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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베스터만 편집, [구약해석학]

by 【고동엽】 2021.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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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클라우스 베스터만이 편집한 『구약해석학』은 구약 해석뿐만이 아니라 신학 전반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지난 10여 년 동안 말해져왔던 논문들을 모아, 구약 이해에 관한 문제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토대를 제공해 줄 의도를 가지고 편집된 워크북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 저자의 일관된 사상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구약학계에서 저명한 인사들의 다양한 견해를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견해들을 지나서 한 경계에 다다르면,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큰 흐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클라우스 베스터만이 편집한 『구약해석학』이라는 이 책을 통해서 구약해석학의 다양한 견해와 전반적인 흐름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Ⅱ. 『구약해석학』 들여다보기


1. 구약의 모형론적 해석 - 게르하르트 폰 라트
모형론적 사고는 모든 인류의 사고 및 해석의 기본적인 작용이다. 구약은 시나 고대 동방에서 볼 수 있는 신화론적이고 사변적인 모형론과는 반대로 시작과 끝의 종말론적 상응이라는 사고에 의해 지배되어 있다.
여러 가지 자료들을 통해 이미 구약 안에서 역사의 엄연한 사실들이 예언적이 되었고 새롭고 보다 완벽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상응하는 원형들로 보아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다. 사건들은 결코 고갈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의 성취 자체는 전혀 예기치 않게 보다 큰 사건들에 대한 약속들을 낳는다. 여기서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고 보다 큰 시기의 전조가 된다.
전승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지대하기 때문에 사건은 즉시 모형적인 것으로 확대해석 된다. 이런 유의 것들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석의야말로 진정 올바른 것이다. 어떤 인간적인 동기들이 개입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물로 역사적 사건들을 거창하고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충동이나 어떤 허풍이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석의자들은 이러한 진술들이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행위를 증언하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구약의 해석: 역사적 개관 - 클라우스 베스터만
우리는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말씀과 연결시킬 때에만 의미 있게 말할 수 있게 된다. 홍해에서 구원을 체험했던 사람들과 후대 사람들이 이 사건을 하나님의 행위로서 고백하고 찬양하고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 구원이 말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러한 구원이 고통 받던 시절에 그들에게 약속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구원을 약속의 성취 또는 예고된 사건의 발생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구약이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오직 약속의 말씀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오로지 그런 말씀의 관련성을 통해서만 역사적 사실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된다. 오직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역사”는 탄생된다. 이 역사의 연속성은 다름 아닌 약속과 약속된 것의 발생을 묶는 통일적인 끈에 있다. 이것이 구약 해석에 관한 현재의 논의에서 약소고가 성취라는 두 개념이 전면에 부각되는 이유이다.
이 개념들 가운데 첫 번째 개념은 말씀하심을, 두 번째 개념은 사건의 일어남(또는 행하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구약 이해를 위한 현재의 탐구에 있어서 기본적인 문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 사건과 어떻게 관련되는 가?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는 어떻게 관련되는 가?’라는 것이다. 정통주의 시대와 신학적 저작의 시대에는 구약에 대한 선입견을 미리 갖고 구약을 이미 알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사실 구약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한 시대는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교의학을 토대로 하고 있었고, 한 시대는 인간 정신은 사고 과정을 통해 역사를 파악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교조적인 역사개념 때문이었다. 이 두 극단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 자신이 그 본문들 속에서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 가를 차근차근 묻는 고된 작업이 시작되었다.


3. 예언과 성취 - 루돌프 불트만
신약과 교회 전승 속에서 통용되던 개념에 따르면,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리는 것이며 성취는 이미 예고된 것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예언이 하나님에 의해 허가된 경우에, 그 예언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나중에 일어날 사건 속에서 성취되게 된다.
신약에서 이점과 관련하여 두 가지 진리가 자명해진다. : (1)구약 예언들이 관심을 갖는 미래는 ‘에스카톤’, 메시야 시대에고, 이것은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현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들은 이런 의미에서 모두 메시야 예언들이다. (2) 구약은 ‘그 전체가 예언의 책’이다. 그 어떤 것이라도 예언으로 인정될 수 있다.
호프만은 『예언과 성취』에서 진정한 예언은 구약의 ‘말씀들’(words)이 아니라 구약이 증언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이 역사는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의 이야기 속에서 성취된 ‘예언적 역사’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역사 자체이다. 성취를 통해 역사는 그 운동의 의미가 분명해졌다는 점에서 예언으로 이해된다.
계약은 원래 희생 제사를 통해 그 유효성을 획득하였고 올바른 희생제사적 예배에 의해 끊임없이 유지되고 갱신된다. 계약의 유효성은 백성들의 공의와 의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들에 대한 순종에 달려있다. 하나님과 백성의 계약, 개개인이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들을 준수해야 하는 그런 계약은 종말론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백성은 실제적은 역사적 경험 세계가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이기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옛 계약과 새 계약의 대비점은 “의문”과 “영”의 차이이다. “영”과 “의”의 “영원한” 새 계약의 “영광”은 옛 계약을 능가한다.
야훼의 나라의 의미는 그가 자신의 명령들과 계명들로써 백성에게 자신의 의지를 부과하는 그 백성의 주(主)라는 것이다. 신약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상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공동체의 생존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새로운 ‘세대’의 침투를 보며 공동체 속에서 세상 내적인 차원과 세상 외적인 차원을 본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가 부활을 통해 왕이 됨으로써 실현되었고, 이제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는 곳마다 그 통치는 현실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종말론적인 집단인 ‘에클레시아’이고 그런 자격으로 개별 공동체와 공동체들 전체를 통해 표현된다. 이 백성이 되는 것은 복음의 부르심의 효과를 통해 세상 밖으로 불리워지고 세례에 의해 거룩하게 된 결과로써 이루어진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하고(einai Christo)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 있다.


4. 구약에 있어서 선포를 통한 “재현”- 마르틴 노트
고대 이스라엘의 주기적인 명절들에서의 “재현”은 출애굽 사건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사건을 포함하고 있다. 구약에 의하면, 합당한 “재현”의 주제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구원 사역들 - 여기에는 약속과 명령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응보적인 심판들도 들어왔고 오직 이 매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들로 언제나 현존한다. 그리고 시간 과정에 붙잡혀 있는 우리 인간들은 그것들을 거듭거듭 “재현”하는 도리밖에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방시그로 “재현”하는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들을 선포함으로써, 즉 그것은 “왜?”라는 의문을 일으켜서(출12:24-27a) 하나님의 구원 사역들을 선포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선포되어야 할 내용은 “전승”을 통해 주어진다. 그리고 오랜 과거 세대로부터 전해졌고 역사에 속하는 언어로 기록된 이 “보도 기사들”은 석의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


5. 약속과 성취 - 발터 침멀리
신약이 신구약의 관계를 인식하는 특히 주목할 만한 방식은 약속과 성취라는 용어이다. 조상들에 대한 약속에 관한 말은 이스라엘의 신앙(이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었던 하나님 야훼를 지향한 것이었다)에 의해 경쟁적이거나 위험스러운 요소가 아니라 출애굽 신앙고백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 주고 확보해주는 과정으로 파악되었다.
구약 신앙고백의 핵 속에서 이 용어에 그러한 필수불가결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 약속/성취라는 범주는 하나님이 수여한 은사의 돌이킬 수 없는 유효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 약속과 성취는 역사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어느 방향으로나 확정성을 갖고 있지 않은 “역사성”만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확대될 수 있는 역사와도 결부되어 있다. 그러한 역사 없이는 약속/성취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이 범주는 시간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역사 과정에서 빠져나와 반복되는 우연한, 불가측의 사건들이라는 저급한 개념으로 빠져든 모든 시도에 대한 무제한적인 안전장치이다.
두 번째 이 역사적 노정이 명확한 긴장 아래 놓여져 있다는 인식에 함축되어 있다. 약속과 성취를 말하는 사람은 베일에 감춰진 목적들과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안다. 족장 전승을 취하여 그것을 출애굽 전승 앞에 놓음으로써,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신앙고백은 풍부해질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해명된다. 그것을 운동과 진정한 역사성의 측면에서 들을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확연하게 이해하게 된다.
예언의 메시지는 하나님에 의해 인격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그 의도에 있어서 극히 인격적인 사건을 거듭거듭 암시한다. 따라서 예언적 선포 속에서 점술적 요소들 - 즉, 역사ㅔ서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가리키는 요소들 - 은 흔히 기이하게되 뒷전으로 밀려나 아주 모호하게 되어버릴 수가 있다. 예언적 약속은 그 가장 깊은 차원에서 예언가의 방식을 따라 장래의 ‘어떤 일’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야훼의 인격적 역사에 대한 선포이다. 선지자에게 그의 메시지에 대한 확신은 중립적인 기준에 따라 측정될 수 있는 그 “예언적” 내용의 객관적 입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확신은 오로지 야훼의 새로운 인격적 발언의 사건, 말씀의 사건에 있다.
구약 전체를 훑어보면, 우리는 약속에서 성취로 나아가는 거대한 역사와 만나게 된다. 이 역사는 도도한 강물같이 흐른다 - 때로는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흐르고 때로는 정체되어 움직이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체를 뛰어 넘어 있는 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들은 역사적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는 민족들 가운데에서의 성취들이다. 이 성취들은 언제나 사건이 된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더 온전한 성취에 관한 질문은 언제나 야훼의 보다 온전한 궁극적인 뜻에 대한 보다 절실한 질문을 내포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모든 사건은 점점 더 성취의 성격을 띠게 되고 나아가 보다 온전한 성취에 대한 문제를 낳는다. 모든 구약의 역사는 야훼의 말씀에 의해 인도되고 주어지는 역사라는 점에서 성취라는 성격을 띤다. 이와 아울러 약속은 하나님의 성취의 자유에 의해 수정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야훼 자신이 모든 약속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옛 계약과 그 약속의 마침이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성취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구약의 궁극적인 영예가 된다. 이제 그리스도만이 구약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합법적인 해석자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 대한 구약의 약속의 말씀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온전히 이해라 수 없다. 오늘날 교회가 구약을 정경의 일부로 굳게 고수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 사건을 직접적으로 철학적, 신화론적으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여 진정한 역사 속에서 주어진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순종을 고백한다.
불트만은 무엇보다도 구약의 모든 선포들은 여전히 지상의 이스라엘 민족 또는 그 조상들과 결부되어 있다는 개념을 지적한다. 신약 선포를 통해 일어나는 실제적인 “분쇄는 ”탈세속화“이 세상에 속하는 것을 벗겨버리는 것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신약이 주장하듯이 단지 분쇄된 것이 아니라 성취도기도 한 구약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역사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확증이다. 구약은 모든 그리스도 신화를 막아준다. 복음이 구약과 결부되어 있는 한, 복음은 결코 무시간적인 선포의 요소로 추상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6. 불트만과 바움게르텔의 명제들에 대한 논평 - 클라우스 베스터만
불트만은 ‘구약 역사는 넘어짐과 실패의 역사이다. 또한 구약 역사는 약속의 역사인데, 이것은 오직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그렇게 보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약속의 말씀들을 신약이 사용하는 방식을 오늘날에 적요할 수는 없다고 한 불트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나사렛 예수가 구약의 이 약속의 역사의 성취라는 사실은 예언 구절들을 통한 증명을 통해서나 그 어떤 방식으로도 입증될 수 없다 - 이 점에서 우리는 불트만의 말에 동의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신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사항이다.
바움게르텔은 ‘예언과 약속을 구별하지 않은 것이 지난 수 십 년간의 새로운 접근방법들의 근본적인 오류라고 본다. 그는 구약에 대한 자신의 석의 작업을 통해 이 두 개념을 철저하게 구별하기에 이르렀다. 약속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예언의 주체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그 의미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킴이 없이 구약의 예언들 또는 약속들로부터 그것들의 미래에의 도달을 벗겨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석의자들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헬라어에서처럼 독일어에서도 약속은 강조점이 어디에 두어지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또한 바움게르텔에 의하면, 약속은 서약이고 이것은 절대적이며 결코 조건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으로는 바움게르텔의 연구는 구약 이해에 관한 현재의 논의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가 약속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하였다는 사실에 그 중요성이 있다. 바움게르텔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과 세상에게 주신 것은 본질적으로 성취(이 개념은 그의 저서 전체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가 아니라 약속(약속된 것이라는 의미의 ‘에파겔리아’)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포괄적인 긴장관계로부터 성경 전체를 위한 토대로서의 중요성을 제거해버리고 이 긴장관계를 한 점으로 수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구약과 신약으로부터 그 역사성을 발탁하는 것이 된다.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및 일차적으로 약속의 내용이 아니라 사건이다. 약속은 사건이고 성취도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들로부터 모호한 적극적이고 객관적인 “정수”를 증류해내려는 모든 시도들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 이야기들로 된 책, 사건에 대한 보도 - 다루지 못하게 된다.


7. 구약의 해석학적 문제- 프리드리히 바움게르텔
구약에 대한 순전히 기독교적인 이해는 선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선이해 속에서만 복음적 신앙은 현재 상황에서 유효하게 작용하는 말씀으로서의 구약의 증언과 유사성을 갖는다. “이해”를 위해서는 이해 대상의 의미에 대한 내적인 참여로부터 생겨나는 어떤 감수성이 꼭 필요하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의 의미에서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믿음이 꼭 필요하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친화력이라는 의미에서 공감대의 형성이 필수적이다. “이해”라는 것은 말씀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은 학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적 진술들의 타당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해의 방법론, 석의의 방법론(해석학)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성경 말씀을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보편타당한 이해, 공동체적 이해로 이끄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학적 이해, 즉 방법론적 이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앞에서 말한 단순한 이해로부터 차별화시킨다. 그러한 이해(이것은 학문적 성격을 갖추고 있다) 속에는 인간의 사고, 인지, 이해에 관한 일반 법칙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법칙들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해석학적 방법론을 개발함에 있어서는 학문적 이해의 일반원칙들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 우리는 종교사 연구로부터 도출된 사실, 즉 구약은 비기독교적인 종교로부터 나온 증언이라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구약의 자기 이해는 복음적 선이해와 동일하지 않다. 여기서 요구되는 명확화를 위한 수단은 경건의 역사에 대한 탐구이다. 구약말씀은 구약인과 신약인 모두에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하나님의 권능이다. 하지만 구약 말씀은 오직 역사적, 종교적 발전과정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 자기이해에 있어서 복음 밖에서 움직이는 증언으로서만 복음적 인물들에게 권능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복음적인 말씀으로서는 복음적 인물들에게 권능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적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종교적 발전과정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성격을 갖고 있고 구약인의 자기이해에 대하여 권능을 갖는다는 점에서 구약 말씀이다. 오직 이런 의미의 구약 말씀으로서만, 오직 복음 밖에서의 증언으로서만 구약은 우리에게 복음의 증언일 수 있다.


8. 구약 해석학 - 한스 발터 볼프
본문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칙에 의해 본문과 그 문맥을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석의 방법론은 거부되어야 한다. 본문이 원문이든 차용문이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증언 역할을 하고 있고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날의 하나님이라면, 그 어떠한 해석학적 원칙도 그 본문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하나님을 증언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활용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본문을 그 역사적 맥락속에서 이해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배제하는 데 관심을 쏟는 석의 방법론이 추구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해석자는 구약 본문의 특유의 성격에 자신을 맡기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본문을 해석자의 입장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본문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것이 해석자의 임무이다. 본문의 일부는 그 ‘맥락’속에서 이해해야만 올바를 수 있다는 것은 해석학의 정석에 속한다. 야훼와 비견될 만한 신은 없으며, 야훼 앞에서는 다른 모든 신들은 신이 아님이 드러난다. 유일자이신 그분에 대하여 그가 사람들에게 다가왔고 특히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역사 속에서 행하셨다는 것 외에는 말할 것이 없다.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지속적으로 새롭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율법’ 아래에서 살고 있다. 예언 속에서도 야훼는 자기가 홀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님임을 보인다. 선지자들의 말씀은 계약 속에서 야훼와 함께 하는 감사와 순종의 삶 바깥에서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총체적이고 뿌리깊은 불순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실패로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야훼는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야훼의 말씀과 행사는 이스라엘에서 계속될 것임을 증언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그 불순종이 뿌리깊은 것임을 보이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심판과 죄사함을 통해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준비하고 잇다는 것을 알린다. 이렇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어 나간다.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에게로 온다는 것 - 바로 그것이 메시지로 남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이스라엘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옳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하나님이 구원 사역에 힘입어 위험들을 안전하게 통과하여 새롭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계약의 연관성을 회복하여 계약 백성의 삶을 위한 지침으로 삼았다. 구약의 역사적 목표로서 구약의 총체적 의미를 밝혀주는 신약에서 구약의 맥락이 발견된다. 또한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의 상응은 구약 문맥들의 증언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모형론적 접근방법은 구약 본문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자 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배제하고자 하는 석의 방법론에 필수불가결하다.
모형론은 역사비평적 작업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절하게 밑받침하는 것이 그 의도이다. 모형론은 구약 석의에 적어도 세 가지 도움을 준다. 신약의 상응점들에 대한 고찰은 발견학습적인 기능을 갖는다. 신약의 종말론적 유비에 대한 고찰은 본문의 설명에 있어서 ‘의도’의 탐구를 촉진시킨다. 유효한 가설로서의 모형론은 구약의 증언 의도와의 신학적 연대성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주고 석의자가 구약 본문에서 너무 성급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는 이질적인 하나님에 대한 증언을 찾아내는 것을 경고한다. 신약의 그리스도 사건은 구약에 비추어볼 때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선포에 있어서 구약의 영속적이고 근본적인 의미이다. 구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강조한다. 이것이 구약 본문이 그 특징있는 증언을 통해 계속해서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인 그리스도 사건을 보여주고 그릇된 고립화와 역사화를 막아주는 방식이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그리스도에 관한 철학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준다. 구약은 기독교 메시지가 그릇되게 개인주의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구약은 기독교 메시지가 초월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아준다.


9. 예수 그리스도와 구약
반 룰러의 저서『기독교회와 구약』에 대한 서평 - 요한 야콥 슈탐
반 룰러는 여기서 자기 생각에 신구약을 분리시키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1. 약속들을 통해 미래를 향해 추동되어가는 역사를 지닌 문헌인 구약에는 그러한 약속들이 담겨 있고 그 약속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모든 약속들의 유일한 성취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여러 행위들 가운데 단지 ‘하나의’ 행위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하나의’ 화해 방식이 존재하지만 구약에는 많은 화해 방식이 존재한다. 대속 사상은 오직 신약에 와서야 최종적으로 돌출한다 - 이렇게 선언되어 있다. 그러나 구약 예언들의 경우에 단순한 열거 방식은 적함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내적으로 파악되고 무게가 달아지고 무엇보다도 구약 전체ㅘ 결부되어야 한다.
2. 구약에서 메시야는 인간인데 신약에서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신성은 전자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반 룰러의 졀론적인 분리에 의해 구속사의 흐름의 신비를 보는 것은 방해되는데, 이것은 특히 메시야의 직임과 관련하여 분명히 드러난다.
3. 신약류의 사자들의 파송을 통한 선교 사역은 구약에서 예기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거부하는 일도 예언되지 않았다. 처음 부분에서는 반 룰러와 온전히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직은 구약에서 예견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진리가 열방에 퍼져나가는 것은 예견되었다.


10. 신정과 구원론
번 룰러의 『기독교회와 구약』에 대한 논평 - Th. C. 프리젠
반 룰러는 구약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온전하게 계시한 고유한 성경이라고 평가한다. 반 룰러가 이러한 개념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신정이 구약 계시의 결정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가 신약에서는 실제로 구원론적 증언만을 듣기 때문이다. 내 견해로는 이 두 가지는 모두 일방적이다. 이로 인하여 신구약의 상호관계는 잘못 결정된다. 나는 이 두 명제를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반 룰러는 신약에 대하여도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가장 중대한 반론은 반 룰러가 구약의 신정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나는 적어도 구약과 관련하여 신정과 종말론이라는 개념을 구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둘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데서 이 책의 커다란 약점을 발견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떼놓고 설교될 수 없다. 반 룰러가 하나님 나라는 단지 그리스도 주위를 맴돌 뿐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진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로부터 비춰나오고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복음적인 신학은 신구약의 상호관계와 그 총체성 안에서 성경을 연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하는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


11. 모형론 석의는 적절한 방법론인가? - 발터 아이히로트
모형들로 사용되는 구약의 구원사의 실체들은 그것들의 실제적인 역사적 기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역사 주관에 대한 가치 있는 증언인, 구약의 역사 설화들로부터 가져온 아주 구체적인 것들이다. 그것들이 모형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교류를 대표하고 보증하고 현실화하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구약의 역사적 계시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종교적, 신학적 의의가 그것들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을 하나님이 예비적으로 제시하신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구약의 모형론적 의미에 대한 그의 탐구가 학문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런 식으로 구약의 역사적 사실들을 평가하는 것이 석의 작업에 속할 수 있는지를 물을 수 있다.
기독교적 석의는 구약이 그 신약 지향성에 의해 근본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믿고 인정한다. 과제는 이러한 신약 지향성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형론은 이러한 목적에 기여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도 우리는 신구약에서 하나님 백성의 결정적인 의의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로의 부르심을 더욱 강조하고 석의를 신앙의 유비 또는 공동체의 유비에서 연유하는 그 무엇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모형론은 거기에서 단지 보조적인 역할만을 할 것이고, 그런 보조적인 지위 내에서는 적합한 석의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12. 구약의 학문적 연구 - 알프레드 옙센
구약학은 교회의 정경의 일부를 다룬다. 교회가 구약을 신약과 결부시킨다면, 그 이유는 신구약이 어떤 식으로든 결합되어 있고 따라서 서로를 해설해 준다고 교회가 믿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경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구약학은 이러한 암시를 따라 어떻게 신약이 구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올바른 관점을 제공하는 지를 물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신구약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통찰을 전제한다.
오직 그러한 통찰로부터만 올바른 역사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신학적 관점이 나온다. : 종교 개혁적 의미에서 최상의 신학적 견해라는 것은 성경에 가장 가까운 견해이다. 본문에 충실한 해석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 본문으로 하여금 가장 극명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접근 방식이다.
구약은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한 이유를 밝혀주고, 신약은 이 구원자를 선포한다. 구약은 하나님의 행사의 목표와 미래를 계시하고, 신약은 이 미래의 개시를 알린다.
교회의 정경에 대한 해석인 구약 해석은 신약과의 관련성과 이에 따라 도출되는 질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무엇이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무엇이 의도되고 있는 지를 찾도록 만든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는 본문의 각 절, 각 장, 각 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구약 정경은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계시의 터전으로서의 역사, 실제 역사를 말한다. 따라서 구약을 교회의 정경으로 진지하게 취급하는 신학은 구약 서론,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질문을 회피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성경의 하나님 말씀이 증언되고 전승된 집단이었다. 구약의 진정한 목표는 여전히 “성경”을 산출한 집단들과ㅣ 환경들의 역사이다. 이것이 정경인 구약에 의해 부과되는 접근 방식이다. 구약학은 양식비평, 본문 비평, 정경 비평 등을 통해 성경의 역사적 출현과 그 형태를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도 역사비평의 방법들이 타당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정경으로부터 결정된다.
구약과 신약의 메시지와의 관련 속에서만 신학자는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역사들에 대한 증언으로 인정하는 “구약”을 발견하게 된다. “구약” 전체를 역사적으로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약을 이러한 맥락으로부터 분리해서는 안 된다.
신약은 구약이 세상과 인간과 인류 역사를 창조하고 심판하고 구속하는 주(主)를 계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들을 증언한다는 사실에서 구약의 본질적인 관심을 본다. 이로써 구약학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이렇게 스스로를 계시하는 그 하나님을 밝히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석의는 ‘모든 역사의 전제’, ‘모든 역사의 노정’, ‘모든 역사의 목표’를 순차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13. 구약 본문의 평가 및 권위 - 프란츠 헤세
구약 진술들의 권위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답변되지 않는 한 구약 진술들에 대한 적절한 평가는 불가능하다. 기본적으로 통용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답변되기 전에는 구약 본문들에 대한 평가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신앙의 진술들에 대한 평가에도 그 진술들로부터 나오는 정서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우리는 단지 이 신앙의 진술(구약 본문의 권위라는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신앙을 갖고 있다는 말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답할 때, 나는 신앙의 결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언 할 수는 있지만 증명할 수는 없다. 마차가지로 상대방은 자신의 정반대의 신앙의 결단이 옳다는 것을 합리적인 토대들 위에서 나를 설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른 신앙의 결단들과 동일한 지평에 있는 어떤 결단이 행해져야 한다.
구약의 신앙의 증언은 역사적 탐구의 결과들을 통해 많은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의문이 제기된다. 반면에 신약의 신앙의 증언은 다소 주변적인 신화적 어투를 제외한다면 역사적 탐구의 결과들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다. 그러므로 복음과 사도들의 증언은 우리에게 내적으로 설득력 있고 직접적인 힘을 갖는 데 반해 구약에서 신실한 자들의 증언은 그 토대, 그 전제인 역사적 사실이 의문시 된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점에서 거침돌이 된다. 그러므로 오직 신약의 증언의 진술들만이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고 구약의 진술들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신약의 증언은 우리에게 구속력이 있음과 아울러 구속 사건을 “실은”(carry)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 반면에, 구약의 증언은 기독교 신앙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예비하고 신앙을 정화하고 심화시키기는 하지만 구약의 개념들이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구속사를 “실은” 실제 사건과 아주 자주 모순된다는 거침돌을 구약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대적들에서 절정에 달하는,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역사가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구속사의 역사와 나란히 일어나는 하나님의 “변증법적인” 구속 활동을 증언한다. 이 두 계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서로 만난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구속/정죄의 역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활동, 약속의 역사, 자기 백성에게 세상의 구주를 인식하도록 허용하지 않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위를 증언하듯이, 그 인간적 측면들을 포함한 구약 전체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목적은 우리가 “신약”인(신자들, 새 시대에 속한 자들)으로서의 우리의 실존으로부터 뒷걸음질쳐서 우리에게서 폐기되어야 할 “구약”인의 실존 양식으로 되돌아가는 지점에서 우리를 부르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평가의 핵심은 구약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소유하는 것이다. 구약의 진술들에 대한 평가는 지루하고 사소한 신학적 작업이다. 그것은 구약을 언제나 여전히 구약인인 우리가 들을 수 있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청종하여 구원을 향한 올바른 길로 나아가 구약인에서 신약인으로 변화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론이다.


14. 구속 사건과 역사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역사 속에서의 야훼 행위의 목표는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그의 사랑에서 나오고 그의 맹세와 함께 시작되며 야훼가 자신의 맹세를 성취하는 행위를 통해 계시될 것이라는 목표를 지향한다. 여기서 깊고 의미심장한 정식(正式)으로 응축되어 있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인식의 일반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약속과 성취의 긴장이 역사를 만든다.
이스라엘은 구체적인 현실의 영역으로서의 역사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창조세계 전체를 역사 속으로 끌어들였다. 역사는 총체적 현실이다.
불트만의 말과는 반대로 이스라엘이 약속에 의거하여 모든 역사적으로 체험되는 성취를 뛰어넘어 그 이후의 성취를 기대하였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인식은 언제나 종말론적 지향을 갖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한 걸은 더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 아에서 일어난 구원 사건과 이스라엘 역사의 연속성을 굳게 고수하였다.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과 새 계약의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 그들을 하나로 묶는 하나님의 하나의 역사를 일관되게 고수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은 오직 약속과 성취라는 하나의 쌍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공동체와 고대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는 하나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예수는 구약의 약속들에 비추어볼 때에만 하나님의 계시이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은 신구약을 포괄하는 하나의 역사, 구약과 신약에서 일하시고 자신의 약속들에 충실한 하나님의 동일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역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독교에는 사실 미래에 성취될 약속을 담고 있기 때문에 폐기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관심이 존재한다. 현실에 대한 역사적 체험은 오직 성경의 역사 이해, 약속에 대한 성경의 신앙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기원이 상실됨으로써 오늘날 역사로서의 현실 체험은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우리는 역사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기된 성취를 지향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약속의 역사를 통해 접근 가능한 것과 같이, 역사성은 역사로서의 현실에 대한 체험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물어야 한다.


15. 구약 선지자들의 역사 이해 - 한스 발터 볼프
선지자들의 역사 이해의 독특성은 그 메시지의 특별한 출발점에 비추어 볼 때에만 이해 될 수 있다. 선지자들에 있어서 역사는 미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목표지향적 대화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장래 행위들 속에서 구원사의 시초를 인식하기 때문에 역사를 연속적인 통일체로 인식할 수 있다. 예언에서 보편사에 대한 관심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은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모든 현실의 유일한 주(主)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그러한 관심은 장차 오실 하나님에 대한 선지자들의 선포의 부산물이다. 예언서의 그 어디에도 역사에 대한 계획이 제시되어 있지 않고, 선지자들의 모든 열심은 각각의 당대의 상황을 장차 오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공격하는 데 두드러진다.
역사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역사의 우발성과 통합성은 동일한 기원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발적이 사건들은 인간과 하나님의 대화의 자유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나 모든 역사의 연속성은 하나님의 최상의 포괄적이 신실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확신이다. 우리 세대가 역사의 통일성을 우리 식의 사고 양식을 통해 인식하고 새롭게 시도해야 한다는 것은 이것과 합치한다.
예언에 있어서 역사의 연속성과 종국에 대한 인식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그들에게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구하지 않은 두렵기조차 한, 그렇지만 결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통해 미래 역사는 그들의 현재 속으로 인식 가능한 방식으로 뚫고 들어왔다. 기본적으로 이 미래의 말씀은 현실의 모든 분야에서 과거 역사의 실제 사건들과 일치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역사의 종국을 인식할 가능성에 접근할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나사렛 예수를 최종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한 초기 기독교의 인식은 초기 기독교와 구약의 구원사와의 연관성에 대한 인식과 뗄래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 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신구약과 관련된 모든 신학들을 신구약간의 역사적 간격의 견지에서 역사비평적인 새로운 해석학적 고찰을 통해 파악하고 또한 신구약의 연속성과 유비를 파악할 커다란 과제를 안고 있다.




Ⅲ. 『구약해석학』의 굴곡이 가져다 준 카타르시스


클라우스 베스터만이 편집한 『구약해석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절망과 환희의 경계선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세계적인 석학들의 논문을 분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 지식의 한계와 번역에서 오는 어색함의 한계들로 인하여 수많은 절망을 경험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자아와의 싸움 끝에 높은 고지에 다다른 자 만이 느낄 수 있는 상쾌함처럼,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얻게 되는 환희도 경험케 되었다. 이제 나는 그 여정의 끝에 서서, 내가 느낀 『구약해석학』의 풍성함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나는 『구약해석학』이라는 책 속에서 세 가지의 피할 수 없는 갈림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구약 해석학”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면, 이 세 가지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갈림길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이스라엘 역사’와 ‘인간 나라에서의 이스라엘 역사’ 사이에서
오는 ‘관점의 차이’라는 갈림길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기 전에 반드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야 한다. 여기에서의 결정은 자신이 ‘무엇을 하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가’라는 물음과 관계된다. 만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전제하에 믿음의 성숙을 얻기 위한 해석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이스라엘 역사’라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이 말한 대로,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말씀과 연결시킬 때에만 의미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모형론에 대한 접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이스라엘 역사’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해석의 목적이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만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면, ‘인간 나라에서의 이스라엘 역사’ 라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프란츠 헤세가 밝힌 대로, 구약의 신앙의 증언들은 역사적 탐구의 결과들을 통해 많은 의문점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당연히 해석자의 몫이다. 그러나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목적으로 하는 ‘정경’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정경이다’라는 사실에 의해, ‘인간 나라에서의 이스라엘 역사’는 2차적 의미로 밀려나게 된다. 판넨베르크는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과 새 계약의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 그들을 하나로 묶는 하나님의 하나의 역사를 일관되게 고수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라고 주장한다.


2.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 오는 ‘관계 설정’이라는 갈림길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구약과 신약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한다는 그 자체로서, 이미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계 설정의 방향에 따라 해석의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약해석학』을 통해서 우리는 ‘예언과 성취’라는 관점과 ‘타락과 회복’이라는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루돌프 불트만, 발터 침멀리 등은 ‘예언과 성취’라는 길을 선택했다. 불트만은 호프만의 『예언과 성취』를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역사’ 그 자체가 하나의 예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예언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한스 발터 볼프는 ‘타락과 회복’이라는 관점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구약의 이스라엘은 총체적이고 뿌리 깊은 불순종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실패로 만들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오는 사건-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 회복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예언과 성취”의 관점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신뢰’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타락과 회복”의 관점을 선택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신뢰’보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성경이 이미 두 가지 사실들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두 가지 관점을 ‘상호보완의 관계’로서,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높은 산이라고 해서 하나의 길만을 허락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또 그 길마다의 아름다움이 다른 것처럼, 이 두 가지의 관점도 성경의 신비로움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3. 성경의 시대와 현 시대 사이에서 오는 ‘해석학적 도구 설정’이라는 갈림길
이 문제는 본질적으로 삶의 자리가 다름으로써 오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의 우리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삶의 자리’를 말하지 않는 다. 오히려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만큼 오래전의 ‘삶의 자리’를 바탕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 시대의 ‘삶의 자리’를 알 수 있는 가?
지금까지 이러한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해석학적 도구들을 연구해 왔다. 이 책에서도 그러한 고민들을 엿볼 수 있다. 알프레드 옙센은 ‘본문에 충실한 해석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고 말한다. 본문이 기록된 성경 시대의 ‘삶의 자리’를 발견하기 위한 첫걸음은 본문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다. 본문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는 다면, 본문의 시대가 언제인지 확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본문의 의미를 확정해야 한다. 한스 발터 볼프는 ‘어떤 원칙에 의해 본문과 문맥을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석의 방법론은 거부되어야 하며, 모든 활용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본문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석의 방법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문의 의미가 확정된 이후에 우리는 여러 가지 해석학적 도구들을 통해 성경의 역사적 출현과 그 형태를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떤 해석학적 도구를 사용해야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 갈림길에서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가능하면 모든 해석학적 도구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옙센은 양식비평, 본문비평, 정경 비평 등의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도구들을 따라 성경의 역사적 출현과 그 형태를 추론하는 것은, 결국 성경 시대의 ‘삶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모형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구약해석학』은 특히 ‘모형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아마도 이 논문들이 쓰여 질 당시에 구약 해석학의 동향 가운데 ‘모형론’이라는 큰 흐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진다. 한스 발터 볼프는 ‘모형론이 역사 비평적 작업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절하게 밑받침하는 것이 그 의도’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통해 성경 시대의 ‘삶의 자리’를 찾아 가야만 한다. ‘삶의 자리’를 찾지 못한 해석은 결코 정확한 해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Ⅳ. 결론
나는 이제껏 클라우스 베스터만이 편집한 『구약해석학』이라는 책을 을 통해 구약 해석학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와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절대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보다 더 나은 해석학의 방법들을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해석의 방법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까지가 해석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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