 그게 바로 바깥 어두운 데서 이를 간다는 뜻입니다. 제일 확실한 것은 아침마다 귀를 여서서 내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준행하도록 유도하시고 내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성령의 감동이 가장 좋습니다. 로마서 8장 5-17절입니다. 내 개인적인 성령의 확신이 모자란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회중 안에서 넘치는 성령의 감동에 내가 간접적으로 아멘하고 동조하는가? 간접적인 성령의 통치입니다. 여러분 모두 산 자의 땅에 분류 받은 의인의 회중에 드는 감격이 매일 매순간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가 도덕적 분투를 일삼아서는 되지 않겠지만 성령의 감화감동에 아멘으로 응답하여 산 자의 땅으로 질주하는 구원 받은 백성들 되게 도와주시고, 기회주의적인 인생관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에 결속되어서 우리 주님의 성령에 감동하는 인생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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