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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열매 -엡5:6-20

by 【고동엽】 2022. 7. 4.
빛의 열매
엡5:6-20
(2013/2/10, 산상변화주일)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헛된 말로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이런 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과 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다 빛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 산상변화주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기를 앞둔 주일로 교회력으로는 산상변화주일입니다. 강대상 보와 스톨이 흰색인 것은 희게 변형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던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십니다. 평화의 도성이라는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고난이었습니다. 성전 체제에 기생하며 온갖 기득권을 누리고 살던 사람들은 성전 체제의 위선과 탐욕을 꾸짖어 온 예수를 없애야 할 적으로 인식했습니다. 주님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행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난의 어두운 골짜기에 들어서기 전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산을 시리아와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안티레바논 산맥의 최고봉 헤르몬 산일 거라고 말합니다.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2814미터의 그 산은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산에 올라가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오르신 산은 나사렛의 동남쪽 10km 지점, 저지대 평원에 있는 해발 588미터 타보르산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도 그 산 정상에는 주님의 변모를 기념하는 교회당이 서 있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산이냐가 아니라 그 산 위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산 위에서 제자들은 새하얗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을 주고받는 광경도 보았습니다. 그 놀랍도록 황홀한 모습에 넋이 빠진 베드로는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 세 분을 모시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서 기자들은 이 사건을 지금 고난을 향해 나아가는 분이 누구신지를 넌지시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일곱 봉인에 담긴 심판이 예고되기 바로 전에 천상의 조화로운 광경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난의 시간을 맞이하게 될 성도들에게, 먹구름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이 그러하듯 희망을 품고 살라는 메시지일 겁니다.

저는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를 참 좋아합니다. 그의 그림에는 삶의 곤고함과 비참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실존의 근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고통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둡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암담하지 않은 것은 캄캄한 어둠 속에 비치는 한 줄이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그린 <십자가 처형>을 볼 때마다 감동합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잔혹한 형벌의 현장인 그곳은 어둡기 이를 데 없지만,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환한 빛살로 인해 그곳은 은총의 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낙원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했던 한 강도의 얼굴에도 빛이 가득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조롱했던 다른 강도의 얼굴은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쏟아진 그 빛으로 인해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빛을 받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빛과 만난 사람들
성도는 그 빛과 만난 사람들입니다. 아니, 그 빛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그 빛과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만드는 성좌들처럼, 인간 세상에 희망을 안겨 주었던 성인들 역시 빛과 만난 사람들입니다. 빛과 만난 사람들은 대개 어둠의 심연 앞에서 절망했던 사람들입니다. 체칠리아 벤투라 수녀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체칠리아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종신서원을 앞두고 가슴 벅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래된 통조림을 먹고 식중독에 걸렸습니다. 치료를 받아봤지만 낫지 않았고, 오히려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고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페니실린을 과다하게 투여했고, 그 후유증으로 그만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좌절의 나날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습니다. 그 어둡던 시간을 체칠리아는 사울의 다마스커스 체험에 빗대 말합니다.

"하나님은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내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때는 한낮의 열기가 뜨거운 오정 때쯤, 내가 세운 계획으로 열정이 넘치던 시각, 추진하던 일의 정당함에 대해 자신만만해 말 위에 꼿꼿이 앉아 달려가던 그 시각이었다."(체칠리아 벤투라, <빛과 어둠의 순간들>, 바오로딸, 31쪽)

무려 7년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낸 시련의 시간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외부의 빛이 차단되었지만 그의 내면은 더욱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했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순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과 깊이 대화를 나눴습니다. 하나님은 쑥대밭으로 변한 그의 영혼을 갈아엎어 주셨고, 물을 주고, 고랑을 파 거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8년 째 되는 어느 날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체칠리아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주님께서 몸소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시며, 네가 곡하는 날도 끝이 날 것이므로, 다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않으며, 다시는 너의 달이 이지러지지 않을 것이다."(사60:20)

성도는 주님이 자기의 영원한 빛이심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 빛을 받은 이들도 고통의 순간을 피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낙심하지는 않습니다.

• 이전과 이후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주는 부탁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자녀답게 산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허망한 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빛의 자녀들은 음행, 더러운 행실, 탐욕과 결별해야 합니다. 바로 그게 어둠의 일입니다. 바울은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이들을 일러 우상숭배자(5)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선과 의와 진실입니다. 선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알베트르 슈바이처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선행이란 생명을 구하고, 생명을 태어나게 하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악행이란 생명을 죽이고, 생명을 망치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생명을 짓밟는 것이다."(닐스 올레 외르만, <슈바이처>, 텍스트, 188쪽)

의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존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이웃에 대해 책임적인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집니다. 그들은 병든 세상, 어긋난 세상을 고치려는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받들며 삽니다.

진실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실한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었습니다. 그것이 고난이라 해도 주님은 신실하게 그 뜻을 받들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은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사55: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 어려운 것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진실입니다. 빛의 자녀들은 그 뜻을 따릅니다.

빛의 자녀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분별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뜻을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바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왜 이 지경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아주 담백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짓지만, 금방 고개를 끄덕이곤 합니다. 신앙의 본은 버리고 말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 살핌
가장 열심히, 가장 분주하게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도 영적인 잠에 빠지기 쉽습니다. 분별력 없는 열심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15) 하고 권합니다. ‘살피라’는 단어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제멋대로, 함부로, 습관적으로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잠에 빠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영적인 잠에 빠진 겁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여기는 마음’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감격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시험문제에 ‘어머니는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에 어느 아이는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답을 썼다지요? 너무나 당연해서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는 데 누군가가 새삼스럽게 묻자 대답할 말이 없는 겁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들/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 그들은 당연히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은총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고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늘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있던 초대교인들은 이 말을 아주 강력하게 받아들였을 겁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또 여쭈어야 합니다. 스스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택을 앞에 두고 주님께 여쭙는 사람과 여쭙지 않는 사람의 선택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의 첫 마디는 ‘들어라’(obsculta)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민하고 민감하게 들어야 합니다. 귀로만 들으면 안 됩니다. 먼저 머리로 듣고, 온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들은 것을 마음에 새겨 생활에 반영하라는 말입니다. 라틴어로 ‘순명’을 뜻하는 ‘oboedientia’는 ‘듣다’라는 뜻의 ‘audire’와 어원이 같습니다. 들음은 순명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에스더 드 왈, <성 베네딕도의 길>, 분도출판사, 53쪽 참조).

• 찬미하는 삶
빛의 자녀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도취입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5:18) 여기서 말하는 ‘술’은 좁은 의미로는 알코올 음료를 가리키는 말이겠지만, 모든 종류의 ‘도취’를 일컫는 환유換喩로 보아야 할 겁니다. 즉 우리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는 일체의 것들이 여기서 말하는 ‘술’입니다. 술, 쾌락, 마약, 오락, 권력, 소유 등 말입니다. 쾌락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삼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오락에 빠져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잊어버리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 재산을 늘리기 위해 모든 인간관계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는 이들도 많습니다.

신앙이란 ‘깨어남’입니다. 지금 우리 삶이 뭔가에 ‘도취된’ 삶인 것을 깨달을 때 자유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저는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하나는 ‘더’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덜’의 길입니다. ‘더’의 길을 걷는 이들은 늘 결핍감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빈곤합니다. 남과 나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덜’의 길을 걷는 이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풍요롭습니다. 남과 나눌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절대적 빈곤이나 고통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닌 데도 늘 ‘더 더 더 더’ 하며 지금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가엾은 인생입니다. ‘더’의 길에서 벗어날 길이 있을까요?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답을 제시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18b-19)

성령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많은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주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룬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세상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겁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들은 타인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며 삽니다. 자기를 열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일 때 우리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기쁨을 맛봅니다. 충남 보령에서 목회하는 김영진 목사님은 술만 마시면 찾아오는 마을 주민을 반갑게 맞으면서 "술 마시고 다른 데 가지 않고 교회로 와서 다행'이라고 말하곤 했답니다. 그 주민은 술 취할 때마다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불렀는데, 그때마다 김 목사님은 기타 반주를 해주었습니다. 그 주민은 지금은 그 교회의 안수 집사가 되었습니다. 김 목사님의 말이 참 크게 다가옵니다. "베어 버리려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잡초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품으려고 하면 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이태형, <배부르리라>, 좋은생각, 229쪽) 성령 충만한 사람의 말입니다.

이제 수요일이면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어쩌면 자기 삶 자체를 사순절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중첩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타보르 산에서 제자들이 보았던 그 놀라운 빛을 내면에 간직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빛의 열매를 거두기 원하십니다. ‘설’이라는 말이 ‘사린다’ 즉 ‘삼가다’, ‘조심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성도들에게는 모든 날이 설날입니다. 빛 안에서 조심조심 걸으며, 어둠에 유폐된 사람들을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의 은총 가운데서 빛의 자녀다운 삶을 향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3년 02월 10일 11시 11분 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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