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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삼일절

by 【고동엽】 2022. 8. 24.

골로새서 1:13~20

오늘은 한국 교회만이 지키는 절기 주일로서 이 주간에 있을 삼일절을 기념하는 주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역사가 많이 변한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일본이나 북한이나 몇 십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지금은 서로 오고 가는 것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확실히 시대 변화적 문화 충돌이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어정쩡한 모습입니다. 북한이나 일본에 대해서 욕을 해야 애국하는 것인지 도와주는 말을 해야 애국하는 것인지, 화해는 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해야 옳은 일인지 잘 모르는 분위기고, 또 정치 지도자들도 그런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변하는 시대에 하나의 문화적 갈등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 6자 회담이 아주 잘 타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북한은 다른 나라들이 원하는 핵을 포기하고 없애는 작업을 할 것인가에 대해 전문가들도 서로 다른 의견을 수없이 매스컴에 발표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앞으로 핵을 그대로 보유하고 기회만 있으면 주변 국가에게 얻어낼 것을 계속 얻어낼 것이라고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이 믿어지게 되는 게 과거 북한은 7 4 공동성명 이후에 제일 열심히 한 것이 땅굴을 판 것입니다. 1992년도 한반도 비핵화 선언으로 미국에서 갖다놓은 핵을 한국에서는 다 거둬들였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북한은 그 때부터 핵 전력화를 추진해서 기어코 만들어 핵을 터뜨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6자 회담을 해놓고 뭐하느냐 말입니다. 또 해놓고 무슨 일을 어떻게 꾸밀지 모릅니다. 최고위층 관계자까지도 이렇게 되면 6자 회담의 성과는 종이쪽지에 불과할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신문에 전면 기사로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인도적으로 지원을 한 것은 저도 열심히 했던 사람이라 찬성하는데 정치적 효과는 없는 겁니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성경말씀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굶주리는 백성에 관한 원조를 통해서 거기에 정치적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2월 15일 미국 워싱턴에서는 일본사람으로 미국에 국회의원이 된 마이크혼다 의원의 발의로 "위안부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국 국회의원이 되어 일본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종군 위안부 청문회를 주선해 미국 국회에서 지금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일을 일본계 국회의원이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강제 동원되었던 우리나라 김군자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가 청문회에 발언자로 나와서 고발했고 네덜란드의 얀 러프 오혜른 씨도 나와서 자신이 당한 일본군 만행을 고발했습니다. 그분들이 증언하기를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안 끝났다. 아직도 싸우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훌륭한 국가 건설을 할 수 있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오늘 성경말씀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와 만물 창조의 목적은 하나다.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 되는데 그 속에 인간의 행복이 약속되어져있다." 마이크혼다 위원에 대해 사람들이 "일본을 왜 이렇게 불행하게 만드느냐?", "무슨 소리하느냐? 내가 일본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서 그런다. 위안부 청문회는 일본을 위한 것이다. 일본이 이 문제를 언젠가는 해결하고 넘어가야 영광스럽게 되고 아시아에서 존경받는 나라가 될 것이지 이렇게 계속 질질 끌어가면 일본은 명예롭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일본 태생이지만 미국의 국회위원으로서 이 문제를 오히려 일본을 위해서, 조금은 피해가 있더라도 해결하고 넘어가겠다."
우리의 독립선언문은 성경말씀 비슷하게 되어 있습니다. 33인 중에 16인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독립선언문이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다.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을 영위케 함이요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피하지 못할 불안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에 있어야 할 단계가 되어 우리는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지금 힘의 시대가 지나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온 인도적 정신이 인류의 역사 위에 펼치는도다. 우리는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서 자기의 신운명을 개척하며 결코 일시적 감정으로서 일본을 질축 배척함이 아니로라. 우리는 본디 타고난 자유권을 지키며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이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전진하나니" 성경말씀과 같습니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선포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서 3 1운동의 기초가 놓아졌다고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상하이에 있는 홍구 공원에 갔었습니다. 거기에 간 이유는 윤봉길 선생의 기념 비석이 거기에 있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곳에 놀러왔던 10여명의 중국인들이 그 비석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온 사람인데 윤봉길 선생의 비석이 여기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라고 저는 통역하시는 조선족 목사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가만히 있는데 그 분들이 흥분을 해서 나에게 십여 명이 번갈아서 열심히 말하는 겁니다. "저분들이 무엇을 나한테 말하는 겁니까?" 웃으면서 그분이 "윤봉길 선생은 조선 사람들보다 우리 중국 사람들이 더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군들에게 상하이가 점령당해서 치욕적 전승 기념식을 할 때 중국인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꼼짝도 못하고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는데 조선 사람인 윤봉길 선생이 이곳까지 찾아와서 그 기념식에 폭탄을 던져 수라장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해서 우리 중국 사람들이 얼마나 통쾌해 했는지 모릅니다. 또, 아울러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조선인이 찾아와서 저렇게 하는데 우리는 뭘 하고 있었나? 침략자에 대한 표현을 그가 그렇게 통쾌하게 해 준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를 존경합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열심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삼일정신에서 배워야 할, 특별히 교회가 배워야 할 민족 교훈이 아주 뚜렷한 게 있습니다.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데는 여러 종교가 힘을 합쳤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한용운 스님이 대표로 나왔지요, 천도교의 대표들이 나왔지요, 기독교의 대표들이 나왔습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33인 중에 기독교 목사는 11명, 전도사가 3명, 장로가 1명, 평교인 1명이었는데 이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른 종교인들과 태화관에 모여서 밤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같이 힘을 합쳤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모든 종교가 가고자 하는 길은 선이요 평화입니다. 영생의 교리가 다른 것이지 사회악 배척에는 똑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악을 제거하는 이 사건에 있어서는 모든 종교가 손을 잡아야합니다. 우리 기독교도 얼마나 배타정신이 강해졌는지 목사와 스님이 밥만 같이 먹어도 이단으로 본다든지 절에 가서 스님과 인사만 해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든지 이런 독선적 입장을 버려야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 날마다 터지고 있는 나라는 이라크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제일 큰 이유는 수리파와 시아파의 종파 전쟁입니다. 과거는 사담 후세인의 종파가 세력을 잡았는데 지금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반대로 이 파에서, 저 파에서 누가 세력을 잡을 것인가? 저는 화신하는 일이 있습니다. 세계 모든 종교인들이 힘을 합치면 세계 평화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가 원하는 것도 다 평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상의 국가가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권력 남용을 부릴 때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제시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악을 제거하는데, 일본도, 공산당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은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을 포기하라고, 지상의 국적만을 소유할 것을 강요당했기 때문에 그토록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많이 당한 것입니다. 또, 우리 같은 기독교 안에도 철학이 다른 파가 많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치 참여를 하지 마라!"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세상일에 관해서 안 된다는 소극적 신학 입장을 주장하는 파도 많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 정치 참여, 사회 참여를 살펴보면 됩니다.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정치적으로 인권 억압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 현장에 직접 나타나셔서 억압받는 민족 해방을 위해서 구체적 지위를 하고 계십니다. 이 일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몸을 바칠 사람으로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에서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정치적 큰 사건에 나는 적합하지 아니함으로 절대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그러한 정치적 민족지도자를 원했다면 내가 왜 바로의 궁을 떠나겠습니까? 바로의 후계자로 정치실세가 되어서 그 힘을 가지고 내가 민족 해방을 시키든가 말든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지 나는 그런 거 이제 싫습니다. 조용히 이 시골에서 양떼를 기르다가 죽으면 천당 가겠습니다. 싫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떡하십니까? 절대로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모세를 선택합니다. "이것은 나의 뜻이며 나의 소원이며 내가 기어코 하고자 계획한 일이니까 내가 너를 도와줄 것이다. 어서 속히 너는 나서라."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섰습니다. 그로 인하여 고통 받는 히브리 민족 공동체는 타민족으로부터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갖는 역사 기록을 봅니다. 왜 기독교 지도자들이 성경공부나 하고 기도나 할 것이지 왜 정치에 뛰어들어서 삼일 운동을 일으켰는가? 더구나 "교회가 그 일을 앞장서서 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탄압을 받아서 3,373명이 체포되어서 옥고를 치렀는데 왜 했는가?" 이렇게 주장하는 파도 있습니다. 당시 한국 기독교에는 일제하에서의 해방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빠져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갔는데 당시 한국인들은 "일제의 정치적 권력에서의 해방이 곧 출애굽이요 해방된 조국이 곧 가나안 복지다." 이러한 신앙의 기초를 정립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삼일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사기의 역사는 13번 똑같이 반복되는데 내용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타민족에게 정치적 억압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특별한 사사 한 사람을 세워서 그를 통해서 해방 역사를 성취하는 내용입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이 삼손이나 기드온 같은 인물을 부르셔서 민족 해방의 정치적 과업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십니다. 기드온에게 전쟁하면서 군사를 모집하라고 하십니다. 모집된 군사는 너무 많으니 줄이라고 하십니다. 맨 나중에 "300명만 데리고 전쟁하라. 전쟁할 때는 횃불을 준비하고 나팔을 불고 흙항아리를 깨뜨리고 소리를 질러라." 마치 군대 지휘관 같은 역할을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에스겔 33장을 보면 하나님이 파수꾼에게 명령하십니다.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파수꾼이 나팔을 불어 민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면 그 피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나팔을 불어 경고하였는데도 백성들이 준비하지 않으면 그 죗값은 그 백성에게 돌아가리라." 그렇게 해서 그 시대에 사회악을 물리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 참여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장 훌륭하게 정치 참여함으로 자기 백성을 멸종 위기에 구해낸 여인을 알고 있는데 에스더입니다. 하만 장군의 히브리 민족 멸종 계획을 전해 듣고 "죽으면 죽으리라."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가서 고하여 민족 구원을 했습니다. 그때 성경 말씀이 분명합니다. "만약 네가 이 일을 모른 체하고 나는 왕후가 되었으니까 내 민족이 이 나라에서 죽든 말든 내 일신상의 행복만 추구하자 하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모든 히브리 민족을 다른 길로 구원하고 너만 혼자 죽게 만드실 것이다. 네가 나서겠느냐 안 나서겠느냐? 이 국가적 정치 반란사에 너는 적극 앞장서라." 그래서 에스더가 민족 구원을 한 것 아닙니까?
신약에 보면 예수께서 사역 시작하시기 전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하고 자신이 앞으로 사역해야 될 모든 분야에 대해서 이사야를 인용해서 하시는 말씀을 누가복음 4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여기서 "가난한 자"에게 초점을 두신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어느 때 배고픈 인생들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떡과 물고기를 배부르게 나눠주셨습니다. 이것이 사회 참여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눌린 백성에게 인권 자유의 회복을 위해서 내가 일을 할 것이며,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고통 받는 형제들을 회복케 하는 일을 위해서 내가 보내심을 받았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나라는 다 선진국이 되고 인권 회복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시면 사회 참여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요한이 외쳐 가로되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울 것이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두려움들이 생겼습니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직업을 비유해서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세금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세리장이 되는데, 선생이여! 우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부정 세관원들 같이 되지 말라." 영혼의 갈 길을 인도하는 선지자가 세금 걷는 일의 갈 길을 정해주고 계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군병들이 가로되 "우리는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라." 철저하게 사회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아니, 너는 율법사가 아니냐?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나이다." "그대로 해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설교를 해주셨습니다. 여리고는 곡창지대입니다. 농사를 짓거나 과일을 따서 당나귀에 싣고 예루살렘까지 가서 산 고갯길을 넘어가야 됩니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 농부의 주머니에는 틀림없이 돈이 있습니다. 강도들이 그걸 압니다. 그러니까 여리고 계곡에는 항상 강도 사건이 나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설교하신 겁니다. 강도가 칼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는 것은 사회악입니다. "이 사회악 현장에서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다. '저런 것은 내 일이 아니야. 나는 빨리 가서 제사 지내고 기도해야 돼!' 그 다음에 레위 사람도 '이것도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이 성전 봉사야. 이런 피 흘림은 내가 안 봐도 괜찮아.' 둘이 다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참여했다. 강도 만난 자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다. 세 사람 중에 누가 제일 잘했냐?"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문둥병 환자들은 그때나 이때나 격리 수용했습니다. 왜? 전염이 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문둥병 환자들을 고쳐주신 기록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런데 고쳐주시고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너는 이제 병이 나았으니까 가족들과 가서 행복하게 살아라." 그러지 않으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당시 제사장은 재판관 임무입니다. 제사장이 그의 몸을 살펴 본 후에 "너는 문둥병이 다 나았다."고 선언을 해주어야만 그는 사회적 복권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집에 맘대로 갈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이는 회복의 권리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서 사회적 복권을 얻으라.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 우리의 선배들이 일제하에서 그렇게 피를 흘리며 순교자적으로 이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일했던 것은 이 나라 역사에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역사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다른 종교인들과도 친숙하게 손을 잡았던 것이 역사의 큰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1930년대 노천명이라는 시인이 '사슴'이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인권이 유린당하는 압박 사회에서 민족을 보고 자기를 보는 슬픈 운명에 우리 모습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사슴은 초식동물입니다. "절대 남을 해치지 않고 풀만 뜯어먹고 선하게 사는 너를 육식동물들이 덮쳐서 산채로 피를 흘리며 너를 뜯어 먹는데도 말이 없는 사슴이여! 해 뜨는 동방의 빛이여 자연을 순응하며 예의지국이여! 관이 향기로운 높은 족속 사슴의 뿔이 아름다워서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그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보는 슬픈 사슴이여! 나라 잃은 현실에 별 힘이 없어서 슬프게 먼 데를 바라볼 뿐이라." 우리민족은 하나의 출애굽 사건은 성취되었습니다. 식민지 해방 8 15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남북통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통일된 가나안 땅에 어떻게 우리가 정착할 수 있을 것인가? 때로는 힘이 없어 슬프게 먼 산을 바라볼 뿐입니다. 이렇게 세계 조소거리로 남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의 소망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있는 권세나 이 세상에 창조된 만물이나 다 하나님을 위해서 되었도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 돌리시는 역사의 순환의 바퀴가 우리 민족을 또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서는 도저히 일본의 식민지를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세계 최대 강대국인 미국, 일본 두 나라가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이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을 앞장세워 진주만 공격을 한 것이지 진다고 생각하면 했겠습니까? 그러한 강대국의 식민지가 된 우리 백성이 슬픈 사슴이 된 것입니다. 모가지만 길게 빼고 무슨 도움이 없을까? 우리 형편으로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민족에게 8 15에 출애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어떤 힘을 통해서 민족의 제2의 출애굽, 즉 통일된 가나안을 이 땅에 주실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믿기 때문에 삼일 기념예배를 쉬지 않고 드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제2의 가나안 땅, 통일된 조국이 속히 되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모두 다 아시는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 이 민족이 21세기에 세계 선교의 주역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써주시기 위하여 한반도의 소원을 들어 응답하옵소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일제 식민지 하에서의 자유, 해방과 같이,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어떤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한반도의 갈 길을 가장 선하게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출처/이필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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