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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사랑

빛과 사랑 (요일2:7-17)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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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사랑   (요일2:7-17)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기 위해 입사시험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필기시험 문제 중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당신이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 그러나 지금 당신 차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좌석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하시고, 그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이것은 아마도 성격 테스트의 일종일 것입니다. 어떠한 답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죽어 가는 할머니를 태워 그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의사를 태워 그의 은혜를 갚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에게 보답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가능한데 반해,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응시자 중 20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종적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도대체 뭐라고 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차 열쇠를 드리죠. 할머니를 태우고 병원으로 모시고 가도록 간절히 부탁드릴 겁니다.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의 것을 포기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제가 이번 미국 가족 방문 길에 어느 목사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지난 9월 미국 테러 대참사 사건은 5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비극적 사건이었지만 그 사건 속에 드러나고 있는 수많은 얘기가운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그 일화의 주인공은 뉴욕 퀸즈 한인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있는 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세계 무역 센타> 건물 34층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납치 여객기 충돌로 이 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붕괴 직전에 놓이게 되었고 빌딩 엘리베이터는 작동되지 않아 위기를 느낀 사람들은 저마다 살기 위해 비상 계단을 질주하다시피 했습니다. 이 청년도 사무실에서 나와 비상 계단을 타고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갑자기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건장했던 청년은 사력을 다해 발을 떼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한 발자국도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청년을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점점 불안을 느낀 청년은 그 와중에 선 채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살기 위해 계단을 질주하는 사람마다 이 청년을 귀찮다는 듯이 비껴갔을 뿐 어느 누구하나 그 청년을 돕질 않았습니다. 원망 섞인 듯한 눈으로 계단 위를 돌아봤을 때 사람들에 밀려 겨우 겨우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이 청년은 자신보다 그 할머니를 살려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고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할머니를 살려낼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을 때 떨어지지 않았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제법 체중이 나가는 미국 할머니를 등에 업고 계단을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청년의 말대로 혼자 뛰는 사람보다 배나 더 빨리 무려 34층이나 되는 계단을 내리달아 순식간에 붕괴직전의 빌딩 밖으로 나왔습니다. 빌딩을 빠져 나와서도 쉴 사이 없이 할머니를 등에 업고 100여 미터를 달렸을 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무너지지 않으리라 장담했던 <세계 무역 센타> 빌딩이 그만 붕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110층 빌딩은 폭발음을 내며 검은 연기와 더불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빌딩을 미처 빠져 나오지 못했던 5천여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최고층 건물 폭발과 붕괴로 말미암아 검은 연기와 건물 잔해로 캄캄해진 뉴욕의 중심 맨하턴 거리에서 이 청년은 하나님의 빛과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제아무리 힘이 장사라도 자신의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할머니를 등에 업고 무려 30여 계단을 순식간에 뛰어 내려와 100여 미터를 더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청년은 어둠 속에 한 줄기 구원의 빛을 경험했습니다. 그 청년은 그 빛을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이웃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 아니며, 이웃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죄인을 정죄하는데 있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하고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그 여인을 어둠에서 생명의 빛으로 인도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그 여인을 잡아 끌고왔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처럼 그 여인을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 죄많은 여인은 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 복수는 지혜가 아니라 어두움이며,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며 빛입니다.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미움과 증오 등의 죄악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회복하게 만드는 것은 용서와 사랑 등 하나님의 빛입니다. 한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어느 한쪽의 죄악입니다. 살다보면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예상치 못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남편이나 아내의 실수와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면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될 수 있지만 그 죄를 칼같이 단도질하여 정죄하고 미움과 증오로 치닫는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걷잡을 수없이 파괴되고 결국 가정은 파탄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어떠한 죄일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가정을 파괴로부터 지키고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정죄와 미움, 증오는 가정을 어둡게 하는 것이지만, 용서와 사랑은 그 가정을 항상 빛으로 인도하여 온 가족을 밝게 만듭니다. 남편(아내)이 자기 아내(남편)를 안다면서 그 아내(남편)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기 아내(남편)를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빛과 사랑가운데 거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파괴시킨 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입니다. 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파괴된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며 인간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서 이웃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자요 하나님의 빛과 사랑가운데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C.H. 다드 교수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이며 그 사랑을 보답하는 일은 그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웃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이웃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웃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십자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은 예수처럼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가 처음 들은 것이 아니라 옛부터 주어진 계명인데 다시 새 계명을 쓴다"는 말씀(7,8절)은 예수 십자가를 통해 사랑에 대한 새로운 표준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는 범위가 인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죄인에게까지 넓혀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이란 하나님께서 멸시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이번 미국 테러 대참사를 일으킨 이슬람 과격원리주의자들이 "미국인들과 유대인들을 하나라도 더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 알라신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죄인이 한 사람이라도 죽어 없어지면 하늘에는 기쁨이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예수 십자가 앞에 유대인과 아랍인은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이나 아랍인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 아랍 사람들보다 믿는 신이 같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더 친밀하게 느끼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이시며 죄인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큰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예수의 사랑은 빈부를 따라 차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은 인종과 문화, 종교를 따라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을 벗어날 자가 하나도 없을 만큼 예수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의 범위가 끝없이 넓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이러한 의미에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 계명이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시므로 새 계명의 표준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마5:45)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아랍인,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똑같이 미치는 것입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그러나 미움은 어둠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서는 물체의 유무와 진위를 분별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가운데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자요, 그 신앙은 허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용서와 사랑은 인격적 관계를 성숙하게 만들지만 미움은 인간의 성장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파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미움과 쓴 뿌리, 쓰라린 기억과 원한,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 등을 그냥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인격적인 성숙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적 생활에 성장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용서와 사랑만이 인간관계를 밝게 하며 인격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을 이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 앞에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게되면 자연히 어두움은 물러가기 마련입니다. 빛이 어두움보다 강하며 인류 역사에 어두움이 빛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며 인류 역사에 거짓이 진리를 이긴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며 미움이 사랑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예수를 증오한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십자가 예수의 사랑이 그 미움을 이기고 그들을 하나님의 품에 안았습니다. 빛과 사랑이 되시는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38-48)

빛이 되시는 예수께서 어둠으로 일컬어지는 세상을 적대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알곡이 잘 자라도록 가라지를 뽑아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추수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라는 옛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미국 테러 대참사 사건으로 주목받고 있는 여러 책들 중 미국 메사추세츠(MIT)공대의 석좌교수로 세계적인 언어학자이며 정치 사회비평가인 노암 촘스키가 쓴 <숙명의 트라이 앵글Ⅰ>에 보면, 미국의 테러 대참사는 미국 외교정책이 빚은 당연한 결과라면서 다음과 같은 통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테러 대참사를 당한 『미국이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로 성숙되기 이전인 1967년 전부터 이스라엘을 지원한 경제적 원조는 GNP로 볼 때 어느 나라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최근의 원조는 이스라엘 시민 1인당 1000달러에 해당하는 정도의 액수에 이르고, 놀랍게도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78년부터 1982년 회계연도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이 전세계에 제공한 군사원조의 48%와 경제 원조의 35%를 받았습니다. 1983년 회계연도의 경우 레이건 정부는 전체 원조예산 81억 달러 중에서 거의 25억달러를 이스라엘에 배정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 가운데 5억 달러는 조건없는 원조금이고 12억 달러는 저금리 융자였습니다. 게다가 특별히 값싼 가격에 무기를 제공하는 등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자비로운 기부금"을 제공했습니다. 미국의 이같은 편협과 편견 속에 이스라엘에 쏟아 부은 외교적,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지원이 미국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인 간의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물로서 이런 대화가 없다면 어렵고 뒤얽힌 평화 프로세스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 미국의 유대인들, 자유주의자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자들은 정부의 행동에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이곳의 파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미국이 국제사회에 정의와 공평을 부르짖으면서 어느 한 나라에 편중된 외교 경제 정책을 계속해서 펴나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위협과 어쩌면 세계 전쟁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숙명의 트라이앵글Ⅰ)

빛과 사랑은 공평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민족에게만 태양을 비추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나라에게만 비를 내리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태양을 비추이시고,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자기에게 기분 좋은 사람만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참된 빛과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이 땅위에 진정한 평화를 위해 모든 인류를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빛과 사랑이 항상 충만한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빛과 사랑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이웃과의 모든 관계가 더욱 더 성숙되고 평화로우며 풍요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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