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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사랑

사랑이 이긴다 (누가복음 15:11 ~ 32)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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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이긴다   (누가복음 15:11 ~ 32)


우리 사회에는 속상한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권력과 돈과 지위가 모든 것을 보장해주는 이 사회에서 그것을 갖지 못한 계층에 대해서는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억울하고 한 맺힌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쓰이는 말 중에 무전유죄(無錢有罪), 유전무죄(有錢無罪)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 없는 사람은 죄에 대한 처벌을 면치 못하지만 돈 있는 사람은 죄가 있어도 무죄로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 우리 사회에서 쓰인다는 것은 그만큼 정의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전에 비해 나아지고는 있지만, 이 땅이 정의가 넘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강남에서 남산 방향으로 차를 타고 가다보면 남산중턱에 큰 호텔이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저는 남산의 아름다운 정경을 가로막고 서 있는 그 건물을 볼 때마다 참 안타깝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그 오른쪽에 외국인 아파트가 여러 채 서있었는데 다행히 철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철거 장면을 보셨겠지만, 저도 없어져야 할 건물을 무너뜨리는 역사적 사건을 보고 싶어 일부러 구경을 했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단 몇 분, 잠깐이더군요. 환경문제에 민감한 요즘이라면 그런 곳에 호텔을 짓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도 옛날에 힘 있는 사람들이 전망 좋은 그 곳에 건물을 짓도록 허가해주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그런 경우를 보더라도 정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의만 있으면 차갑고 무섭고 불안합니다. 정의의 다른 편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서 정의와 사랑이 같이 가야 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한다는 정의만 있다면 우리의 사회에 온갖 불행한 일들이 초래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느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좋아했고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잘 기르기 위해 애를 썼을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장난감도 사주고 축구와 야구도 같이 하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좋은 경험을 많이 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틴에이저(teenager)가 되자 반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틴에이저는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여러분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가 있다면 아마 틴에이저시기일 것입니다. 초등학생 때까지 잘 지내던 아이들이 teen이 붙기 시작하는 중학생 때부터 하루아침에 돌변합니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별 귀신이 다 들어옵니다.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혼란스럽고 위험합니다. 어떤 때는 마치 귀신들린 아이들 같습니다. 이 과정이 보통 13살(thirteen)부터 19살(nineteen) 고등학교 졸업 무렵까지 계속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십대 자녀들 문제로 고생하는 부모들을 종종 만나게 되고 저도 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곤 합니다.

죄는 사람을 망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들 속에는 모두 죄의 씨가 있습니다. 십대가 아니어도 우리 속에는 반항과 타락의 씨와 탕자의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어디론가 떠나 내 멋대로 살고 싶다, 나도 타락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결혼하여 20년 넘게 가정을 잘 꾸려온 어느 가장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 핸드폰에 잘 모르는 번호가 자꾸 뜨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번호로 전화를 하니 모르는 여자가 받습니다. 남편에게 물었더니 3년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에게는 이보다 더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남편과 그 여자에게 권고를 했으나 여자는 책임을 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남편마저도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지금 그대로 두자고 합니다. 그 아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멀쩡한 사람이 ‘에이 모르겠다!’고 탕자의 마음을 먹으면서 그 평안하던 가정이 망가지고 지금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본문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중 자신의 몫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이만큼 컸으니 집을 나가 제 나름대로 살아보겠다고, 이제 겨우 십대를 벗어난 아들이 유산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누어 주었더니”(12절).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듣자 두 말도 하지 않고 재산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저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들을 붙들고 “얘야, 네가 정신이 있느냐?” 하면서 한바탕 설교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심하게 야단쳤을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무척 고단수(高段數)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수든 죄든 무엇을 통해서든지 자식이 스스로 깨달아야 된다는 점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부모가 붙잡고 있다고 해서 자식의 마음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래? 그럼 해봐!” 하고 재산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재산을 받은 자식은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성경의 원리는 죄가 있으면 속히 망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한 것이 12절인데 14절에 벌써 망했어요. 정말 빨리 망했지요. 아들은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자 돼지먹이인 쥐엄 열매로까지 배를 채우려 하였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성경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속히 망하리라고 했습니다(신4:26).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희생과 사랑이 필요하지만 망하는 것은 금방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망한다”(신8:19)고도 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때로는 죄가 달콤해 보이기도 합니다. 마귀가 여러분을 유혹하면 눈이 어두워지고 감각이 둔해집니다.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결과로 반드시 망할 것이며(You shall surely parish), 금방 망할 것이라(You shall quickly parish)고 선언했습니다. 남산의 외국인 아파트도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멀쩡하던 아파트가 “뻥”하니까 폭삭 연기 한번 나고는 끝나더군요. 그 건물도 지을 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우리 교회를 짓는데도 순수 공사기간만 6년 8개월이 걸렸습니다. 규모가 큰 만큼 공사기간도 오래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도 부수는 데는 금방일 것입니다. 여기저기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단추 한번 꾹 누르면 그만 푹석 주저앉겠지요. 망하는 것은 쉽습니다.

죄는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다윗왕은 성공의 극치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다윗왕의 생애를 연구해보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한 후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지만 죽는 날까지 14가지의 재앙이 그를 따라 다녔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죄는 범할 가치가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잠깐 동안의 달콤한 유혹의 결과가 너무나 쓰고 아픕니다.

여러분, 죄를 두려워하십시오. 혹시 여러분 중에도 3년 전부터 숨겨놓은 여자나 남자가 있다면 제가 좋게 이야기할 때 당장 회개하고 정신 차리십시오!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은 아닐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짓이나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있다면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다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숨기려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람이 모른다고 하나님도 모를 것이라 생각합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 속히 망하고 확실하게 망하는 것이 죄의 특징입니다. 혹시 우리 삶의 어디엔가 죄가 도사리고 있다면 더 깊이 빠지기 전에 속히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고 새로워져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릴지언정 아픔과 고통과 파괴를 경험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때로는 죄를 통해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죄 때문에 아픔을 경험하고 스스로 깨닫습니다. 본문의 둘째 아들도 스스로 돌이켰다고 했습니다(17절). 깨달음은 스스로 해야 됩니다. 남이 가르쳐서 깨닫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가 직접 깨닫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학교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여러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 것들을 많이 배웠지만, 지금까지 제게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대학원을 다니며 직접 쓴 소논문들과 학위논문들입니다. 선생님들이 가르쳐 준 것은 내용은커녕 그 선생님들 이름조차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깨달은 것들은 지금도 남아 있고 여전히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식이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계속 보호하며 고생을 대신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독립하지 못하고 의존적이거나 미숙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얼마 전에 어느 부인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서른 두 살 된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어머니가 내 인생을 망쳤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인생을 망친 적이 없거든요. 어릴 때부터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지 아들에게 일일이 가르쳐주었는데 왜 어머니 때문에 망했다고 할까요? 문제는 자식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끊임없이 간섭을 했기 때문에 그 아들은 생물학적 나이는 서른둘이지만 정서적, 삶의 깨달음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들 대신 다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 아들을 좀 놔주십시오. 어머니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그 아이가 이제 자기가 되도록, 어른이 되도록, 성장하도록 가만 두고 다시는 간섭하지 마세요.”

자녀가 스무 살 될 때까지만 이야기해도 부모로서 할 이야기는 다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말을 또 하겠습니까? 그 다음부터는 잔소리입니다. 다 큰 아들에게 어머니가 계속 참견과 잔소리로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지 못하게 하니까 ‘어머니가 내 인생을 망쳤다’고 반항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나는 어머니로서 할 일을 했는데 내가 너를 망치다니 무슨 소리냐?” 서른 두 살 된 아들이 반항하자 비로소 그동안 아들을 너무 휘어잡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른두 살이나 먹은 사람이 어머니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한다면 어떻게 어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녀가 실수를 하더라도 실수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인생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렇게 했습니다. 나가서 고생 좀 해보라고 했습니다. 실수가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실수를 통해 깨닫고 배운다면 실수마저도 큰 축복입니다. 저도 제 인생을 돌이켜보면 실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실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진리를 배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통해서 배우지만 잘못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도 고생 끝에 깨달았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부하고 품꾼들도 배불리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는구나.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잘못했다. 이제는 아버지가 나를 아들로 취급하지 않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만 주셔도 감사하겠다.” 아들은 겸손하게 깨달았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끝장입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 말씀하시고 권하시고 역사하실 때 귀를 기울여 듣고 돌아서야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 망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렇게 잘못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인내하면서 늘 기다리십니다. 사랑은 멀리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누군가 멀리 있어도 ‘저건 내 아들이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느끼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겼습니다. 아들은 신발도 없이 거지행색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하고 죄를 범해서 신발조차 없는 아들처럼 되었을지라도 우리를 끌어안아주시고 사랑해주시고 품어주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고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았다!”고 하는 아버지의 부르짖음은 참 사랑의 부르짖음입니다. 사랑은 남의 단점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 전, 이란에서 세계평화대회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 6명과 모슬렘 지도자 6명이 이란에 모여 세계평화를 위한 발표와 토론을 하는 자리에 저도 참석했습니다. 모슬렘 지도자들의 발표내용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정의(justice)였습니다. “Peace with Justice,” 즉 정의가 이루어져야 평화가 있지 정의가 없으면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모슬렘들은 자기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사람을 죽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복수를 해야 정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수를 당한 사람은 다시 상대방에게 보복을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보복에 보복을 거듭하는 보복의 사이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의는 보복하게 하고 슬픔을 불러일으킵니다. 죽음을 부릅니다. 정의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정의만으로는 복수의 사이클을 끊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세계의 평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자기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저들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은 용서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스데반도 용서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오래 전에 저는 좋은 신앙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목사의 기쁨 가운데 하나가 아름다운 신앙인을 자주 만나는 것이지요. 이분은 50대 초반의 부인으로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참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장로님이셨는데 정의파여서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을 용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앞에서 모든 가족이 벌벌 떨었습니다. 자연히 아버지에 대한 반항을 품게 되었지요. 교회를 다니긴 했어도 성가대석에 앉아 예배 중에 종이에 뭐라고 적어서 이쪽으로 돌리고 또 한 장 써서 저쪽으로 돌리며 성가대원들의 예배를 방해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자기 마음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멀리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권사님이신 어머니는 딸이 조금 늦게 들어오면 아버지에게 야단 맞을까봐 딸을 숨겨주고 보호하고 새벽에 일어나면 딸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셨답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머니, 제발 저를 위해서 기도 좀 그만 하세요. 마음대로 죄를 짓지도 못하고 불편해 죽겠어요!” 하고 투정을 했답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 이 분은 옛날을 돌이켜보면서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감싸주시고 아버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쓰시던 어머니가 너무 그립고 고마워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고 합니다. 정의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에는 사랑이 이기는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엄격하던 아버지 때문에 그 딸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눈물 흘리며 자기를 감싸주던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의 음성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잘 섬기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정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랑이 이겨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큰 형은 정의파입니다. 밖에서 일하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풍류 소리가 나고 잔치 분위기입니다. 집나간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잔치를 베푸는 것을 알고 속이 상했습니다. 아버지가 “네 동생이 왔으니 빨리 들어오라”고 해도 싫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밭에 가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아버지를 거역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재산을 창녀와 탕진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다니 틀렸습니다!” 이론적으로 형의 말은 모두 맞습니다. 동생에게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론이 정연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정의파의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의는 분노를 일으킵니다. 정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 옆의 사람들을 다 태워죽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도 정의파가 한 명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바른 소리를 하며 항상 정답만 말하고 좀처럼 실수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고 자기도 모자라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은 너무나 완벽해요. 그런 사람 옆에서는 모두 힘이 듭니다. 어느 남편이 저에게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 도망가고 싶습니다. 숨이 막혀서 더 이상 못살겠습니다. 제 아내가 결혼생활 30년 동안 계속 이래라 저래라 하며 제 잘못을 일일이 지적 합니다. 아내만 쳐다보면 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낙심이 됩니다. 이제는 저도 자유를 얻고 싶습니다.” 집안에서 이렇게 정의를 행사하는 사람이 아내가 아니라 남편일수도 있고 부모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정의는 필요하지만 사람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정의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행하십시오. 자기에게는 엄격하게 행사하되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푸십시오.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본문 중의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큰 아들의 주장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단 한 가지, 동생을 향한 사랑이 없었던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정의는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죽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정의도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만약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사랑을 택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베푼 아버지의 사랑이 여러분과 제 가슴에 있기를 바랍니다.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했던 딸을 한없는 사랑으로 결국 하나님께 눈물 흘리며 돌아오게 했던 그 어머니의 사랑이 여러분과 제 가슴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도 이런 사랑을 배워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정의롭고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을 넉넉히 베푸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출처/김상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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