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도 바른 이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교제)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여기까지이다- (있을찌어다는 원문에 없다)
"아래의 헬라의 원문을 보듯이 이 문장에는 동사가 없다. 그리고 교통하심이 아니라 교제하심이다.
본문에 히브리어 및 헬라어 원문을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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η χαρισ του κυριου ιησου χριστου και η αγαπη του
헤 카리스 투 큐리우 예수 크리스투 카이 헤 아가페 투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그 은혜 주 예수의 그리스도 사랑과
θεου και η κοινωνια του αγιου πνευματοσ μετα
데우 카이 헤 코이노니아 투 하기우 퓨뉴마토스 메타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with
하나님의 교제가 성령의 함께
παντων υμων αμην
판톤 휘민 아멘
all of you A-men
모두에게 너희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아멘.
교회에서 목사가 가지고 있는 절대 권한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축도권이다 .
축도란, 말 그대로 복을 빌어주는 기도이다.
그런데 왜 복을 빌어주는 기도가 목사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이어야만 되는가?
.
축도 의미는 기독교 백과사전에서
"목사가 예배 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 기도로서
보통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 있는 말씀을 외운다"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 축도 때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오래전 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축도를 가장 엄숙한 순서로 인정하여
사제는 예복을 입고 이를 선언한다" 라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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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축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적은 없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 도고, 감사 등의 기록은 있으나
축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이 말씀은 목사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일반 성도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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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내리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축복하는 것이다.
만일 평신도가 축복을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라고
목사들은 주장하지만 그러나 이는 어긋난 생각이다.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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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축복하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계급주의적 차별 의식이 숨겨져 있다.
교회 내에 목사, 장로, 집사, 평신도라는 계급을 만들어 놓고,
그 중에서도 목사라는 계급의 권위를 위한
일종의 권력 상징으로서 규정한 것이다.
그러한 권력앞에 어떻게 일반성도가 교회재정에 관해 떳떳이 요구할 수 있겠는가?
.
권리가 어떤 특정 집단에게만 허용될 때, 그 권리는 권력이 된다.
그 권리가 목사라는 직분에게만 허용이 되어진다면
이것은 권력의 도구로 변하게 된다.
목사가 전도사를 대할 때에도,
감히 축도권도 없는 주제에 라고 내세울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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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손을 높이 들고 하는 축도는,
성도들로 하여금 손을 든 순간 하늘로부터 복이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절묘한 연상 장치로 보인다.
비슷한 모양은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믿게끔 만드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
그저 눈감고 하는 것보다는 손을 들고 하게 되면,
목욕탕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모양을 연상하게 됨으로써,
심리적 작용에 의해 복이 쏟아질 것 같은 믿음이 생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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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했고,
이삭이 야곱에게 했고,
야곱이 아들들에게 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숱하게 행했던 축복 기도(복을 비는 기도)를,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목사를 제외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할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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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엔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백성을 축복하는 권한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셨다
(레9:22-23, 민6:22-27).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은 이것이 오늘날 강단에서 목사들이 하는 축도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의 축복기도는 중보의 기도로서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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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약시대의 대제사장(히3:1, 히4:14)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딤전2:5).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히6: 19-20)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요(딤전2:5)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신 것이다(요일2:1).
.
오히려 우리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성도나
모두 주 안에서 형제라고 하고 있다(히2:11, 마23:8).
이와 같이 아론의 대제사장적인 축도권에서
그 기원을 찾아 축도를 한다면 누구라도 감히 쉽게 축도를 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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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2장8절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축도의 모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손을 들고 기도하던 관습(시63:4)에 따라 말한 것 뿐이고
다투기 보다 서로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권면이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경건한 풍습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서신서 끝에 있는 '축원'(고전1:3, 고후1:2, 갈1:3, 계1:6, 롬1:7, 삼하15:20, 계1:5, 룻2:19)을 축도로 오해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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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목사만이 축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않다.
이는 편지의 끝인사로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편지로나 말로 서로를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 후서 13장13절의 말씀(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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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24-25(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절의 말씀은
예배시의 축도가 아니라 분명한 서신의 끝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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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위한 축복 기도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새해에 복많이 받으라고 빌어주는데,
성도간에 축복하는 일이 어떤 직분에 의해서 제한받는다는 것은 아주 잘못 되어있다.
만일 그것이 특별한 위치에 있는 바울이 자기가 세운 고린도 교회를 위한 축복이었고
또 오늘날 개교회에서 행해지는 축도를 목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자주 흔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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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일은 부활 후 승천하실 때 단 한 번 뿐이었다
(눅24:50-53 "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멜기세덱도 마찬가지다(창14:19 "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
멜기세덱은 인류 최초의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인물이다.
그가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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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도 야곱을 축복하였으나 에서는 축복하지 않았다(창27:34-38).
에서는 동생에게 축복을 다 빼앗긴 후에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니까"(창27:38)하며 애원하였다.
그럴지라도 아버지의 위치에 선 이삭은 또 다시 축복할 수가 없었다.
만일 성도들을 위한 위한 목회적인 특별한 위치에서
자기 교인들을 위해 축복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자주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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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은퇴할 때나, 혹은 목사가 죽을 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매 주일마다 자기 몸에서 무슨 복(福)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양 손을 들어 강복의식을 행하는 것은
자판기의 돈만 넣으면 쏟아져 나오는 커피처럼 자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18:22 "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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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가 복을 비는 기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간절히 축원하노라?"
복을 비는 사람이 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이렇게 기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것은 종교적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 스스로를 격상시키려는" 무서운 함정인 것이다.
" 결코 비는 자는 자신의 권위를 포기해야 한다.
기도의 첫번째 태도가 구하기 위해 높은 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야 한다.
또 축도가 기도라면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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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을 부탁하셨는데(요14:13)
목사는 왜 이 중요한 원리를 생각치 않는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복을 비옵나이다. 아멘.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면 가장 성경적인데 말이다.
또 축도가 기도라고 하면서
그 기도를 꼭 카톨릭처럼 예복을 입고 해야만 하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물론 오늘날에는 사복을 입고 축도를 하는 목회자들도 있지만
그러나 대개 그런 경우는 주기도문 암송을 시킨다.
목회자 까운을 입고 하는 기도와 벗고 하는 기도의 구별은 누가 만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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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축도가 기도라고 하면서
그 기도를 대예배나 공 예배와 같은 정해진 시간에만 하도록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이 의식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에 따라 기도는 때와 장소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기도 드려야 한다.
축도가 복을 비는 기도라면 기도할 수 있는 자와 기도할 수 없는 자의 구별이 있는 까닭도 있을수 없다.
위엄과 권위와 자만의 태도로 기도한 바리새인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며 겸손히 기도하는 자가
의롭다함을 얻고 돌아간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익히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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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지금껏 목사들에 의해 의식화 된 신자들은 축도를 복받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축도를 한 그 목사에 의해서 복이 좌우되는 것처럼 과장되게 맹신 하고 있다.
그러나 축도는 비복음적인 용어이며 하나의 의식행위 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에서 교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며
성도들의 기복신앙을 이용한 발상이다.
본래 축도를 베네딕숀(Benediction)이라 하는데
이는 신부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베네딕트 신부가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본 따서 만든 것이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는 개신교가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에도 없는 일을 자기들 각자 교단 헌법에 만들어 놓고 그렇게 덫에 걸려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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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은 교권이라는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분명히 목사는 그 신분에 있어서 교회의 회중들보다 높지 못하다.
교인들이 앉아있는 위치보다 조금 높게 한 강단에 있다고 해서 높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목사까지를 다 포함하여 죄인으로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를 입어야만이 구원과 영생을 얻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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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예수 한 분으론 부족한 것처럼
어떤 인간의 대리자를 세우고 또 그를 통하여 복을 받으려 하는 성도들의 태도는
성경적인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
목회자를 더 의롭게 하시고 목회자가 아니 라고 해서 덜 의롭게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
'
'
어떤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주일 학생 예배가 끝난 후 한 학생이 교육 전도사에게 질문을 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예배 끝날 때 손들고 하는 기도를 왜 안 하세요?
어른 예배 때는 주기도문 대신에 목사님이 손들고 축복기도 하시던데요.
우리 어린이 예배도 그렇게 해주세요."
그러자 전도사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목사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단다.
목사와 전도사가 급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 아이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옆에 있던 한 아이가 끼어 들었다.
"어? 영국에서는 모두 다같이 하던데....?"
.
그 아이는 몇 년 간 영국에서 살다가 얼마 전 한국에 돌아온 아이였다.
영국에서 누구나 할 수 있었던 것을 한국에서는 목사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아이에게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거기에서는 직분도 없는 어린이들까지도 다같이 했던 축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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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에서는 축복이라는 개념과 복이라는 개념이 아무 생각 없이 혼용되고 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축복하실 수가 없다.
축복은 복을 비는 것인데,
말 그대로라면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복을 주라고) 빌고 있다는 뜻이 된다.
복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축복 즉,
복을 주라고 누군가에게 간청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기도하다니 이런 어쩌구니 없는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바른 표현은 '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인간은 복을 비는 것(축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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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세상 사람 누구나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라' (로마서 12장 24절)에도 있는 말씀이다.
과거 초대교회때의 핍박이나 또 중세때의 기독교인들의 핍박, 또 현세에도
어디 목사들만 핍박을 받았던가?
바울이 굳이 목사들에게만 한 말은 아니다.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핍박하는자까지도 축복해주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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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축복하는 기도는 누구나 하는 것이며,
목사들만이 축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은 더군다나 분명히 아니다.
목사에게만 축도권이 한정됐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세계 모든 교회가 비 성경적인 십일조를 없애 버린것처럼
세계 거의 모든 교회가 일반 모든 성도에게도 축도권 뿐만 아니라
당회장권 까지도 열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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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한가지 특별한 사항은 이런한 교회에서는 분배 원칙도 성경적이다는 것이다.
가령 교회 담임 목사의 식구수가 3명이고 그 교회 나이 어린 전도사가 식구수가 4명이었을 때 사례비라는 봉급도 식구 수효에 따라서 담임목사보다도 오희려 나이 어린 전도사가 식구 1명이 더 많기 때문에 더 받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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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축도를 주로 예배를 폐회 하는 순서에 넣고 선언으로서 끝 맺음한다.
그러나 축도가 예배가 끝맺음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끝나는 개념이 없고 생활속에서도
계속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후에 만찬으로서
그 모임을 마무리하고 서로 교제하였다(행20:).
저들의 모임은 말씀을 강론하고 떡을 떼며 교제하고 헤어졌던 것이다.
예배는 끝나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이제는 성도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다같이 서로 서로에게 열심히 마음껏 축복해야 할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하심이 당신과 함께"
하기를 기도해야 할것이다.
끝부분에 '있을찌어다'라고 함으로써, 괞이 언어적 위엄도 또한 드러낼 필요가 없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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