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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칼빈의 경건 [박응규교수]

by 【고동엽】 2021. 11. 3.

“종교개혁과 칼빈의 경건: 구원의 심각성과 종말론을 중심으로"

박응규 (ACTS, 역사신학)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내세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며, 그 현상은 여전히 주요한 신앙의 특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한 이 시점에 있어서도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말세에 관한 서적들은 꾸준히 읽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종말론은 구원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연구 되어야하며, 그럴 때에야 그 의미와 가치가 확연히 드러난다. 종말론은 단지 시대의 현상이나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강하게 영향을 주는 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과 개인과 인류의 종말에 대한 인식이 접목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본고에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구원의 심각성과의 연관성 속에서 종말론을 고찰함으로 그 본질적 의미를 규명하고, 그의 경건의 개념을 포착해 나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칼빈의 신학 속에는 구원론적 기반을 분명히 하면서도 종말론은 그의 전체 신학의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소망의 신학자(the theologian of hope)"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1)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론적 신앙과 종말론적 소망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개념이다. 신앙은 소망의 토대요, 소망은 신앙을 양육하고 지탱시켜주며, 또한 끊임없이 신앙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신앙에 견인하는 힘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2) 신앙은 소망을 낳고, 소망은 신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구원론과 종말론의 관계를 칼빈만큼 적절하게 지적하고 그의 신학에 적용하는 예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3) 칼빈이 요한계시록 주석을 집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계시록을 무시했다고 간주하면 큰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메시지는 그의 저서 속에 흐르는 주요한 내용이며, 이러한 토대 위에서 그의 경건의 개념이 발전되었다.4)




I. 인간의 죄성과 종말론

I-1. 하나님 지식과 자기지식의 인식과 구원론

칼빈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자기 지식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질문인 것이다. 칼빈이 이미 언급한대로 이 두 가지 지식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상호보완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 능력, 모든 선한 것의 부요하심과 순결하심과 의로우심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인간 자신의 무력함과 죄악 됨을 바르게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문제는 사색의 결과가 아니며, 사실(res ipsa)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에 칼빈은 <기독교 강요>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5)

칼빈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동시에 문제삼고 출발하고 있다. 하나님 지식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지식도 처음부터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선 나 자신의 죄악성을 심각하게 문제삼지 않는 사람은 칼빈을 바로 알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6) <기독교 강요> 서두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모든 선하심과 의로우심의 광명 앞에 선 우리 자신의 무지, 허무, 빈곤, 연약함, 무엇보다도 타락과 부패를 마땅히 느끼게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7) 이러한 우리 인간 자신의 죄와 악함과 비참함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찔림 받는 일이 평생에 한번 정도 있는 것이 아니고 성찬을 받기 전에 자기를 살필 때마다 일어나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인간과 역사는 본질상 죄악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회개와 겸손과 성결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근본이요, 정통신학의 핵심적인 교리였으며,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강조해 왔던 중심적인 진리였다. 칼빈도 그의 <성찬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함으로써 얻는 유익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 려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심각한 고뇌와 양심의 깊은 찔림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 어떤 것도 의로 여길 만한 것은 전혀 없으며, 반대로 죄와 허물로 가득한 것이 너무 많아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 올 수밖에 없으며, 그 어느 누구도 영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둔감하거나, 어리석지 않다면, 이러한 무시무시한 생각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며 괴롭히는 지속적인 지옥의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결과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8)

이러한 신지식과 인간의 자의식은 바로 신학의 출발점이요 전제임이 분명하며, 신학에서 필수불가결한 결정적인 문제인 것이다. 칼빈의 인식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시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구속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9) 그러기에 구속의 문제나, 종말에 관한 질문들을 인간의 사색(speculation)에 의존하여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우상의 형태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무시하고 인간자체를 경배하는 행위가 될 것임을 칼빈은 경고하고 있다.10) 그러기에 그는 말씀과 함께 역사(役事)하는 성령에 대한 강조가 이어진다. 하나님의 영과 말씀을 분리하는 것은 바로 당시의 광신자들/열광주의자들(fanatics)이 빠졌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11)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실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주시며 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13).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내 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 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는데 있는 것이다.12)

간혹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지만, 우리는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며,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과 다를 수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3) 하나님께서는 일종의 상호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고, 참된 신앙을 소유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바로 칼빈은 이러한 전제 위에서 종말론에 대한 논의도 말씀을 떠난 공허한 사색이 아닌, "신학적인 성경주해 (theologically-constrained exegesis)"를 통하여 전개하고 있다.14) 이러한 작업은 바로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그의 지속적인 소망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I-2. 종말론적 입장에서 본 인간론과 구원론

성경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구분하여 육은 죽이고 영은 살리는 일이 기독교의 중심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원론이 가지고 있는 오류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성경에서 구분하고 있는 영과 육에 대한 언급을 타계주의나 혹은 현세주의로 비판할 수 없는 정당한 근거가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절규하고 있으며, 그 영적 싸움을 통해서 "중생한 사람"으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칼빈도 <기독교 강요> 제 3권 10장에서 "내세에 대한 명상"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자는 현세를 천시하는 일에 익숙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는 하늘나라의 영광에 이르기를 구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주장이 몸과 영혼의 이분법에 뿌리를 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십자가를 지는 현세의 생활과 내세의 하늘 왕국 사이의 대조"에 근거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15)

소위 칼빈의 "비세속성(unworldliness)"은 실제로 갱신 및 현재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에 대한 추구이다. 내세에 대한 묵상은, 피조된 세계와 관련이 없는 다른 하늘의 세계를 선호하여 피조 세계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혁신을 이미 일으켜 놓으신 그리스도를 늘 찾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늘"의 의미는 대체로 천상의 어떤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계의 새로운 또는 천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16) 그러므로 "우리가 만물의 최종적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찾아야 할 곳은 오직 하늘뿐이다."17)

이러한 추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지상의 상태와 천상의 상태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존재의 고민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종교는 영혼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내적 싸움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너희가 영으로 몸의 행위를 죽이면 살리라"고 하신 대로 쉬지 말고 기도해서 계속적으로 사역하는 육의 작용을 다시금 영으로서 죽이는 일을 해야 한다. 양심이 날마다 더욱 예민해짐으로 자기 마음속에 사랑의 법에 어긋난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더 큰 죄책감으로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8) 이러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래서 모든 신학의 기본 전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며 인정했던 칼빈의 신학은 그 위대성이 여전히 발휘된다. 칼빈 신학의 모든 국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 빌헬름 니젤(Wilhelm Niesel)도 언급하기를, "우리의 성경에 대한 모든 주목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이며," 칼빈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주장에 종말론적인 색채를 가미시켰다"라고 하였다.19) 그런 면에서 칼빈의 종말론을 구원론의 테두리 속에서 고찰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II.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구원의 심각성, 그리고 종말론

II-1. 구원의 심각성 문제

기독교 종교는 구원 중심의 종교이다. 또한 성경자체가 종말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구원론과 종말론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구원의 심각성이라는 주제는 성경 자체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철두철미하게 이 한 가지 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이나 팔복의 주제도 "천국에 들어감"을 중심으로 선포되고 있으며, 여러 비유에서도 천국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지옥에 떨어지느냐가 언제나 전제되어 있다.

구원의 심각성 문제는 모든 신학주제들이 이 한 가지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주제를 관념적으로는 알고는 있으나, 이 일에 대해서 심각성이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신학의 각 분야에서 해석학적 전제와 원리로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20)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죄로부터의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 즉 "구원에의 갈망(a desire of salvation)"이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또한 거룩함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고전 6:9; 엡 5:5). 택하신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로 인함이나 그리로 이끄시는 방법은 거룩한 삶("holiness of life")을 통해서 하신다고 주장한 Calvin의 언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21) 이 거룩함을 얻는 방법은 오직 죄 사함을 얻은 심령이 회개를 통하여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 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 그 유익과 결과"에서, 회개를 먼저 논한 후에 죄 사함을 후에 언급하고 있다. 내용적으로 보면 죄 사함이 회개보다 앞서는 것을 칼빈은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죄 사해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비로소 죄인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온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가 동시적인 구원사건이요, 하나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보혈을 보시고 죄인을 의롭다 받아 주시고, 또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사건이고 회개는 이에 즈음하여 우리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수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요, 회개는 수평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죄 사함을 기초로 하는 칭의와 화해는 불과 3장만을 할애하고 이에 대응하는 죄인의 변화, 즉 회개와 이에 따르는 중생한 성도의 자기부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8장(3-10장)에 걸쳐 언급하였고, 죄 사함에 호응하는 성화의 생활("Continual progress of justification")은 5장(14-18장)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함으로 결과되는 회개와 성화의 생활에 관하여 그는 13장을 할애하고 있다.

II-2. 구원의 심각성과 종말론

칼빈의 종말론은 사색적이기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또한 그의 종말론은 독립된 영역("independent formulation")으로 다루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역사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논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성경 주해 속에는 종말론에 대한 성경적 중요성을 추출해 내면서 그의 삶과 목회에 적용하는 특성이 매우 강하다.23) 그가 비록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은 집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종말론을 반영하고 있는 일차자료는 매우 풍부하다.

그리스도 안의 삶은 칼빈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종말론적 실재이다. 퀴스토르프도 칼빈의 관점을 성경적-바울적 의미에서 종말론적 성격이 매우 강함을 강조하면서, 죽음과 불멸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도 자칫하면 기울어지기 쉬운 어떤 철학적 경향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 준 것은 "그의 종말론의 기독론적 기초(the christological foundation of his eschatology)"라고 주장한다.24) 바로 우리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III.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론, 그리고 성도의 삶

III-1. 구속론적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심판

구원의 심각성 문제가 매우 필수적인 주제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과 직결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아무리 중생과 성화, 그리고 구원의 체험 그리고 신앙의 확신을 강조한다해도 이것들이 장차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르는 일에 명확하게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단지 도덕적인 문제에만 그친다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빠져버린 기형적인 구원론에 안주할 수 있다. 기독교의 근본진리가 무너지게 된 근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철하도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문제이지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 칼 빈, 웨슬리가 하나같이 이 문제를 모든 문제의 기초(basis, fundamentum)로 삼고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 타나는 하나님의 진노(롬 1:18) 이것이 모든 구원론의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롬 2:4-9; 고전 4:4-5; 6:9; 엡 5:5 등 하나님의 심판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제기하 고 있습니다.25)

칼빈도 이 주제 즉, "하나님의 심판대(Heavenly tribunal)"의 문제를 기독교 종교의 기초라고 지적하고 그의 칭의론 세 장의 중간에 한 장, <기독교 강요>의 제 3권 12장을 이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심각성을 도외시하고 종말론을 단지 유토피아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약화시킬 우려가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단지 낭만적 대망으로 대치하면서 그것이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으로 곡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죄 사함에 대한 분명한 인식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 주요한 핵심이 될 기독교 종말론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말세에 대한 일들을 가르치시면서 추수 때에 될 일들을 중심으로 많은 것을 언급하면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임할 때"에 될 일, 특히 심판을 주로 문제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에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 앞에서 땅과 하늘도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서 "퍼져 있는 책들"에 기록된 대로 "자기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이 강조된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그 때에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음을 구하여 온 자들"과 "자기의 욕망을 따라 진리에서 떠나 불의를 일삼아 오던 악한 자들"을 좌우에 갈라놓으시고 "그 때에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창 25:34) 하시고,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하신 말씀대로 영원히 "빛나게 되고" "내 아버지의 복 받을 자들이여"라고 하신 말씀처럼 "영원히 영원히 우리 아버지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하신대로,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시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2)는 말씀대로 인류의 역사는 종결되어 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식은 이 세상에 살면서 갖은 죄악을 행하는 삶을 철저히 회개하고 변하여져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를 애통하고 의를 사모하며 친절하고 일체 깨끗하고 모든 좋은 일을 힘써 행하여 천국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자각은 "참고 선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일"과 "하나님의 택하심을 굳게 하는 일"을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성도의 견인이라는 개혁주의 신학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성도에게 향하신 죄로부터의 용서와 감격은 구원의 확신을 보다 강하게 할 것이며, 모든 죄악과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택하심을 확인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에 전력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이 회개를 논할 때,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죄인의 마음이 회개를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26) 이러한 언급은 인간이 종말론적 자각, 즉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이는 참된 기독인의 삶이 영위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성도가 죄 사함의 은총을 받으며 죄를 회개했다고 해서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칼빈도 죄과(罪過, the guilty of sin)와 죄성(罪性, the substance of sin)을 구분하고 있듯이 죄과로부터의 자유함은 주어지나,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은 영혼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주관치 못하게 할 뿐 아주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치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거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성도가 그 속에 남아있는 죄의 주장(the sway of sin)을 굴복시키고 승리자가 되는 것은 성령께서 그 능력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27)

우리의 제일 큰 고민은 "마치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것처럼"(etsi Deus non daret)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세속화의 영향을 교회와 신자가 지대하게 받으면서 이 악한 습성이 무의식중에 강하게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28) 그러기에 인간이 죄인임을,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적으로 의식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세대에 가장 필요한 신앙적 요소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구원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최대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과 웨슬리가 죄사함과 회개를 중심으로 한 구원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재판주로 온 인류를 심판하실 때에 영생과 영벌로 양과 염소를 나누는 준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구원론적 핵심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종말론적 차원이 내재된 신앙생활을 이 땅에서 영위해야한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종말론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성령을 통한 성화의 삶은 종말론적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구속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압도되는 일은 기도와 말씀 앞에서 특별한 은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실 것"(눅 11:3)을 약속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진심, 전심, 전력의 사랑의 인치심(burning heart)을 우리에게 주신다.29)




III-2. 종말론과 기독인의 삶: "내세에 대한 명상(meditatio vitae futurae)"

칼빈의 성경주석이나 신학서적 집필, 그리고 모든 사역을 움직이는 중심적인 동기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교회를 올바로 세우는 데에 있었다.30) 그는 말하기를, "더우기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건덕(健德)에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명상하도록 끊임없이 힘써야하며, 호기심에 빠지거나 무익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마음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한다.31) <기독교 강요>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세에 대한 명상"을 고찰해 보면, 기독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종말론적 중요성을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언제나 성도들을 격려하는 기도로 마무리하는데 그 원천은 대체로 종말론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32)

칼빈에 의하면 기독인의 삶에 있어서 신앙이 먼저 오고 소망은 다음에 온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며, 죄 용서함을 받게 한다. 마치 칭의와 성화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듯이, 신앙과 소망도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누구든지 성화의 삶을 꾸준히 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잡아야만 가능하다.33) "신앙과 소망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하여 바라본다. 그 속에 그들의 연합이 있다. 그러나 신앙이 오신 분(그리스도)과 그의 구원사업을 되돌아보는 데 반하여, 소망은 오실 분과 장차 나타나게 될 그의 사업의 완성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내다본다."34) 칼빈은 종말론적 신앙이야말로 마음의 변화와 삶의 개혁을 가능케 함으로써 교회의 존재와 기독교인의 삶을 결정짓는 근본적인 태도를 제공한다고 본다. 칼빈은 교회의 존재에 있어서 종말론의 비중을 다음과 같은 말로 함축한 바가 있다: "마지막 날의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될 만한 위험스러운 일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복음에 남는 것은 없으며,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라져 신앙전체가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탄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을 파괴하면 교회의 목을 직접 누를 수 있다."35)

칼빈의 종말론적 영향이 가장 잘 반영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내세에 대한 명상"일 것이다. 그는 성도들이 세상의 종말과 영원한 생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철저하게 하고, 고통 중에서도 악을 제압하시고, 마지막 날의 부활과 영화에 대한 소식을 통하여 위로와 소망을 잃지 않도록 이 내용을 그의 <기독교 강요>에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내세에 대한 명상은 성도로 하여금 앞으로 되어질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믿음으로 미리 바라 보게 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을 거룩하고 의롭게 가꾸어갈 수 있는 신앙의 안목을 제공한다. 존 리이스(John Leith)도 칼빈의 "내세에 대한 명상" 속에서 성도의 지속적인 회개의 삶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지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세상의 그리스도의 군사인 성도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나라의 진전을 위하여 열정을 가지고 살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내세를 묵상하고 바라보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36)

건전하고도 지속적인 내세에 대한 마음의 고정이야말로 우리가 현세의 여러 가지 유혹들을 이겨내며, 죄성을 죽이는 일에 필수적인 신앙의 덕목이 될 것이다. 즉, 천국 생활을 향한 열망은 결코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37)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순례"의 삶이다. 이 세상의 악한 것에 대한 배척은 필요해도, 참된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하늘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할 곳도 하늘과 내세이지 이 땅과 현세가 아니다."38)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영위해야 마땅하다.


III-2-1. 두 세대 간의 삶(Living between the Times)

구속론적 입장에 본 종말론은 우리에게 천국인의 삶을 살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며 성결한 삶을 지향하게 한다. 그러므로 천국인의 삶은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에 대하여 완성되어질 미래의 소망으로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실제로서 경험하여 비롯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종말론은 성경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인간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의 <영혼불멸설>(Psychopannychia)에서도 강렬한 종말론적 소망과 실제적인 역사에의 소명사이의 종말론적 긴장이 아주 잘 반영되어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목표와 아직 성취되어야 하는 정해진 끝 사이의 긴장이 칼빈의 종말론적 시각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성취된 목표와 그의 재림 시 성취될 정해진 끝 사이의 긴장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칼빈의 종말론에 대한 생각을 다스리고 계시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강림(초림)과 재림을 함께 묶는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찾는 것은 그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고대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39)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은 "그리스도께서 한번 나타나신 때부터 신실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정신을 차리고 그분의 재림을 고대하는 일"이라는 것이다.40) "자신 속에 초림과 재림을 병합하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칼빈의 종말론적 관점의 중심에 계신다."41)

칼빈의 전체 시각은 승천하셔서 현재는 왕 노릇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초림과 재림 사이라는 양극 사이를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그의 견해도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라는 사실이다. 칼빈에 의하면, 주님께서 신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어느면으로든 어떤 특정한 시간에 묶어놓지 않고 그 분을 늘 기다리는 것"이다.42) 그러기에 지상의 천년왕국 사상(millennialism)에 대해 배척하는 것도 이러한 근본적인 시각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천년왕국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아직 갱신되지 않은 지구에서 제한된 기간 동안 가시적으로 왕 노릇 하실 것을 가정한다. 그러나 칼빈이 믿기로는 이 완전한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 곧 그 나라는 영원한 것으로서 이 세계의 혁신을 포함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가시적 출현은 오직 이 완전하게 된 나라의 최종적인 현시를 뜻할 뿐이다. 아직 갱신되지 않은 땅 위에 있는 시간적으로 제한된 메시아의 나라 개념은 칼빈에게 유치한 환상으로 들렸으며, 유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흡사했다.43)

칼빈의 종말론적 가르침의 근본 목표는 때를 계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소망을 주려는 데에 있으며, "신실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지막 날까지 긴장하게 하려는 것이다."44)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위엄이 마지막 때에만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완성이 그 때까지 연기될 뿐이다. 부활 때에 이미 시작된 일들이 완성될 것을 바라보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고난과 시험, 그리고 유혹 가운데서도 소망과 인내로 거룩한 삶을 영위해 갈 것을 촉구한다. 한철하도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여 천국백성이 된 성도들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자리가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무조건 용납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용서받은 죄인,' '돌아온 탕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의 죄악 상태를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어서 선한 일에 힘쓰는 천국인이 되는 것입니다."45)

이미 언급한대로 칼빈은 성화를 "칭의의 계속적 진보"로서 진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의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하나의 이신득의 (justification by faith alone)의 범주 안에서 취급하려는 그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행함"으로는 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됨이 종교개혁 원리의 핵심이다. 로만 카톨릭의 믿음과 선행으로 구원 얻는다는 모순에도 빠지지 않고, 무율법주의(anomianism)나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의 오류를 피하면서도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 얻는 귀한 진리를 강조하면서 "선행 없는 신자"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효과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칼빈의 "선행이 따르는 신앙운동"은 구미 교회나 한국교회가 절실하게 회복해야 할 과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학적 논리를 칼빈은 어떻게 전개해 나가는지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성도의 선행의 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46)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후에 그의 자녀의 표(標)를 또한 허락하신다. "선행의 은혜"(the grace of good works)는 "자녀 삼으시는 성령"(the Spirit of adoption)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보여 주신다. 이것은 부르심의 열매로서 이로서 주께서 우리를 "자녀로서 택하셨음"을 알 수 있다. 즉 그 근원은 선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47) 칼빈은 롬 8:30을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거룩하게 하신다고(sanctify) 번역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도의 선행을 하나님의 택하신 대로 소급해 올라가야 하고 그 근원에서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보게 된다.

칼빈은 죄 사함을 받은 죄인이 회개하고 중생하여 다시 죄 가운데 빠지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죄 사함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선행의 은혜를 제 2은총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를 의롭다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자비는 더욱 크시어 칭의의 은혜 위에 성화의 은혜까지 주시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최상의 즐거움이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행위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행위의 칭의"(works of righteousness/ operum justitia)라고 불렀다.48)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행위까지도 선하다 받아 주신다. 칼빈은 거듭 강조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셨는데 선행을 통해서 유업으로 영접해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49) 하나님께서는 선행으로 단장시키어 우리를 영생의 유업을 잇게 하신다. 우리에게 영생의 유업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그의 자비의 작정에 의한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기까지 인도하시는 방법은 선행을 통해서이다.50) 성경에서도 우리를 그의 나라로 이끄시는 방법이나 모양은 "참소치 아니하고 진실을 말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 즉 "중생과 그 열매"로써 되어지는 것이 분명하다(시 15:1; 24:4; 사 33:14). 하나님의 자비로 당신의 것들을 생명으로 영접하시나 그리로 인도하시는 방법은 선한 일들을 통해 이루어짐을 칼빈은 강조한다. "영생을 상속하도록 자비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 인도하셔서 영생을 소유하게 만드실 때에, 그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의 수단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51)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으로써만 자신의 생명 안에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는, 정하신 순서에 따라 그들 안에서 자신의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그것을 소유하도록 그들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행위에 따라 면류관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말이 아니다.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한 말은 적절하며 그 때문에 그들은 선행에 몸을 바치는 동시에 영생을 명상한다.52)

칼빈은 우리가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행에 정진하지 않고서는 아니 됨을 강조한다.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구원의 저자(author)가 될 수 없으며, 구원은 복음의 지식과 성령의 조명으로 시작되나 우리가 우리의 성품이 참으로 자녀다운 성품인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 세상에서 당한 고난에 대한 보답으로 장차 좋은 것들로 더하여 주시고 상주실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생활은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길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을 인도해서 천국을 엿보게 하는 길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성결하게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롬 8:30)."53)

이러한 신앙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근거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고 거룩함이 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멸하심은 단지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것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불법을 대속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의 형상을 입혀 주시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54) 이렇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일은 하나님의 만세 전에 세우신 작정에 근거하고 있다.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롬 8:29).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예정, 그리고 영원한 작정(decree)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때로는 일방적인 면으로 이해될 가능성도 있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는 영원한 작정을 그 내용이나 그것이 역사 안에서 나타나고 이루어지는 것과 구별하지 않았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그 작정의 결과인 약속된 부활이 확실하지 않는 한 헛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55) 왜냐하면 영원한 작정은 그것을 드러내고 결실을 맺게 하는 구속사와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데이비드 홀워다(David E. Holwerda)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 전통의 일부에서는 영원한 작정을 종말론과 유리시켜 왔기 때문 에, 그것이 일종의 정적인, 거의 운명론적인 결정론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역사는 뒤에서 미는 큰 힘의 관점에서 검토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행위 는 제외시킨 채 하나님께서 해야 하는 행위만 강조되었다. 이미 소망 가운데 소유 하고 있는 갱신에서 나오는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내세로의 인력(引力)은 그러한 전통들 속에서 무시해도 되는 요소가 되어 왔다.56)

신앙적인 변화는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벗어난 신자들의 삶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완전을 향한 진보를 이루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57) 진보의 개념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세상의 죄악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의가 편만히 이루어지는 사회건설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왕권은 모든 영역에 미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론의 구조 속에는 분명히 이 세대와 오는 세대 간의 구분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두 세대 사이에 살고 있다.58) 이러한 두 세대 간의 구분이나 관계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너무 피안적이고 미래적인(other-worldly) 측면에서 종말론을 이해할 것이며, 또 한편으로 너무 현세적이고 현재적인(this-worldly) 차원에서만 종말론을 곡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중심으로 이해하게 될 때, 세대의 구분(discontinuity)과 함께 그 관계(continuity)를 바르게 인식하여, 극단적인 종말론의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으며, 천국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59) 또한 구원론을 종말론적 차원에서 고찰해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모든 활동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과 목적의식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종말론을 통하여 우리는 모든 사건이 지향하고 방향과 모든 창조물이 추구하는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60)


III-2-2. 하나님 나라의 삶과 성화(Kingdom Life and Sanctification)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통하여 현세에 대한 과도한 애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칼빈은, "십자가의 훈련을 통하여 현세 생활의 불안을 깨닫는 때라야 우리는 올바로 전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현세 생활에서 우리가 바라며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분투 노력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61)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현세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현세 생활은 신자들의 구원을 촉진시키는 데 전적으로 이바지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현세생활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62) 우리는 현세에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준비해야 하며, 하늘에서 면류관을 쓸 사람들이 우선 지상에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를 얻기 전에는 개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상생활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 주께서는 구속주로서 우리에게 오시며, 악한 일과 불행한 일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그의 생명과 영광의 복된 기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만일 신자들이 눈을 돌려 부활의 능력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귀와 육과 죄와 악한 자들을 결국 이겨낼 것이다."63)

"내세에 대한 명상"이 <기독교 강요> 1559년도 개정판 제 3권, 8장, "십자가를 지는 것" 다음에 삽입되는 것은 자기부인과 죄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종말론적 확신과 소망이 없이는 비성경적이며 또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칼빈의 목회자적 지혜에 기인하고 있다.64) 즉, 칼빈은 종말론적 적용이야말로 성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모든 일의 근본적인 동인이 됨을 강조한다. 내세에 대한 소망은 죄와의 싸움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두 세대 간에 사는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천국인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끊임없이 계속되는 종말론적인 싸움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무장되어야 하며, 무기는 신앙과 사랑, 그리고 특별히 소망임을 강조한다. 전투 중에 있는 성도에게 끝까지 참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승리의 확실성이다. 바로 칼빈의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도 구원론적 토대 위에서 전개하는 종말론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빈이 성화를 위한 투쟁과 경주를 완성에로의 새로운 삶의 발전으로 보고 있는 것은 특별히 그의 윤리적 특징과 종말론적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성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도록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65) 내세에 대한 성실하고도 규칙적인 명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진전시켜 나가는 필수적인 요인이 된다. 이렇게 그의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전망 속에는 종말론적 기초와 방향이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III-2-3.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화(Union with Christ and Sanctification)

종교개혁 당시나 그 후에도, 칼빈의 신학은 곡해된 부분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의 신학의 핵심을 예정론으로 한정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대한 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 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의롭다 할 수 있다면, 칭의라는 선물은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 칼빈이 주장한 예정론의 핵심은 우리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위로였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으며,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을 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담대하게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의 영성의 출발점은 예정론이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이다. 그는 인간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되며 평생동안 그 결합 안에서 성장한다고 가르쳤다. 이 연합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지, 점진적인 여러 성장 단계를 지닌 긴 여정의 종착점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라고 말한 내용과 상통한다고 할 것이다. 칼빈은 이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칭의는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루터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주어지는 성화(신자들이 거룩해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을 구원서정 상의 한 단계)의 은사를 보다 강조하였다. 이런 면에서 칼빈은 루터의 신학에서의 단점을 넘어설 수 있는 면모를 보여 준다 하겠다. 칼빈은 또한, 영적 훈련을 강조하였으며, 반면에 루터는 규정된 관습으로부터의 자유를 귀중하게 여겼다. 칼빈의 저서들을 보면 그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중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확실성과 영적 생활의 성장이라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균형 있는 강조는, 그의 신학을 예정론으로만 국한시켜 잘못 이해되어진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의 신학과 삶은 어떤 전통보다도 기독교인의 공적인 책임이라는 개념을 잘 보전해 오고 있다. 개혁주의 신앙은 사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무관심하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공동생활의 건강을 유지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선택의 동기와 목적 모두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전에 선택된 우리(엡 1:4)는 선택의 보증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 거울이며, 우리가 이렇게 보는 데는 아무런 자기기만도 없는 것이다."66)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으로 영원 전부터 정하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 이시기로 예정하셨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시 려고 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계 21:27 참조) 너무도 분명하고도 확고한 증거 가 된다.67)

그러므로 내세를 바라보는 소망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연장으로 간주할 수 있다. 토마스 토렌스(Thomas F. Torrance)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성만찬은 이런 의미에서 "내세에 대한 묵상"의 한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68)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의 확실한 친교를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면서(요 6:35), 이 떡을 먹는 자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하시기 때문이다(요 6:51, 58). 기독인의 소망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 뿌리박고 있다.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그의 지체로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해야 할 대책은 천국의 기업에 대한 신자들의 유일한 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69) 바로 그리스도는 그와 교제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소망의 기초와 목적(the foundation and end of the hope)이다. 그의 재림은 바로 그의 초림 시에 그가 성취하신 속죄 사업의 열매를 드러내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미래의 재림에 두는 소망은 그를 믿는 우리들의 신앙의 단순한 부록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의 면류관이다."70) 또한 그리스도는 기독인의 소망의 기초와 목적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순례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칼빈의 신학은 철저히 기독론적이면서도 또한 종말론적이다.

신앙의 순례의 길에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는 바울의 말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일에 가장 첩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내 육신 속에 내가 살고 있지만, 믿음 가운데 자기 피로 나를 속량 하시어 자기 것으로 만드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시어서 당신의 것들을 내게 베푸는 것이 그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내 육신 속에 "나"를 볼 것이 아니라 그 아들로 말미암아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71) 우리의 소망의 현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실재이다. 비록 아직 가시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늘나라로 옮겨졌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우리들의 소망의 확실한 보증이다. 비록 우리들 속에서는 소망이 '가정적인 것'(as if)으로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으로서의 소망은 이미 '사실적인 것'(is)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72)



IV. 칼빈의 개혁사상과 경건 (Calvin's Reformed Faith and Piety)

IV-1. 칼빈의 경건 개념에 대한 역사적 배경

칼빈의 경건에 대한 근본적인 특성은 그가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신앙고백적인 헌사를 하며 시작했던 <기독교 강요>의 제 1판 (1536)에 이미 잘 나타나 있다. "경건의 전체와 구원 교리에서 필히 알아야 할 거의 모든 것을 포함한 이 저작은 경건을 사랑하는 모든 이가 읽을 가치가 있으며 최근에 출판되었다"고 그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칼빈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듯이 <기독교 강요>는 "종교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을 훈련받게 할 기초적 원리를 제공하려는 것뿐이다."73)

그의 <시편 주석>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칼빈은 경건의 의미를 깨달은 후에는 그의 신학 연구는 경건을 증진시키기 위한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경건(pietas)"과 "지식(eruditio)"이라는 용어로써 표현되고 있다. 1536년도 판 <기독교 강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고 있다: "모든 거룩한 교리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과 신들에 대한 지식이다."74) 우리는 하나님을 모든 지혜의 근본이라고 인정할 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되며,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들이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게 될 때에 우리의 삶에서 순종과 봉사의 응답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비천한 상태와 하나님의 형상과 닮음이 지워져 버린 상태를 인식하면서 타락의 결과를 깊이 절감하면서도 우리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우리 주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며, 죄로부터의 자유와 용서, 하나님과의 평화와 화해, 성령의 선물과 은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제적 지식과 우리의 지식은 오직 아들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단 한 분의 중보자(solus mediator)이시며,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은 칼빈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게 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신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에 관한 참된 지식의 결과는 진정한 예배 형태 속에서 표현되는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의존의 태도이며, 그것이 참된 경건이다. 이런 경건의 결과 우리는 자신을 낮추며,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맡기며 그의 자비하심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의 경건의 주요한 특징들은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지식,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경외심과 영광을 돌려야 할 필요성, 인간 편에서의 믿음과 봉사와 복종에의 요구, 그리스도 안에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 의존, 그리고 경건한 예배에서 표현되는 인간의 실천적 자세이다.75)

칼빈은 어느 개혁자보다 경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연구하며 그의 삶 속에서 진정한 경건을 추구했던 인물이었다. 경건은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바른 태도, 진정한 지식과 진정한 예배를 포함한, 예배의 진정한 태도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경건이라는 단어는 그의 1536년도판 <기독교 강요> 서문에 사용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단어이기도 하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경건의 대상이시며, 그리스도는 그 행위(실천)에서 우리의 독특한 모범이시오, 본보기이시다."76) 경건은 완제품으로써 인간에게 주어지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노력을 경주함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열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은 계속적인 경건의 실천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함으로 부름 받았음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전 생애는 경건을 실천해야만 한다.

이러한 경건을 추구하는 삶은 말씀의 척도에 따라 영위되어야 한다. 말씀 이외에 빛 또는 진리의 다른 근원은 없다. 말씀은 모든 교리의 기준이요 척도가 된다. "성령은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모든 교회를 계몽시키기 위하여 교회보다 선행하지만, 말씀, 그것은 모든 교리를 시험할 수 있는 '리디아 돌' 같은 것이다."77) 그런데 말씀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예증"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칼빈의 삶의 동기는 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예증하기 위한 열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해서 태어났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78)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을 진정한 예배의 대상으로 모심으로 성도의 삶이 경건하게 이루어진다. 진정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 와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기독교 강요>뿐만 아니라 <시편주석>에도 칼빈의 내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언급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칼빈은 그의 영적인 순례자의 삶을 "다윗을 본받는 생애(imitatio Davidis)"라고 규정한다.79) 칼빈의 신학이 이렇게 신학적인 심오함과 함께 실천적인 특성을 소유한 것은 사도 바울을 포함하여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도움을 요청하는 특별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저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 강요>도 이중적인 목회적 의도를 지니고 있는데, 첫째는 초신자들에게 성경연구를 소개하는 것이요, 둘째는 적대적인 정부 앞에 있는 프랑스의 복음주의자들을 옹호하고 이들을 격려하여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변증적(apologetic)인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기독교 강요>는 고통이라는 상황 속에서 기록된 변증서이다. 바젤에 체류하는 동안 그의 고국 불란서에서는 많은 신실하고 거룩한 신도들이 신앙 때문에 화형에 처해지며, 정부는 그들의 극단적인 종교적 신념과 정부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시도 때문에 처형한다는 변명으로 그들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가운데, 칼빈은 그들이 믿은 신앙의 교훈이 무엇이었으며, 신앙 때문에 죽어간 자들의 실상을 알리고자 <기독교 강요>를 쓰기 시작했다.80)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언급은 칼빈의 신학이 성숙해 감에 따라 첨가되고 발전되어짐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 강요>는 1536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기독인의 삶에 대한 기록은 1539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간행된 라틴어로 된 제 2판 <기독교 강요>에서부터 나타난다. 그는 기독교인의 삶을 이 세상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영적 성숙의 한 과정으로 묘사했다. 칼빈은 기독교인의 삶의 본질은 자기부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특히 그러한 삶은 주님의 본을 받아 십자가를 지는 모습 속에 표현된다. 기독교인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세이다. 그의 사상 속에는 현세와 내세의 삶 사이에 긴장이 유지되지만, 그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특징이 있다. 내세를 갈망하면서도 활기 있고 건강한 현세관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반제(反題))적"인 견해들의 병렬이라고 할 수 있다.81) 칼빈의 기독교 삶에 대한 글인 "기독교인의 삶과 대화" (1549년에 저술)가 토마스 브룩(Thomas Brook)에 의해 영역되었는데, 영어권 신자들에게 칼빈의 사상이 소개된 것이다. 이런 칼빈의 사상이 1539년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와 1541년에 간행된 <기독교 강요> (불어판)의 제 17장에 언급된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내용들이 후기 청교도 사상의 씨앗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82)



IV-2. 칼빈이 생각했던 "참된 경건"의 의미

칼빈에 의하면, 경건(pietas)은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관한 그의 전반적인 이해와 실천을 압축한 단어였다. "참된 경건이란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이와 같은 경건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성급하게 어떤 신을 고안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에게서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찾으며 그가 자신을 보여주고 선언하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인다."83) 그리고 <기독교 강요>에서 경건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들을 알 때 나타나는 경외감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된 것"으로 정의하며, 종교(religio)도 정의하기를, "...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두려움과 관련된 신앙으로서, 여기 나타나는 두려움 안에는 자발적인 경외감이 포함되며 그 경외감과 더불어 율법에 규정된 바와 같은 합당한 경배가 수반된다."84)

칼빈은 경건의 참된 본질을 신자들의 두 가지 표징에서 드러난다고 했는데, 그것은 첫째로, 경의, 그분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순종하는 것, 둘째는, 두려움, 그분을 주님으로서 섬기는 것이다. 지식도 경건의 개념 속에 들어가는데, 신지식(cognitio Dei)이 경건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지식의 열매요 경건의 증거이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경건에 이르는 첫걸음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제자"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진정한 가르침이 없으면 경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진정한 종교와 하나님 경배는 믿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으로 그 분의 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다."85) 그리고 경건과 사랑(charitas)을 관련시키면서 경건이 사랑의 뿌리임을 밝힌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또는 외경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들 사이에서 정당한 삶을 누릴 때도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향한 이와 같은 외경적인 태도와 이웃을 향한 우리의 태도 사이에 맺어져 있는 이와 같은 관계는 그의 신명기 5:16에 관한 설교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칼빈의 경건에 대한 이해와 개념 정의는 그의 개종상황을 좀더 고려해 보면 확실해질 것이다. 개종에 관한 이야기는 의례히 변화를 야기 시킨 동인으로서의 성경말씀이 등장하곤 한다. 칼빈의 마음을 강력하게 변화시킨 말씀에 대한 정보가 아직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롬 1:18-25의 내용이 그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 아니했는가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1:21,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이 더욱 그러하다. 칼빈이 말하고 있는 경건의 중심주제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칼빈이 새롭게 발견한 개혁신앙을 추구해 나가는 종교적 탐구는 그의 신앙의 핵심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의 종교적 탐구는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과 인간의 타락을 비교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개종이후에도,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극적이었다고 해도, 즉각적인 완성이 뒤따라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완전한 기독교인의 삶을 향하여 성장해 가는 일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완성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는 이 같은 핵심적인 신앙의 탐구를 두 가지 지식과 더불어 시작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 정의, 자비, 온유함이요, 다른 하나는 타락한 인간의 무지, 범죄, 무기력, 죽음, 심판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율법, 곧, 구약의 성문법과 내면에 기록된 양심의 법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놓여 있는 무한한 간격을 이어주는 하나님의 최초의 노력이다.

율법은 우리의 죄와 저주를 판별해 주고 묵상하도록 도와주는 거울이다. 율법은 우리의 주님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존경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겐 이런 의무들을 수행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절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저주, 심판, 그리고 영원한 죽음을 당해 마땅하다. 이것이 칼빈의 경험이 내린 결론이다. 그러나 이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깨어지고 다른 하나의 길이 우리에게 열려진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다. 우리의 부패하고 황폐함에 대한 자아인식은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자비를 구하게 된다. 이런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성부께 이를 수 있는 영원한 축복에로 우리를 안내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게 되었던 계기는 바로 스트라스부르그로 피신하여 약 3년간 조그만 프랑스 회중들을 목회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1536년부터 1538년까지는 제네바시를 개혁신앙에 기초한 법으로 통치하려는 시도를 단행했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비성경적인 구교의 예식과 많은 악습들을 폐지하기로 결의하며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이윽고 1538년에는 오히려 추방당해 스트라스부르그에 피신하여 부처(Martin Bucer)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는 가운데 그의 사상이 더욱 성숙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 기간에 구약의 족장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자신의 고난관을 피력하였는데, 그들의 삶을 순교의 여정에 있는 자들로 묘사했다. 그리고 장차 다가올 소망이 그들의 순례여정에 활력을 공급했다고 믿었다. 이런 깨달음이 칼빈이 그에게 다가왔던 환난에 대항하여 승리의 싸움을 전개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고난이 오히려 그의 신학을 성숙시키며, 기독교인의 삶, 즉 경건에 대한 심오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의 삶에 관하여"라는 논문 속에서 칼빈은 신앙, 회개, 칭의, 중생, 선택 등 교리적 주제들에 관하여 신조적인 설명을 가하는 것은 제아무리 명료하게 가르쳐 준다 하더라도,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새로운 믿음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사도 바울이 상세하게 논한 기독교인의 삶에 관한 기독론적 기초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반성이 요청되었다. 성경과 초대교부들에 관한 연구를 깊이 있게 한 후에, 하나님의 자녀들에 필수적인 거룩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생동안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밟아나가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전개되는 "자기부인"이라는 기독론적인 특성은 외적 삶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추적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인의 삶의 자세는 현재의 삶에 의미와 목표를 부여하는 것은 내세에 대한 소망이라고 언급하였다. 칼빈의 경건,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견해는 내적이며 외적인 기독교인의 삶, 그리고 현세와 내세에 대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의 우리에게도 바르고도 심오한 신앙의 원리들을 제공하고 있다.

칼빈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무엇보다도 시편을 사랑하고 묵상하였으며, 거기서 얻은 교훈들을 어떻게 생활에 적용하고 실천에 옮길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시편을 "영혼의 모든 부분들에 대한 철저한 해부"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이 거울에 비추어지지 않는 심상, 곧 감정을 체험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성령은 시편을 통해 모든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과 의혹, 그리고 소망과 근심과 걱정 곧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온갖 격동하는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셨다.86) 시편기자들 중에 다윗의 고난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향한 많은 신앙적 호소와 감정들을 통하여 칼빈의 자신의 내면과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삼는다. 칼빈은 말하기를, "내가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그[다윗]를 통하여 내 소명의 출발점과 나의 사역의 지속적인 과정을 반추하게 된 것이 매우 유익한 일이다."87) 또한 칼빈은 "시편은 낯선 땅에서 방황하는 나를 붙들어 주었다"고 고백한다.88)

칼빈의 신학과 경건은 바로 수많은 투쟁과 시련을 통해 성숙해진 것이다. 그의 마음 중심에는 세상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었으며, 어떠한 시련 중에도 하나님의 뜻이 역사를 운행해 나갈 것이며, 이런 와중에서 칼빈은 교회의 순수함과 치리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릇된 신앙운동과 제도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교회를 건실하게 세우는 것이었다.



IV-3. 칼빈의 경건에 나타나는 특징들

먼저, 칼빈의 경건을 특징지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칼빈의 영성 혹은 경건의 출발점은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닌, 죄를 용서받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즉 우리의 경건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실망한 인식 하에 다른 곳으로부터의 도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능력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바가 되면, 우리는 그 안에서 모든 하늘의 보화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우리를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한 온갖 성령의 선물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게 되며,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거듭나서 (고후 4:16) 마침내 새 생명 안에서 행하게 되며, 의를 위한 삶을 살게 된다.(롬 6:4) 즉, 경건한 삶, 거룩한 선하심과 자비를 경험케 하며 그에 따라 살게 하는 믿음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온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라고 정의하면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이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음으로 가능해지며, 하나님의 형상을 내 보이기 위하여 그 어떤 더럽힘과 불경건도 내몰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그를 우리의 본보기로 삼을 수 없으며, 그에게 접붙임을 받을 수도 없다. 이것은 삶의 교리이며, 우리 구원의 근원에 있는 교리이다. 완전한 경건은 즉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획득되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진하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향한 영적인 성장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를 향한 삶은 끊임없는 자기부정으로 특징지워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에, 우리는 거룩함을 힘입을 수가 있고, 이 거룩함이 연합을 가능케 하는 띠라고 언급하였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그 삶의 창시자인 하나님께 관련시킬 수 있으며, 피조물의 참된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성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셨는데, 우리가 의롭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충하게도 우리의 창조주를 포기하는 것이며, 우리 구주를 탄핵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면, 그의 지체인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워 가셨기에, 우리는 전심으로 세상적인 애착을 떨쳐 버리고 거룩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갈망해야 한다 (골 3:1ff.). 이것은 단지 혀로만 외치는 교리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며, 영혼을 사로잡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진리는 우리의 삶을, 영성을, 그리고 경건한 삶의 열매가 분명히 맺어져야 한다.

칼빈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에게는 감사의 태도가 요구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삶에 비교해 보면, 이 세상적 삶은 경시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을 "유배지"로 때로는 "감옥"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을 아예 백안시 했다기보다는, 지상적 삶은 하나의 순례이며, 지상적 삶의 즐거움은 하나님을 향한 봉사의 적절한 통합을 요구하는 하나의 여행이라고 간주했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세상을 거쳐가는 것이라면, 그것을 버리기 보다는 우리의 신앙적 전진을 돕는 한도 내에서 그 축복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언급했다.89)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그 완전한 선함에 참여하는 날을 바라보며, 날마다 조금씩 나아가는 영적인 순례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절대적인 선함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즉, 종말론적 긴장국면 (eschatological dimension: "already/not yet," in our spiritual pilgrimage)이 있음을 인지하면서 우리는 평생동안 그 선함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추구해야 한다.

다음으로, 고찰할 수 있는 특징이 하나님께 소유된 인식 가운데 솟아나는 경건의 특성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토대 없이는 그런 자세가 나타날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자신들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고 받으실만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롬 12:1).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알아야 하며,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성별 된 의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칼빈이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비교, 고전 6:19) 주님께 속해 있게 될 때 잘못된 길을 걷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무엇이며 우리가 모든 삶의 행위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90)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죽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우리의 목표되신 주님께 드리려면 (롬 14:8; 고전 6:19), 사도 바울이 언명한 대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엡 4:23)이 필요하다. 우리의 사고 능력 전체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투입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거쳐야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를 쫓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이 펼쳐진다. 성경에서도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는 자아에 대한 관심보다는 평생동안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생활하도록 훈련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의도를 지배하시도록 해야 하며, 그 의도가 하나님에게 고정되도록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바로 자신을 부인(否認)하는 삶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영성의 중요한 특성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이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마 16:24)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웃들을 위한 일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그리고 주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자기를 사랑하고 높이는 이 치명적인 질병은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의 여정에 서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는 이러한 본성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 반대로 자기사랑 대신에, 교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고난 속에서 자신의 종들을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보여 주었듯이, 끊임없는 고통을 받으심으로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지신 삶이 그리스도의 생애였다.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의 자리에 올라 가셨듯이, 십자가에 담겨 있는 고통의 쓰라림은 위대한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의 고난과 불행이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귐은 더욱 확고해지며, 그 분과 연합되어 있을 때 찾아오는 역경은 오히려 축복이 되며, 우리의 구원을 크게 증진시키는 것을 돕는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배우며, 여기에 세상이 감당 할 수 없는 경건의 능력이 샘솟게 된다. 이런 사실을 믿고 경험하게 될 때야 비로소 십자가로부터 얼마나 귀한 유익이 나오는지를 알게 된다. 고난의 십자가는 우리의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육신에 의존하는 우리의 태도를 벗어나게 함으로 참된 경건을 추구하게 한다. 주님은 고난이라는 약으로 우리를 제지하고 길들임으로써 우리의 육신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신다.

이 세상에서의 수없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삶을 지향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성향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에 끊임없는 불행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신다. 재난이나 고통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희구하거나 무절제한 확신 안에서 안주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시며, 세상의 재물이 얼마나 단명인지를 상기시키시는 재료들이다. 영원한 면류관에 관심이 있는 자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분명히 우리의 마음은 먼저 세상을 조소하지 못하는 한, 내세를 심각하게 동경할 수도, 묵상할 수도 없다. 이 두 극단 사이에는 중립지대가 없다. 세상이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되든가, 아니면 세상에 대한 무절제한 노예가 되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인간은 단 하루를 사는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을 조소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함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증오하는 극단적인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칼빈은 언급한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격려해주는 하나님의 자비의 선물이다."91)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으로부터 떠나 하늘나라의 삶으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마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정해 주신 초소와도 같은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소환하실 때까지 우리는 이 초소에 거주해야만 한다."92)




IV-4 칼빈과 종교개혁 경건/영성의 주요한 특징들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는 종교개혁 영성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네 가지로 그 특징을 설명한다.93) 첫 번째로, 종교개혁 영성은 성경연구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함양된다는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모토는 그들의 신학방법론이나 영성의 기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독자들이 잘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성경주석을 집필하였으며, 그들은 주석 설교를 통하여 성경본문의 내용과 듣는 이들의 삶과 연결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행한 설교들은 이러한 특징을 반영하는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 각 권을 연결해서 설교("lectio continua: the continuous preaching through a book of the Book")라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경신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어떤 의미에서는 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주요한 주제들을 일관성 있게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성경을 보다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저술되었다. 이러한 결과 제네바 성도들은 선포되어진 설교를 통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 삶을 영위해 나갔다. "The first work of Calvin was a book---the Institutes. The second was a city---Geneva. Book and city complement one another. one is doctrine formulated; the other is doctrine applied." 칼빈이나 개혁자들에게는 성경이 교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그것은 삶을 영위해 나가게 하는 실제적인 동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 영성은 첫 번째로 성경적이며, 둘째로는 교리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 94)
이와 같은 성경을 기준으로 형성된 종교개혁 영성은 자칭 선지자처럼 행세하며 무분별하고 변질된 영성에 대하여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소유하게 했다. 영성에 지나친 관심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계시의 사유화에 대한 위험성을 차단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언급할 수 있는 특징은, 종교개혁 영성은 인간의 자기이해, 중요성, 그리고 자기성취는 하나님을 배제하고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전제를 토대로 형성된다.

칼빈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이해하는 첩경이라는 사실이다. To find out who we are---and why we are---is to find out who God is and what he is like. 그렇기 때문에 교리는 단순한 지적인 작업이나 혀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라고 갈파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교리적 작업은 우리의 전 인격체가 담겨져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우리의 마음 전체가 변화되어야 하며 삶의 중심이 바뀌어야 하는 중요성이 내재한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포괄적인 특성이 있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Knowledge of God is thus like a vital force, capable of changing those who possess it and are possessed by it. True knowledge of God moves us to worship, obedience, and the hope of eternal life. Calvin stresses that there is no knowledge of God where there is no faith and worship of God."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특성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인간을 아는 것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a point of focus). "Christ is 'the mathematical point of Scripture'" (Luther).95) 현재의 영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여러 가지 영성운동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영성을 바르게 판단하고 조정할 수 있는 필요가 증대되고 있다. James I. Packer draws attention to the need for "more biblical and theological control" of spirituality, regretting the "egocentric perspective" of many spiritual writers who use radically subjective criteria in developing and commending spiritual practices.96)

세 번째로, 종교개혁 영성은 모든 신자들의 만인제사장 됨과 소명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심어 줌으로써, 영성의 테두리를 확장시켰다.

성직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인식(the notion of the laity as the laos---the people of God)은 남녀노소 누구든지 심오한 신앙의 저변확대에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토대로 하여 칼빈이 시도했던 일종의 소그룹 운동(the powerhouses of Calvin/elises plantees)은 프랑스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실시하는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다.97)

네 번째로, 종교개혁 영성은 세상 속에서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으며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세상을 경원시하는 수도원적 영성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이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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