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인 1509년 7월, 파리에서 약 60일 떨어진 프랑스 북구 노용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564년 5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55년의 생애를 살면서 총 59권에 달하는 책을 저술했다. 역작 「기독교 강요」와 성경 각권의 주석은 후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탁월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현대인에게도 강한 도전과 신앙의 확신을 주리라 믿으며, 존 칼빈과의 가상 인터뷰를 시작한다.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노용에서 출생
1523 - 1527년 파리대학에서 철학, 논리학, 라틴어 공부
1527 - 1529년 오를레앙대학에서 법학 전공, 인문주의 법학에 영향을 받음
1529 - 1531년 부르쥬대학, 회심
1531 - 1533년 파리와 오를레앙대학에서 신학 연구, 「세네카의 자비론에 대한 논고」 출간
1533 - 1534년 파리와 노용에서 생활
1534년 바젤로 망명, 「영혼 수면론」 출간
1536년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 출간
1536 - 1538년 제네바에서 개혁운동 시작
1538 - 1541년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와 집필, 「로마서 주석」 출간
1541 - 1564년 제네바에 귀환하여 계속적으로 개혁운동에 앞장섬
1564년 5월 27일 소천
정성웅 목사는 계명대학과 미국 위트워스대학 그리고 텍사스 주립대학원을 거쳐 하버드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석사를, 영국 옥스퍼드대학 신학부에서 칼빈과 바르트의 신학적 관계를 연구한 논문으로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미국 테네시주의 장로교 명문인 킹 칼리지(King College) 신학과와 선교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설교 전문 웹사이트 설교은행(sermonbank.net)의 운영위원으로 섬기고 있으며, 「개혁&개혁」(부흥과개혁사) 등의 저서와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한국장로교출판사), 「평화신학」(한국장로교출판사), 「기도합주회」(부흥과개혁사) 등의 역서를 출간한 바 있고, 세계적인 신학 저널에 많은 논문을 기고하였다.
개인 이력에 대하여
가족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저의 아버지는 제 고향 교회의 서무와 회계일을 담당하던 서기관이었습니다. 그 당시로는 중류층에 속하는 직업이었죠. 아버지는 또한 지방 의회의 의원으로서도 일하셨습니다. 저는 둘째 아들이었고, 다른 형제들이 있었으며, 제가 여섯 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작고하셔서, 아버지는 바로 재혼을 하셨습니다. 새어머니와의 사이에 딸 둘을 두셨습니다.
저는 교회 개혁에 헌신한 뒤 결혼을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이가 들어가고, 또 담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지게 되었고, 특히 동역자인 마틴 부처가 간곡히 결혼할 것을 권하여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32세 되던 해인 1540년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이덜레트 드 뷰레 (Idelette de Bure)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제 아내는 이미 결혼을 한 경험이 있었고, 남편과의 사별 후 두 자녀와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게 너무나 과분한 아내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저를 잘 도와주었습니다. 저와 그녀 사이에 아들이 한 명 태어났지만 어려서 목숨을 잃었고, 제 아내 마저 1549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소천했을 때 슬픔이 너무도 컸지만 하나님의 위로로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재혼하지 않고 오직 복음 사역에 전심 전력 하였습니다.
태어난 당시의 사회 환경을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태어난 16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는 완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종교와 문화가 거의 구분이 안될 정도로 교회는 민중들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어떤 축제일이 되어 어머니와 함께 성당에 가서 여러 곳을 치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의 축제일이 사회의 축제일이었습니다. 성직자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 속했고,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중산층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민중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요.
어릴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당시에 전염병이 많이 돌아서 어린 아이들이 일찍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도 그들이 언제까지 살아남을 것인가는 정말 예측을 불허하는 일이었습니다. 저 또한 저의 형제들을 어릴 때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교회 환경이나 신학적인 배경은 어떠했나요?
저는 어릴 때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미신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죠. 여기서 미신적이라는 말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교회가 요구하는 의식을 잘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에 빠져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성경 말씀과 복음이 가르치는 참된 구원의 도리를 한 번도 제게 가르쳐 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전통을 따라 성상을 숭배하고, 미사와 축제일에 참여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저 재래적인 풍습과 전통을 따라 성당을 들락날락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죠.
이렇게 자랐기 때문에 제가 파리와 오를레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루터의 저작을 읽었을 때 저의 영혼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루터의 복음적인 메시지는 공로주의와 전통주의와 업적주의에 빠져 있던 제 영혼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에게 권위를 가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점, 또한 특정 계층의 사람만이 사제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제와 제사장이 되었다는 루터의 주장이 제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성경 연구와 신학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고, 그 당시 가톨릭 교회의 신학이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의 깊은 영향 아래 있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죠. 대체로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과 공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비복음적 신학이었습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만물로부터 경배 받아야 마땅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세상 모든 운영 주체의 주인이셔야 한다는 의미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구도를 전제로 할 때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원리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나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는 자신들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 영역에서도 빛이요 소금이어야 합니다. 경제 영역에서도, 사회, 교육, 문화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은 빛이요 소금이어야 합니다.
정치 영역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도 있고, 간접적인 주권행사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든 어두운 정치에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고, 부패하고 맛을 잃은 정치에 맛을 주고 새롭게 하는 역할을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전략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국회 의원들 중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장 본질적인 방법이죠. 또는 기독 시민 단체를 형성하여 국회의원의 의정 활동을 감시하는 방식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정치를 새롭게 할 것이냐는 것 역시 각자의 부르심과 소명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복음 전도라는 지상 최대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우선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 외에 다른 일을 하는 형제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격려해주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원리는 다른 영역에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로마서 12장 1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거룩한 산제사의 삶을 살아야 하며 이것이 예배드리는 것과 같은 영적 행동이라고 말씀합니다. 주일예배와 삶을 통한 매일 예배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저는 주일예배 또는 공(公)예배를 삶의 중심에 놓고자 합니다. 삶을 통한 매일 예배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예배보다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예배입니다. 따라서 두 종류의 예배가 우리의 삶 속에서 동시에 드려져야 하지만 그 우선권은 공예배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주일날 드리는 공(公)예배에만 매우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공예배도 주일 이외의 날에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예배 때 사(公)예배와 매일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영적인 힘과 영양분을 공급받게 됩니다. 이것이 공예배의 중요한 의미와 가치입니다.
사실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말 자체가 복수형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권면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공동체는 공예배를 드리되 동시에 사예배도 공동체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공예배를 통해 영적 힘과 자양분을 공급받을 때 사예배 역시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공예배 때에는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공동체 의식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합니다.
삶을 통한 매일 예배 없는 공예배는 가식적인 것이 되기 쉬우며, 공예배 없는 매일 예배는 단순한 구호나 허상이 되기 쉽습니다.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은사의 활용이 개인적인 매일 예배에서도 이루어져야 하지만 공적인 교회 생활과 예배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주권과 개인의 영성에 대해 꼭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에의 의지가 하나님이 넣어주신 믿음에 의해 발생한다고 해도 과거의 악습이 압도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태도로의 전환은 쉽지 않습니다. 거룩한 동기와 악한 동기는 늘 투쟁 상태에 있습니다. 이러한 투쟁 상태를 늘 거룩한 동기로 압도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 또는 자기 존중감(self-esteem)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도 점점 자라나는 과정을 겪습니다. 10년 전에 가졌던 하나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지금 가지는 확신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또는 매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서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 개인의 영성에 자리잡기 시작하는 것이죠.
우리 안에 잔존해 있는 죄는 우리에게 육신의 소욕과 악한 동기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악한 소욕(所欲)과 동기는 우리가 아직 버리지 못한 악습과 연결되어 우리를 매우 힘들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는 음란한 생각들을 잘 버리지 못할 것이고, 어떤 자매는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잘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형제 자매들이 해야 할 일은 먼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주(主)되심을 인정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검인 말씀을 가지고 이 악한 소욕과 싸워야 합니다. 악한 생각과 동기가 생길 때 그것을 선한 생각과 동기로 대체하는 훈련을 쌓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한 것처럼 우리는 피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과 동기 자체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일시적으로는 강한 성령의 능력으로 물론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소욕이 생길 때 즉시로 하나님께 그 사정을 아뢰고 또 싸우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선한 싸움 중 하나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먼저 예방입니다. 항상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둘째 전투입니다. 악한 동기와 소욕이 전쟁을 걸어올 때는 말씀으로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그 소욕들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싸움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쳐 복종시켜 승리할 때 우리에게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실패하더라도 주저 없이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또 새롭게 무장하십시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영적 무장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군사로 부름을 받았으며, 의식하든 안 하든 영적 전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승리는 자신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십시오. 내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진실로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지금 한국 교회에 가장 필요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요?
첫째, 저는 한국 교회가 다시 복음 신앙의 베이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복음 신앙의 베이스는 사도들의 신앙이자, 개혁자들의 신앙입니다. 한국의 경제가 거품 경제였다가 IMF라는 위기를 당한 것처럼, 한국 교회는 많은 부분에서 거품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거품 현상으로 인해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신앙의 기본을 튼튼히 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신앙적 뿌리는 너무나 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뿌리를 깊이 박아야 합니다.
둘째, 한국 교회는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아무리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가지고 있다해도, 지금과 같이 한국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고 있지 못한다면, 아직 우리가 어리구나 라고 인정할 줄 아는 겸손을 회복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 교회 내에는 아직까지 성숙하지 못한 유치한 면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부분들을 고치고 개혁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마치 졸부가 되어서 자신의 부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아 보입니다.
셋째, 지도자들의 영성과 도덕성의 회복입니다. 참된 영성은 참된 도덕성과 연결됩니다. 지도자들의 영성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며 물질 중심적인 듯 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구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이 바르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 생각하는 기독 지성인들의 booksharing
글쓴이 : 행동하는 기독지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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