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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유익하리요(마가복음 8장 36절~38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 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시는 오늘의 잠언말씀은 아주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고, 그리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가장 절실하게 와 닿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 말씀의 표현 방법도 퍽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데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용어는 전부가 실생활상의 용어입니다. 철학적 용어나 신학적 용어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쓰는 평범한 생활용어를 써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무릇 예수님의 비유가 대체로 그러합니다. 달란트 비유 같은 것을 보아도 장사하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혹은 농부들의 씨뿌리는 이야기를 하시는가 하면 회계 이야기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종들에게 얼마의 재산을 맡기고 나갔다가 얼마 후에 돌아와서 그 동안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 얼마나 남겼느냐 하고 회계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쓰시는 말씀과 비유의 소재를 늘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취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입니다. 상업용어가 많습니다. 상업용어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경제인 된 인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이란 워낙 경제적인 면을 생각하고 사는 존재이거든요. 사람을 가리켜 'economic animal'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경제적 동물인 것입니다. 저축도 할 줄 알고, 더 좋은 것을 찾을 줄도 압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소유욕이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경제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얼마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경제적 존재다'라고도 쉽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도 이윤의 추구. 가지고 있으려고만 하거나 보존하려고만 하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것으로 가지려 하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네 단어가 나옵니다. '얻는다' '잃는다' '유익하다' '바꾼다'- 이 말들이 다 상업용어입니다. 수지(收支)에 관한 것입니다.
때로는 손해보기도 합니다.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얻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익하다면 바꾸기도 합니다. Exchange하는 행위도 한다는 말입니다. 이윤추구입니다. 좀더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듯 실리 추구의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얻으려고 합니다. 소유하고자 합니다. 돈을, 물질을 얻으려고 합니다. 얻으려고 하지만 저마다 다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과연 얼마까지 가져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에는 그 한계가 있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다 가지는 것이 아니요 다 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정 없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소유에 욕심을 부립니다. 생각해보면 소유라고 하는 것은 때로 참 맹랑합니다.
'이건 내 것이다'하고 가지고 있으면서 죽는 것입니다. 땅 같은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땅문서 하나 가지고 있을 뿐. 땅은 멀리멀리 있습니다. 자신은 가보지도 못한 땅입니다. 그런데도 '이건 내 것이다'하고 문서 하나 쥐고 있다가 그냥 죽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듯 어리석습니다.
여러분, 소유라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수양관을 지으려고 해서 터를 마련하려고 다닐 때, 우리 장로님, 집사님들과 함께 가보았습니다. 쓸만한 데가 있다고 하면 가보고, 가보고 하는데 땅값이 얼마나 비쌉니까? 그 일을 위해서 수고하는 분들이 제게 물어봐요. 어떤 땅을 원하느냐고.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가장 유익한 땅, 좋은 땅을 사되, 물론 수양관을 지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꼭 필요한 만큼만 사고, 그것과 인접한 것은 전부 그린벨트에 걸린 것으로 사자고 말입니다. 그린벨트 걸린 것은 쓸모 없거든요. 쳐다보는 것이야 돈주고 쳐다보나요? 산이야 어차피 보는 것이지 먹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집 짓는 것은 집 짓는 것으로만 적당하면 되고 나머지 것은 바라만 보는 것이면 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이고 내 것이고 상관없습니다. 나라 것이건 김서방 박서방 것이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쳐다보는 것은 내 것이니까요. 그 주인은 어디 가서 사는지 알 필요 없습니다. 나는 바라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감상하고 사니까 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소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가졌는데도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은 참 바보스러운 짓입니다.
아무튼 돈, 물질, 이런 것에 대한 욕망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하나는 '지식'입니다. 더 알려는 것, 배우려는 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과연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지난번에 미국 시애틀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제 친구 목사님이 계신 교회라서 오후에 시간이 좀 났을 때, 여기저기 구경 좀 다니자고 해서 레이니어라고 하는 곳에 갔었습니다. 백두산의 두 배나 높은 산이 거기에 있습디다. 아름다운 산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구경했습니다. 집사님들하고 같이 갔는데 이분들이 오면서 제게 말해요. "목사님, 미국에 좋은 데가 많은가봐요." "그랜드캐니언 가보셨어요?" "나이아가라폭포 가보셨어요?" "옐로스톤 가보셨어요?" 여기 가봤느냐 저기 가봤느냐고 부지런히 묻습니다. 아마도 나는 가봤는데 어떻더라고들 자랑하고 싶어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 듣다못해서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어차피 다 보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요" "그러니 대충 보고 맙시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다 보는 것은 아니요, 또 다 보면 어떻다는 것입니까? 지식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그저 많이 알고 싶어하지만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다 알지도 못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 25절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이 고침 받고 아주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밖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 또 알 필요도 없다, 내가 나면서부터 소경이었고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 이 한 가지만 내가 아노라 --꼭 알아야할 것을 알면 됩니다. 좀 전에 부른 찬송대로 대속해 주신 은혜, 이 한 가지만 똑바로 알면 아무 것도 몰라도 됩니다. 내 이름 석자를 몰라도 좋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 큰사랑만 똑바로 알면 됩니다. 그 한 가지만으로 만족하고, 그것만 가졌으면 만족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 많이 알면 그야말로 식자우환(識者憂患)이지요. 걱정거리만 많아집니다. 생각만 많아집니다. 일만 복잡해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 알려고만 합니다. 명예를 추구합니다. 지위를 찾아다닙니다. 얻고 또 얻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욕망을 가리켜 'three P'로 요약해 말하기도 합니다. Possessions -소유하려고 합니다. position -위치를, 지위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power -권세를 추구합니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아무튼 사람은 끝도 없이 얻으려고 합니다.
생각할 문제가 또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얻으려고 하지만 얻기만 하는 것은 아니요 잃어버리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얻으려 하다가 도리어 잃어버립니다. 하나를 얻으려 하다가 열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찮은 것을 얻으려 하다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느냐 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저보다 10년 앞서 유학을 간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이로 보아서는 저보다 훨씬 후배이지만 미국 유학에는 선배 격입니다. 그 많은 유학생들 중에서도 이 사람은 10년이나 되었고 어렸을 때에 갔으니 비교적 영어를 잘합니다. 처음 간 사람들은 영어에 익숙지 못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가 프린스턴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지 5년 뒤에야 이 사람이 거기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프린스턴에서 공부한 것으로는 저보다 5년 후배가 되는 것이지요. 거기서 같이 공부할 때인데 이 사람이 좀 교만합디다. 자기가 영어 좀 잘한다고 해서 영어 못하는 사람들을 턱없이 경멸하는 것입니다. 영어도 못하면서 뭣하러 공부하러 왔느냐, 쓸데없이 돈 없애고 시간 없애고 할 것이 뭐냐 --이런 소리를 거침없이 해요. 그래놓으니 영어 서투른 다른 목사님들이 그만 민망해서 얼굴이 벌개지곤 하는 것입니다.
보자보자 하니 그거 안되겠더구먼요. "자네 그러면 못쓰네." 한번은 불러다놓고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 "말 벙어리 같으면 뭣하러 왔단 말이오?"하고 대거리합니다. 언젠가 이 사람이 한국신문에다 글 한 편 내고 싶다면서 수필이라고 하나 써온 것을 보니 하도 서툴러서 "이거 초등학교 3학년짜리 작문연습 한 거구먼"하고 물리친 적도 있고 해서, 마침내는 제 충고를 우습게 여기는 그에게 따끔한 소리를 한마디 해주었습니다. "자넨 국제고아야." "국제고아라니요?" "자넨 어쩌다 영어는 좀 하게 되었는지 모르나 미국사람 만큼은 못하지 않는가?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국제고아가 아닌가!"
여러분, 잊지 말 것입니다.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부터 제대로 해야 합니다. 영어 같은 것이야 대충 해두면 되는 것입니다. 한국사람이 미국사람처럼 영어 발음을 잘하면 미국사람 자신부터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면 약간 한국식으로 영어를 해야 오히려 매력이 있는 법입니다. 한국사람이 됐으면 우선 한국말을 기본적으로 잘해야 합니다. 남의 말은 그 다음입니다. 둘 다 제대로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제가 이 말을 왜 하겠습니까? 멧돼지 잡으려다가 집돼지까지 잃는 꼴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영어 배우느라 우리말 잃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남의 것 탐내다가 내 것 잃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하나 얻으려다 둘을 잃어버린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를 얻었으나 둘을 잃었습니다.
특히 외국에 유학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많습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에 한국의 현실에 어두워집니다. 한국의 윤리에 어두워집니다. 한국사람다움도 잃어갑니다. 이를테면 퍽 무례합니다. 동양적 윤리를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 얻었다고 생각할 때에 반드시 잃은 것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합니다.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 내가 얻으면서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고 잃어버렸는가 아니면 얻는 것만 생각하다가 무엇이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게 잃어버린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 얻는 것만 생각하고 좋아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계산을 해보니 엄청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선택적인 것과 피동적인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얻으면서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살려면 이것을 얻기 위해서 저것을 내버리는 지혜가 꼭 필요합니다. 무엇을 얻었느냐. 무엇을 잃는지 알고 잃었느냐 모르고 잃었느냐, 이것이 분명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절)"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 유익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유익한 것을 얻고 해로운 것을 버려야지요. 유익한 것을 얻고 덜 유익한 것을 버려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얻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케르다이노'입니다. 취한다, 수고해서 얻는다고 하는 말이 됩니다. 한편 잃는다는 뜻의 헬라어 '제미오오'는 '상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유익하다는 뜻의 헬라어는 '오펠레오'인데 이것은 '소득'입니다.
잃어버리고 얻고 계산하고 남은 것, 그러니까 얻는 것이 많고 잃어버리는 것이 적으면 남은 것이요, 이것이 '이득'이요 유익입니다. 더 소중한 것을 얻고 덜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면 유익입니다. 얻은 것이 됩니다.
남은 부분입니다. 내 것이지요.
본문에는 또 바꾸는 행위가 있습니다. 주고 바꾸다 --'exchange'의 헬라어는 '안탈라소'인데, 이는 지불하고 얻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상행위입니다. 사고 파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고, 이렇게 됩니다. 얻기 위해서 버립니다.
그런데 얻는 줄로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많은 것이 빠져나가고 말았다면 인생은 실패인 것입니다. 바꾸는 행위는 좀더 능동적인 것입니다.
무엇을 주고 바꾸겠느냐 -더 유익한 것을 얻고자 덜 유익한 것을 내줍니다. 장사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물건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삽니다. 장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물건을 주고 돈을 받습니다.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양자가 다 제편에 유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행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준이 있습니다. 우선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합리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멍청하면 안되지요. 따라서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시편 49편 20절에 보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해로운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 그 가치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면 안됩니다. 모르면 속지 않습니까? 대상(隊商: caravan)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사막과 같은 지방에서 대오를 짜 가지고 코끼리나 낙타 등을 이용하여 무기와 식량을 준비해서 여행하는 상인 단체를 대상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에 필요치 않은 것을 그것이 필요한 저 마을에 가져다주고, 또 저 마을에 필요하지 않은 것을 그것이 필요한 이 마을에 가져다줍니다.
유익한 것을 갖도록 하고 유익하지 않은 것을 내놓도록 해서 교환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려면 그 가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내가 몰라서 소중한 것을 내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옛날 아프리카에 다이아몬드가 많았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차돌처럼 굴러다녔는데, 영국사람들이 다이아몬드 가지고 오면 껌 주마 하고 아이들을 꾀어서 아이들이 공깃돌이나 하고 노는 다이아몬드를 다 걷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곳 아이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공깃돌'이 영국사람들에게는 값비싼 '보석'이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껌이 더 소중했고 영국인들에게는 다이아몬드가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가치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우리가 그런 실수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모르고 소중한 것을 내놓았어요. 뒤에 알고 보니 굉장한 손해를 보았어요. 그러나 뒤 늦게야 알고 가슴을 쳐봐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유익하고 않고는 절대적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유익하냐 않으냐가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오늘 유익한 것이면 유익한 것이요, 필요치 않은 것이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소중한 가치의 것이라고 해도 내게 필요가 없는 것이면 의미가 없습니다. 한국전쟁 때 피난길에서 그런 장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피난 나오는 사람들이, 저야 뭐 금반지 하나 없이 빈손으로 나왔습니다마는, 어떤 사람들 보니 집에 감춰놓았던 게 많았던지 금붙이 같은 것을 허리에 잔뜩 챙겨 가지고 다녀요. 그런 것을 내놓고 쌀을 얻으려고 하지만 저쪽에서 쌀을 주지 않아요. 어림도 없습니다. 지금은 쌀이 중요하지 금붙이가 소용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이 통하지 않더군요. 보통 때는 금붙이가 좋고 돈이 좋지만 전쟁통에는 먹을 것밖에 중요한 것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늘 이야기합니다마는 참 기막힌 경험입니다. 제가 차고 왔던 시계 하나 풀어주고 고구마 4개 얻어먹은 일이 있습니다. 사정사정 해서요. 그 시간에 내게 필요한 것은 고구마였지 시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우리에게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있는 법입니다.
오늘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 오늘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이것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유익하다고 하는 말은 좀더 미래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골동품 같은 것 수집할 필요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미래입니다. 앞으로 나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젊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고요, 나이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이든 사람이 코걸이 귀걸이 해봐야 뭣합니까? 옷걸이가 워낙 낡았는데 치장이 대숩니까? 옷도 좋은 것 입어봤자 별 볼일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은 나이 따라서 필요한 것이 따로 있습니다. 과거에 필요했던 것도 지금은 필요가 없어요.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이 85세 되셨는데 언제 한번 그분의 사무실에 들렀더니 전에는 그렇게도 많던 책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큰 테이블에 강대상에 놓아두는 큰 성경책 한 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많던 책 다 어디 치우고 이렇게 했습니까?" 제가 물어보았더니 "내가 지금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책은 두어서 뭘하나요? 다 남 주었어요"라고 대답하십니다. "나는 신문도 볼 필요가 없어요. 내가 신문 보면 어쩌겠다는 게요? 그것 다 소용없는 거요. 복잡한 것 자꾸 읽으니까 머리만 아프고 재미없어요. 지금은 내게 이것 하나면 돼요. 이 성경책 하나 돋보기 하나면 되는 것이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누구의 말도 필요 없고, 누구의 위로도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말씀하는 그분이 참 지혜로워 보였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나이에 맞는 유익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나이에 맞지 않는 것을 찾는다면 주책입니다. 나이에 맞는 것이 곧 유익한 것입니다. 아무 것이나 유익한 게 아닙니다. 젊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고 나이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따로 있습니다. 지금 임종이 가까운 사람에게는 무엇이 필요할 것 같습니까? 언제 한번 병원에 들어갔는데, 문병 오는 사람마다 먹을 것을 가지고 옵니다. 그런 광경을 보다가 농담 좋아하는 분이 그래요. 건강할 때는 하나도 안 가져오더라고. 못 먹게 되니까 갖다놓는다고. 저희들끼리 먹고 가버린다고. 맞는 말입니다. 환자로 있을 때에는 음식이 소용없습니다. 남 먹는 것도 보기 싫어집니다. 생각해보면 그 시간 따라 유익한 것이 있어요. 무엇이 유익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줄 알았기 때문에 전에 소중하던 것, 족보고 학벌이고 명예고 다 소용없다고, 바리새교인이고 히브리사람이고 하던 것, 전에 좋아하던 것, 전에 유익하던 것 다 버렸다고, 깨끗이 버렸다고 말입니다. 왜냐, 이제 내게 유익한 것은 오직 예수를 아는 지식뿐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그 깊은 뜻을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온 천하라고 합니다. 땅 몇 평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파트 한 채가 아닙니다. 온 천하입니다. 온 천하를 얻는다 한들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냐 하십니다.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하심입니다. 여기서 헬라말로 '프쉬케'라고 하는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포괄하는 것이지만 본디는 'soul' 이라고 번역합니다. 보이는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육체를 주관하는 영적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영이 떠나가면 육체는 죽어지고 마니까 이것은 육체의 생명과도 관계가 있는 영적 생명입니다. 이것이 '프쉬케'입니다. 순수한 영적 생명은 '프뉴마'입니다. '프쉬케'는 일괄적으로 생명이라고도 번역하고 목숨이라고도 번역하고 혼이라고도 번역합니다. 혼이 떠나면 사람은 죽으니까 혼이라고도 번역하는 것입니다. 'psychology'가 '프쉬케'에서 나온 말입니다.
본문은 생명 제일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선 살고 볼 것입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미화를 해도 모자랄 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을 때에라야 아름답습니다. 시든 꽃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살아서 미인이지 병든 사람이 미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제일입니다. 살아 있으니 아름다운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아름답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잘생기고 못 생기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살아 움직임이 아름다운 것이지 죽고 나면 죽은 양귀비가 산 추녀만 하겠어요?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하십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합니다. 모든 것에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 속에 향기가 있고 생명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 점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깜빡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야 소유도 있고 지식도 있고 명예도 있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무슨 명예가 있고 죽은 다음에 무슨 지식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생명을 잃으면서 소유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한심합니다.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파손되면서 물 속으로 자꾸 빠져 들어갑니다. 선객들이 구명선으로 옮겨 타게 되었습니다. 구명선은 작아서 사람들도 겨우 타야 하니까 짐들은 다 내버려두고 빈 몸으로 타야 됩니다. 구명선에서부터 지금 빠져 들어가고 있는 배까지 긴 줄을 걸쳐놓고 그 줄을 타고 한 사람씩 옮겨 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 하나는 금이 많아서 '이걸 두고 가다니 안되지'하고 허리에다가 잔뜩 꿰찼습니다. 그래가지고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들이 다 타고 맨 마지막에 줄을 타고 내려가는데, 줄이 탁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미련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듯 미련한 사람이 오늘도 많습니다.
소유가 아무리 중요한들 생명만이야 하겠습니까? 건강만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직선적으로 말씀드려서 뭣합니다마는 우리가 미국에 가끔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보면, 옛날부터 한국에서 알던 사람들도 있고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간접적으로라도 아는 분들이 저를 때때로 괴롭힐 때가 있어요. "목사님, 우리집에 가서 점심 잡수십시다"하고 사정들을 합니다. 그래서 "그럽시다"하고 차를 탔는데, 커다란 '링컨 콘티넨탈'입니다. 최고로 좋은 차 아닙니까? 아하, 이 사람이 이 차 자랑하려고 이러나보다 하고 탔지요. 그런데 웬걸, 이렇게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 한 시간이나 걸려요. 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보니, 집이 또 엄청나요. 점심 잠깐 먹고 이내 저녁예배를 인도해야 하니 돌아오는 데 한 시간 반이 걸렸어요. 점심 한끼 먹는데 이 사람이 왜 이렇듯 야단스럽게 수고를 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사람, 이민을 와 가지고 고생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가만히 보니 안팎 두 사람의 얼굴이 누렇게 떴어요. '우리가 고생고생해서 이만큼 잘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랑하고 싶었던 게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 보니까 참 안되었어요. 그 집사고 자동차 사고, 그리고 두 사람은 병자 되고 말았어요. 아주 시들었어요. 다 늙었어요. 이 무슨 꼴입니까? 이미 때는 지나갔습니다. 좀 적게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좋을 뻔했지요.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들을 보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다그치다가 덜커덕 앓아 눕기라도 하면 그 때에는 안 해도 좋다합니다. 공부도 적당히 해야 합니다. 건강에 지장을 가져와서야 되겠습니까? 거기에 목숨을 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마음 아파지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아는 교수 한 분이 원래 몸이 좋지 않아요 자신도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또 공부를 하러 간다고 해요. 저는 말렸습니다. 그는 돌아 와가지고 죽었습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러분 다 좋지만 생명이 먼저입니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살아야 일하지 않습니까? 살아야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건강해야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목숨과 무엇을 바꾸겠는가,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미래지향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하늘나라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죽음이요 천당이 생명입니다.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종말론적으로 볼 때에 생명이란 하늘나라에 가야 되는 것입니다. 순교자는 영생을 위하여 이생을 버린 사람이요, 영원히 살기 위하여 이 육체의 목숨을 버린 사람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면 영적 생명이요, 신령한 생명입니다. 신령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고 이것이 건강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버릴 수도 있고, 이것이 바로 살지 못하고 이것이 만일에 병든다고 한다면 무엇이라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생명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하심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곧 믿음입니다. 확실한 믿음, 쉽게 말해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버릴 수 없습니다. 내 믿음과 무엇을 바꾸겠습니까? 믿음에 손해보면서까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져봐도 소용없고 부자가 되어봐도 소용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분들이 많이 있어요. 가난할 때에는 괜찮았는데 사업이 잘되고 돈도 좀 벌리니까 어느 사이에 교회를 등한히 하고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워낙 바빠서요. 출장 다니느라고 겨를이 없어요" 합니다. 제가 한마디 더 하고 싶은데, 행여 믿음에 낙심이 갈까봐 더는 말을 못하고 맙니다.
믿음에 손해보면서까지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합니까? 온 천하를 얻고도 진실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유익합니까? 하나님의 사람된 존재의미를 상실하고야 그 소유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지식에, 그 명예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분명한 가치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참 행복입니다. 참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행복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린다고 한다면 온 천하를 얻는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과 바꾸겠느냐 바꿀 수 없지요. 절대가치니까요. 절대가치를 아는 사람은 상대적인 것은 가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만이 절대가치입니다. 나머지의 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찰나적인 것이요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 존재는 참된 의미의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 이렇게 온 천하를 얻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나는 과연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명 먼저, 생명 우선, 생명 중심의 확실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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