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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태복음 16 : 21-28)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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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그리 마옵소서(마태복음 16 : 21-28)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찬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Stevenson)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소설은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잘 알려진 책입니다. 그 내용을 말하자면 지킬 박사라고 하는 책 중 인물이 특별한 약품을 발명하게 됩니다. 그중 어떤 약을 먹으면 선한 사람이 되기고 하도 또 다른 한 가지 약을 먹으면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낮에는 존경받는 지킬 박사라는 인물로 행세하게 되고 밤이면 하이드씨라는 악한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이 두 인격 사이를 왕래하며 즐기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는 이 하이드씨라는 이름으로 나가 살인을 하게 됩니다. 이제 그렇게까지 악해진 것을 보고 그는 다시 지킬 박사로 돌아가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종래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장 무섭고 비참한 종말을 맺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두 얼굴의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두 마음, 두 인격, 혹은 이중 인격, 위선자 등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은 천사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사실은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것이 곧 비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남 앞에서 너무 잘 보이려고 자기를 위장하다가 그 위장에 익숙해지고 마지막에는 위장으로 길들여져서 심지어는 자기가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까지 빠지게 됩니다. 이제 누가 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나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그런 기형적, 병리적 인간상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한절 거슬러 올라가 15절부터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시몬에게 호칭 둘을 주고 계십니다. 그 하나는 베드로요 또 하나는 사탄입니다. 이는 아주 극단적인 의미를 가진 두 이름입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말은 반석이라는 뜻의 말

그것은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에서 불리워진 대단히 귀한 이름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탄"이라는 말은 악마의 상징이요, 악마의 괴수입니다. 이는 그 이름의 뜻이 말해 주듯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요, 대적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원수! 그것을 가리켜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이 시몬을 두고 베드로라고 부르신 예수님께서 잠시 후에는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그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 생각할 것은 두 명칭을 모두 2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1로 부르고 있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가하자면 네 안에 반석과 같은 믿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베드로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고백만이 아니라 그 인격까지, 총체적으로 함께 부르시는 호칭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사탄"으로 부르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안에 악마가 있구나, 네 안에 사탄이 있구나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대단히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시며 시몬의 전 인격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이 베드로도 되고 사탄도 됩니다. 베드로라고 불리워도지고 사탄으로도 불리워집니다.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됩니다. 이것은 결코 이중이 아닙니다. 양면성도 아니요, 두 얼굴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릇이요, 하나의 용기, 하나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공부는 잘 안되고 엉뚱한 생각만 난다며 상담을 요청해온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 학생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아마도 못된 피를 물려받았나 봐요"라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하길래 "너의 어머니, 아버지 다 괜찮으신 데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우리 할아버지께서 첩을 얻었었대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제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첩 안 얻은 할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조상들은 다 그렇지!" 하며 달랬던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두 피를 물려받은 것입니까? 두 얼굴을 물려받은 것입니까?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존경받을 때가 있는가 하면 멸시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사실의 나입니까?나 스스로 나를 볼 때에도 어떤 때에는 그만하면 괜찮은 것 같은데 또 어떤 때에는 그렇게도 못되었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구제 불능한 인간입니다. 이제 거울을 한번 보십시다. 이 두 얼굴의 모습을 언제까지 보고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 앞을 한번 내다 봅시다.

장차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는 그랬다치고 앞으로 나의 생은 어떻게 전개될 것 같습니까? 사탄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까? 천사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까? 악마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어느 쪽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는 그의 편지 속에서 "나는 사도"라는 것을 계속 반복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죄인의 괴수다. 만물의 때만도 못하다"며 자기의 부족한 면을 그대로 계속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느 때에 베드로를 베드로라고 명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거슬러 올라가 읽어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며 물으실 때에 베드로가 선뜻 나서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고백을 합니다. 이는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로 이 신앙을 고백할 때, 그 고백적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인격, 그 신앙고백으로 사는 인간, 그를 향해 베드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교회의 지체이며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제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신 설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깨달음은 너 자신이나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셨다는 것인데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자, 하나님께서 알게 하셔서 아는 자, 하나님의 말씀의 소통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말씀이 소통되는 사람! 기도하면 응답이 있고 성경을 읽으면 말씀이 깨달아지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가까이 들려오는 그런 사람! 성령의 감회가 있고 하나님과 만남의 관계로 지니고 사는 그런 사람을 베드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이는 진정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베드로가 변하여 사탄의 꾀임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그 생각과 행동이 사탄의 주도하에 끌려가고 있단 말씀입니다. 사탄의 주도에 끌려가는 인간,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어 나올 수 없는 그러한 인간! 이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게 막히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단절된 그러한 인간! 양심도 겸손도, 그리고 신앙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인간을 가리켜서 사탄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입니다. 열 두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입니다. 이 사랑하는 수제자 시몬을 향해서 베드로라고 부르시더니 이제는 여지없이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그것도 불과 잠깐 사이에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갈릴리 어부로부터 시작해서 3년 동안 따라다니며 희한한 능력을 보기도 하고많은 말씀을 들었으며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는 사탄적인 것이 있었고 악마적인 것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것이 끈질기게 그를 붙들고 있는 중에 이제 예수님께서 내가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순간 자기의 본래의 모습, 깊이 숨겨졌던 그 모습이 불쑥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자기 진실이 노출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참으로 본색이 드러난 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번 깊이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신앙, 그 고백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절정이요, 어쩌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교육하셨다고 한다면 여기까지 교육하셨고, 이제 그 교육의 절정에 왔다고 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만족하게 여기시고 이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그를 깨우치십니다.

십자가를 져야겠다!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본문에 의하면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을 이 때로부터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모르는 신앙, 십자가의 신비와 부활의 능력, 그 깊은 뜻을 모르는 신앙은 악마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미신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며 만류한 그 말의 의미를 하번 생각해 보십시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사실 예수님을 끔찍이 위한다고 한 말입니다. 그러기에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한 것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사랑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사랑! 십자가를 모르는 사랑! 단순히 감상적인 눈물로 사로잡는 싸구려 사랑 따윈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모르는 사랑, 희생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 그것은 이름뿐, 아무 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현대 교인은 값싼 은혜를 구하는 결정적인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편할까? 어떻게 하면 고통없이 살 수 있을까?하는 그런 생각만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는 히틀러에 대항해 싸우다가 감옥에 갇혀 결국 죽게 되는데 그가 죽기 직전에 쓴 편지 가운데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많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살고 싶습니다"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다 쓰고 난 후"오늘도 또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받으시옵소서"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문이 있든, 굴욕이 있든, 죽음이 있든, 그래도 받아들이고 그 모든 이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받으시옵소서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해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과학적인 이해가 있습니다. 이는 객관적으로, 사실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 이해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또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이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종교적 이해, 즉 신앙적 이해요, 종합적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십자가를 져야겠다"하셨을 때 이것을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예 그렇습니까? 하고 일단 받아들이고 믿은 다음에,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적 바른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데 누가 감히 십자가를 지세요, 마세요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누가 하나님더러 이래야 됩니다. 저래야 됩니다 하며 주의 모사가 되겠는냐는 말입니다. 여기에 진정 신앙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눈물이 귀한 것이지만 이러한 값싼 감상 때문에 아무 일도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귀한 일을 이루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끝내게 됩니다. 사도행전 2113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자기에 대한 핍박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려 할 때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이를 말립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대답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저들의 권함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에도 예루살렘의 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무리가 되어 따라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그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감상적인 눈물에 젖을 때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은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목적, 그리스도의 뜻을 이해하여야 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나와 세계를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모든 교훈의 주제가 무엇이며 그 초점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대속물로 오셨습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의 마음, 그의 깊은 뜻은 십자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엄청난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생각은 이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인기는 최고에 달해 있고 마침내는 유대 나라의 왕과 메시아로 기대되는 순간에 왜 불길하게 죽는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저들이 생각하는 그 영광의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들은 고난의 메시아는 모르는 채 영광의 메시아만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도 납득이 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기적의 능력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5천 명을 한 자리에서 먹이기도 하고 풍랑을 잔잔케 하며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을 가졌다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습니까? 예수를 자으러 오면 장님을 만들어 버리면 될 터이고 십자가 위에서 못을 박으면 뛰어 내리면 될 것인데, 그 희한한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고난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이야기냐는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데 왜 이 같은 고난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있는데 주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버려두겠습니까?" 하는 그런 이야기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추측하여 숨겨진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면 베드로가 은근히 출세욕을 가졌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왕좌에 오르시면 나도 한 자리 하겠다는 속셈으로 3년 동안 꼬박 꼬박 따라다녔는데 이제 와서 십자가에 죽으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예수님을 아예 붙들고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하지 마옵소서라며 만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대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매우 단호하신 가운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하십니다. 이것이 사탄이요 사탄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사랑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의 교훈과 그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깊고, 넓게, 자세한 설명을 하셨건만 십자가의 뜻이 그 마음에 들려지지 않습니다. 부활을 말씀하시지만 부활의 진리가 납득되지 않습니다. 잘 알다시피 나라 일이든, 개인의 일이든 십자가 없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미국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다닐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에 피아니스트가 한 분 있는데 그 부인은 용모도 단정하고 신앙도 좋으며 남편도 그만하면 괜찮은 편입니다. 그런데도 가정 생활이 원만치 못하여 늘 티격태격 거릴 뿐 아니라 더러 별거 생활도 하며 만났다, 헤어졌다 합니다. 한번은 제가 "행복하게만 살아도 짧은 인생을 좀 조용하게 살 수 없느냐며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부인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 있기는 있지요" 하면서 대답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죽으면 되지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착한 일에도 십자가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도 있고, 희생도 있고, 썩어지는 밀 알이 있고야 다시 생명이 살아납니다. 화목이 거저 오는 것이겠습니까? 한 사람이 중생되는 역사가 거저 되는 것입니까? 이를 위해서는 피를 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한 인간이 재창조 될 수가 없습니다. 속죄의 역사가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직 십자가의 피, 그것뿐입니다. 개혁이요, 개선이요, 교육이요, 혁명이요 하며 온갖 짓을 다해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에는 오직 십자가, 그것뿐이었음을 역사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추상적인 십자가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십자가입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구체적인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야 싹이 날 것입니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야 주님의 지신 십자가의 뜻을 압니다. 나의 십자가를 똑바로 지지 않고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달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는 곧 죽음입니다. 의로운 희생입니다. 사랑의 죽음입니다. 여러분! 나의 십자가! 내 몫에 패인 그 십자가를 바로 지고,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제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알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3 : 10, 11)고 하였습니다. 죽어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이것! 이는 곧 부활의 능력이 바로 십자가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그 십자가를 바로 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봅니다.

계시의 십자가! 그 놀라운 사랑의 계시의 십자가를 보며 이 십자가를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창조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고전 1:)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십자가를 쳐다보십시다. 그 속에 능력과 지혜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 자신의 문제도, 이 나라의 문제도, 온 세계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살 길이 있고 비결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기도

자비하신 주님! 언제까지 이렇게 모순 투성이의 이중적인 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하오니 나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고 이제는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오늘을 살며 내일을 이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더는 두 얼굴의 삶을 살지 않게 하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닮은 한 얼굴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또한 나의 십자가를 잘 감당하게 하시사 부활의 능력을 힘입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태복음 16 : 21-28)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찬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Stevenson)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소설은 많은 사람에게 읽혀져 잘 알려진 책입니다. 그 내용을 말하자면 지킬 박사라고 하는 책 중 인물이 특별한 약품을 발명하게 됩니다. 그중 어떤 약을 먹으면 선한 사람이 되기고 하도 또 다른 한 가지 약을 먹으면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낮에는 존경받는 지킬 박사라는 인물로 행세하게 되고 밤이면 하이드씨라는 악한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이 두 인격 사이를 왕래하며 즐기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는 이 하이드씨라는 이름으로 나가 살인을 하게 됩니다. 이제 그렇게까지 악해진 것을 보고 그는 다시 지킬 박사로 돌아가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종래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장 무섭고 비참한 종말을 맺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두 얼굴의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두 마음, 두 인격, 혹은 이중 인격, 위선자 등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은 천사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사실은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것이 곧 비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남 앞에서 너무 잘 보이려고 자기를 위장하다가 그 위장에 익숙해지고 마지막에는 위장으로 길들여져서 심지어는 자기가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까지 빠지게 됩니다. 이제 누가 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나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그런 기형적, 병리적 인간상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한절 거슬러 올라가 15절부터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시몬에게 호칭 둘을 주고 계십니다. 그 하나는 베드로요 또 하나는 사탄입니다. 이는 아주 극단적인 의미를 가진 두 이름입니다. "베드로"라고 하는 말은 반석이라는 뜻의 말

그것은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에서 불리워진 대단히 귀한 이름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탄"이라는 말은 악마의 상징이요, 악마의 괴수입니다. 이는 그 이름의 뜻이 말해 주듯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요, 대적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원수! 그것을 가리켜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 그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이 시몬을 두고 베드로라고 부르신 예수님께서 잠시 후에는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그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 생각할 것은 두 명칭을 모두 2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1로 부르고 있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가하자면 네 안에 반석과 같은 믿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베드로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고백만이 아니라 그 인격까지, 총체적으로 함께 부르시는 호칭임이 분명합니다. 또한 "사탄"으로 부르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안에 악마가 있구나, 네 안에 사탄이 있구나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대단히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시며 시몬의 전 인격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이 베드로도 되고 사탄도 됩니다. 베드로라고 불리워도지고 사탄으로도 불리워집니다.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됩니다. 이것은 결코 이중이 아닙니다. 양면성도 아니요, 두 얼굴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릇이요, 하나의 용기, 하나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공부는 잘 안되고 엉뚱한 생각만 난다며 상담을 요청해온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 학생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아마도 못된 피를 물려받았나 봐요"라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하길래 "너의 어머니, 아버지 다 괜찮으신 데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우리 할아버지께서 첩을 얻었었대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제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첩 안 얻은 할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조상들은 다 그렇지!" 하며 달랬던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두 피를 물려받은 것입니까? 두 얼굴을 물려받은 것입니까?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존경받을 때가 있는가 하면 멸시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사실의 나입니까?나 스스로 나를 볼 때에도 어떤 때에는 그만하면 괜찮은 것 같은데 또 어떤 때에는 그렇게도 못되었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구제 불능한 인간입니다. 이제 거울을 한번 보십시다. 이 두 얼굴의 모습을 언제까지 보고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 앞을 한번 내다 봅시다.

장차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는 그랬다치고 앞으로 나의 생은 어떻게 전개될 것 같습니까? 사탄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베드로가 되는 것입니까? 천사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까? 악마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어느 쪽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는 그의 편지 속에서 "나는 사도"라는 것을 계속 반복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죄인의 괴수다. 만물의 때만도 못하다"며 자기의 부족한 면을 그대로 계속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느 때에 베드로를 베드로라고 명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거슬러 올라가 읽어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며 물으실 때에 베드로가 선뜻 나서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고백을 합니다. 이는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로 이 신앙을 고백할 때, 그 고백적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인격, 그 신앙고백으로 사는 인간, 그를 향해 베드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요, 이것이 교회의 지체이며 곧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제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신 설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깨달음은 너 자신이나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셨다는 것인데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자, 하나님께서 알게 하셔서 아는 자, 하나님의 말씀의 소통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말씀이 소통되는 사람! 기도하면 응답이 있고 성경을 읽으면 말씀이 깨달아지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가까이 들려오는 그런 사람! 성령의 감회가 있고 하나님과 만남의 관계로 지니고 사는 그런 사람을 베드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이는 진정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베드로가 변하여 사탄의 꾀임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그 생각과 행동이 사탄의 주도하에 끌려가고 있단 말씀입니다. 사탄의 주도에 끌려가는 인간, 사탄의 유혹에 빠져들어 나올 수 없는 그러한 인간! 이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게 막히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단절된 그러한 인간! 양심도 겸손도, 그리고 신앙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인간을 가리켜서 사탄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입니다. 열 두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입니다. 이 사랑하는 수제자 시몬을 향해서 베드로라고 부르시더니 이제는 여지없이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그것도 불과 잠깐 사이에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갈릴리 어부로부터 시작해서 3년 동안 따라다니며 희한한 능력을 보기도 하고많은 말씀을 들었으며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는 사탄적인 것이 있었고 악마적인 것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것이 끈질기게 그를 붙들고 있는 중에 이제 예수님께서 내가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그 순간 자기의 본래의 모습, 깊이 숨겨졌던 그 모습이 불쑥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자기 진실이 노출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참으로 본색이 드러난 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번 깊이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신앙, 그 고백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절정이요, 어쩌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교육하셨다고 한다면 여기까지 교육하셨고, 이제 그 교육의 절정에 왔다고 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만족하게 여기시고 이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그를 깨우치십니다.

십자가를 져야겠다!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본문에 의하면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을 이 때로부터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모르는 신앙, 십자가의 신비와 부활의 능력, 그 깊은 뜻을 모르는 신앙은 악마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미신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며 만류한 그 말의 의미를 하번 생각해 보십시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사실 예수님을 끔찍이 위한다고 한 말입니다. 그러기에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한 것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사랑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사랑! 십자가를 모르는 사랑! 단순히 감상적인 눈물로 사로잡는 싸구려 사랑 따윈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모르는 사랑, 희생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 그것은 이름뿐, 아무 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현대 교인은 값싼 은혜를 구하는 결정적인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편할까? 어떻게 하면 고통없이 살 수 있을까?하는 그런 생각만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는 히틀러에 대항해 싸우다가 감옥에 갇혀 결국 죽게 되는데 그가 죽기 직전에 쓴 편지 가운데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많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살고 싶습니다"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다 쓰고 난 후"오늘도 또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받으시옵소서"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문이 있든, 굴욕이 있든, 죽음이 있든, 그래도 받아들이고 그 모든 이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받으시옵소서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해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과학적인 이해가 있습니다. 이는 객관적으로, 사실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 이해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또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이해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종교적 이해, 즉 신앙적 이해요, 종합적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십자가를 져야겠다"하셨을 때 이것을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예 그렇습니까? 하고 일단 받아들이고 믿은 다음에,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적 바른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데 누가 감히 십자가를 지세요, 마세요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누가 하나님더러 이래야 됩니다. 저래야 됩니다 하며 주의 모사가 되겠는냐는 말입니다. 여기에 진정 신앙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눈물이 귀한 것이지만 이러한 값싼 감상 때문에 아무 일도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귀한 일을 이루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끝내게 됩니다. 사도행전 2113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자기에 대한 핍박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려 할 때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이를 말립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대답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저들의 권함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에도 예루살렘의 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무리가 되어 따라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그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감상적인 눈물에 젖을 때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은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목적, 그리스도의 뜻을 이해하여야 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나와 세계를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모든 교훈의 주제가 무엇이며 그 초점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대속물로 오셨습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의 마음, 그의 깊은 뜻은 십자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엄청난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생각은 이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인기는 최고에 달해 있고 마침내는 유대 나라의 왕과 메시아로 기대되는 순간에 왜 불길하게 죽는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저들이 생각하는 그 영광의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들은 고난의 메시아는 모르는 채 영광의 메시아만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도 납득이 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기적의 능력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5천 명을 한 자리에서 먹이기도 하고 풍랑을 잔잔케 하며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을 가졌다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습니까? 예수를 자으러 오면 장님을 만들어 버리면 될 터이고 십자가 위에서 못을 박으면 뛰어 내리면 될 것인데, 그 희한한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고난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이야기냐는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데 왜 이 같은 고난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있는데 주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버려두겠습니까?" 하는 그런 이야기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추측하여 숨겨진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면 베드로가 은근히 출세욕을 가졌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왕좌에 오르시면 나도 한 자리 하겠다는 속셈으로 3년 동안 꼬박 꼬박 따라다녔는데 이제 와서 십자가에 죽으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예수님을 아예 붙들고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하지 마옵소서라며 만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대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매우 단호하신 가운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하십니다. 이것이 사탄이요 사탄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사랑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의 교훈과 그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도 깊고, 넓게, 자세한 설명을 하셨건만 십자가의 뜻이 그 마음에 들려지지 않습니다. 부활을 말씀하시지만 부활의 진리가 납득되지 않습니다. 잘 알다시피 나라 일이든, 개인의 일이든 십자가 없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미국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다닐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에 피아니스트가 한 분 있는데 그 부인은 용모도 단정하고 신앙도 좋으며 남편도 그만하면 괜찮은 편입니다. 그런데도 가정 생활이 원만치 못하여 늘 티격태격 거릴 뿐 아니라 더러 별거 생활도 하며 만났다, 헤어졌다 합니다. 한번은 제가 "행복하게만 살아도 짧은 인생을 좀 조용하게 살 수 없느냐며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부인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 있기는 있지요" 하면서 대답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죽으면 되지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착한 일에도 십자가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도 있고, 희생도 있고, 썩어지는 밀 알이 있고야 다시 생명이 살아납니다. 화목이 거저 오는 것이겠습니까? 한 사람이 중생되는 역사가 거저 되는 것입니까? 이를 위해서는 피를 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한 인간이 재창조 될 수가 없습니다. 속죄의 역사가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직 십자가의 피, 그것뿐입니다. 개혁이요, 개선이요, 교육이요, 혁명이요 하며 온갖 짓을 다해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에는 오직 십자가, 그것뿐이었음을 역사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추상적인 십자가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십자가입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구체적인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야 싹이 날 것입니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야 주님의 지신 십자가의 뜻을 압니다. 나의 십자가를 똑바로 지지 않고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달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는 곧 죽음입니다. 의로운 희생입니다. 사랑의 죽음입니다. 여러분! 나의 십자가! 내 몫에 패인 그 십자가를 바로 지고,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제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알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3 : 10, 11)고 하였습니다. 죽어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이것! 이는 곧 부활의 능력이 바로 십자가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그 십자가를 바로 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봅니다.

계시의 십자가! 그 놀라운 사랑의 계시의 십자가를 보며 이 십자가를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창조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고전 1:)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십자가를 쳐다보십시다. 그 속에 능력과 지혜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 자신의 문제도, 이 나라의 문제도, 온 세계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살 길이 있고 비결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기도

자비하신 주님! 언제까지 이렇게 모순 투성이의 이중적인 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하오니 나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고 이제는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오늘을 살며 내일을 이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더는 두 얼굴의 삶을 살지 않게 하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닮은 한 얼굴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또한 나의 십자가를 잘 감당하게 하시사 부활의 능력을 힘입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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