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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 6 강 작별(2)

by 【고동엽】 2022. 4. 15.

제 6 강  작별(2)

룻기 1:11∼14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나오미는 두 자부와 함께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오는 도중에 두 자부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어미 집으로 돌아가서 새로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아라." 그러나 두 자부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아니니이다 우리가 함께 돌아가고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두 자부의 눈물과 간절한 애원도 나오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나오미의 마음은 단호합니다.
룻 1:11,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어머니가 친딸에게 말하듯이 말합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말합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들의 고향에 돌아가서 너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게도 더 낫다." 어머니가 딸들의 행복을 빌듯이 자부의 행복한 내일을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왜 자부들이 돌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질문합니다. 첫번째 질문은,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입니다. 같이 가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까지 나와 함께 산 정 때문에 따라오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를 위해서는 돌아가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이미 나이가 많고 늙은 것을 알지 않느냐? 결혼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설혹 결혼한다 할지라도 내가 아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찾아보아야 할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옛날 유대의 결혼법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신 25:5∼10,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 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내게 행치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나오미가 새로 결혼을 하고, 그래서 아이를 낳게 되면 두 자부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와 결혼을 해서 죽은 남편의 대를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유대 사회의 율법이 규정한 결혼법입니다. 그러나 이미 나오미는 나이가 많기 때문에 결혼하기도 어렵고 설혹 결혼한다 하더라도 아이를 낳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사실을 12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를 합니다.
 1:12,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오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서 두 자부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고, 이로 인하여 돌아가도록 만들려는 것이 나오미의 생각입니다. 자기는 남편을 둘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상황을 가정해서 이렇게 계속 말합니다.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그렇다고 칩시다. 결혼도 하고 또 아이를 낳게 된다고 칩시다. 13절에 계속됩니다.
 1:13,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나중에, 즉 지금 태어나는 아이가 자랐을 때는 이미 두 자부가 늙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어린 아들이 늙은 형수와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그런 불확실한 일을 바라보고 지금 찾을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어찌 불확실한 일을 인하여 현재의 좋은 기회, 새로 결혼하여 남편을 둘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기까지 나오미는 자기가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합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3절 하반부에 보니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 했습니다. 나오미는 여호와의 손이 자기를 쳤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여호와의 손은 능력의 손길로 우리 인간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은 우리와 함께 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치시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함께 하신 것을 찾아봅니다.  
 스 7: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스 7:28, "또 나로 왕과 그 모사들의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나의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두목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이번에는 반대로 여호와의 손이 치신 예를 찾아봅니다.
 출 9:3,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생축 곧 말과 나귀와 약대와 우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악질이 있을 것이 며."
 신 2: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삿 2:15,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삼상 5:9, "그것을 옮겨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지라."
 삼상 5:11, "니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삼하 24: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나오미 생각에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만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치셨다고 생각했습니까? 고향에 흉년이 든 것을 하나님의 손이 친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정든 고향, 조상 대대로 살아온 유다 땅 베들레헴을 떠나야 하는 것도 여호와의 손이 치셨기 때문이고, 또 자기 남편이 죽은 것도 여호와의 손이 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아들들이 죽었고 더 이상 아들이 없는 것 등이 다 여호와의 손이 자기를 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집에 우환이 생기는 것은 전적으로 며느리가 잘못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고집합니다. 나오미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얘들아, 다 내 탓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떠나는 것이 오히려 너희들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오미는 끝까지 자부들을 생각해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어머니의 마음입니까? 시어머니 되시는 분들은 다 그런 마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여호와의 손이 나오미를 치신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요. 나오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계속 살펴보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너희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앞길이 창창한 너희들이 나 때문에, 다 내 탓으로 잘못되는 것 같아 너희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이 더욱 아프다는 것입니다.
 14절에 세 사람은 다시 울었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앞에서 세 사람은 한 번 울었었습니다.
 1:9,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9절에서 울고 14절에서 다시 울었습니다. 그리고 두 자부 가운데 둘째 며느리인 오르바가 그 시모에게 입맞추고 돌아갔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 종종 입맞춤이 따라옵니다. 이별의 뜻으로 입맞춤을 하는 것입니다.
 창 31:28,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삼하 19:39,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바실래의 입을 맞추고 위하여 복을 비니 저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왕상 19: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 하였느냐 하니라."
 우리가 오르바를 나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시어머니의 지혜로운 권면에 그대로 순종해서 시모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모압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오르바의 뒤를 좇아가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8, 9절에 나오미가 빌어준 축복의 말씀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1:8,9,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오르바는 나오미의 축복대로 좋은 남편 만나서 평안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룻이 남았습니다. 룻은 과연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압에 남느냐, 그렇지 않으면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가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돌아가는 오르바를 보면서 더욱 갈등했을 것입니다. 모압에 남는 것은 앞으로 재혼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은 일생을 혼자 과부로 살아야 하는 괴로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아마도 오르바를 따라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의 선택은 오르바와 달랐습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우리가 오르바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더욱 아름다운 것은 룻입니다. 독특하지요? 자기의 모든 행복, 평안을 다 포기하고 불쌍하고 가련한 나이든 시모의 뒤를 좇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룻과 같이 시어머니와 함께 하려고 자기의 모든 인생을  희생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런 여인이 나옵니다.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후사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법에 따라 그 동생하고 결혼했습니다. 동생도 죽었습니다. 이번에도 후사가 없습니다. 남편의 그 다음 동생은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그래서 시아버지가 가서 수절하고 동생이 클 때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어서 면박을 쓰고 자기 시아버지와 동침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다말입니다. 기를 쓰면서까지 자기의 권리를 찾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달랐습니다. 얼마든지 결혼을 할 수 있는데도, 얼마든지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도, 얼마든지 자기 삶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데도 모든것을  다 포기하고 불쌍한 시어머니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본문에 보면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환도뼈가 부러지고도 하나님을 붙잡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야곱입니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씨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은 자기를 축복해주기 전에는 결코 가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일로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선 오르바의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포기하고 희생하였다는 것 때문에 오르바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어머니를 저버렸다고 잘못했다고 책하지 말고 오르바가 순종한 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르바는 어머니 말씀을 잘 따랐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목사가 막걸리를 마셔도 이해를 해라." 우유를 마신 것이겠지 하든지, 또 진짜로 막걸리를 먹었더라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하고 이해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 지적하고 비판하고 따지려고 하지 말고 먼저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3:7,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저들을 이해하시고 저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르바의 입장을 나쁘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반면에 룻처럼 모험적인 신앙도 나중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게 됩니다. 룻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우리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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