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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의 삼위일체론
Ⅰ. 들어가는 말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두된 조직신학의 현저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소위 ‘삼위일체론의 부흥’, 혹은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서 간과되고 배척되었던 삼위일체론에 관해 물꼬를 튼 사람이 바르트이다. 그를 뒤이어 몰트만은 바르트에 의해 대변되고 있는 서방교회 삼위일체론의 유형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삼위일체론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제안했다. 여기서는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구조 및 성격을 살펴보려고 한다.
Ⅱ. 십자가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고난
먼저 그의 초기 작품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십자가의 관계성을 탐구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구원론적 질문을 던지는 대신에, 하나님 자신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신비가 드러난 것인데 그것은 성부의 고통, 성자의 죽음, 성령의 탄식 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안에 있는 사랑의 사건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버리심으로 깊은 분리를 경험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하나님과 하나인 통일성이었다.
곧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의 분리요 동시에 통일이다. 몰트만 은 “삼위일체론이 어떤 신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신약성서의 가장 간결한 진술”이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학의 토대이며 비판이다. 삼위일체론의 내용적 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십자가 지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론이다.
“성자는 자신이 죽을 때 그의 사랑 안에서 성부로부터 버림받음의 고난을 당한다. 성부는 그의 사랑 안에서 성자의 죽음의 슬픔의 고난을 당하신다. 그 경우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희생의 성령이라고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즉 버림받은 인간에게 사랑을 창조하시는 성령,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성령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성부와 성자는 십자가를 다르게 경험한다. 성자는 죽음을 겪고 성부는 성자의 죽음의 고난을 겪으신다. 성자는 성부의 버림 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지만 성부는 성자의 죽음에 상응하는 성자의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다. 이러한 사고를 토대로 몰트만은 하나님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고난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성부도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다는 성부수난설적인 표현이라 할 수 없다. 성부로부터 버림받은 성자의 고난과 죽음은 성자의 죽음 안에서 겪는 성부의 고난에서 비롯된 고난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또한 예수의 죽음도 성부 수난설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죽음이라고 이해될 수 없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그의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삼위일체론적인 표현으로 말해져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 수난설적인 표현을 받아들임으로써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Ⅲ.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성
1.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몰트만에 따르면 하나님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그는 역사의 고난으로부터 초연한 무 감정하며 불변적인 하나님 개념을 거부한다. “삼위일체를 예수의 고난과 죽음 안에 있는 사랑의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삼위일체는 결코 하늘에 있는 자기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된 지상의 인간들을 위해서 개방된 종말론적 과정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역사 속으로 스스로 개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역사 속에 있는 하나님 안에서의 역사적인 되어감(becoming)의 사고를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적 구원의 역사는 “최종적으로 창조 전체가 영광의 왕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때까지, 그 안에서 신적 삶을 찾을 수 있도록 성자, 성령, 성부와의 역사 속으로 취하여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위일체적 구원의 역사는 철저히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 즉 삼위일체로 이끌리며 하나님의 역사의 미래에로 통합된다” 그러나 세계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가 동일시 된다는 위험을 주의 깊게 인식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과정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과정 사이의 구별이 유지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신적 인격들은 각각의 경우에 상이한 방식으로 세계의 역사 속에 관여되어 있다. 그들의 상호역할은 변화하는데, 이는 행동의 주체가 성부로부터 성자와 성령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상호 일치하는 신적 인격들의 공동 작용이며, 이 작용을 통하여 그들의 영원한 사귐이 창조의 시간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하고, 창조 전체에 대하여 자유로운 전개와 최종적인 영화를 위한 넓은 공간을 열어준다.”몰트만은 서방교회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의 단 하나의 형식만을 다루어 왔음을 비판하면서 세가지 종류의 다양한 삼위일체론의 양식을 제안한다. 성부-성령-성자(그리스도의 파송, 내어줌과 부활), 성부-성자-성령(그리스도의 주권과 성령의 파송), 성령-성자-성부(종말론적인 완성과 영화)
2.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 사이의 관계성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삶은 전적으로 삼위일체 안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십자가와 구원사의 다른 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골고다에서 일어난 것은 하나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미치며 따라서 영원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에 영향을 미친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경세 안에 있었던 것이다. “성자의 십자가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삶에 영향을 미치듯이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과 연합될 해방된 창조의 기쁨을 통해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내적 삶을 형성한다.”달리 표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의 역사를 갖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그의 역사는 이 세계와 그의 백성들의 역사를 포함한다. 몰트만은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이다”라는 라너의 원리를 긍정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진술들은 경제적 삼위일체에 관한 진술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경제적 삼위일체에 관한 진술들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송영적인 진술들에 상응해야만 한다”. 몰트만은 그의 초기 저서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후에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에 구별성을 인정했다. 곧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 사이에 상호적 관계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호적 관계성의 개념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성을 하나님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성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성과 상호적 영향을 갖는다고 주장된다. 비록 세계 안에서의 신적 관계성은 주로 내적 관계성에 의해 결정된다 할지라도 말이다.”하나님이 전적으로 역사의 과정과 동일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본질적인 구별을 긍정하고 있다.
3. 삼위일체적 송영
본질과 계시, 존재와 행동,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의 전통적인 구분의 양식을 사용하는 대신에, 그의 책 『생명의 영』에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네 가지 모형을 제안하고 있다. 군주론적 삼위일체, 역사적 삼위일체, 성만찬적 삼위일체, 그리고 송영론적 삼위일체이다. 삼위일체의 군주론적 형식은 서방 교회에 위해 주로 주장되었는데, 창조와 화해 및 성화에 있어서 성부로부터 나오는 행동의 단일한 형식을 가정하는 것이다.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신다. 이것은 특히 삼위성 보다 통일성에 우위를 두며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세적 삼위일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지닌 바르트와 라너의 경우에서 발견된다. 몰트만은 이를 기원의 삼위일체 혹은 파송의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역사적 삼위일체의 형식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구원사에 근거한다. 창조와 화해 및 구원에 이르는 모든 구원의 역사는 미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지향한다. 그리고 성만찬적 삼위일체의 형식에서는 활동이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성령-성자-성부. 성자를 통해 그리고 성부와 함께, 창조 전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의 연합과 하나님의 영원한 행복에의 참여하고 창조의 목적에 이르기까지 성령은 성자를 영화롭게 한다. 따라서 성령의 교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하며 또한 찬양과 감사를 통해 그 사역들의 목표를 실현하기 시작한다. 송영의 삼위일체는 구원사를 넘어서서 삼위일체 하나님 자체의 영원한 존재 속으로 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위일체적 송영은 내재적 삼위일체이다. 그는 송영에 근거하며 구원과 관련된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구분을 강조한다. “자신 안에서 안식하고 순화하며, 그 통일성이 신적 인격들의 영원한 공동체에 놓여 있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삼위일체적 송영을 통해서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본적 본성은 이러한 공동체이다.” “심지어 영광의 나라에서도 세계는 하나님의 청조로 남아 있으며 결코 하나님 자신이 되지 못한다.”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는 상호적이지만 비록 그 상호성 속에서도 비대칭적인 것이다. 요약하면 송영의 삼위일체에 대한 몰트만의 강조는 삼위일체적, 종말론적 만유재신론으로서의 자신의 사고의 이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Ⅳ.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성
1. 하나님의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몰트만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전개를 위한 두 가지 출발점들이 있는데,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것과 성서적인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접근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통일성을 선호하며 심리적 유비를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서 발견된다. 이는 하나님이 존재하며 한 분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최고의 실체로 이해된다. 일찍이 고대의 실체 형이상학의 틀 속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은 삼위일체론의 정식을 작성했다. ‘una substantia-tres personae’(한 실체-세 인격들). 이런 맥락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은 세 신적 인격들의 공통적이며 동질적인 실체 속에서 이루어진다. 달리 표현하여, 그들은 한 실체(hypostasis)이나 한 인격은 아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 사고가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세 인격의 구별성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또 다른 형이상학적인 접근은 헤겔의 철학에 근거하여 있다. 몰트만에 따르면, 근대 주체성의 철학의 틀 속에서 바르트와 라너는 하나의 동일한 신적 주체로서의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규정하였다. 세 존재 양식들 안에 있는 하나의 신적 인격과 세 가지 구분된 존재 양식들 안에 있는 하나의 신적 주체, 여기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은 한 하나님의 주권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신적 존재 양식은 한 실체가 아니라, 한 인격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양식은 삼중적인 자기 반복 혹은 삼중적인 자기 전달에 머물게 된다. 물트만의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 속에서 삼위일체는 불가피하게 양태론적인 경향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접근이 아닌 성서의 내러티브로부터 출발한다. 즉 성서에 명백하게 증언되어 있는 구원의 역사에 근거한 삼위일체의 세 인격들의 구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발전을 위한 성서적 출발점은 성자-성부-성령의 신적인 역사에 있어서 상이한 세 행위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에 그것의 통일성에 대한 질문이 뒤따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일성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에 삼위성을 설명하는 서방 신학의 전통에 반대하여, 몰트만은 인격들의 삼위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다음에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 설명한다. 몰트만의 관점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교제 가운데 있는 관계적인 공동체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일한 실체나 초월적인 주체가 아니라 역동적인 공동체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몰트만은 명시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고대 실체 형이상학의 경계와 근대 초월적 주체성의 형이상학으로부터 기독교적 하나님을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공동체, 과정, 그리고 관계의 형이상학의 상이한 맥락 속에 있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몰트만에 의하면, 성서적 내러티브에 근거한 “삼위일체론적 해석학”은 우리로 하여금 “관계성과 공동체성”과 관련하여 사고하도록 해준다.
2 .인격과 관계
몰트만에 따르면 삼위일체의 세 인격들은 상호 간의 관계들 속에서 규정되며 관계들은 인격들을 형성한다. “세 신적 인격들은 그들 상호간의 관계들 속에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서의 특수하고도 고유한 본질 속에 존재하며, 이러한 관계들을 통하여 규정된다” 그러나 인격들을 단지 관계로만 규정하면 하나님의 삼중적인 자기 반복처럼 들여 양태론적 경향에 기울어지게 된다. 그래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세 인격들은 의식과 의지를 지닌 하나의 공동적인 신적 실체의 개별적이고 고유하며, 서로 교체할 수 없는 주체들이다. 각 인격들은 상호교체적일 수 없는 방식으로 신적인 본질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관계에 앞서 개별적인 실체로서의 인격이 존재하지만 관계적 이해가 없다면 삼신론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인격과 관계는 상호적 관계성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관계들이 없는 인격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인격들이 없는 관계들도 존재한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몰트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관계적 인격 이해와 보에티우스의 실체적 인격 이해가 함께 확보될 때 성서적인 삼위의 인격성과 관계성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3. 하나님의 상호 순환적 사랑
“신적 인격들은 서로에 대한 관계성 속에서만이 아니라, 요한의 진술이 보여주듯이, 서로가 서로 안에 있다. 성자가 성부 안에 성부가 성자 안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 안에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 존재한다. 서로 안에 있는 인격들의 이러한 친밀한 내주와 완전한 침투는 삼위일체적인 페리코레시스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이러한 상호 순환, 상호 내주, 상로 침투는 사랑 때문에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신적 삶이 서로를 하나로 통일하게 해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하나로 된 분이며 우리와 우리들의 복수로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서 연합됨을 뜻하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영원한 사랑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면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그래서 그들의 고유한 신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영원한 사랑은 세 인격들 사이의 ‘동종을 위한 사랑’이며 이것을 넘어서 ‘타자들 위한 사랑’인 ‘창조적 사랑’으로 발전한다.”그들의 흘러 넘치는 사랑 덕분에 성부, 성자, 성령은 자신을 넘어 창조와 화해와 구속 안에서 유한하고 모순된 도덕적 피조물들인 타자를 위해 자신을 개방하신다. 그 결과 자신의 영원한 삶 안에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제한하게 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상호 순환적 통일성은 자기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통일성으로 생각되어질 수 없다. 오히려 “그들도 또한 우리 안에 있도록”(요17:21)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나타나듯이 인간들과 세계에 개방되어 있다.곧 타자를 위한 사랑으로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에 내주하고 사랑으로 인간과 세계는 하나님 안에 내주한다. 이러한 상호 내주는 결국 인간과 세계가 종말론적으로 영원한 세계에서 발견되게 될 것이다. 또한 몰트만은 상호 순환적 틍일성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차원을 긍정한다. 하나는 성부의 기원 없는 분으로 성자와 성령의 기원이며 이것은 군주론적 통일성을 형성한다. 또 하나는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 차원에서는 신적 인격들 사이에 완전한 평등이 존재한다. “페리코레시스를 통하여 삼위일체론 안에 있는 모든 종속론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넘어 인간 세계서도 삼위일체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페리코레시스를 통해 오로지 특권과 종속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인간적인 교제에 상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내재적인 삶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하여 삼위일체적 만유재신론을 말한다.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의 내주는 그 종류에 있어서 신적인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세계의 내주는 그 종류에 있어서 세계적인 것이다.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지각하는 다른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몰트만의 삼위일체론에서 특징적인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관계성과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성 사이에 유비가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내적인 삼위일체적 페리코레시스는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위한 양식이다.
Ⅴ. 나가는 말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그의 신학의 본질적인 토대이다. 몰트만은 십자가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또한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역사적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세계를 위하여 자신을 개방한다.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성은 비대칭적인 상호성으로 이해되어진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세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몰트만의 신학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격적이며 관계적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적 구별과 관계들을 보전함으로써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킨다. 또한 그는 관계성과 공동체와 관련 지어 삼위일체론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한다. 따라서 그는 세 신적 인격들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통일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삼위일체를 구성한다. 신적 인격들의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관계들의 구조는 상호 순환적인 관계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신적 페리코레시스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의 양식에 적용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여 하나님과 세계는 독특한 구별 속에서 상호 내주하는 것이다.
[출처]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작성자 kais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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