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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부활관

by 【고동엽】 2011.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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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부활관

 

기독교가 2천년 동안 신앙고백을 해왔지만, 그 신앙고백 속에는 아주 불분명한 것,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그냥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부 활"에 대한 우리들의 고백은 특히 그러하다. 오늘의 한국교회들은 기독교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높은 성장율을 보 이고 있기에 그 자산에게는 마치 아무 문제도 없는 양 착각하고 있는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같이 안일한 자세가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일 반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맹목적인 복종이니 무모한 광신은 점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 환란의 본산지 - '부활' 신앙 한국교회의 부황신앙이 불분명한 점, 모순되는 점을 그대로 간직하고있 다는 사실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입증할 수 있다. 각 교회들이 사용하 고 있는 장례식 예문은 중세교회의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복사해 놓은 것 들에 불과하다는 점이다.그래서 이교도들의 사상인 영혼불멸괴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인 몸의 부활이 나란히 고백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혼불멸이 란, 인간의 영혼은 선하고 영원하며 육체는 악하고 유한하다고 생각하는 헬라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아주 평안히 맞이할 수가 있었다. 즉 죽음이란 유한한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무한한영 혼이 해방됨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영왁 육이 하 나의 인격체라고 믿으며, 그 인격체가 통째로 죽었다가 통째로 다시 살 아남을 믿는다. 그런데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사상이 혼란스럽게 공존함으로써 지금의한 국 교인들은 '부활'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믿는다. 우리가 죽 으면 썩어지나 영혼은 직접 하나님께 가거나 낙원으로 간다.

 

그리하여육 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거기서 수억년(?)을 지내다가 어느날 주님께서 재 림하실때 비로소(그러니까 그 영혼은 '주님'과는 떨어져 있는 모양이다) 공중이나 지상으로 되돌아와 새로운 육체를 덧입게 된다. 이것은 중세교 회의 일반적 신앙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서신 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형태의 신앙은 전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부활 신앙은 어떠한 것일까. * 부활 신앙의 무신론적인 오해 이제부터는 스위스의 개혁파 신학자 바르트의 사상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부활 신앙을 재검토해보자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바르트를 내세우는 것 은 그가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하기 에 그를 다룬다.

 

그의 부활 사상에는 독특한 것이 거의 없다. 나아가 이 미 한 세대 전의 신학자이기에 비판할 점도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지극 히 중도적인 그의 사상을 소개한다). 그러면 바르트가 거부하고 있는 잘못된 형태의 부활신앙부터 생각해 보 자. 부활신앙이 인간의 생물학적인 죽음의 극복이라거나 죽음 다음의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이라면, 바르트의 생각으로는 그것을 이교도적인 신앙일 뿐이다.

 

필자는 그런 신앙을 가리켜 '무신론적인 부 활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인간의 생물학적인 죽음의 극복과 내세를 믿는 것이 어째서 무신론적인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미 죽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그 러나 물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살기를 원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 한다.

 

그래서 건강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하려한다. 의를 위해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너 순교자들의 시대와 지금은 엄청나게 달라서 마치 전 혀 다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듯 해졌다. 우리는 살고 싶어하며 그것도 무한히 사고 싶어한다. 영원한 삶에 대한 이같은 인간의 꿈은 오래되었으며 또 집요하다.

 

진시황제도 불로초를 찾 아오라고 동방으로 사람들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지금 미국에는 여러 구 의 시체들이 어느날엔가 동면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냉동실에 보존되 어 있다고 한다. 모든 피조물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운명, 시간 속의 존 재, 그 자체를 극복하려는 것은 인간의 욕심들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도 인간의 시간성을 초극하는 비법을 발견해 내지못 하였다. 단지 무수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그 해 답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도 기독교의 부활이어 떻게 이 시간성의 문제의 해답이 되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른다. 즉 수억 년의 후의 나의 영혼이 무엇을 근거로 여전히 '나' 인지 그들은 모른다. 수억년 후 내가 지구로 돌아와 새로운 육체를 입느다고 치자, 그때의 새 로와진 나를 어떻게 지금의 나와 동일시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육체는 전혀 다른 것인데, 의식만은 동일하다는 것인지? 마치 전쟁을 기 억한다는 사람들처럼, 혹은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의 생활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부활하고 나면 기억도 달라지는 것인지... (그러나 아기의 경 우에는 육체가 동일성을 보장해 주지만, 부활의 경우는 아무것도 우리의 동일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어떤 식으로 이든 부활이 우리의 생물학적 죽음을 극복해 주고 내세를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부활을 믿는 것은 "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 (<죽은 자의 부활>,154쪽)을 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나' 중 심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로소 가능한 엄청난 불신앙의 소산이다. 이같은 신앙은 얼핏보기에 대단히 훌륭해 보이나 하나님이야 어찌 되었든 '나' 만의 영원을 꿈구는 욕심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겉으로는 내세와 부활을 믿는다 고 말하나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다가 죽기보다는 이 세상에 서 하루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치기가 일쑤이다. 내세가 없다고 믿는 사 람들이야 물론 '이 세상' 밖에 없으니 죽기를 두려워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세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서 죄(타협의 죄)짓기 를 두려워 하지 않으니, 그것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

 

이런 신앙에 대하 여도 하나님 중심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실증주의 부활의 오해 한국교회의 부활신앙 속에는 또 다른 무신론적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 을 필자는 '실증주의'라고 부른다. 실증주의적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 은 사흘 전에 매장된 어느 청년의 시체가 망우리의 공동묘지에서 무덤을 젖히고 현세로 되돌아온 것이 바로 부활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 격자들이 그 장면을 하나하나 기술할 수도 있다고 상상한다.

 

즉 성서학 자들이 소생이라고 칭하는 사건을 부활이라고 크게 잘못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의 부활의 '실증성'을 부정하였다. 하여 바르트를 가리켜부 활의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오해를 한다. 그러나 이같은 비판이야 말 로 무신론자들이나 할 수 있는 어리석은 소리이다. 성서를 자세히 읽어 보라. 성서는 그 어느 대복에서도 부활 사건 자체의 목격담을 싣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바울 사도의 경험을 제외하면 이미 신앙인이 아니었던사 람들에게는 '부활하신'예수께서 '나타나시지' 않으셨다고 보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서 어디에도 무덤에서 살아나오신 부활의 예수를 (소위과 학자나 자연인의 눈으로)보고, 그를 처형한 로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회 개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부활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 제로 발생한 사건이지만 신앙이 없는 역사들의 비디오 카메라로는 찍을 수 없는 성격의 사건이었다"고 단호히 말한다 (Church Dogmatics,IV.2, 143-149쪽). 즉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사건 (그런 의미에서 '절대기적'이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감춰어진 비밀 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활신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단지 부활 사실에 대한 객관적 보도와 그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가능했을 뿐이다. 결국 바르트는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 의 생각할 때에만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하나님중 심으로 생각할 때는 부활이 무엇을 의미할지를 생각해 보자. * 기독교의 부활신앙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소망이나 일반적 인 잠재력의 성취에 근거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바르트는 크게 강조한다 그는 신학자 불트만이 부활을 인간 실존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잠재력 으로 환원시킬 위험을 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과거에 얽매인 인간인미 래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자기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경험이 소 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런 경험은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 사 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바르트의 요점이다. 인간의 부활이 무엇 인지 알고자 원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부터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이 보여준 인간의 부활이란 삶의 가리키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영광으로 가득찬 생'이며,'완성된 삶'이며,'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삶'이다 (Dogmatics on Outline,164쪽, Learning J esus Christ Through the Heidelberg Catechism,76쪽) 즉 우리의 몸의 부활이란 우리가 다시는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무시간 적 세계 (저세상)로 돌입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전체 삶이 전체적으로 부활하신, '영화로운신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게 됨 을 뜻한다 (상동,89쪽)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부활신앙을 참으로 갖게 되면 이 세상에서 이미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 도께서 속하게 된다'(상동,30쪽)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는 삶'의완 전한 모습이 어떠할 것인지는 아직 우리에게는 다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 이다. 그것에 대한 부질없는 사변을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다음 과 같은 바르트의 생각은 이 점을 아주 분명히 말해 준다. 즉 "죽은 자 의 부활"이라는 바울 사도의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 에 불과하다고까지 바르트는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146쪽). 바로 여 기에 바르트의 부활 사상의 핵심이 있다. 하나님을 믿음, 죽은 자의 부 활을 믿음, 예수의 부활을 믿음 이 세가지는 사실상 동일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없이도 가능한, 영혼불멸과 내세를 믿는 믿음은 기독교와 아 무 상관이 없다. 또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함과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생 각함은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켰다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 의 삶의빛에서 세상을 보고 또 살아감을 뜻한다. 결코 이기적인 자기의 욕심충족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그런 일이 아니 다. 진정한 부활의 빛에서 본다면 그분 삶은 아직 죽음의 권세에 얽매인 삶일 뿐이다. 성경을 보면 부활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 는 것과 예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현존해 계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 을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생 이 한 개인으로 서의 私的인 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생이 이제는 이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 다. 그래서 바르트는 부활을 승천과 재림과 더불어 생각하기를 원한다.사도 신경에도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는 '끝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오신다 고 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이 세상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서 비로소마 무리될 커다란 사건의 서곡이었다.

 

그래서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 의 부활을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현대인들처럼 이 세상의 삶에 대해 매력을 못 느껴서가 아 니라, 자기들이 버린 예수가 '하나님의 의'로 인정되었다는 것을 인정하 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자기들이 버린 예수가 하나님에 의하여 되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자기들의 행위가 전적으로 죽을 짓이었음이 폭로됨과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 은 스승의 부활 소식을 전해 주는 여인들을 가리켜 '정신이 나갔다'고 말 하며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사건은 사람들이 즐거이 기다리던 사건 이 아니라 원치 않았던 '심판'의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을 충족시키는 사이비 과학, 마술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오늘날의 삶이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의 삶과 일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우리가 비록 세상 에서 죽은 자처럼 지내게 되고 또 순교를 당한다고 할찌라도 우리의 삶이 예수의 삶과 일치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거나 또 죽게된 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믿어야 한다.

 

* 바르트의 교훈 무신론적으로 생각한다면 부활이란 인간의 유한성, 곧 생물학적인 죽음 을 극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과학은 그런 부활에 준하는 것을 인간에게 선사할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이나 노화방지의 기 술, 또는 세포 하나로 인간을 복제, 재생시키는 기술 등이다. 그렇게 되 면 인간은 불멸의 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온다고 하더라 도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이 염려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삶'이다. 하나님을 사실상 더 이상 믿지 아니하는 현대인들은 하나님없는 삶이 無보다 더욱 치욕스럽 고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것 이 죄지은 인간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형벌이라 했으며 '죽음'도 죄의 삯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부활이란 바로 하나님에 의한우 리의 생의 완성을 뜻한다고 과감하게 말했던 것이다. 이같은 부활 이해가 무수히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줄 것 은 뻔하다. 그러나 그들이 실망을 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하나 님을 전혀 하찮은 존재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 께서 함께 계심' (임마누엘)이 아니라 단지 더러운 '자기 육체의 만수무 강과 불로장생'일 뿐이다. 그래서 더 좋은 것을 준다해도 굳이 ( 하나님 은 없어도 좋으니) '불로 장생'이나 달라는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 성경 과 기독교가 무슨 말을 하리요 즉 무신론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이 어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으리요? 그래서 결국 바르트는 한국의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생 각된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시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성경을 주의 깊게 읽으시오.'

감신대: 홍정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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