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상호침투적 삼위일체론
Ⅰ. 들어가는 말: 바르트 신학의 원리-삼위일체론
아마도 20세기의 신학을 논할 때 칼 바르트와 그의 신학의 영향력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 비록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과 많은 신학적 논쟁을 했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조차도 바르트를 일컬어, 일명 “천사적 박사”라고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비견되는 신학자라 칭송한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 역사상 그의 신학적 원리와 공헌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상 개인으로서 바르트 만큼이나 방대한 신학적 저서를 남긴 사람은 없다. 아퀴나스의 총 저서의 2배 분량의 글을 남겼다. 그는 여러 가지 별명이 붙어있다. 신-정통주의자, 변증법적 신학자, 기독론적 신학자와 더불어 그가 삼위일체 신학자라는 사실이다. 그가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를 재개 시겼다. 여기서는 그의 삼위일체론이 그의 신학에 어떤 근간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Ⅱ. 칼케돈적 기독론과 상호침투론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기독론과 연관이 있다. 바르트는 성서가 말하고 있는 계시의 근간은 삼위일체이며, 삼위일체론은 본질적으로 “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산물”이라고 정의한다. 곧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삼위일체론의 근간인 기독론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1922년 로마서 강해를 출간했다. 이것은 기존의 교계와 신학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19세기의 독일의 관념주의와 자유주의 신학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변증법적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변증법이란 어떤 하나의 사실이나 사물에 대해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 윈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의 서로 다른 양극관계를 상호침투적인 관계성 또는 상보적 관계성에 기반을 두고 설명한다. 바르트가 기독론의 신성과 인성의 전적 타자적 관계를 신학의 기본 원리로 삼는 이유는 18-19세기의 유럽에서 편만했던 이성주의적이며 관념론적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아래 혼탁한 신학계를 다시 정돈하기 위해서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간에 모종의 공통분모, 즉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하며 구체적으로 알 수 있고 서로 만날 수 있다는 자연계시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절대 계시 없이도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결국 자유주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르트의 입장에서 볼 때, 계시를 등한 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정작 기독교에서 그리스도가 없는, 앙꼬 없는 찐빵인 격이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성서’ ‘오직 믿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트는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철학을 거부하고 초 이성적인 믿음과 계시를 근간으로 하는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다. 바르트는 신의 계시로서의 말씀은 인간의 이성보다 위에 있는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되고 이해되는 것으로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식하고 만나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역 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의 기본은 바로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 선포, 성서의 복수의 삼중적 형태들이 아닌, 단수의 삼중적 형태로서의 말씀이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중적이며 동시적인 하나님의 단일성을 논하는 상호침투적 삼위일체론과 매우 흡사한 원리를 보여준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관점에서 양극이 만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극단적인 상황을 신학적 양식의 출발점이라 전제한다. 이러한 양극적 상황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양쪽을 서로 잇고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양식은 곧 무한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유한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계시이자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제시한다. 바르트는 오직 이 계시의 말씀인 예수를 통해서만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를 잘 이해한다면, 역으로 형상의 본체 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간접적이며 유비적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안에 신성과 인성이 상호 침투적 관계는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상호침투적 관계와 비슷한 것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세 양식 사이의 완벽한 상호침투적 삼위일체론이라 정의할 수 있다.
Ⅲ. 행동과 존재의 양식
바르트 자신은 자신의 신학을 그리스도의 말씀의 신학이라 하였다. 그럼 말씀은 무엇인가? 그에게 있어 말씀이란 하나님의 계시로서 절대로 데이터나 명제처럼 정적이며 실체적이지 않고,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 항상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다고 정의한다. 곧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과 역사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곧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해한다. 말씀의 존재양식은 행동양식인 것이다. 계시의 말씀인 예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의 두 본질이 존재하는데, 이는 물질적이나 숫자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사역들의 교류의 관점에서 말씀의 존재의 양식인 신적 행동과 인적 행동의 상호 침투적 행함이 예수와 그의 삶에서 나누어지지 않지만 구별되어서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신적 행동과 인적 행동이 예수 안에서 각각 신적 본질과 인적 본질로서 구분되지만 분리나 변질의 상황 없이 완벽한 상호 내재적 관계 가운데 하나의 행함을 이룬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위격을 보충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양식(mode)이라는 용어를 도입한다.
바르트는 위라는 용어가 삼위일체 안에서 삼위 사이에 존재하는 각각의 상대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곧 삼위에서 아버지도 위이고, 아들도 위이고, 성령도 위로서 일위, 이위, 삼위 같은 위(位,Person)의 개념으로는 아버지 됨과 아들 됨과 성령 됨의 구별되는 특성을 표현하는데 상대성이 부재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결국,위(位,Position,Person,Mask,Role)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개념으로 성부,성자,성령의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 성부 됨, 성자 됨, 성령 됨 같은 구별성을 강조하려는 본래의 의도를 무색하게 하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 삼위일체라 함은 삼위의 특성들을 분리 없이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 구분함을 의미한다. 위의 용어는 교회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지만 바르트는 성부 됨, 성자 됨, 성령 됨 가운데 서로와의 관계 안에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의 존재의 세 가지 독특한 양식들(modes)이라 정한다.
Ⅳ. 존재의 양식으로서의 행동
그러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양식으로 존재하시는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다. 이 계시의 말씀인 예수는 그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을 동시에 행하신 분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계시로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게 한다. 곧,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인 예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우리 인간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예수의 상호내재적 존재의 양식에 기인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은 행동 가운데 존재하시며 살아가신다 라고 정의한다. 곧, 바르트의 견지에서는 존재와 행동은 동일하다고 정리할 수 있다.(being=action)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의 양식으로서의 관계성 안에서는 각각의 양식은 서로를 한정하며 구성하고 구별되지만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상호교류적 행동과 상호침투로서 연합을 이룬다. 곧, 서로의 독특한 관계성 안에서만 하나님의 각각의 위가 서로의 위를 정하여 준다.
Ⅴ. 내재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 그리고 필리오케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기본적 논리에 있어 성부가 삼위의 근원이시며 성자와 성령이 그 근원으로부터의 발출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에 기인한 신학적 해석이다. 또한 그는 서방의 필리오케 또한 수용한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교제의 행동과 본질로서 사랑인 성령은 아버지의 성령과 아들의 성령이라 부르는데 이는 곧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근원이라 정의하는 근거로 삼는다. 성부의 신성은 오직 성부로부터 기인하며, 성자의 신성 또한 오직 성부로부터 기인하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성령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발행한다고 바르트는 정의한다.
이단적인 양태론의 입장에서는, 예로 물(H2O)이 얼음과 물과 수증기의 세 가지 양식 중에서 어느 한 양식으로만 (얼음이든, 물이든, 수증기든)존재하듯이 하나님은 한 분인데 그 한 분이 때로는 아버지로만, 다른 때는 아들로만, 또 다른 때는 성령으로만 존재의 위를 바꾸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정론으로 여겨지는 상호침투의 삼위일체의 입장을 고수하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이러한 단순논리적이며 현상적인 비유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각각 특이한 양식으로 동시에 입체적으로 서로와의 관계성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함께 행동하며 공존함을 의미한다. 예로 양태론에서의 물(H2O)의 상태와는 다르게 바르트의 상호침투적 삼위일체에서 본다면, 물(H2O)의 얼음과 물과 수증기가 셋 중 어느 한 상태로만이 아닌 각각 다른 세 양식들(얼음, 물, 그리고 수증기)이 공시적이고, 공존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물은 물질적으로 이것을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오히려 바르트의 상호 침투적 삼위일체 관계의 원리는 하나의 투명한 유리컵에 있어, 이 유리컵을 구성하는 물질로서의 유리와 유리컵의 본질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만든 사람의 구상 사이의 서로 구별은 되지만, 뗄 수 없는 공시적이며 공존적인 관계의 이치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기독론에서는 신성과 인성이 합의 단계에서도 신성과 인성이 서로 양극을 이루며 분리나 변질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연합하듯이, 기독론의 원형이며 본체인 삼위일체의 본질은 성삼위가 서로 구별되지만 섞임이나 변질 또는 분리 없는 서로간의 완벽한 동시적 상호침투와 연합을 이룬다. 이러한 관계속의 역동성을 교부들은 perichoresis나 circumincessio라고 정의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의 역사와 동일하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은 성삼위의 완벽한 상호침투적, 상호보완적 행동 그 자체이다.(devine essence=divine action)
바르트의 이와 같은 견지는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역사 속에서 계시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을 결국 하나님의 세상 역사 속에서 행하시고 나타내시는 행동을 통해 특히 언어적 행동을 통해 계시됨을 알 수 있다. 삼위를 이루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삼위의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Ⅵ. 말씀: 언어적 곧 소통적 행동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으로서의 예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되신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은 곧 계시의 공시적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는 존재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계시의 말씀인 예수에 관한 기독론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계시의 말씀인데 이는 그의 보혜사 성령으로 임하신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본질이 영인 말씀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은 영적 말씀의 행동으로 우리와 소통하시며 자기를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를 계시하시고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의 양식이 계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잇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항상 역동적인 말씀은 상호 침투와 상호정향으로 완전한 구별 가운데 일치를 이룬다. 그것은 하나님은 말씀의 행동으로 존재하신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Word=activity=being)
Ⅶ.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지성(knowability of God):
존재의 유비와 믿음의 유비
하나님의 본질과 행동을 인식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유비법(analogy)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유비란 서로의 비슷한 것을 찾아서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인간 사이의 소통에는 대화의 창이 존재해야 한다. 이 대화의 양식은 곧 인간 언어의 유비적 특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유비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고 자기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곳이다 라고 정의한다. 유비법은 바르트에게 신학의 기본적 수단이자 필수적 장소가 됨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 크게 카톨릭의 존재의 유비와 개신교의 믿음의 유비로 구별된다.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존재의 유비는 하나님의 본질과 계시를 아는 근간이며 또한 인식의 창이다. 관계의 유비에서는 존재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고리라고 여긴다. 하나님도 존재하고 피조물도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라는 공통개념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언가의 자연적 연결고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유비이다. 바르트는 카톨릭의 존재의 유비의 인식적 접근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며,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하듯, 하나님과 인간간의 영원한 단절을 전제로 하는 믿음의 유비를 주장한다. 곧 믿음의 유비는 근본적으로 존재의 유비에서 전제로 하는 하나님과 인간 간의 측량할 수 있는 거리의 존재를 부정한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에는 영원한 단절이 있어 어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접근을 한다 해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소통이 근본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교부 철학의 산물인 존재의 유비는 인간의 내재적이며 선천적인 이성을 중시하는 반면, 믿음의 유비에서는 근본적 단절을 전제로 하며, 이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신의 계시와 이에 부합하는 인간의 믿음을 골자로 한다. 그러면 인간의 피조 언어로 어떻게 창조자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묘사하고 인식할 수 있을까? 창조자로서 피조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적 수단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의 언어인 아버지, 아들, 심판자. 권세자, 왕, 종과 같은 낱말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에는 직접적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에게 숨겨진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더 나아가,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는 상태가 된다. 최악으로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고, 피조물이 창조주가 될 수 있는 혼돈의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종의 동질성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과 비기려는 인간의 교만이요 우상숭배적인 것이다. 역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결 고리가 전혀 없이 영원한 단절의 상태라면,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하신들, 인간은 이를 인식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다. 즉 인간의 언어만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비피조적 계시의 말씀을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의 핵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어떠한 동질성과 이질성에 관한 것이 아니고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과 상호응답간의 관계성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유비는 동질성과 이질성 간의 중간 단계의 것으로 상호적 유사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유비는 근본적으로 큰 유사성안에서 더 큰 비유사성의 존재를 전제한다. 하나님을 지칭하며 묘사하는 인간의 말들, 예로, 아버지, 주님, 창조자, 왕, 사랑, 빛 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특성을 묘사하는 데는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피조물들의 특성들을 모두 초월한다. 그러나 이러한 낱말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 세계 안에서 항상 유비적이며 상징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간접적 인식표현이다. 결국, 하나님에 대해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의미가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해석을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시와 이성이 공존해야 하며, 믿음의 유비와 존재의 유비는 서로 구별되며 대치되지만. 결코 나뉨 없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룸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한때(1936) 존재의 유비를 적그리스도의 발명품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가 결 코 될 수 없다고 했다. 1956년 그의 저서인 『하나님의 인간성』에서 존재의 유비에 관한 자기의 독단적이며 극단적인 이해의 오류를 인정하며, 유비의 상보적 특정을 인정한다. 그는 믿음 안에서의 이성, 곧 믿음의 유비 안에서의 존재의 유비라는 유비의 상보성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앎에 있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간접적 양식으로 전해지는 계시를 이성의 수단으로 인식하며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한 단절이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유비의 상보적 특성의 관점에서 간접적 유사성을 논할 수 있다. 간접적 소통을 직접적 동일화와는 다른 것으로 창조자와 피조물의 더 큰비유사성 안에서 유사성을 부각시키어 하나님의 은혜로 소통하는 것이다. 한 가지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유비와 존재의 유비는 서로 양극을 이루지만,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고 다른 한쪽만 부각시킬 수 없는 절대 상보적 변증의 특성을 인식하여야 한다. 바르트 자신도 주장하듯이 신학적 사고는 믿음의 유비와 존재의 유비에서 나타나는 서로 상반되지만 공존되어야 하는 특성들과 같은 것들을 다루고 이해하기 위해서 필히 변증법적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Ⅷ. 나가는 말: 상호참여적 존재의 양식인 관계
바르트의 관점에서는 존재란 관계적 세계 안에서 인식되고 관계성 밖에서는 존재란 있을 수 없다. 곧, 하나님의 존재는 관계적 존재이며, 교제교통의 관계적 개념 없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상보적 관계의 존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정의하며 이러한 상보적 관계의 존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와 유사하며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도 유비적이라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상호내재적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상호내재적 관계의 존재를 통해, 곧 직접적인 동일화가 아닌, 간접적 유사성을 통해 계시됨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이처럼 인간에게 계시된 기독론의 신성과 인성의 상호내재적 관계적 존재론을 근간으로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유비적으로 해석한다. 바르트가 주장하듯이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서의 계시를 통해 나타나는 그의 행위이다. 바르트의 관점에서는 존재란 행동 가운데 표출되는 관계성 그 차체이다. 상호침투론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을 발전시킨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예수님과 인류의 관계,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출처] 칼 바르트의 상호침투적 삼위일체론|작성자 kais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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