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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고광필) 부록 - 현대적 접근의 문제점 2

by 【고동엽】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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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문법과 언어놀이(language-game)

어느 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산책하다가 축구게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그의 생각 가운데 우리도 언어를 가지고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영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애들이 처음에는 지시적으로 언어를 배우지만 일단 배우면 여러 가지 다른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언어를 쓰고 배우는 것이 게임과 비슷하다. 게임에 룰이 있는 것처럼 언어사용에도 룰이 있다. 이 룰이 문법이며 우리 신자는 성경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신자로 되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누가 성경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의 신앙생활의 틀을 결정한다. 개혁주의 신앙을 배우면 개혁주의 신자가 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며 언어가 보여주는 하나의 논리인 것이다. 이 언어놀이가 문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모든 삶은 여러 가지 형태의 언어놀이를 통해서 이루어진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언어놀이가 어떤 형태의 삶의 틀(form of style)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v). 문법과 삶의 형태(forms of life)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 가지 삶의 형태는 언어놀이에 의하여 형성되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주어진 것이며 일단 어떤 형태의 삶의 틀이 형성되면 그것을 바꾸기가 아주 힘든 것이다. 여기서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필자는 미국에서 13년을 살았는데 고기는 안 먹고 살 수 있어도 김치와 된장국을 먹지 않고는 살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누가 물어본다면 단순하게 한국에서 거의 33년 동안 이것들을 먹고살았기 때문이다. 김치가 쇠고기 보다 영양분이 많아서도 아니고 한국 사람의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여기서 해석학적인 면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평가하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근거가 이 삶의 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삶의 틀은 세계를 보는 안경, 지평 혹은 관점이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이 성경을 “안경”(spectacle)이라고 말한 것은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말은 개혁주의 안경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종합하면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언어놀이를 하고 언어놀이를 하다보면 어떤 삶의 틀이 생긴다. 그래서 어떤 삶의 틀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 삶의 틀에서 나오는 언어의 사용은 그 언어의 의미를 결정 지운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는 대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사상은 지금까지의 서구사상과 아주 다르다. 전자는 독창적이고 명료성(clarity)과 간결성(persipicuity)에 중점을 두고 언어사용을 봄으로서 모든 것의 에센스를 파악하려 했다면 후자는 체계(system)를 이용하여 거대한 지식의 빌딩을 건축하려 했다. 서구의 많은 철학자나 신학자들까지도 새로운 이론을 도입함으로 과학에서처럼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데 진보를 믿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의하면 인간의 근본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으며 방대한 이론을 통해서 쌓아올린 거대한 지식의 빌딩의 체계에 의해서 인간의 병패적인 사고를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그 문제점을 조명케 했으며, 언어의 원초적인 홈(original home of language)인 언어 놀이(language-game)를 통해서 모든 문제의 핵심을 조명하고 파악해서 병패적인 사고를 치유하고자 한다. 언어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언어대한 이론이 아니라 언어사용이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후기 사상의 언어논리 개념은 그가 말한 대로 새로운 이론을 도입해서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언어의 사용을 봄으로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조명해주고 이로 인해 문제가 문제로 되지 않게(to dissolve)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전도서 기자가 이미 말했듯이 해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한 말을 깊게 이해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를 가지고 해석에 앞서서 언어사용을 봄으로서 문제점을 새롭게 파악하게 하고 조명해 주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자기의 방법에 창조적인 것이 있다면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보는 방법이라고 했으며 그는 자신의 공헌을 말했다. “나는 내 방법의 창조성은(그 말이 옳다면) 씨에 속한 것이 아니라 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밭에 어떤 씨를 심어 보라 그러면 다른 밭에 심는 것과 다르게 자랄 것이다.” “I believe that my originality(if that is the right word) is an originality belong to the soil rather than to the seed.(perhaps I have no seed of my own). sow a seed in my soil and it will grow differently than it would in any other soil”(Norman Malcolm의 Ludwing Wittgenstein의 14페이지 각주 17번으로부터 재인용).
여기서 나온 밭은 성경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좋은 밭과 같을 것이다. 다른 해석 방법보다 30배 60배 100배나 좋은 결실을 맺는 해석방법이 될 것이다.

vi). 문법과 언어의 생명력

무엇이 언어를 생명력 있게 만드는 것인가? 자동차에 기름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고 해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냉장고라고 해도 전기를 연결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언어를 생명력 있게 만드는 것은 언어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사용에 있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언어도 되고 죽일 수 있는 언어가 된다. 가령 사형과 무죄라는 언어를 생각해보자. 사전에서 보면 별로 우리에게 감동과 감격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언어가 판사가 재판장에서 사용할 때는 똑같은 언어이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형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언어가 되지만 무죄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언어가 된다. 무엇이 똑같은 언어를 이토록 차이 나게 만드는가? 사전이 그렇게 만드는가? 아니면 언어의 사용이 그렇게 만드는가? 언어의 사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치 아니하면 언어의 힘은 죽어버리게 된다. 필자는 한국에서는 웬만한 한자를 쓰고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13년의 ?지않은 세월을 사는 동안 한자를 많이 일어먹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한자를 사용하지 안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우리의 전화번호를 잘 기억하고 있는가? 전화번호가 암기하기 쉽기 때문인가?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생명력은 사용에 있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 언어에 대한 의미가 불확실해지고 의심이 생긴다. 확실성이란 어떤 객관적인 근거에 있다기 보다는 언어의 사용에 있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사용이 그 언어의 확실성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vii).문법과 보여줌(grammar and showing)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목적은 성명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묘사(to describe)하는 데 있다. 여기서, 묘사한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설명을 계속하다보면 결국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언어의 놀이는 그 개임을 통해서 그 개임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을 말할 때는 설명보다는 보여준다는 말을 사용한다. 결국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보여주어야 하며 설명할 수 없는 것도 결국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보여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지 안했던가! 성경의 깊은 이해는 말씀 그대로 받아드리고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의 언어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언어이다. 그러기 성경의 메시지를 말로만 하면 설득력이 없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viii).문법과 “으로서 봄”(seeing as)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판다하고자 하는 것의 모든 성분을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으로서 보는” 것이다. 가령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종이라고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종이를 만드는 방법과 종이의 화학성분을 알아서 종이라고 하는가? 단순히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종이라는 언어를 혹은 언어개임을 배웠기 때문에 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무엇을 으로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15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북한의 북풍으로 말미암아 국민회의가 서울에서 패배를 마시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신문에서 봤다. 신학국당은 국민회의가 해석한 것처럼 보지 않는다. 서울에서 이긴 것은 점진적인 개혁과 안정을 원하는 국민의 여망으로 해석한다. 똑같은 사실을 놓고 왜 견해가 다른가? “으로서 보는” 것은 아무나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상황 또는 이권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몇 해전 발틱 삼국이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였을 때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늘은 태양이 더 밝게 보인다고 했다. 태양이 그날만 더 밝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밝게 보이는 것은 그들의 상황이 그렇게 표현하도록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상황과 독립에 대한 감격이 그들에게 태양이 밝은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잠언기자는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새롭게 볼 수는 있는 것이다. 새롭게 보는 것은 누구나 다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새롭게 보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과 전혀 다르게 세상과 사람을 본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 3-5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이제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되었다고 했다. 환히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환난이 즐거운 것이 되는 것이다. 고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은 고난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인류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고난에 새로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생애를 배울 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뿌리가 자라고 신앙의 인격이 신앙인으로서 자라 가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고난은 인생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욥기를 보면 욥은 고난을 통해서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본다고 고백했다. “내게 주께 대하여 귀로만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참으로 감격적이고 놀라운 고백이다. 우리는 얼마나 책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는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눈으로 직접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살아 계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만나 뵐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된 사람만이 성경을 철학이나 도덕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

ix). 문법과 해석

해석이란 언어의 사용(the use of language)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다. 본다는 말은 해석하기 앞서 문장에 있는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놀이를 보는 것이다. 언어놀이(language-game)는 삶의 형태(forms of life)를 형성한다. 언어의 사용은 언어놀이에 의해서 보여지며 언어놀이는 어떤 삶의 표현이다. 따라서, 언어놀이, 삶의 형태는 서로 구분은 되지만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착되어 있다. 언어놀이란 언어의 원초적인 집(heimat)으로서 텍스트와 해석자를 하나로 연합시키며, 텍스트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의 내적 조명과 같다. 여기서 언어의 원초적인 집이 언어놀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우리가 무엇의 가장 깊은 이해를 하려고 한다면 근원으로 돌아가서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의 원초적인 고향은 언어개임이다. 따라서, 언어의 깊은 이해는 언어자체에 있지 않고 그 사용에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언어사용에 있는 것이다. 일상언어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고 대화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용어는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다. 따라서, 성경공부, 강의, 설교는 일상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성경이 일상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쉽게 강의하지 못하거나 설교하지 못한다는 것은 강의 주제를 잘 모르거나 성경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언어의 사용(언어놀이)은 삶의 틀을 형성하고 언어의 사용은 삶의 틀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삶의 표현이기 때문에 언어사용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인격과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삶의 틀은 주어진 것이다. 어느 공동체 안에서 살다보면 그 공동체의 특성을 갖게 되고 정체성이 생기는 것이다. 필자는 미국에서 영어의 관사와 정관사, 전치사 사용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다. 지금도 잘 모른다. 영문법을 공부할 때는 아는 것 같지만 실제 사용에서는 자주 혼동된다. 그러나 미국 학생들은 문제가 없다. 자기나라의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왜 당신은 관사, 정관사, 전치사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의 대답은 아주 단순했다. 영문법을 잘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That is how we use it..” 즉 그렇게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렇게 사용하고 살다보니 이제는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삶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은가?
삶의 틀은 받아드려진 것이며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삶의 틀 가운데서 봐야하는 것이다. 다른 기준으로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각 공동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나온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공동체가 인정하는 객관성은 없는 것인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삶의 틀 자체가 객관성이요 주관성이요 어떤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선험적인 지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틀 자체가 모든 평가, 해석의 옳고 그름을 정당화하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사람들의 일치(一致)가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잘못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인가?--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옳거나 잘못이다; 그리고 언어 내에서 사람들은 일치한다. 이것은 의견들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태의 일치이다.”(<철학적 탐구>, So you are saying that human agreement decides what is true and what is false?--It is what human beings say that is true and false; and they agree in the language they ues. That is not agreement in opinions but in form of life. No. 241).

III. 두 접근방법의 비교

대륙을 중심으로한 실존적 현상학적 접근방식은 철학적인 접근방식으로서 다소 난해하고 어렵다. 이 접근방식은 이해의 구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해란 현존재의 자기이해에 기초해있다. 후기에서는 현존재의 실존적 현상학적 이해보다는 언어를 통한 존재의 이해에 중점을 둔다. 언어의 이면에 숨어있는 언어의 본질적인 구조를 살피며 이 구조에서 드러나는 인간존재 의미를 찾고자 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의미는 언어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을 중심한 일상언어 철학은 이해의 구조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이해에 중점을 둔다. 의미란 사전에 있는 의미가 아니라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의미란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맥 속에서의 의미를 강조한다. 여기서 강조 점은 해석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사용을 봄에 중점을 둔다. 언어의 원초적인 고향은 언어의 사용이다. 이것을 언어놀이(language game)라고 한다. 언어의 놀이는 삶의 틀을 형성(forms of life)하고 결국 존재의 의미는 이 삶의 틀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양 접근방식이 서로 다는 근원에서 출발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다. 언어이해는 결국 인간이해이다. 언어가 인간을 이해하는 근원적이고 총체적이라는 것이다. 쓰여진 언어이건, 말하는 언어이건, 몸으로 하는 언어이건 언어는 언어이다. 우리는1997년 전의 역사, 예술, 문학을 이해하는 것도 결국 언어로 쓰여진 작품이나 예술을 통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토록 언어는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언어이해를 그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데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성경의 언어와 문학작품의 언어는 언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천지차이가 있다.
철학적 해석방법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이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우리의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철학적인 방법의 문제점이다. 성경해석은 성경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이 성경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주신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했다. 이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이 역사적 문법적인 것이다. 문맥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문자적인 의미이다.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은 언어사용을 봄으로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언어로 쓰여졌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졌다. 그러나 같은 언어이지만 성경은 다른 작품의 언어와 다르다.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성령님의 감동시켜서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언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의미와 특성에 있어서는 문학작품의 언어와 성경의 언어는 천지차이가 있다. 성경의 언어의 의미가 다른 것은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성경을 쓰셨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일반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것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하는 이스라엘 사람과 그리스인이 성경을 잘 이해하느냐 할 때 그렇지가 않다. 잘 읽을 수 있고 사전적인 의미는 잘 알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영적인 의미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서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한다.
디모데 후서후서 3:15-17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보자.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경은 두 저자(dual authorship)를 가지고 있다. 원저자와 기록자이다. 하나님과 인간(원 저자와 기록한자)이다.

I)성경의 저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πασα γραπη θεοπνευστος)로서 감동이란 단어는 θεος와 πνεω(숨을 쉬다)의 합성어이다. 문자적으로 변역 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이다. All Scripture is Godbreathed(NIV).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GNB/NASB).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KJV/NKJV).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RSV). The Whole Bible was given to us from God(living Bible). 왜 똑같은 원문을 이렇게 다르게 번역할 수 있는가? 이것이 해석의 어려운 점이다.NIV을 제외하고는 전무 수동으로 번역했다. 수동과 능동의 번역은 뉴앙스의 차이가 있다. 문법적으로 보면 감동이라는 단어는 형용사적으로 쓰였다. 주격, 여성, 단수 형용사이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말은 서술적이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창세기 2:7에서 흙에다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성령(living soul)이 되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심으로 사도들의 기록이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 된다. 수동적으로 보면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어떻게 쓰셨는가? 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Knowing first, that no prophecy of Scripture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for prophecy never came by the will of man, but holy men of God spo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Spirit./NKJV) “You must understand that no prophecy of Scripture came about by prophet's own interpretation. for prophecy never had its origin in the will of man, but men spoke from God as they were carried along by the Holy Spirit/NIV).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기록자는 성령 하나님이다. 수동형은 성경을 성령님을 통해서 쓰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성경은 마태, 마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가, 하나님이 누가를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시키셔서 기록케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마가 복음이지만 일차적으로 저자는 마가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마가는 성령님의 도구로 쓰여짐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마가는 기계와 같이 쓰임을 받었는가? 아니다. 마가의 믿음, 교육을 하나님께서 쓰신 것이다. 이것이 유기적 영감이다. 그래서 똑같이 복음서를 기록했지만 신학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인간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절대 무오한 말씀이다. 절대 권위가 있는 말씀이다.

ii) 성경 내용(딤후 3:15)
성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말 할 수 있을까? 핵심적인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가? 언약의 말씀이다. 구원의 메세지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의 약속이요 신약은 오신 메시아의 성취다. 이 말들이 다 맞은 말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how from infancy you have known the holy Scriptures, which are able to make you wise for salv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Jesus/NIV, to instruct(RSV)/, to give wisdom that leads to salvation(NSAB) και οτι απο βρεφουs ιερα γραμματα οιδαs τα δυναμενα σε σοφισαι ειs σωτεριαν δια πιστεω τη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말하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를 말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전치사는 예수 “안”(εν Χριστω Ιησου /in Christ)에라는 말이다. 예수밖에 있는 믿음이 아니라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부다, 마호메트, 공자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만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행4:12).
성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성경에는 시, 역사, 비유, 묵시, 윤리, 과학, 법, 모든 것이 있지만 성경은 철학, 문학, 윤리, 시, 역사책도 아니다. 성경을 배우는 근본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성경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어떤 책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책은 없다. 성 어거스틴도 그의 고백록에서 플라톤의 철학에서는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를 가르치지 안했다고 고백했다. The Confessions of ST. Augustine, trans., with an introductuction and notes, by John K. Ryan,(Image Books, New York, 1960), p.180.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도록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세상의 책과는 질이 다른 책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님 자신이 말하셨다. “도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24:27, 요 5:39, 행 13:27). 따라서, 성경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이시다.

iii) 성경의 핵심 메세지
성경의 핵심 메세지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메시지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구속의 메시지이다. 성경핵심메시지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이다. 성경은 구속 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은 성부 하나님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감동시키시자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쓰신 것이다.

iv)성경의 유익(딤후3:15-17)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profitable(KJV?RSV/NSAB), useful(NIV)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니라” 말했다(딤후 3:16). 이 말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가 믿는 자로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들어내며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칼빈은 디모데후서 주석(딤후 3:15-17)에서 성경은 선하고 행복한 삶의 완전한 룰(a perfect rule of good and happy life)을 가르처준다고 했다. 그렇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배워야한다.
a)교훈(ωφελιμο πφοs διδασκαλιαν/doctrine(KJV/ teaching(NIV/NSAB/RSV), )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교훈, 윤리에 대한 교훈, 결혼에 대한 교훈, 역사에 대한 교훈, 철학에 대한 교훈 등을 배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b) 책망(reproof, rebuking, πφοs ελεγμον)
성경을 공부하면 우리 신앙 생활에 어디에 잘 못이 있는가에 대해서 책망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도(말씀)를 행하는 자가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23, any one listens to the word, does not do what it says is like a man who looks his face in a mirror, and looking at himself, goes away immediately forgets what he looks like.).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공부하고 책망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 못 공부한 것이다. 잘못 설교를 들은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책망 받지 아니할 사람이 있는가? 없다. 성경을 공부하고 잘못된 점을 회개해야 한다.
c)바르게 함(correction, correcting, πφοs επανοφθωσιν)
성경공부를 통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제는 말씀이 지시한 데로 고처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회개한 단순히 뉘우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돌아가려고 하지 말고(죽음) 돌아오라고 하셨다(겔18:31-32). 회개한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찢는 것이다(욜 2:13). 이런 점에서 보면 회개란 하나님의 책망이 아니라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게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d)의로 교육함(training in righteousness, πφοs παιδειαν την δικαιοσυνη)
성경은 우리 신자가 의로운 생활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도록 가르친다. 경건한 생활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가르친다. “교육”(παιδεια)이라는 말에는 배운다는 말과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훈련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교육이란 배우고 그리고 그 배운 것을 실천하는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희랍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만든다고 봤다. 그래서 그들은 교육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세상 것을 배워야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서 올바른 인간이 된다고 가르친다. 경건한 생활을 배워야 한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θρεσκεια)은 곧 과부와 고아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약 1:27)고 했다. 야고보에 의하면 경건한 생활이란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야함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는 성화된 삶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요 둘째는 도움이 필요한자가 어려움에 있을 때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뿐만 아니라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e)모든 선한 일을 온전케 하게 함(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교훈을 배우고, 책망 받고, 책망 받은 것을 고치며, 의로운 훈련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KJV/NIV/RSV/the person who serves God(GNB)이 된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닮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신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할 때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악한 일을 하게 된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온전케 한다는 말은 흠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능히 성경 말씀대로 사는 자를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사람의 돈에서는 썩은 냄새가 난다고 킬케고올은 말했다.

IV. 정리

성경에 대한 현대적 접근 방식에 있어서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하는 것처럼 단순히 텍스트를 해석하는 규칙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과정에서 텍스트와 해석자의 관계성을 말하는 쌍방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쉴라이허막허나 딜타이에도 불구하고 현대 대륙 해석학의 이론적인 기초를 놓은 사람은 하이덱거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고 한다. 그는 현존재의 전기 해석하과 언어를 통한 후기해석학의 이론적인 토대를 정립했다.
하이덱거의 영향을 받은 가다머의 입장에서 보면 해석이란 텍스트와 해석자의 지평의 융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해석 입장에서 보면 지평의 융합이라는 언어는 문제가 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텍스트와 해석자의 지평이 일대일로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지평에 의해서 항상 해석자의 지평이 변화되고,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성경과 성령님의 조명에 의해서 해석자의 관점이 항상 변화되고,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분명하고 자연스러운 성경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성경해석은 하이덱거의 현 존재해석학의 통찰력을 도입하여 성경을 실존적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인 해석이다. 성경해석의 한 면만을 강조한 옳지 못한 성경해석 방법이다. 특히 성경의 사건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신화로 보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실존 의미를 표출시킨다고 해도 잘못된 이해이다. 성경의 부활사건은 신앙의 핵심인대 이것을 신화로 보는 것은 성경언어의 사용을 잘 못 본 것이다. 부활은 시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의 부활을 실제적인 사건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살아서 제자들과 같이 먹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 이상 더 어떻게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가? 없다. 성경 그대로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해석이란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은 기계적인 것은 아니다. 언어의 사용이란 삶의 형태의 표현이고 보면 언어의 사용을 보는 해석자의 관점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늘 변화되고, 그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의 내적인 가르침을 받아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성경언어 사용에서 보면 성경해석의 문제는 성경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에게 언제나 문제가 있다. 그래서 해석자는 항상 성령님의 조명과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늘 경건한 생활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성경에 의해서 온전히 지배되도록 해야한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해석자는 성령의 학교인 성경을 통해서 늘 자신의 해석의 지평을 수정 보완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의 의미는 다른 지식에 의해서 발견된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 그대로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의 조명과 가르침을 통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깊은 이해하는 것이다.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칼빈은 성령님의 감화력은 인간의 애씀과 결합한다고 말했다. Comm. on I Cor. 9:1. "Deus ipse autor cum insturmento, et vis spiritus cum hominis opera coniungiter." "For, in that case, the question is not, what man can do of himself without God, but on the contray, God himself, who is author, is conjoined with the instruemnts, and the Spirit's influence with man's labour:in other words, the questtion is not, what man himself accomplishes by his own power, but what God effectsthrough his hands."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령님의 역사는 인간의 학문을 쓰신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학자가 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목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Sermon on Deut. 5:23-37.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바라보며 대처하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해석에 대한 접근들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성경해석에 대한 현대적인 접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의 절대 무오성과 성령의 내적 조명과 가르침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은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성경에 대한 현대접근 방식에서 보는바와 같이 각 해석방법은 그 나름대로의 특성과 약점을 갖고 있다. 성경해석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성경해석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전제가 필요하다. 각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과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과 가르침을 받으면 해석자의 지평의 폭을 넓혀주며 성경해석에서 고려해야할 문제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적인 해석 방법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데 대단히 유효한 방법이며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의 깊은 측면을 보다 쉽게 이해케 하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대한 현대적 접근방법에서 시도한 해석방법은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 접근방법의 통찰력은 성경해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선별적으로 사용한다면 여러 가지 성경 해석방법을 비판하고 이해하는 데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일반은총의 영역에 있는 현대적 접근방법을 칼에다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칼의 의미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처럼 현대 접근방법에서 제시한 통찰력을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해로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실존적인 성경해석방법은 문제가 많은 방법이다. 주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객관적인 의미를 적용하는 것은 진공 속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상황에 적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현대적인 접근방법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성경해석에 대한 현대접근 방식의 문제점을 잘 알아서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며 좋은 통찰력은 성경의 절대무오성을 믿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고 가르침을 받아서 필요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사용한다면 생명을 살리는 칼과 같이 유익한 도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현대 성경해석의 접근방법의 긍정적인 측면을 말한다고 해서 성경을 문법적 언어분석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은 성경해석에 중요한 점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성경이 제시한 해석방법--성령의 가르침과 내적조명--을 통해서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도달하는 과정--사닥다리--으로서 세상학문은 필요한 것이다. 일단 도달하고 나면 사닥다리를 치우는 것이 순서이다. 더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해석의 중요한 방법은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이며, 핵심은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과 가르침을 받아서 자연스럽고 분명한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하루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적인 학문의 훈련과 연단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성경에 대한 현대적 접근방법을 공부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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