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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서신 // 제 1 강

by 【고동엽】 2022. 10. 23.

바울서신 강의

 

김세윤  교수

 

바울서신 // 제 1 강

 

 

서론 / 바울의 세계

 

바울의 서신 마다의 가장 중요한 issue들이 있어요. 가장 중요한 문제점들이... 가령 갈라디아서 같으면, “갈라디아서가 언제 쓰였졌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요. 갈라디아서를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문제요. 고린도 서신들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 복잡한 관계, 이것을 좀 알아야 우리가 본문을 해석할 수가 있어요. 로마서 같으면 가장 중요한 문제란,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 뭐냐? --로마서를 쓴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도 로마서 서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그걸 잘 알아야 로마서를 종합해서 해석할 수 있어요. 이처럼 그 각 서신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 가장 중요한 issue들을 중심으로 서론을 공부하기로 합시다.

이 시간은 우선 바울의 세계, 바울의 세계를 좀 간단히 하나의 배경으로 간추려 보려고 그럽니다. 자, 그러니까, 바울의 세계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로마제국과 그의 유대교의 세계, 이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 보겠어요.

 

1. 로마제국

누가복음 2장 15절 이하에서 보면,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메시야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의 초대 황제 아구스토가 로마 전체에 (세계적인 칙령) 인구조사를 하는 칙령과 연결시켜서 시작을 해요. 아구스토, 옥타비우스 아구스투스가 제국을 통일해서, 세금(인두세, 각 사람 머리당 내는 세금)을 받기 위해서 정확한 인구조사를 꾀했기 때문에, 자기의 통치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호적을 하라는 이런 칙령(勅令)을 내렸는데, 그 칙령과 관계해서 “예수께서 탄생하셨다.” 그렇게 시작을 해요.

그래가지고 이제 이 사도행전 28장 끝에 가면, 누가는 예수와 예수 운동에 관한 자신의 두 권으로 된 책(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두 권으로 된 책)을 뭐라고 결론을 짓느냐 하면, 예수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를 주시다.” 라고 로마에서 --곧 아구스토와 그의 후계자들의 수도인 로마에서-- 선포하는 것으로 이 두 권으로 된 그의 책을 종결지어요.

여기에서 보다시피, 이 초대교회의 세계는 로마 제국의 세계였는데, 초대교회의 메시지는 κυριοσ(주)라고 불리웠던 로마의 황제와 일면 대립 관계를 가지며 팽창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어요. 이 아구스토 시대에 절정을 이룬 로마 제국의 제국주의적 정치는 지중해를 둘러싼 엄청난 영토의 제국을 만들었어요.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에서 부터 서쪽으로 대서양까지, 북쪽으로 라인강과 다뉴브강에서 북부 아프리카 사막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둘러싼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 대 제국을 헬라어로 οικονομια(오이코노미아) 또는 문명인들이 추구하는 세계 --Aryan(아리아)의 세계--  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그 속에서는 로마의 군대와 로마법 그리고 로마행정이 이루어 놓은 평화가 있는데, 이 상태를 pax-romana(로마의 평화)라 합니다.

로마인들은 그의 제국 내에서 군대의 빠른 이동을 위해서 직선 도로망을 구축했고 그 직선 도로망을 조약돌로 포장해서 결국 많은 도시들, 로마제국의 많은 도시들을 연결했는데, 이것은 결국 로마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과 그들의 문화의 상호 이동과 상호 혼합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로마 군대는 이 군사로(路)를 정비하고 또 바다에서의 항해를 안전하게 해서 당시 여행이 굉장히 편리하고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안전한 여행의 보장은 로마제국의 동반부와 서반부를 정치적으로만 연합시킨게 아니고 문화적으로도 많은 융화를 시켰어요.

그래서 떠돌이 철학자들, 그들은 군대나 노예들이나 상인들과 더불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 다니면서 자기들의 그 철학사상, 자기들의 종교, 자기들의 관습(慣習), 이런 것들을 전파함으로 당시는 syncretism(혼합주의) --종교적, 문화적 혼합주의-- 가 당시의 팽배한 시류였어요. 당시 이방 로마도시 사람들의 사회적 삶은 우상숭배와 성도덕의 타락으로 특징지워졌어요. 각 도시마다 그 도시가 섬기는 신들이 있었고, 신전들을 짓고 있었고, 그 신전들에서의 예배는 많은 경우 성창(聖娼)을 두고 있었습니다.

덧붙여서 당시 로마제국의 동반부에서는 로마황제들을 신으로 그리고 주(θεοσ, κυριοσ)로 신격화해서 섬기는 이른바 황제숭배 사상이 발달하기도 했어요. 그것은 동양사회에서 귀신들을 신격화해서 황제숭배를 정당화한 관습에 따라 Egypt나 바빌로니아 또 중국이나 우리 한국이나 일본이나 동양사의 어딜가든지 있죠. 우리 한국에서만도... 중국의 황제, 투천자나 일본의 국왕도 천황, 천조대신으로... 에집트의 파라오, 바로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바빌로니아에서도... 이런 사상에 깊이 물든 로마제국의 동반부의 종족들은 로마황제 아구스투스를 시초로 해서 로마황제를 신으로 섬기기 시작하는 이런 황제숭배가 발생하였어요.

고대 모든 제국들이 다 그랬지만 로마 제국도 노예제도에 근거해서 --노예제도를 근거해서-- 세워진 사회였고, 제국이었고, 바울 편지들의 여러곳에서 초대교회의 상당수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노예들이나 하층민에 속했던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문화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이루었던 Hellenim(헬레니즘)의 계승자였습니다. 이 헬레니즘이란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지금의 인도의 파키스탄, 그 인도의 서부 인더스강 이서(以西)까지 점령하고, 남쪽으로는 애굽과 에집트와 지중해 남부를 점령해서 이뤄놓은 광대한 제국에, 헬라문화와 헬라인들과 동양인들의 인종적 혼합을 도모하고 --헬라문화와 동양의 문화를 융합시켜서 이루려고 했던 문화를 우리는 보통 ‘헬레니즘’이라 그러는데-- 로마 제국은 문화적으로는 바로 (정치적으로도 우리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헬레니즘의 계승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헬레니즘 세계에서의 공통어는 헬라어였죠. 헬라어라 하는데 Koine(코이네) 헬라어가 공통어였고, 헬라의 사상적인 철학사상(헬라의 합리적인 사고)과 기술, 그리고 동양의 종교성들이 융합한 것이 헬레니즘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고린도전서 8장 5절에 보면, 헬라인들은 많은 神들과 많은 主들을 섬긴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신약시대의 이 헬라세계는 고전적 헬라 철학, 플라톤주의나 아리스토 텔레스의 古典的 헬라 哲學의 가르침이 무너지고, 그것들이 대중화 하면서 사람들은 더이상 이해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윤리적 관심,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에로 옮겨져서, 신약시대에 와서는, 헬라의 철학 학파로 말한다면 아주 물질주의적인 에피큐리어니즘(Epicurianism) 즉 에피큐러스학파, 스토아(Stoicism), 즉 자연에 순응해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스토아 학파, 또는 회의주의(Scepticism) 또는 냉소주의(Cynicism) 등등이 그 각자의 철학자들을 배출해서, 이런 철학들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돌아다니면서 각자의 철학사상을 전파하는 그런 형국이었어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 당시 물질주의적인 사고, 회의주의적인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숙명주의적 사고, 숙명의 힘 앞에, 숙명에 순응해야 할 따름이지 숙명을 거스릴 수 없는 숙명주의적 사고, 그래서 절망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신들과 주들에게서 도움을 얻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자연히 발달한 것이  점성술, 점성술이 발달을 해요.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별들이 또는 그 별들에 존재한다고 보는 신들이 또는 영들이 인간의 운명을, 숙명을 좌우한다고 보고 그 별들 또는 별들에 존재한다고 본 신들을 기쁘게 하는데 그들의 노력을 경주했던 거예요.

그래서 당시에 이 숙명, ‘아낭케’(必然),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 숙명 또는 ‘하이메르메네’(숙명)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중심 개념이었으며,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런 상태에서 자연히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무책임하게 되어서 타락하게 되는데, 이 도덕적인 타락이 또 당시의 큰 특성이었어요. 사람들은 별들에 존재하는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또는 그 신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점성술을 통해서 자기의 운명을 미리 알아보려고 했으며, 운명을, 가령 그 운명이 이제 나쁜 운명이면 --악운이면-- 그 운명을 좌우한다고 본 별, 또는 별들 또는 별들에 있는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magic을 사용했고, 신들에 제사하는 형태의 종교를 발전시켰어요.

이것들이 점차 발달해서 나중에는 神秘宗敎들을 낳았는데 이 신비종교들에서 신을 κυριοσ(주)라 불렀다는 말이예요. 또는 여신을 κυρια라 불렀고, 또 한편 이들은 이 지식, 비밀지식, Gnosticism(영지주의)적  비밀지식을 얻어서 이 물질적인 세계로 부터 자신들의 영혼을 해방시켜서 신적인 영역으로 진입시킬 수 있다고 본거예요. 그래서 이 영지주의가 발달하게 돼요. 한마디로 당시 이 헬레니즘의 영적, 도덕적 분위기는 회의주의와 숙명주의와 절망의 상태에서 구원자를 간절히 원하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이들은 점성술을 통해서 또 영지주의의 비밀지식을 통해서 신비종교들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어요. 도덕적으로 말하면 숙명주의와 물질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도덕적인 무책임성을 유발시켜서 심한 타락상을 보였고, 일부 신비종교는 성창(聖娼)을 통한 예배를 가르쳤기 때문에 특히 고린도 같은 데서는 아주 심하게 성도들에게 성적인 문란을 일으켰어요.

 

2. 유대교의 세계

그런데 유대교로 말한다면, 두번째로 이제 바울의 세계의 또 한쪽은 유대교의 세계 또는 유대민족의 세계인데, 제일 먼저 말해야 되는 것은 신약시대의 유대교는 다 헬라 유대교(Hellenistic Judaism)입니다. BC 323년이니까, 알렉산더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이래,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과 그 속의 유대민족은 예수와 바울 당시까지 3세기반 이상을 근 4세기 동안을 헬라 통치자들 아래 있은 거예요. 하스모니아 왕가의 매카비 반란이 성공해서 잠깐 하스모니아 왕조의 통치를 받았으나, 하스모니아 왕조는 아주 헬라화된 왕조였기 때문에 --뭐 그것은 예외로 칠 수 있고-- 이 3세기 반내지 4세기 동안에 헬라인들의 통치 아래, 유대 민족은 헬레니즘의 세계에 편입되어서 헬라적, 그리고 동양적 이원론, 영과 물질을, 육을 나누고, 빛과 어두움(암흑)을 나누고, 시간과 영원을 나누는 헬라적 또는 동양적 이원론과 신비주의 또는 추상적 사고 이런 것들이 유대교에 침투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팔레스타인에서도 헬라말이 보편적으로 쓰였으며, 아람말과 더불어 헬라말이 보편적으로 쓰였으며, 이 쿰란 문서 같은데도 헬라 사상의 영향을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어요. 보통 우리는 이 신약시대의 유대교를, --여러분들 paper 쓴 것 보니까 영어로 Judaism을 꼭 유대주의라 그렇게 번역을 하는데 유대주의란 말이 아니지, 유대주의란 말이 어디가 있어. 유대교지 유대교. 무조건 주의라 해서 자꾸 유대주의, 유대주의 하는데, 난 유대주의란 말 절대 안써. 항상 유대교라고 하는 데도, 내 과목에 paper 쓰는 사람들 한결같이 유대주의라고 써. 유대주의가 아니고 유대교라 이거야. 유대교.-- 이 신약시대 유대교를 크게 팔레스티나 유대교(Palestinian Judaism)과 헬레니스틱 쥬다이즘으로 나누는데, Palestinian Judaism이란 말할 것도 없이 신약시대에 팔레스티나에 살았던 사람들(유대인들), 헬라어를 이해를 했으나 주로 아람어를 모어로 사용하면서 생각하고 종교문화를 쌓아갔던 사람들의 유대교를 팔레스티나 유대교라 하고, 팔레스티나 밖에 흩어진 이른바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간에 이들에게 헬라말을 모어로 사용하면서 헬라세계에서 이방인들과 이웃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서 성행됐던 유대교를 헬라 유대교라고 그러는데, 신약시대의 유대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 다 헬라의 철학적, 언어적, 종교적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다 헬라 유대교라, 헬라 유대교. 다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겠지만 팔레스티나 유대교에 헬라적 영향이 좀 적었고, 헬라 유대교에 헬라적 영향이 좀 더 많았겠죠. 그래서 정도의 차이로 이렇게 구분할 수 있으나 원칙적으로 말하면 신약시대의 유대교는 다 헬라 유대교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팔레스티나 유대인들 간에 여러가지 학파가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파, 하나는 사두개파, 하나는 에센파, 또 하나는 이제 이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유대에는 4개의 학파가 있다, 철학 학파가 있다 해서 유대교의 여러 다른 신학적 경향을 가졌던 이 그룹들을 헬라의 철학파에 견주어서 표현한 데서 지금까지 사람들은 유대교의 이러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데, 또 하나는 네번째 학파(요세푸스가 말하는 네번째 학파)는 열혈당파, 열혈당파가 있다. 그런데 이들의 헬라 문화에 대한 반응이 다 조금씩 달라요. 물론 열혈당파는 헬라의 영향을 될 수 있으면 거부하는 아주 극단의 쇼비니즘을 나타낸 사람들이죠. 에센파가 그 다음쯤 되나. 아까 이야기한대로 에센파의 문서인 쿰란 문서들에 벌써 헬라적인 사고의 영향이 많이 보여지고 있어요. 그 다음에 이제 헬라문화에 대해서 저항을 나타낸게 바리새파 였어요. 바리새파. 사두개파는 신학적으로는 가장 보수적인 파였어요. 모세 5경만을 권위있게 인정하고 그외에 새로 발달된 가르침을 거부하는 신학적으로 그런점에서 극보수, 복고주의적인 자들이었어요.

그러나 이들은 당시에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성전 제사장 통치 계층으로서, 귀족 계층으로서 삶의 양식에 있어서는 과격히 헬라화 되었어요. 헬라의 통치자들과 결탁해서 그들의 사회적 통치 지위를 지탱하고 삶에 있어서 과격히 스스로 헬라화 된 사람들이었어요. 바리새파는 그 율법을 연구하고 그 율법을 정확히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함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던 중산층 경건운동, 부흥운동을 했어요. 그 사람들은 중산층이었어요. 사회계층적으로 말하면 부흥운동, 경건운동, 그래서 원래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제사장들을 위한) 이 정결의 법 또는 성결의 법, 이 레위기의 법들을 일반화하고 대중화 해 가지고 평신도들과 자기들에게 적용을 해서 이스라엘 제사장으로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목욕하는게 중요했고, 손 씻는게 중요했고, 성전에서 제사하는 제사장들의 성전을 위한 모든 법칙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예요. 이 사람들이 “이제 율법에 충실하다. 곧 언약에 충실하다.” 하므로 우상숭배와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헬라사상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예요. 이 사람들과 같은 경향인데, 다만 조금 더 지독하게 율법 연구와 율법 실천에 바리새파 보다 더 노력했던 사람들이 에센파, 이들은 아마 같은 뿌리에서 나왔죠? 다 같은 뿌리, 중간사 시대의 하시딤과 같은 뿌리인데, 이들은, 바리새파는 유대땅에 머물면서 유대인들의 민족적 삶, 공동체 삶에 참여하면서 사두개파에 의해 장악되었던 성전의 예배에 같이 참여하면서 일상생활에서 경건운동을 폈지만, 에센파는 BC 165년쯤에 매카비 형제 요나단이 성전의 대제사장이 되어서 --그것도 대제사장 가문, 사독 가문 출신이 아니면서도 대제사장이 되어서, 그것도 시리아의 통치자 알렉산더 발라에 의해서 이방인에 의해서 대 제사장이 임명이 되어가지고-- 성전을 장악하므로 성전이 돌이킬 수 없이 타락했다고 보고 예루살렘 성전과 절교를 하고, 다시 말하면 사두개파와 절교를 하고, 이 쿰란같은, 사막에 동굴에 은거하면서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사람들이예요.

이런 사람들에 있어서 헬라사상은 물론 굉장히 배격이 되죠. 열혈당은 --이런 사람들의 신학적 뿌리에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독립과 다윗왕조 재건을 통한 이스라엘 위에 신정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정치적 행동파 사람들이 열혈당인데-- 이들은 또 헬라사상과 원수관계에 있기 때문에 전혀 타협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팔레스타인, 팔레스티나 유대인들간에 헬라사상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기도 하고 반감을 가지기도 했으나, 심지어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헬라사상을 많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늘날 한국 사람들,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든 면에서 일본화 되어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사람들의 두 그룹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이제 율법 연구와 율법의 실천, 이게 중요했는데, 이들은 율법에 두 종류가 있다고 봤죠. 두 종류가 무슨 율법이냐면, 쓰여진 율법과 구전된 율법이 있다고 봤어요. 쓰여진 율법은 구약성경, 적게 말하면 모세오경을 말하고, 구전된 율법은 장로들의 전통이나 전승인데, 예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가 예수에게 시비걸죠? 그 장로들의 전통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쓰여진 율법에 대한 해석과 적용의 전통, 전승을 쓰여진 율법이라 하고, 가령 죽은 자의 부활사상을 포함한 종말 사상은 대개 이 구전된 율법에 속했어요. 구약성경에 부활사상이 거의 안 나타난다고 아주 희미하게 나타나요. 다니엘서 12장 같은데 아주 희미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두개파는 쓰여진 율법만 존중했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두개파는 부활을 안 믿은 거지요. 그러나 이 바리새파, 에센파는 두 율법이 둘다 다 모두 모세에게서 주어졌고, 둘다 다 똑같이 권위있다고 봤어요. 둘다 똑같이 권위 있다. 둘다 똑같이 하나님 말씀이다. 실제적으로는 구전된 율법이 쓰여진 율법보다 더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되기도 했어요. 실제적으로...

다음, 이 바벨로니아의 정복이래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 밖으로 많이 노예로, 포로, 당시 전쟁포로는 다 노예라, 전쟁 포로들은 다 노예예요. 그래서 바벨로니아의 정복이래 유대인들이, 후에 이제 알렉산더의 제국이 되고 후에 로마 제국이 되는 그 방대한 지중해 세계 연안에 흩어지게 돼요. BC 586년, 7년 바빌로니아의 정복에 의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었는데, 그러나 그중에 일부만 팔레스타인에 귀환을 해 가지고 다시 성전을 짓고 유대 민족공동체를 다시 이뤘지요. 그러나 다수는 바빌로니아에 남았어요. 그래서 예수 당시까지도 바빌로니아에 아주 중요한 유대 공동체가 있었다고... 그래서 예수 당시, 예수 이후까지도 이 탈무드,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더 커요. 바빌로니아 유대인들 간에 성경연구를 모아놓은 것이 탈무드인데 바빌로니아 탈묻이 예루살렘 탈묻보다 더 커요. 더 방대해.

또 알렉산더에 의해서 정복되고 그의 후계자들, 에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본거지를 둔 왕조에 의해 정복되고, 나중에는 또 시리아, 안디옥에 근거를 두었던 셀루키드 왕조에 의해 정복되고 할 때마다, 유대인들이 포로, 곧 노예로 붙들려 감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굉장히 큰 유대 공동체가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알렉산드리아가 당시 로마 다음 제일 큰 --로마 제국에서 제일 큰-- 도시였는데, 다섯 구로 행정구로 나눠졌는데, 그중에 두 구가 완전히 유대구였다고 해요. 유대구...

유대인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돈버는데 재주가 있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재주가 있었어요. 그 당시에 많은 그, 그리고 또 당시나 지금이나 유대교의 특성상 이웃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들의 아주 독특한 종교, 당시 고대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민족이었다고. 왜?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형상없이 신을 섬기는 것이예요. 그들에게는 --당시 이방인들에게는-- 굉장히 이상한 것이예요. 자기들끼리 또 할례, 할례가 또 당시 이방인들에 의해서 유대인에 많은 조롱거리가 됐다고. 그리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며 살고 이방인들과 관계를 않고 식사도 같이 않고 스스로 담을 쌓고 --왜 다 불결한 것으로 봤으니까. 그래서 이 아주 배타적인 ghetto(공동체)를 이룸으로, 그런데다가 돈을 잘 벌고 재주는 많고 하니 반유대, 반유대주의 소위 anti-Semitim(반 셈족주의)이 당시 로마세계에서 아주 굉장했어요.

그래서 이 반유대주의는 헬라나 중세 기독교에 의해서만 처음 생긴게 아니고 로마시대 이전부터 아주 고대 때부터 있은거예요. 하여튼 이 알렉산드리아에 다섯 행정 구역의 두 구가 유대구일 정도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말이예요. 아까 내가 바빌로니아에 커다란 유대 공동체가 있었다고 했어요. 알렉산드리아의 커다란 유대공동체, 오늘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한 300만 산다고 해요. 뉴욕에 유대인이 몇명이나 사는지 알아요? 여러분들? 그 언제 통계를 들었는데 잊어버렸네. 아마 미국에 사는 유대인 전체가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보다 훨씬 많을거야. 뉴욕 한 도시에 사는 유대인만 해도, 통계 다 잊어버렸는데, 하여간 상당히 많아요. 그와 같은 실정이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렇다고 그래요. 옛날 예수 당시도 그랬어요. 그래서 이 헬라세계의 큰 도시마다 유대인들이 굉장히 많이 살았어요. 고린도, 로마, 안디옥...

그곳에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이 많이 있었어요. 알렉산드리아에 당시 유대인이 한 4만내지 6만정도 살았다고 보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전체 인구와 맞먹는 인구예요. 신약시대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한 5만으로 추정하는데, 알렉산드리아에 4만내지 6만 정도의 유대인이 살았다고 봅니다.

사도행전 2장 5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AD 30년, 오순절 잔치에 로마제국 각처에서 온 유대인들의 목록이 나오죠. 목록이... 그걸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만큼 흩어졌나 알 수 있어요. 이 로마제국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한 본토 유대교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특히 반세겔 성전세 --성인 남자는 다 내야 되는, 일년에 반세겔씩 내야 되는 성전세-- 를 통해서 세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과 그 가족들은 성전의 제사의 덕을 본다고 봤고, 유대교의 여러 순례 절기 때는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았으며, 예루살렘에서 가끔 순회 랍비를 파견해서 헬라세계 여러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일정기간 가르치게 하는 일 등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어요.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으로서 세상의 중심이었으며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곳이었기에, 그렇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언젠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 거기서 살다가 예루살렘 거룩한 도성에서, 되도록이면 성전에 가까운 곳에서 살다가 죽고 거기에 묻히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어요.

당시 유대교회에 가면 세상을 10개의 동심원으로 나눠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중심으로 한 거룩의 도에 관한 10개의 동심원으로 나누어서 지성소에서 머리 갈수록 멀리 퍼질 수록 거룩의 도가 적었다고,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 사이에 사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개, 돼지에 불과한 이방인, 더러운 자들과 같이 산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돈을 많이 벌면 성전 가까이서 거룩한 성전 가까이 살다가 죽는 것을 큰 꿈으로 생각했어요.

이들에게는 바빌로니아 포로기 때부터 점차 발달하는 이 synagogue(회당)가 삶의 중심을 이루었어요.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종교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삶 전체, 이들의 삶 전체의 중심이였어요. 그래서 이 회당은 이들에게 예배의 처소였을 뿐만 아니라 학교이기도 하고, 시민 회관 노릇도 하고, 여행하는 유대인들에게 여관 노릇도 하고 심지어 직업 알선소 노릇도 했어요. 이 회당에 안식일마다 모여서 예배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당시 이방인들에게는 아주 이상하고 새로운 것이었어요. 왜? 아까 이야기한대로 형상이 없어요. 예배한다는 신의 형상이 없어. 둘째로 제사를 하지 않아요. 반면에 유일신 사상, 그리고 높은 도덕적 수준이 당시 이방인들의 눈에 띄였어요. 그래서 진지한 이방인들이 자연히 유대인들의 이 회당에서의 예배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의 회당의 예배에 가끔씩 참여하는 자들이 늘게 되었어요.

이런 자들을 God feared라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고 했어요. 헬라말로 δεομενοι(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고 하는데, 사도행전에 가끔 이 말이 나와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그러니까 이들은 누구예요? 이방인들이라. 이방인들로서 유대교에 흥미를 느끼고 유대 회당에, 예배에 유대인들과 함께 참여하는 자들, 이들 중 일부는 이제 유대교에 더욱 심취해서 아예 할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개종자가 되기도 했어요.

개종자(προσηλυτοσ), 영어로는 ‘proselyte'라고 하는데, 이들은 개종자라. 이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면 이방인들로서 유대교에 심취해서 할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 된 사람, 개종자. 할례를 받은다는 것이 왜 유대인이 되는 거야? 할례가 뭐예요? 언약의 표징이지. 그래서 언약의 백성으로 언약의 백성에 들어감을 나타내는 할례를 받음으로써 개종자가 되는 자들도 더러 있었어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대로 당시 유대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간에 많은 조롱감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에서 조롱받게 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할례라고 했어요. 어렸을때 할례를 받은 것은 괜찮은데, 성인이 되어 가지고 할례를 받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었고 할례를 받다가 죽기도 했어요. 가끔씩. 오늘날같이 보건 위생이 철저하지 못한 사회에서.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할례를 받으면 그 이방인의 공동체에서 거의 고립돼요. 거의 따돌림을 받는다고. 그래서 정상적인 사회 생활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돼요.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항상 이 할례를 받은 이방인을 자기들 중의 하나로 항상 환영했느냐! 꼭 그런게 아니예요. 특히 AD 70년에 로마제국에서 여러 유대인들이 완전히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포로, 노예들로 잡혀가고, 팔려가고 이런 판에, 이방인들에 대해 아주 치를 떨고 이를 갈고 있어 가지고 이것이 신학적으로도 반영이 되어서 AD 70년 이후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절대로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할 정도였어요. 심지어 이 προσηλυτοσ(개종자), 할례받은 이방인도 구원 못 받는다. 기껏해야 유대인들 종노릇이나 한다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개종자들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거리낌 없이 환영받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물론 좀 더 자유주의적인 랍비의 가르침도 있죠. 가끔씩... 그래서 좀 넓은 마음 가진 유대인들에 있어서 이런 사람을 환영한 사람도 있었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개종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런데 개종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으므로, 유대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냥 할례는 받지 않고 유대 회당에 참여해서 야훼를 예배하고,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을 준수하는 정도로 유대교에 실행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방인들 간에... 이런게 이제 바울의 선교에 다 중요하죠. 바울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목표로 선교하기 시작하고, 모여 있는 회당을 근거로 선교를 하게 되는 것이 이런게 다 되돌아보면 신약의 교회, 기독교의 선교 입장에서 보며는 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섭리의 산물인 것 같기도 해요.

학자들간에 논란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당시 로마제국에서 유대교가 이른바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이 됐느냐 안됐느냐, 얼마전까지만 해도 유대교가 당시 로마법에 의해서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했어요. 근데 요새 와서 학자들은 로마법이 유대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한 일은 없으나, 로마의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을 되도록이면 그들 종교를 간섭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그 지혜를 터득해서 유대인들에게 많은 특권을 그냥 허락했다. 특권을 누리도록 그냥 묵인했다는 정도로 이해를 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군대에 안가도 되었고, 황제 숭배에 참여 안해도 되었고, 유대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핍박받는게 없었고, 이런 많은 특권을 허락 받았다. 이것도 중요해요.

가령 바울이 AD 50년, 51년, 52년, 51년 겨울에 고린도에 갔다구. 거기서 누구 앞에 끌려가요? 갈리오 앞에 끌려가요. 로마의 총독 갈리오 앞에 끌려가요. 죄목은 로마법에 위배된 종교를 퍼뜨렸다. 갈리오가 재판을 한 결과 바울은 유대교의 일종을 전파한거다. 그래서 무죄석방이 돼요. 그래서 바울의 복음이 유대교의 일부로 인정이 되어서, 로마법을 저촉한 것이 아닌 것으로 해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게 되어요. 그러나 70년 이후는 상황이 달라져요. 그래서 이제 기독교가 더이상 유대교의 일부가 아니라 해서 로마 관리들에 의해서 정식으로 핍박을 받게 돼요.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나 디아포라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회당은 두 개의 기둥이었어요. 당시 유대교의 두 개의 기둥. 성전이 유대의 종교와 삶의 중심이기는 하였으나, 바빌로니아 포로기 때부터 발달하는 회당이 유대 삶에 점점 더 중요성을 띠게 되었어요. 그래서 회당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을 배우는 처소로, 예배 처소로, 그리고 학교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어요. 신약시대의 유대교는 성전의 제사와 율법 연구와 실천을, 두 개의 중심을 가진 이런 타원형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신약시대 유대교는... 그런데 이제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됨으로 자연히 유대교는 율법만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중심을 가지는 종교로 탈바꿈을 해요. 그런데 이 율법을 어디서 공부하고 어디서 실천하느냐? 회당에서. 그래서 율법 중심의 종교, 곧 회당 중심의 종교로 탈바꿈을 해요. 그런데 이 회당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공부하는 이 전통이 점차 랍비, 학교의 발달을 가져오는데, 후기 랍비 전통은 Talmud, 탈무드의 전통은, 예수와 바울 당시 곧 신약시대의 랍비 학교를 두 학파로 간추려서 표현을 해요.

그중에 하나의 학파는 샤마이 학파였고, 또 하나는 힐렐 학파로 간추려서 표현을 해요. 그래서 여러 후기 랍비들의 계보를 샤마이 학파와 예수 당시의 신약시대, 샤마이 학파와 힐렐학파로 소급해서 따지는데 원래 이 힐렐은 샤마이의 제자였어요. 샤마이 학파는 아주 보수적인 학파요, 이방인들과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고 모든 면에서 보수적인 학파였고, 힐렐학파는 자유주의적인, 인간성이 풍부한... 이방인들에게도 열려있는 학파였다. 힐렐 자신도 원래 바빌로니아에서 온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배우려고 샤마이 학교의 샤마이 집의 돌담에 걸쳐서 서당개 풍월 배우듯이 율법을 배웠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는 이 두 학파가 보수, 자유, 진보적으로 아주 적대 관계에 있게 되는데, 그래서 나중에 탈무드를 만든 랍비들은 이쪽 계열에서 나와요. 이쪽 계열(힐렐학파), 그래서 탈무드에 보며는 샤마이 학파를 많이 욕을 한다고, 욕을. 이쪽 계열이 결국 승리하는 --주도적인 랍비학파가 되어서 이쪽의 가르침이 많이 남아있어요.

그중에 하나 이런게 있다고. 한 이방인이 샤마이한테 와 가지고 “내가 유대교로 개종하고 싶소, 당신이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을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내가 유대교로 개종하겠소.” 그랬다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율법이 너무 복잡해 이방인들에게는. 그러니까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다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로 요약해 달라 이말이예요. 여러분들, 한 발로 몇시간이나 서있겠어요. 그러니 샤마이가 몹쓸놈이라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버렸다 이거야. 이 사람이 힐렐 앞에 왔어. 힐렐 보고 똑같이 말을 했어. 힐렐이 “아, 그거 간단하다.” 율법은, 예수께서 가르치는 황금률 있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쳤죠? 힐렐은 그것의 부정적인 표현 “남으로 부터 당하기 싫은 대로 남에게 하지 말라 그게 율법의 전부라, 그것을 알면 네가 율법 다 안거다.” 라고 가르쳤다는 거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어요.

힐렐은 그 같은 가르침을,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는 가르침을 부정적으로 표현했어요. 아주 유대교적인 발상이지. “남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남에게 따귀맞고 싶지 않으면 너도 남 따귀 때리지 말라.” 그 소리예요.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가르쳤어? 적극적으로 가르쳤다고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우리도 남한테 사랑받고 싶지? 그런대로 우리가 남을 사랑하라.”고 했어요.

또 하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힐렐은 이렇게 인간성이 풍부하고 특히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 말이 바벨론의 탈무드라는 곳에 전승이 된다고 해요. 그런데 하여간 두 학파, 그러나 예수 당시에 단순히 두 학파만 있었던게 아니고 여러 학파가 있은 거지. 여러 학파가 나중에 탈무드에서 예수 당시의 토라 연구와 그 학파의 경향을 두 가지로 간추려서 표현을 한다. 그런데 이제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 예루살렘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되므로 자연히 유대교는 이 원래 유대교 --구약의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유대교였어요. 성전에서 제사하고 그 제사를 통해서 용서를 얻고 성전 중심으로-- 대신에 바벨로니아 유대교가 이렇게 발달하지요. 바벨로니아에서는 성전이 없으므로 회당에서 예배하고 율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고. 그러나 이제 팔레스타인에 돌아와서 다시 성전을 재건해서 성전의 제사가 중심이 되면서 동시에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이 운동, 경건운동이 있었죠. 그것은 이런 모티브였는데 성전이 다시 파괴됨으로 이제 완전히 율법의, 율법(경전) 중심의 종교가 돼요.

그래서 AD 100년쯤에 쟘니아, 팔레스타인의 지중해 연안의 쟘니아? 또는 예브네라고 그래요. 예브네라는 항구도시에서 요하난 벤파카이(?) 위대한 랍비의 영도 아래 랍비들이 모여가지고 당시 그전까지의 유대 랍비들의 율법의 가르침을 모아 가지고 일단, 구약의 정경, 구약의 캐논(canon)을 확정하고 당시 랍비들의 율법의 가르침을 항목별로 법제화한 것이 Mishnah를 확정했고, 미쉬나에 대한 학자들의 토론의 전통, 그것을 Talmud라고 하는데, 그 Talmud를 발전시키게 돼요. 이렇게 됨으로써 AD 70년의 성전 파괴로 말미암아 점차 율법 중심의 종교가 되는데, AD 100년쯤에는 완전히 구약의 정경, 구약의 정경과 구약의 가르침을 항목별로 율법 책에, 구약에 기술한 율법들을 항목별로 법제화한 ‘미쉬나’로 완전히 이제 율법 종교로, 율법 중심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돼요.

그런데 바로 이 100년쯤이 언제냐 하면, AD 70년이후 이와 같은 유대교의 발전은 동시에 같은 구약, 같은 구약에 뿌리를 둔 기독교가 전혀 새로운 종교로 인식되게 되는 그런 과정이예요. 원래 아까 내가 이야기한대로 바울 선교 때만 해도 바울도 그렇게 주장했고, 다른 모든 신약의 저자들도 이 자기들이 선포한 복음이 무슨 새로운 종교로 시작한다고 본게 아니예요. 구약과 유대교의 완성으로 본 거죠. 구약과 유대교의 완성으로... 더구나 유대교가 이렇게 탈바꿈하는 이 기간에 유대교가 점차 --기독교는 그전부터, 바울 당시부터 기독교를 이단으로 취급하고, 유대교 일부로 보지 않고 배척하는데-- 이때쯤 오면 기독교 자체 내에서, 교회 자체 내에서도 더 이상 우리는 유대교가 아닌 진정한 구약의 완성이나 더 이상 유대교가 아닌 별개의 종교로서의 自己 이해를 갖게 돼요. 그래서 이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에서 율법중심의 유대교와 기독교의 독특한 Identity, 별개의 Identity를 가진 별개의 종교로 발전하는 기간이 같아요. 이런 기간에 발전하게 돼요.

 

3. 종합

대충 이런 상황이 바울과 바울의 세계였는데, 이런 세계가 지금 우리가 설명한, 우리가 살펴 본 몇가지의 로마 헬라 세계와 유대교의 세계가 바울의 선교, 신약시대의 선교, 특히 바울의 선교에 결정적으로 공헌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4장 4절 그 첫반부에 있는 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을 지금 이야기 하는데, 그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이 언제 일어났다고? “때가 차매”... 그 말이 원래 헬라어로는 ‘πληρωμα’ 즉 ‘때의 충만함’이 이르매, 충만함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이 ‘때의 충만함’ 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의거해서 그가 그의 선조들을 통해 약속한 구원을 이루기로 한 그 때,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한 모든 여건이 성숙되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의해서 내다 본 그 구원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 되었을 때 라는 그런 말이겠죠. 그러나 꼭 그것이 인간 역사 속에서, 그렇다면 어떤 흔적들을 나타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해서 당시 헬라 세계와 유대 세계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여건들이 혹 이때의 ‘πληρωμα’와 관련 있지 않겠나 생각해서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요건들을 생각해 본다고.

첫째로 아까 이야기한 Pax-Romana, 통일된 로마 제국과 하나의 정치적인 unity, 평화, 그 다음에 비교적 공정한 로마의 재판관, 행정관이 없었으면 선교 못했다고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나 그 지역의 이방인들에게, 두들겨 맞아 죽었다고요. 비교적 공정한 로마 관리가 없었으면 빌립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요. 거기서 두들겨 맞아 죽거나 그래서 Pax-Romana와, Pax-Romana를 지탱했던 직선도로와 포장된 도로, 그리고 안전한 도로, 그리고 안전한 항해로, 항로. 로마인들은 선교사들에게 얼마나 유용하게 이용되었느냐 이말이예요. 지금도 유럽에 가면 로마 도로가 있어요. 직선도로, 조약돌로 포장해 놓은 도로들이 있죠.

그 다음에 도시들의 발달, 사상과 종교적 신념들의 자유로운 교류, 아까 이야기 했죠? 헬레니즘, 알렉산더가 이룩한 헬레니즘의 전통은 각 민족들의 사상과 종교들에 자유로운 교환, Koine 헬라어, 제국의 언어로서의 공통 언어, 이 헬라어가 없었으면 어떻게 선교했겠어요. 여러분들 지금 선교사 간 사람들 말 배우느라 고생들 하죠. 여러분들이 이 헬라어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어디가서나 헬라어로 선포한거요. Koine 헬라어. 알렉산더가 이룩한 헬레니즘의 세계에서 공용어가 된 헬라어.

둘째로, 그 다음에 중요한게 유대인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바울의 선교의 거점 노릇을 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들의 회당, 바울이 어느 도시에나 가면 어디에 먼저 가요? 유대 회당에 먼저 간다고. 아까 회당이 무슨 노릇 했다고? 여행하는 유대인들에게 여관, 여관방 노릇을 해서 거기서 잠을 자고 안식일 되면 다 회당에 예배하러 모이지. 여기 제일 뒤에 누가 앉아 있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앉아 있다고, 이방인이. 회당에는 당시에 목사가 없었어요. full time 목사가 없었다고. 회당장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마 예배를 인도했었던 모양이야. 어떻게 인도하냐 하면, 나중에 이제 신약 당시에 이 ‘lectionary’라는 것. 1년 52 안식일 날, 각 안식일에 읽어야 할 토라, 모세 오경 한 본문, 선지서 한 본문...  이렇게 읽도록 정해놓은 본문 list를 lectionary라고 하는데, 이게 유대교에서 발달한다고. 교회가 나중에 이걸 이어 받아요. 그런데 예수 당시에 벌써 있었다고, 바울 당시에 벌써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하여간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회당장이 그 안식일에 읽도록 지정해진 구약의 본문 한 구절을 읽어요. 읽고는 “우리 중에 혹 이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위로나 권면을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라, 나와 봐라.” 그런다고. 그러면 바울이 여기 이렇게 앉아 있다가 ‘옳다, 됐다.’ 하고 나간다고. 나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여러분들이 읽은, 여러분들이 들은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성취되었노라.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약속한 그 구원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노라’하고 복음을 선포한다고. 복음을 선포해요. 그러면 이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마음이 좀 넓은 사람들이라 “정말 일리가 있는데, 그 좀 더 들어보자.” 그러기도 하지만, 대부분 유대인들은 “저 이단자 나왔다. 이단자, 못된 놈 나왔다.”고 쫓아냈다고. 이 이방인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들어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죽음을 통해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가릴 것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단 말이야. 자기들은 여기 회당에 100년 아니라 죽을 때까지 참여해도 구원이 있는 둥 마는 둥 잘 모른다고. 그런데, 바울이 그러는데 구약 이사야의 말의 성취인데, 자기들에게도 똑같은 구원이 있다고 하니 “바울, 당신 우리 집에 좀 잠깐 갑시다. 다시 한번 좀 이야기해 봅시다.” 이렇게 해서 바로 회당 옆에  교회를 세운다고. 누구를 중심으로?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린도 교회도 이랬다고. 고린도 교회도 이렇게 세운거예요.

이렇게 바울이 회당을 거점으로 바울이... 아까 회당에서 뭐라고 했죠? 직업알선소 노릇한다고 했죠? 직업알선소. 그래서 바울이 “나 천막 만드는, 가죽 다루는 사람인데 혹시 그 어디좀 알선하쇼.” 하면 여기서 “아, 우리 동네 유대인 하나 있는데 로마에서 막 올라온 브리스길라 그 사람들의 천막 회사라고 있는데 거기가서 한번 취직해 보라.”고 그랬죠. 바울이 거기가서 취직을 해가지고 돈을 벌면서, 자기 생계를 벌면서 회당에서 복음 전파해 가지고 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한 거예요. 이게 바울의 선교 패턴이라고. 그러니까 이 유대인,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들의 희망, 그들 가운데 있었던, 이미 구약을 잘 배워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귀를 가진 이방인들, 이들이 없었다면 생판 여호와가 누군지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파한다는 것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어렵겠는가? 이들은 아주 이미 잘 마련된, 유대 회당에서 율법, 구약성서를 공부, 잘 마련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바울 선교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어요. 예?

셋째로, 또하나 당시 아까 이야기한 헬라세계의 숙명과 절망의 분위기, 영적 분위기, 그래서 구원을 갈급하는 분위기, 또 유대인들로 말한다면 수백년동안 이방인들의 짓밟힘을 당한 가운데에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상황, 이런 것들이 신약과 바울 선교에 큰 역할을 한 세개의 일반적인 조건들이었어요.

이런 모든 조건들이 다 신약의 선교. 특히 바울의 선교에 성공, 성공에 기여한 요건들이었다. 이말이예요.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시간의 충만함이 왔을 때에, 그것은 혹시 당시 헬레니즘과 유대교의 이런 여건들을 갖춘 상황을 혹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서 정한 그 때이겠지만, 그것은 일반 역사에서는 그런 요건들로 특징을 갖춘 때가 아닌지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이말이예요.

자 그러면 바울의 선교의 세계를 간단히 그것으로 마치고 이 다음 시간에는 바울 서신으로 들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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