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경계로 (출 15:22-16:30)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느 교과서에서 읽었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네덜란드는 잘 알다시피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지역이 많은 나라인 까닭에, 바닷물을 막기 위해 세워져 있는 둑들은 그 곳 사람들에게는 생명선 그 자체입니다.
어느 소년이 둑 위를 걸어가다가 그 둑 틈새에 조그마한 구멍이 생겨서 물이 새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소년은 그것을 그대로 버려두면 물구멍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둑이 무너져 내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위에는 다른 아무 사람도 없었고 마을까지 달려갔다 올 여유도 없었던 까닭에 그 소년은 일단 자기 손가락으로 그 물구멍을 막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물구멍은 조금씩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소년의 팔뚝 전체를 다 그 구멍 속에 넣어야만 했지만, 마침내 동네 사람들이 그 소년을 발견하게 되고 그 둑을 안전하게 수리하게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의 초점은 그 소년의 감동적인 희생정신에 있는 것이었지만, 저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처럼 크고 튼튼히 쌓여진 둑이 그처럼 작은 물구멍 하나로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소년이 그 물구멍을 자기 손가락과 팔뚝으로 막지 않았다면 그 물구멍이 커지는 속도는 훨씬 빨랐을 것이며 결국 그 큰 둑 전체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 제게는 인상 깊게 남았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것, 처음에는 별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지만, 만약 그대로 버려두면 나중에는 엄청난 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둑에 뚫린 작은 물구멍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그와 같은 물구멍에 해당되는 것이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소한 것이지만 나중에는 우리 신자의 신앙생활 전체를 한 순간에 다 파선시켜 버릴 수 있는 위험한 물구멍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에 그 물구멍은 바로 불평 원망하는 버릇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일 처음에는 그리 대단한 죄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질 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원망의 물구멍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만드는, 그들의 전 인생의 둑이 완전히 터뜨려 버린 큰 비극으로 직결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사람의 불평하고 원망하는 버릇이 결국 어떤 큰 죄로 자라나게 되는지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버릇 속에 그런 위험한 물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시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1. 불평 원망하는 버릇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게 만들고 불순종하는 마음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런 과정을 그대로 밟았습니다.
본문 15장 22절로 24절에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내 버리지 못한 원망의 버릇, 결국 그들의 출애굽 이후의 행로에 치명적인 죄악이 되었던 그 악습이 제일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기 ‘원망하다’라는 단어는 원어로는 ‘투덜투덜 불평하다 (murmur)’라는 뜻입니다.
무슨 악에 받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원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수근수근, 중얼중얼하며 “에이, 물이 써서 못 마시겠다.”라는 정도의 불평으로 시작된 말이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목이 마른 판에 모처럼 발견한 물이란 게 못 마실 정도로 쓴 것이었으니 어쩌면 그 정도의 불평이 입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평은 사실상 그들이 스스로 손가락으로 막아버렸어야 했을 작은 물구멍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저마다 입에서 줄줄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그 원망은 홍해를 건넌 후 겨우 삼일 지난 후에 터져 나왔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 노도와 같은 애굽 군대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홍해를 갈라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을 체험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이제는 물맛이 좀 쓰다고 원망 불평하는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 놀라운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는 사실상 광야생활 내내 잊히지 말아야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삼일을 못 지나서 벌써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물 맛 쓰다는 그 작은 불평의 마음 하나가 그 큰 은혜에 대한 감사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원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15장 25절로부터 27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첫 원망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무 벌도 내리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그저 물을 달게 만들어 잘 마시게 해 주시고 또 곧 이어서 큰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한 가지 의미심장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큰 구원을 체험하고서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작은 일에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사람들이 과연 앞으로 당신의 말씀을 제대로 순종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테스트해 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원망 잘하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인가?’ -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인들에게도 실로 의미심장한 질문인 것입니다.
그 테스트는 곧 이어지는 만나 사건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16장 4절에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식량으로 만나를 내려 주시는 가운데 그들을 위한 제1차 테스트로서 두 가지 규례를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매일 거두어들인 만나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16:19) 하는 것과, 제 육일에는 안식일 분의 식량을 준비하기 위해서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두라”(16:22) 고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테스트의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그것은 모세와 하나님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첫째 규례의 순종 여부에 대해서는 본문 16장 20절에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규례 순종 여부에 대해서는 16장 27절과 28절에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고 기록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실시한 ‘말씀 순종 여부 테스트’에 불합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불평 원망하는 것이 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여도 실상은 아주 위험한 ‘물구멍’이 되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원망 불평하는 마음은 반드시 감사 감격하는 마음과 상치되게 되어 있어서, 한쪽이 커지면 다른 한쪽이 약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는 아무 영적 감각이나 반응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만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툭하면 불평 잘하는 교인치고 뜨겁게 감사하며 그 얼굴에 기쁨이 넘치는 사람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생활 같이 하면서도 정말 별 것 아닌 일 가지고서도 늘 뒤에서 중얼중얼 불만을 토하는 교인치고 진심으로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은 그 불평 원망하는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을 먼저 갉아먹어 버리고 완전히 억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마음과 버릇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쪽으로 점점 더 자라나게 됩니다.
감사란 것은 은혜 제대로 받은 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 반응인데 그것조차 없다면 이미 곁길로 떨어지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 없는 마음은 마치 “거머리의 두 딸들”(잠 30:15)처럼 ‘달라 달라고만 하면서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욕심만 남게 됩니다.
바로 그 욕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말씀 불순종하는 것도 아주 간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호멜 씩 거두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남보다 더 많이 식량을 쌓아 두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 말씀을 아주 쉽게 잊어버립니다.
‘안식일 분을 위해서는 육일 째에 미리 거두고 제 칠일에는 나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규례를 알면서도 오히려 그 기회에 남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물욕 때문에 그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도 지극히 쉽게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헌금은커녕 십일조조차 하지 않는 집사들이 제직회석상에서는 제일 말이 많고, 주일성수도 제대로 하지 아니하고 돈벌기에만 바빠하는 교인들이 평소에 교회에 대한 불평불만은 제일 많이 늘어놓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에서 매사에 불평하는 말이 아주 쉽게 나오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감사가 없어지게 되며, 자기 마음속에서 원망하는 마음만 끝없이 솟아오르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겁도 없이 불순종하는 죄악으로 발전되는 것을 깨닫고, 그 작지만 위험한 물구멍을 스스로 미리 막을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불평 원망하는 버릇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불신과 배교로까지 자라나게 됩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 과정을 따라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들 중 절대다수가 파멸에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두 번째 원망은 본문 16장 1절로 3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월 십오일”에 이 사건이 생겼다고 했으니, 출애굽한지 어언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식량 문제로 인하여 원망이 발생했습니다.
이미 광야 행진을 한 달 정도 했다면 출애굽할 때 들고 나왔던 식량은 거의 동났을 것이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의 원망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갔습니다.
그저 “배고픈데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럴 바에야 아예 옛날 애굽 사람 밑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먹고 살던 시절이 훨씬 낫다”라고 원망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 때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때 하나님 손에 죽었더라면 더 행복했겠다”라는 극단적인 악담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같은 원망 소리가 들렸을 때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어쩌고 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으시고 당장 나타나셨습니다.
아까는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15:25) 그 응답으로 나타나셔서 해결해 주셨지만, 이번에는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16:4)라고 기록된 것처럼 즉각 반응을 보이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원망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하나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백성들이 모세 앞에서 원망하는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에게 직접 원망하는 소리로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6장 7절로 10절에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 모세가 또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명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는 등, 이 모든 표현들이 강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16:2)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원망은 하나님 들으시라고 일부러 한 말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바로 하나님 당신을 향하여 직접 원망하는 말로 들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평하고 있는 상황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시켜 주심으로써 야기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바로의 종노릇하면서 살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이 광야까지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라는 곳은 바로 저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는 여정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광야생활은 그 자체로서 곧 하나님의 선하심이 쏟아 부어지고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불평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광야가 자기네들을 “주려 죽게” 만들 저주의 장소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들과 홍해를 가른 기적까지 동원하시면서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이시라면 일용할 양식 정도야 가볍게 해결해 주실 것이 너무나 뻔한 일인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애굽에서 곱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이 광야에서 몰살시키시려고 데려 나오신 것처럼 생각하는, 실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완전히 망각한,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불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 앞에서 원망한 말이 곧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원망이나 다름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두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위에 세워 주신 지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모세와 아론이 그들과 꼭 같은 사람인 까닭에 그들 앞에서 그런 원망하는 것을 조심하지 않고 겁을 낼 줄 몰랐지만, 문제는 그 두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대언자요 하나님의 사자(使者)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달하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백성을 지도하는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은, 내용적으로는 사실상 하나님을 직접 원망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신하고 정면으로 반역한 것이야말로 그 원망이 내포하고 있던 실질적인 죄악이었고, 바로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광야 여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서든지 신자의 입에서 불평 원망의 소리가 나오게 되면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그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구원받은 대열에 서게 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죄입니다.
아무리 육신생활에 좀 부족한 것이 있고 자기 개인 인생에 잘못되어 가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 믿은 후에 누리는 새 생활은 적어도 불신 생활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행복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라는 사람이 세세한 인생살이에 대하여 불평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출애굽한 광야 생활보다 이전에 애굽에서 죄악의 종노릇하며 마음대로 먹고 살던 시절을 더 행복하게 여기는 망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신자의 입에서 나오는 불평은 그 직접적인 대상이야 누구이든지 간에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라는 이 두려운 사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살기 힘들다고 혼잣말로 불평을 하든지, 교회생활에 대하여 다른 교인 앞에서 불만을 토하든지, 혹 ‘예수 믿어도 잘 되는 것 하나도 없다’라고 교역자 앞에서 원망하는 그 모든 말들이 실제적으로는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그 환경이라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인들이 교역자에 대하여 불평하는 말을 정말 삼가야 합니다.
담임목사에 대해서는 그래도 예의를 지킬 줄 알면서도 부목사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여전도사들에 대해서는 아예 마치 자기가 부리는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제멋대로 비난하고 악소문을 퍼뜨리는 교인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교역자에 대한 악담은 그 부교역자들을 임명한 담임목사를 비난하는 것이고, 목사에 대한 불평은 바로 그를 기름부어 세우신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원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가 자기 입장을 세우고 자기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에게 무슨 변명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당장 그들 사이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종들을 대변하시고 당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선언하셨던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함부로 원망하는 말이 계속 흘러나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신앙하고 하나님께 정면 도전하고 반역하는, 걷잡을 수 없는 둑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을 꼭 깨닫고, 그런 불평의 작은 물구멍들을 오직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늘 미리 막아버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불평 원망하는 버릇은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협하는 악습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병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 10절과 11절에서 경고하기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내 스스로 막지 못했던 불평 원망이라는 그 작은 물구멍은 출애굽이라는 그 큰 구원의 은혜를 망쳐 버리도록 발전되었고, 그 작은 ‘투덜거림’은 결국 광야에서의 멸망이라는, 둑 전체가 한꺼번에 터지는 사건으로까지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일을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마땅히 자신의 거울로, 자신의 경계로 삼도록 하기 위하여 본문의 이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아니 우리의 진짜 마음으로는 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의 입술에 그와 같이 중얼거리는 버릇이 없습니까?
우리의 육신생활에 조금 모자라는 것, 조금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두고 가볍게 투덜투덜 불평하는 버릇이 없습니까?
누구라도 그런 경우를 당하면 의례히 할 수 밖에 없는 불평, 심각한 죄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투덜거림이 혹시 내 입에서 떠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사 앞에서, 교인 앞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속에서만이라도 그런 불만에 가득 찬 작은 중얼거림이 혹 날마다 계속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작은 물구멍이라고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처럼 불만에 쉽게 끌려 다니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도 간단하게 잊어버리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도 또한 너무나 쉽게 불순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에 받혀서 고함치는 원망은 아니라고, 하나님 들으시라고 일부러 하는 불평은 아니라고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처럼 입에서 원망이 쉽게 나오고 있다면 이미 그 심령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의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결국 점점 더 하나님을 불신하고 끝내는 배교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그 물구멍은 점점 더 커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가, 내가 큰 축복을 아직 맛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혹 이와 같은 불평의 버릇 때문이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서, 그런 원망을 오히려 눌러 버릴 수 있는 감사의 제목들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니 이미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마땅히 감사드려야만 할 은혜들을 상기해 내고 구체적인 감사의 제물을 잊지 않고 늘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이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사소한 일에도 불평하던 이 악습의 물구멍을 완전히 막아 버리고, 이제부터는 오히려 작은 일에도 항상 감사로써 자신의 심령과 입술과 손을 대신 가득 채울 줄 아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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