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사하는 이유 (딤전 1:12-17)
디모데전서 1장 1절을 보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나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1장 2절을 보니, 이 편지의 수신자는 그가 믿고 사랑했던 <믿음의 참 아들> 디모데입니다. 그런데 1장 3절을 보니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떠날 때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거기 남겨두고 떠났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일단 풀려난 뒤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심방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에베소 교회를 방문할 때였습니다. 마침 빌립보에서 목회하고 있던 디모데가 믿음의 아버지 바울을 만나러 달려왔습니다. 문제는 당시 에베소 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거기 더 오래 머물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도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하는 수없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거기에 남겨, 그 문제들을 처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마케도니아 지역에 가 보니, 그 곳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에베소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디모데를 생각하면 바울의 마음이 늘 편하지 않았습니다. 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써 보낸 편지가 바로 디모데전서인데요, 바울의 애타는 심정을 직접 들어봅니다. / 딤전 3:14-15 / (읽기) / 너에게 속히 가기를 바라나 그러지 못하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전해져 오는데요, 그런데 15절에 보니, 이 편지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군요.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고>, 그리고 <이 집은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이요 진리의 터전임을 알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쓴다는 거지요.
당시 에베소 교회는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해서 진리의 기둥과 진리의 터전이 흔들리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율법주의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신 율법만 지키면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이 난무했고, 영지주의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인정하나 예수님의 인성(人性)은 인정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저들의 믿음을 흔들었습니다. 또한 극단적인 율법주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을 더욱 공고히 하였고, 초점을 잘못 맞춘 영지주의는, 인성을 무시한 나머지, 성도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금욕주의 아니면 극단적 쾌락주의로 빠지게 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해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시작하자마자, 이런 이단 사상들을 조심하고 경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장 4절,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라!>, 1장 6절,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 1장 7절, <자기가 말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들>, 1장 9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오직 불법한 자들과 죄인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라!>, 1장 11절, 그러니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아라!>
이렇게 시작한 바울은 이 편지의 결론 역시 이단 사상을 조심하라는 권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들어봅니다. / 6:20-21 / (읽기) / 거짓되고 망령되고 허탄한 말과 허한 변론을 피하라는 거지요, 믿음에서 벗어난 자들을 조심하라는 거지요. 대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만 채우라는 거지요.
# 2
그런데 오늘의 본문, 1장 12절 말씀을 보니,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던 사도 바울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자기 고백과 자기 간증을 하기 시작합니다. 거기 12절 중간 대목인데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한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감사함은, 내가 감사하는 이유는, 이런 뜻이지요. 해서 오늘 말씀의 제목도 <내가 감사하는 이유>인데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자신의 신앙을 아들에게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해서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사도 바울의 감사를 배우면서, 내가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부디, 2005년도 상반기를 풍성한 감사로 마감하시고, 하반기를 새로운 소망으로 열어 가시기 바랍니다.
우선 바울의 감사를 배움에 있어 가장 먼저 기억할 단어가 있으니, 13절과 16절 에 나오는 <긍휼>이란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의 감사는 기본적으로 주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고백이기도 하지요.
중요한 점은, 이렇게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되자, 그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사도 바울은 자기 삶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감사하고 있군요. 주님 내 안에 계셔, 내 생각이 변하고, 내 마음이 변하고, 내 인생이 변하게 된 이 놀라운 사실에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군요.
1장 13절을 보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고백하는 말 치고는 너무나 솔직한 고백이 있군요. 바울의 심정으로 우리도 한번 고백해 볼까요? / 1:13 / (읽기) / 그랬습니다. 바울은 주님 만나 긍휼하심을 입기 전까지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일 뿐이었습니다.
거기 훼방자란 단어, 헬라어로 모독하는 자란 뜻이요, 핍박자란 단어, 추격하는 자란 뜻이며, 포행자란 단어, 폭력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사람이란 뜻인데요, 그랬습니다. 바울은, 주님 만나기전, 주님을 모독했고, 주님의 사람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괴롭혔으며, 심지어 폭력으로 인권을 유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일들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그 땐 몰랐다는 점입니다. 13절 후반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죄인 줄도 모르는 불쌍한 중에 가장 불쌍한 인생이었다는 고백이지요.
그랬던 사울이, 일단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14절,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해지자,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요, 그랬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께서 이 죄인을 용납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직분까지 허락하셨다는 점이었습니다. 죄인을 불러 직분을 주시다니, 죽이신다 하여도 할 말 없는 죄인인데, 직분을 주시고, 능력까지 주시니, 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해서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키기까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16절을 보실까요? 중간 대목,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셨다!> 여러분, 주께서 나를 먼저 오래 참아주셨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주님, 먼저, 일절, 오래, 참아주셨기에 사도 바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오래 참는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죽어 지옥에 가 있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 나가 출세하는 것, 감사할 일입니다. 세상에 나가 돈 많이 버는 것, 큰 감사의 제목입니다. 이런 저런 시험에 합격하는 것, 명예와 권력과 부를 갖게 되는 것, 다 감사의 조건들 맞습니다만,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서 배우는 근본적인 감사는 내 안에 일어난 변화에 대한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불쌍히 여겨 오래 참아 주신 주님께 먼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래 참아 주실 뿐만 아니라, 나의 죄와 허물까지 모든 것을 참아 주시어, 오늘의 내가 있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먼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로 내 안에 일어난 그 놀라운 변화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감사의 마음으로 이젠 나도 주님처럼 먼저, 일절, 오래 참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시기 바랍니다. 해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1:15 / (읽기) / 죄인 중에 괴수조차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사도 바울, 정말 귀한 고백인데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변화는 어떤 것들이었는가, 그에게 일어난 어떤 변화를 감사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하는 변화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드리는 감사는 온전한가? 무엇을 감사하라 하시는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 3
1. 주께서 이 죄인을 불러, <분노와 미움의 사람>에서 <용서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 시절, <살기가 등등>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예수 믿는 것들 잡으려고 다메섹까지 추격하던 핍박자, 마침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포행자의 죄까지 범했던 인물, 한 마디로 그는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을 모르는 채, 잘못된 신념에 따라,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믿었던 터라, 그의 살기는 대책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어, 주께서 그를 치셨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채찍질이었죠. 그렇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자, 사람이 변하는데요, 분노가 변하여 용서가 되고,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 바울의 가슴 속엔 분노와 증오의 대신 은혜와 사랑만이 충만했습니다. 또한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이렇게 거듭난 바울, 이젠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라 그 가슴에 품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주님의 사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해서 그의 입술엔 늘 이런 고백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나의 형제자매들아, 나의 사모하는 이이여,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이들이여!
가슴에 사랑이 넘치니,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고백이 곧 시가 되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아니요,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감사의 제단에 나오신 여러분, 혹 아직도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미움을 품고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어,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이 시간,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모든 분노와 미움을 씻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께 감사하는 첫 번째 이유, 그것은 나를 오래 참아 주시고, 용납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새 사람 만들어 주심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2. 주께서 이 죄인을 불러, <자랑과 교만의 사람>에서 <겸손과 복종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 시절, 자랑할 만한 것들이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가문으로 보나, 혈통으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학벌로 보나, 심지어 신비 체험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잘난 사람 맞았습니다.
문제는 그런 자랑들이 교만으로 이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일단 교만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자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안하무인 망나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극도의 교만은 극단적인 죄를 불러오는 법, 결국 그는 살기를 품게 되었고, 죄인 줄로 모르고 사람을 죽이는 포행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바울을 주님이 불쌍히 여겨, 내치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자 그의 자랑이 겸손이 되었고, 그의 교만은 복종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언제 겸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젠 죽도록 충성할 자신이 생겼습니다. 겸손과 복종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 쓴 뿌리는 쉬 제거되지 못하는 법, 교만의 뿌리는 쉬이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해서 주님은 그의 몸에 안전장치를 걸어두셨으니, 그것이 바로 찌르는 가시였습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장미 꽃 가시까지 감사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서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그는 겸손과 복종의 종이 되어 평생을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헌신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 아직도 마음속에 인간적인 자랑으로 가득합니까? 주님 앞에서 부질없는 것을 자랑하고 있진 않습니까? 자랑이 지나쳐 그만 교만 마귀에 사로잡혀 목을 곧게 세우고 있진 않습니까? 아니오, 이 시간,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모든 자기 자랑과 교만을 씻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젠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이젠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께 감사하는 두 번째 이유, 그것은 내 가슴에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심어 주시고, 겸손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주께서 이 죄인을 불러, <고통을 주던 사람>에서 <고난을 감내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 시절,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죄인 중의 괴수>였다고 아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놀랍게도 천하에 몹쓸 죄인을 부르시더니, 긍휼을 베푸시고, 새 사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죄인에게도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시다니, 나는 고통만 안겨 드렸는데, 죽어 마땅한 이 죄인의 일절을 오래 참아 주시면서 오히려 은혜와 사랑을 풍성하게 부어주시다니, 그런 주님을 생각만 해도 그는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해서 그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감내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아니, 주님의 남은 고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직분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께 충성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고통을 주던 사람에서 고난을 감내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지요.
그 후로 그는 실로 엄청난 고난을 감내하게 됩니다. 직접 들어볼까요? / 고후11:23-27 / (읽기) / 또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고통을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고난을 감내하는 사람입니까? 내가 주님께 감사하는 세 번째 이유, 그것은 나를 <고통만 주던 사람>에서 <고난을 감내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젠 나도 주님의 십자가 같이 지고,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게 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 4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사도 바울의 일생은 불행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선 너무나 감사한 일생이었습니다. 이젠 주 안에서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고, 복종할 수 있고, 그리고 무엇 보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감내할 수 있음을 감사했습니다.
주 안에서 혁명적으로 거듭난 자신을 돌아볼 때, 그는 너무 감사하고 너무 행복했습니다. 해서 그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1:17 / (읽기) / 기도합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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