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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을 가지라 (계2:1-7)
1. 요한 계시록의 수신자인 일곱 교회는 역사를 통하여 앞으로 교회가 당면하게 될 전형적인 상황들을 대비하기 위해 특별히 선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는 당대의 교회들이었지만 또한 오늘날 우리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보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보낸 계시입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에베소의 시대적 정황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에베소는 로마로 가는 대로였으며, 아시아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아시아의 관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끊임없이 각 나라 사람과 각종 상품들이 흘러오고 흘러 나가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아시아 최고의 부유한 도시가 되었으며, 각 나라의 문화와 문명, 각종 이교 사상과 신비주의 종교가 성행하는 "세계 최고의 허영의 시장"이라 불리웠던 곳입니다. 특히 에베소는 세계 7대 불가사의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아데미(다이아나)신전이 있는데 이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4배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아데미 신전에는 수천명의 남녀 사제들이 종사했었고, 다산을 기원하는 제사의식으로 여사제들은 매음행위를 하여 신성한 창부노릇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도피중인 범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에베소는 또한 미신이 만연한 곳으로 이름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에베소 문서>라고 불리우는 부적은 만병통치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아이를 갖게 하고, 운동선수에게는 승리를, 여행자에게는 행운과 안전을, 사업가에는 성공을 보장했기 때문에 이것을 사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에베소에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에베소는 각 나라의 범죄자들이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 몰려들었고, 각종 미신과 우상숭배에 따른 성적 타락과 부도덕이 넘실대는 곳이었습니다. 정신적, 영적, 도덕적 타락의 온상이며 모든 종교를 용납하여 종교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에베소에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에베소에 생명을 구원하는 거룩한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하게 여겨질 정도로 복음 전파에 불리한 조건들만 눈에 띄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에베소의 이 모든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를 두고 P.C. 트렌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땅은 다른 아무 곳에도 없다. 또한 여기처럼 깊은 뿌리를 내려서 믿음과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땅을 다른 데서 볼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처럼 기독교 신앙의 승리를 보여준 곳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에 교회를 개척하여 인근 지방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까지 간접적으로 전도하는 등 자신의 선교 절정기를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제3의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이후에는 디모데가 이 교회를 관할하는 최초의 감독이 되었고 후에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이곳에 모셔 생활하다가 이곳에서 장사지냈다 합니다. 그만큼 이곳은 분명히 기독교를 대적하는 문화와 문명, 그 어떤 영적 세력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곳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복음 전도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고 해도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한 반드시 승리하여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2.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그 "그 행위와 수고"에 대해 칭찬받은 교회입니다. 여기 "수고"는 헬라어로 "고포스"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땀을 흘리기까지 일한다", "심신이 기진 맥진할 정도로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몸을 지나치게 아끼고 땀을 흘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칭찬받는 성도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심신이 기진 맥진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교회에 봉사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행위가 참으로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의 "인내" 또한 칭찬받은 신앙의 내용이었습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휴포모네"인데 고난, 환난, 손실을 씩씩하게 용기를 갖고 대항하여 그것을 은혜와 영광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은 인간 생활에 색채를 가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휴포모네" 즉 인내를 가지고 사는 기독교인은 그 당하는 환난과 고난을 인하여 예수 십자가를 통해 입혀주신 세마포 흰색이 더럽혀져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환난과 고난과 역경이 많다해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회색분자가 되거나 아예 까만색으로 변질되어서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풀무에 단련할수록 정금이 되어 나오듯이 환난과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더 순백의 광채를 발할 수 있어야 참된 교회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받은 것 가운데 또 하나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 당'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로서 배교했던 니골라를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의 산물로 율법의 시대가 지났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으며, 육신은 악하고 구원받는 것은 영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무슨 악한 짓을 범해도 영혼구원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치므로 극히 반도덕적, 비윤리적 생활을 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삼아 양심에 아무런 가책을 느낄 것 없이 죄악을 조장하는 이단 사상으로 교회를 파괴하려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니골라 당의 창시자 니콜라우스란 이름은 '백성'을 뜻하는 헬라어 '라오스'와 '삼키다', '없애다', '정복하다'는 뜻의 헬라어 '니카오'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 "백성을 삼키는 자들"이란 뜻의 '니골라 당'의 실체가, 잘못되고 부도덕한 이단 사상의 가르침으로 백성을 삼키는 반기독교 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계시록 2장 14절의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같은 무리들입니다. "발람"은 "삼키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발라'와 "백성"을 뜻하는 히브리어 '암'의 합성어로, "백성을 삼킨다"는 니골라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람은 니골라의 다른 이름일뿐 아니라 구약에 실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직접 저주하지 않았지만 미디안 여인들을 미끼로 놓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음행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함으로 간접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만든 자였습니다.(민22-25장) 발람은 신약의 니골라였고 니골라는 구약의 발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이나 니골라의 교훈은 한 가지 이단에 붙여진 두 가지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람의 시대에 일어났던 것이 요한의 시대에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이 오늘날에도 꼭 같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밖에 있는 불신 무리들보다 교회를 더 어지럽히는 악한 자들로서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죄악을 끌어들이거나 교인들의 죄악을 눈감아 주거나 변명하거나 아예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방치하는 것은 건전하고 건강한 성도의 교제를 파괴하는 니골라 당의 무리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죄악을 무조건 용납하는 곳이 아니라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여 교회의 성결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회개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3. 에베소 교회는 무역의 중심지에 위치하다보니 교회 안에 뜨내기 신자들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이들 뜨내기들이 교회의 자선과 사랑을 이용하여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성도들을 이용하여 돈을 모아 이들 중 일부는 상당한 재산을 긁어모아 호의호식하며 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무리들을 철저히 분별하여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교제를 금지시키거나 아예 교회 입교를 거절하거나 아니면 그 정도가 심하면 교회에서 아주 추방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입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뜨내기들을 분별하여 색출하고 각종 날뛰는 이단자들을 발본색원하다보니 사랑의 불이 식어진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잘못된 사람들을 일소하려던 열심,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열심히 자칫 비판적인 신앙으로 기울었고 그러다 보니 사랑의 교제가 식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악을 용납하지 않고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 정통 신앙을 지키려다 사랑이 식어지는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정통주의는 생명력이 없는 껍데기만 남은 정통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단을 근절시켜려던 노력이 까다롭고 엄격한 정통주의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종적으로 수직적인 신앙은 좋았으나 횡적으로 수평적인 신앙을 등한시하므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이성은 차가운 가슴을 만들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세워진 지 40여년이 지나자 성도들은 차츰 복음의 열정을 잃어 버렸습니다. 본문에 지적된 바와 같이 사실 에베소 교회는 진리에 대한 열심에 있어서 첫 사랑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바른 신앙이 있을지라도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이 식어지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교회의 촛대를 옮기시고 말았습니다. 촛대가 옮겨졌다는 것은 더 이상 교회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만이 생명을 낳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내가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땀을 흘리며 심신이 기진맥진할정도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모든 환난과 고난을 용감히 견뎌내고, 어디 하나 나무랄데 없이 정통신앙을 지키려 했었으나 그만 사랑이 식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의 촛대를 붙잡고 계신 예수께서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처음 사랑으로 돌아 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세 가지 단계가 있음을 본문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책망만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곧 이어 그들에게 문제 해결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첫 단계는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즉 신앙 생활 초기에 가졌던 뜨거운 사랑을 다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현재 신앙생활의 모습이 처음에 가졌던 적극적이고 열성적이며 헌신적인 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신앙생활이 처음보다 진보하고 성숙한 모습이 없다면 이미 마음의 촛대가 불이 꺼져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집을 뛰쳐나간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갑자기 아버지 집에서 누렸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잘못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그것을 슬퍼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결단을 말합니다.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충심으로 그것을 슬퍼하며 아버지께 가겠다는 결단이 곧 회개입니다. 회개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죄와 허물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즉각적이고 단번에 이루어져야 하는 결단입니다. 탕자가 회개한 후에 곧 바로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던 것처럼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열매가 없으면 가라지 인생에 불과합니다. 변화된 행동과 삶을 통해 자신의 회개가 참된 것임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우리 평강교회가 에베소 교회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며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주 작은 일이지만 엊그제 교회에 보내온 한 통의 편지는 우리 교회가 처음 사랑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바로 0 0 자매로부터 보내온 편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동희 목사님, 평안 하셨습니까! 부산에 0 0 자매입니다.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로 이렇게 컴퓨터 e-메일로도 안부를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한해를 고이 접어 주님께 드리며 한해의 끝이라는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부끄러움과 아쉬움만 남는 것 같습니다. 이 한해도 주님 앞에 드린 것은 너무나 부족한데 받은 은혜는 너무 많아 주님께 책망이나 받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굳은 팔을 오른손으로만 계속 쓰다 보니 예전부터 어깨에 통증이 있어 조금은 힘들었는데 갈수록 심해져 그나마 이 모습 안에서 병상에 있는 환우들께 편지 보내는 이 작은 일도 못하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는데 어느 날 책을 보니 '음성인식' 소프트 프로그램이 있어 키보드를 치지 않고도 음성으로 워드 같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뻤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무언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또 남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나의 삶에 큰 기쁨이었기에 그 소망이 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른 것을 제쳐놓고 그 프로그램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노트북 용량이 모자라 실행이 안되어 혹시 업그레이드시키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하면 그 용량에 맞는 중고 컴퓨터라도 알아 볼까 싶어 0 0 0집사님께 컴퓨터 구입한데 연락처를 물어 본다는 것이 이렇게 새 컴퓨터를 받게 되어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 폐를 끼쳐 너무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얼마 전 목사님의 추수 감사절 설교 말씀 중에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펄먼의 이야기에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아 제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펄먼이 "때로는 모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도 제게 남은 것만으로 연주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께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라는 그 말에 나 또한 통증이 조금 덜한 왼손으로 할 수 있는데 까지 하지 못하고 나에게 처한 상황만 보고 남아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목사님, 도심 속 콘크리트 벽 사이에 그 틈새를 뚫고 피어나는 작은 풀잎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연약해 보이는 풀잎이라도 하나님께서 다 뜻과 의미가 있어 존재케 한다는 생각에 연약하고 볼품없는 나의 삶일지라도 내게 주어진 삶의 몫에 감사하며 때로는 불편한 나의 육신 때문에 기대만큼 채워지지 않고 또 남들보다 빨리 달리지 못한 나의 삶일지라도 결코 초조해 하거나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있는 그대로 주님께 드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음성인식'프로그램은 책을 보고 익히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분 집사님께서 오셔서 컴퓨터 놓을 책상을 조립하고 또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시고 하는 모습에서 울컥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주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 주신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께 어떠한 말보다 깊은 기도로써 감사함을 전합니다. 다가오는 거룩하고 복된 성탄절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평강교회 성도님들과 목사님가정 위에 충만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샬롬! -부산에서 0 0자매- 》
"세계 최대의 허영의 시장"으로 군림하던 당대 아시아 최대의 항구 도시였던 에베소는 지금은 배가 닿을 수 없는 모래 해안선과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황무지와 폐허로 버려진 오늘의 에베소가 처음 사랑을 찾아가지 못하므로 "촛대를 옮기리라"는 예언의 성취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이기는 길은 회개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촛대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길은 회개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했습니다. "생명 나무"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같이 에덴동산 한 복판에 있던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뱀으로 가장한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줄로 알아 그만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선악과를 따먹었던 이들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여 화염검을 두어 그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기는 자에게는 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첫 번째 아담이 잃어버렸던 것을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으로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창세기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창조를, 요한계시록은 그 처음 땅과 하늘이 모두 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에덴 동산에 침투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범죄한 인간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형벌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에는 인간을 유혹했던 마귀와 죄와 사망의 영원한 멸망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창세기는 인간의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은 사망과 사단에 대한 정복과 회개와 사랑으로 세상과 죄악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보며 회개하는 성숙한 믿음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날로 더해가는 사랑이 충만한 성도와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천사와 같은 여인을 잃게 되면 나는 미치광이가 되거나 일티시강에 투신하는 것,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네." 이것은 1856년 3월 26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친구 브란겔리를 통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첫 사랑의 여인,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이 여인은 하급관리 이사예프의 아내로 일고여덟살된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폐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황제 타도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4년간 징역을 마치고 출옥하여 키르기스평원 부근의 자그마한 마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군복무 중 이사예프 가족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사예프의 아내 마리아는 다정다감하고 정열적인 스물여섯살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죄수 신분으로 군복무중인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깊은 동정과 연민의 정을 보내었습니다. 4년간의 감옥생활에서 막 벗어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마리아가 보여준 따뜻한 친절은 그를 첫 사랑의 정열로 이끌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1년후 이사예프는 600km나 떨어진 곳으로 전근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넘볼 수 없는 첫사랑이었지만 이별해야한다는 사실에 비탄에 빠져 몸부림을 치다시피했습니다. 첫 사랑 마리아와 헤어져 있는 동안 수많은 편지들을 주고받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위의 편지밖에 없습니다. 이사예프가 이사간지 몇 달만에 술로 인한 병으로 죽어버리고 마리아는 어린 아들과 남편이 남긴 빚덩어리뿐 이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소식을 알게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불행한 천사 마리아를 구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심하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마리아를 돕고 정식으로 청혼하게 됩니다. 아이가 딸리고 폐병을 앓고 있으며 빚더미에 앉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사랑의 열정에 마리아는 결혼을 승낙하게 됩니다. 결혼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근무지로 돌아오는 도중 심한 간질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간질환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 알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권이 되어 아내 마리아와 함께 페테르브르크로 돌아왔지만 마리아의 폐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경제사정도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블라디미르, 모스크바로 옮겨가며 치료와 요양을 하다가 1864년 4월 서른 여섯 살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런데 마리가아가 모스크바에서 요양생활을 할 무렵 도스토예프스키는 수슬로바라는 스물한 살의 젊은 여성과 밀애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여인과 재혼한 후에도 마리아의 아들을 끝까지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첫 사랑은 이미 그 열정이 식어진지 오랬지만 자신의 의무만은 다했다는 변명일 것입니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등 대작들을 발표한 러시아의 대작가였지만 첫 사랑을 저버린 그였기에 뒷맛이 씁쓸하고 개운치 않은 느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대부분 첫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지만 그 첫 사랑에 대한 추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첫 사랑은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되어져야만 하지, 첫 사랑을 찾으려해서는 피차가 망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첫 사랑으로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첫 사랑에서 멀어졌다면 회개하고 첫 사랑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낙원을 이루며 사시기 바랍니다.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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