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영성의 기초를 이루는 네 개의 주요 주제]
요즘 계속 더운 날씨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낮에도 가끔씩 졸음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도 여전히 화창한 해가 떠 올랐습니다. 아침인데도 벌써 땀이 나는 군요....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쓴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을 읽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종교 개혁 영성의 기초를 이루는 4가지 핵심 주제에 대한 부분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1. 그 영성의 기초는 성경 연구에 있으며, 거기로부터 풍성한 양분을 공급받았다. 성경은 기독교 신앙을 낳고 자라게 하는 수단으로,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그 권위를 부여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인물들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데 집중한 사람들이었다.
2. 종교개혁 영성은 인간의 정체성, 순전성 그리고 완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다로 떨어진 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의 모습이 어떠신지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바뀌는 것을 말한다. 신앙은 두뇌 작용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종교개혁 영성은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성직을 가졌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바로 이 같은 사실 때문에 근세 초기 유럽의 새로운 사회 상황이라는 현실에 확실하게 적응 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 영성의 중심은 평신도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점을 회복하는 것이다. 로테르담 출신의 에라스무스가 쓴 <그리스도의 군사에게 주는 안내서>는 성직자들을 다른 신자들과 완전히 다른 반열에 올려 놓았던 그 모든 관점에 대한 신뢰성을 허물어 버린 책이다. 에라스무스가 보기에는 성직자는 오직 하나의 직무 곧 자신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수준만큼 평신도들도 그와 같은 수준의 지식과 이해에 이르게 하는 직무만을 가질 뿐이었다. 성직자들은 교육자들이며 자신과 평신도 사이에 가로놓인 교육의 격차를 제거하는 과제를 걸머지고 있었다.
4. 종교개혁 영성은 일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그 뿌리를 내리면서 아울러 그 삶을 지향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견고하면서도 충실하게 세속 세계의 질서가 규율하는 삶에 열중하게 하면서도 동사에 새로운 의미와 깊이를 그 삶에 제공하고 있다. 근세 초기의 사회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복음의 본질과 관련하여 어떤 손상도 가져오지 않았던 영성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현세를 경멸한다’(토마스 아 켐피스)는 수도원 영성의 관념은, 적어도 일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그 영성이 끼쳤던 영향들과 관련하여,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종교 개혁가들은 말씀의 중요성,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 사역의 중요성, 현실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모든 것의 원천은 말씀임을 재천명 하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의 언어로 바꾸자면 종교개혁은 ‘열림의 운동’이라고 표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열어 놓는 것, 성직을 평신도들에게 열어 나누는 것, 교회가 현실 세계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 놓는 것 등으로 말입니다.
어떤 글에서 사람과 사회를 두 종류로 구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부류는 성을 쌓고 담을 쌓는 유형, 다른 한 유형은 다리를 놓고 길을 내는 유형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평하기를 우리는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책에서도 종교개혁가들의 본래적 의도는 중세 교회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중세교회가 갇혀 있는 성에 문과 창문을 달고자 한 것이 본래적 의도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처 : 뜻이 이루어지이다.
글쓴이 : 하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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