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존 맥아더

by 【고동엽】 2021. 11. 12.
목록가기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성경 해석학(hermeneutics)이란 신학자들이 성경 해석에 대한 학문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해석학은 모든 신학의 중추적인 기본 구성 요소다.
해석학의 임무는 본문의 의미를 그 올바른 문맥 속에서 발견하는 일,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서 의미를 도출해 내는 일이다.
주의 깊은 성경적 해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을 믿지 않는 것보다 나을게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라는 점에서 동의하지만 그 성경을 잘못 해석한다면 거기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결과적으로는 성경을 안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리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을 의도하고 있는 듯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열과 오류와 이단과 배교로 이어지는 확실한 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얼마나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가!
우리는 참석자가 돌아가면서 특정 구절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는 식의 ‘성경 공부’모임에 참석해 본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구절은 이런 뜻인 것 같아요.” 그런 식의 성경 공부에서 얻는 소득이란 대개 무지에서 나온 온갖 구구한 생각과 그 구절에 대한 몇가지 가능한 해석인데 그나마 그런 해석들조차 다 틀린 해석일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실 어떤 구절이 나에게나 다른 누구에게 어떤 뜻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구절의 실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구절에는 어떤 사람과도 관계없는 본래적인 의미가 있다. 성경 공부의 과제는 그러한 성경의 참된 의미를 분별하는 것, 그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문맥에 대한 보다 세심한 관찰이 요구되기도 한다. 성경의 모든 구절은 일점일획까지도 저자가 의도한 의미만을 담고 있으며 해석자의 과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일이다.

피해야 할 세가지 오류
디모데후서 2:15은 성경연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옿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성경을 연구하는 엘에는 부지런함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성경은 정확히 다루어야 한다.
올바른 해석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자신의 요점을 강조하는 일을 삼가라.
목사나 성경 교사는 자기가 원하는 반응을 얻기 위해 본문에 생소한 의미를 끌어들이기가 쉽고 그런 유혹을 자주 받는다.

피상적인 성경 연구를 피하라.
정확한 성경 연구는 어려운 작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고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성경의 주요 진리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특정 본문의 일반적인 요점에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진리를 우리에게 숨겨 두시지 않았다. 그러나 말씀의 바른 의미가 언제나 즉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한 본문의 실제 의미는 그 본문의 배경이 되는 문화를 이해해야 비로소 드러난다. 또 때로는 성경 원어의 단순한 뉘앙스인 word play(말장난)를 통해 의미가 분명해질 때도 있다. 우리가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유행하는 제멋대로의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경 해석을 아무렇게나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몇가지 해석의 차이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성경을 주의 깊게 부지런히 연구해야 할 우리의 책임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전서 5:17은 교회에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 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끈기 있고 세심하게 말씀 연구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몇몇 신자들 중에 아무 도움 없이도 완벽하게 성경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성경을 완벽히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리로 통하는 지름길인가? 교회의 모든 경건한 지식을 무시할 만한 권리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그렇지 않다.

첫째로 인간이 지은 책을 무시하고 성경 그 자체로 들어가겠다는 주장은 경건하고 영적인 주장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종의 감춰진 자기중심주의다. 전통적 교회에 속한 신앙의 선배들의 꾸준하고 경건하며 헌신적인 연구를 도외시하고서도 혼자서 성경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은 교활한 교만이다.
둘째로, 그런 주장은 성경의 영감을 성경의 조명과 혼동한 오래된 착각이다.
성령의 역할은 새로운 진리를 전달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문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내용을 조명해 주는 것이다. 성경의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석서나 성경 사전을 이용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즉흥적인 성경 해석을 철저히 조심해야 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거의 또는 아무런 준비 없이 강단에 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대개 그런 설교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설교를 전하면서 자신만의 신학을 만들어 낸다.
영적인 해석이나 풍유적인 해석은 본문 자체가 그런 해석을 요구할 경우가 아니면 하지 말라.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자신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요점을 가르치기 위한 우화로 이용한다. 그들은 성경적 소재의 의미를 찾는 대신 성경적 소재를 자신들이 가르치고 싶어하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비유로 만든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명한 은사주의 설교자는 느헤미야서에 대한 설교 도중 거의 모든 내용에 걸쳐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하거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했다. 예루살렘 성벽은 폐허가 되었고 이것은 인격의 무너진 벽을 말하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인격의 성벽을 재건하러온 성령을 상징한다. 그는 왕의 못(느 2:14)에 대한 대목에 이르자 그것은 성령 세례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근거로 그는 방언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느헤미야서는 인격의 벽, 성령 세례, 방언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설교자가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적용해서 해석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놀라운 성경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술일 뿐이다. 그런 해석은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말씀으로 만들어 버린다.
올바른 방법을 성경을 해석하려면 예수님이 친히 부활하신 직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보여 주신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여기서 “설명하시니라”라는 뜻으로 쓰인 헬라어는 ‘헤르메뉴오(hermeneuo)'인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예수님은 성경을 가르치시면서 성경을 정확하고 논리정연하게 해석하셨다. ‘헤르메뉴오’, 즉 ‘해석학’을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건전한 해석 방법을 사용하는 성경 교사의 완벽한 모범이다. 예수님과 다른 방법으로 성경을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는 것이다.

건전한 성경 해석을 위한 다섯 가지 원리
지금까지 살펴본 방법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유익하지만 특정한 성경 본문을 올바로 해석하는 일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해석학에 대한 질 높은 강의에는 다음의 다섯 가지 원리가 포함되어야 한다.

문자적 원리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방적이고 경직된 직해(literalism)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적 해석이란 우리가 성경을 비유, 과장, 직유, 은유, 상징 등의 비유적 표현을 포함하는 자연스러운 의미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자연스럽게 독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전달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능한 한 분명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말씀을 전달하셨을 것이라고 가장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의 언어를 이해할 때와 똑같이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는 가끔씩 비유적인 언어와 상징적 표현도 등장하지만 그런 표현들은 사용되는 대목이 명확히 드러난다.
스가랴, 다니엘, 에스겔, 이사야, 요한계시록 등과 같은 묵시적인 본문들은, 그 본문이 전달하는 문자적 진리를 알려면 신중하게 연구해야 할 분명한 비유와 상징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상징적인 언어가 성경의 표준은 아니며, 그런 언어는 사용되는 곳에서 눈에 띄게 드러난다.
때때로 상징적 표현은 해석하기 어렵지만 그 역사적 배경을 연구해 보면 보통은 분명한 의미를 식별할 수 있다. 비유적 언어조차 분명한, 문자적 진리를 전달한다. 성경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종의 퍼즐이 아니다.
비유는 성경에서 때때로 사용되는 또다른 형태의 비유적 언어다. 비유는 영적인 진리를 보여 주는 이야기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실제로 역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비유의 구체적 내용-인물, 사건, 시대 및 장소-은 가설적이거나 은유적이거나 단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유가 보여주는 영적인 진리는 언제나 문자적이고 실제적이다.
신비적 또는 풍유적 해석을 좋아하는 나머지 문자적 해석을 포기한 이들은 정확성과 일관성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 대신 상상력만이 지배하는 무한경쟁을 벌인다. 그들이 문자적 의미를 부정할 때, 그들은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주인처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왜곡함으로써 성경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든다.

역사적 원리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계 가운데 하나는 그 본문이 기록된 문화적, 지리적, 정치적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면 본문은 종종 실제적으로 저절로 해석된다.
성경의 어떤 책을 볼 때든지 우리는 그와 관계된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 책이 어느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면 그 교회의 신자들이 살았던 도시의 특징은 무엇이었는가? 그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어디서 누가 다스리고 있었는가? 어떤 사회적 압력이 어느 정도까지 관련되어 있었는가? 그 공동체의 갈등과 문제와 위기는 무엇이었는가? 그 당시 문화는 실제로 어떠했는가? 사람들의 관습은 무엇이었는가?
예를 들어 오늘날에 베드로전서 1:13에 나오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베드로의 권면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군인들이 길게 흘러내리는 통옷(투니카)을 입었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갈 때 옷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허리띠를 단단히 매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 즉시 분명하게 이해된다. 즉 “전투에 나갈 마음의 준비를 하라. 너에게 방해가 되거나 걸리적거리는 것은 무엇이든 정리하라.”라고 베드로는 권면하는 것이다.
문화적, 역사적 의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성경 사전, 성경 입문서, 주석, 역사책, 성경적 관습에 대한 책 등을 이용하면 된다. 그런 책들을 참고하면 우리는 어떤 성경 본문의 배경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면 보통은 그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분명한 의미가 도출될 것이다.

문법적 원리
한 본문의 구문론적 구조는 종종 그 의미를 알아 내는 열쇠가 된다. 예를 들어 때때로 어떤 문장의 의미는 전치사 같은 간단한 요소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본문에 ‘~ 때문에’, ‘~을 통해’, ‘~안으로’, ‘~안에’, ‘~에 의해’ 등의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는지의 여부는 분명히 중요한 문제다. 어떤 경우에는 원문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둘 또는 그 이상의 영어 단어로 옮겨질 수도 있다. 영어 성경에 나타나는 그 단어에 가능한 대안적 번역어가 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또 어떤 문장이 ‘이것’, 또는 ‘그것’을 언급하면 그 대명사의 선행사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
문법은 우리가 좋아하는 과목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성경의 언어를 해석할 때 기본적인 문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단어과 구절의 순서를 따라가야 한다. 본문의 정확한 이해가 그것에 달려 있을 수도 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때 무엇보다 가장 먼저 성경 본문을 원어(헬라어나 히브리어)로 공부하는 것이다. 단어와 문장의 올바른 순서에 주목하고, 문장 구조와 문법을 살펴봐야 한다. 다음으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몰라도 원어 위에 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적혀 있는, 헬라어나 히브리어 본문이 실린 원어 대조 성경을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 좋은 성경 주석서라도 참조하면 된다.
문법에 주의를 기울이는 저자와 설교자에게 주목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조심하라. 성구를 구절별로 분해하여 그 의미를 좀더 명확히 알 수 있도록 명사, 동사, 수식 어구, 및 그 밖의 품사들을 보여주는 방식의 귀납적인 성경 공부법을 배우는 것이 좋다.

종합의 원리
종교개혁자들은 ‘스크립투라 스크립투람 인테르프레타(scriptura scripturam interpretatur)', 즉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말의 뜻은 애매모호한 구절은 보다 명확한 구절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자체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성경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과 모순되지 않는다. 한 분의 신적인 저자(성령님)가 성경 전체에 영감을 불어넣으셨으므로 성경은 놀랍고 초자연적인 통일성을 띠고 있다. 종합의 원리는 분명하고 일관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성경을 다른 성경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성령은 자기모순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니다. 분명한 의미를 지닌 구절을 가지고 난해한 구절을 해석해야 한다. 단 하나의 애매모호한 불분명한 본문에 기초해서 교리를 세우면 안된다. 성경 각 부분의 핵심은 나머지 전체의 계시 속에서 보아야만 비로소 충분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 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실제적 원리
우리가 언제나 물어야 할 마지막 질문은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이다.
디모데후서 3:16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의 모든 내용은 우리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적용된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교훈이란 기본적인 신령한 진리, 특정한 구절이 가르치는 원리를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기준으로 삼는 원칙을 포괄한다. 책망이란 성경이 우리의 죄를 폭로하며 숨겨진 죄책을 드러내고 감춰 둔 치부를 밝히 드러내는 방법이다. 책망은 바르게 함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우리가 책망받은 죄로부터 돌아서는 일을 내포한다. 다음으로 의로 교육하는 일, 즉 참된 교리에 대한 반응으로 새롭고 의로운 길을 준비하는 일이 시작된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실제적인 역사다.

성령의 조명하심과 의식적인 성경공부
해석의 다섯 가지 원리도 중요하지만 그런 원리들도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 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2,14)
바울의 이 말은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을 묘사한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영적인 진리를 보여 주실 수 있다.
누구든 사실을 듣고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성경의 의미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조금이나마 얻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성령을 떠나서는 성경이 인간의 마음을 관통하고 변화시키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법이다. 조명, 즉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대한 참된 이해는 성령과 더불어 임한다. 모든 신자에게는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신 분인 성령이 내주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사역이 없다면 성경의 진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관통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종종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과 마주칠 때 저자가 내 앞에 있어서 그가 의도한 내용을 직접 물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해보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저자에게 언제나 직접 물어 볼 수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우실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령의 조명하시는 사역이 의식적인 성경 공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 둘은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주의 깊게 철저히 탐구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떤 도구를 얻든지, 어떤 경건한 지혜를 접하든지 그것을 우리 마음을 조명하는 방편으로 이용하신다. 성령께서 성경과 관계없이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기도교 내의 광신주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요한일서 2:27“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는 데 있어서 어떤 스승이나 인도자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4:11-12절 말씀과 모순된다.
성령께서는 많은 가르침의 은사를 주셨고(롬12:6-7) 모든 신자에게 서로를 가르칠 것을 요구하셨다(딤후 2:2). 요한은 요한일서 2:27에서 그런 성령께서 주신 가르침과 모순되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이단, 즉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적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 구절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우리가 성령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해서 이단과 진리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지 성경의 모든 구절에 대한 정확한 해석의 절대적 보증이 아니다.

많은 진지한 사람이 자신의 성경 연구와 성경 지식이 부족을 합리화하기 위해 요한일서 2:27을 악용하고 계속해서 성경을 그냥 펴 놓기만 한 채 성령께서 스스로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말씀하시도록 허용한다는 미명 아래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한다. 그런 태도는 많은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은사주의 운동은 바로 그런 오류의 온상이 되었다.

포도나무선교회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