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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서로 기도하라(야고보서 5:16-1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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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기도하라(야고보서 5:16-18)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서로 기도하라(1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치유를 위한 기도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주제인 본문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두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기도하라, 둘째는 회개와 함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회개하면서 기도하라'라는 것을 중심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16)"-여기에 깊이 생각해야 할 신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병이냐 하는 것이 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볼 때에 병은 저주요 심판입니다. 죄의 값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로서 분명히 당신의 자녀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택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이요, 언젠가 세상을 떠나도 분명히 그분 앞에 설 것입니다. 이런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모두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병에 걸립니다. 그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죽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즉 예수 믿는 사람이 생각할 때에 병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효과적인 말씀으로, 그 속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귀로 듣는 말씀이 아닙니다. 병중에 더 신비롭게 더 가까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입니다.

다같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병중에 들으면 그 말씀은 더 가까이 들리고 더 절실하게 들립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교회에 나와서 늘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설교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늘 듣던 설교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테이프로 들으니 그렇게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더군요." 분명히 옛날에 자기가 들은 설교요, 며칠 전에 들은 설교인데도 병석에서 다시 들을 때에 그 말씀이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한 구절 한 구절 강하게 부딪쳐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병입니다. 이런 일을 위하여 때로는 우리에게 병도 은혜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병 낫는 것도 은혜요, 병드는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적어도 믿음의 사람은 병 낫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간혹 대단히 변덕스러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병이 들면 저주받은 것이요, 병이 나으면 은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시험에 든 것이요, 나으면 '하나님, 할렐루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이요 유치한 신앙입니다. 적어도 바로 믿는 사람의 신앙으로는 '병이 들어도 감사합니다, 나으면 더 감사합니다, 죽으면 더욱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를 평안히 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생을 마칠 줄 아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병은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병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Works of God-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말로 해도 못 알아듣고, 감동을 주어도 못 알아듣고, 감화시켜도 못 알아듣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사건을 보여주어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래서 부득불 몸에 손을 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action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인도하시는 그 행동이 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병으로써 나를 중단케 하시고 가치관을 바꾸게 하십니다. 바빠서 교회에 못 가겠다고 하고, 바빠서 성경을 못 보겠다 하고, 바빠서 기도도 못하겠다고 하던 사람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보니 바쁜 것이 어디 있고, 꼭 해야 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일은 한가지로 모두 시시한 것입니다.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예배 시간이요 기도 시간입니다.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바쁘고 건강할 때에는 일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기도도 "어제와 같습니다"라고 끝내고는 잡니다. 15분쯤 더 있다가 자면 안됩니까? 아무리 급한 일이 많을지라도 기도는 잊지 말 것입니다. 아니, 급한 일이 많을수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병입니다.

일단 병에 걸리게 되면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그 동안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하찮기만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것이고,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지금은 여러분이 '정말로 그렇다'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실 이것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람밖에는 모릅니다. 입원했다가 어제 퇴원한 사람, 오래 전에 입원했던 사람도 이것은 모릅니다. 사람이란 간사해서 그때뿐이지 식간이 지나면 또 달라집니다. 이렇듯 병이란 사람들을 중단케 하시고, 그들의 가치관을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적인 행동입니다.

사람은 병에 걸리고 나서야 사랑도 느끼게 되고 깨닫는 것도 많아지게 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중앙의료원에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여집사님 한 분이 입원해 있었는데, 그 남편 되는 분은 아주 불량했습니다. 늘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술만 취하면 아무하고나 싸우고 욕하고 발길질하는 못된 주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와서도 부인을 괴롭히고, 걸핏하면 나가 죽으라고 구박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병이 나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 후, 제가 찾아가서 보니 마침 그 남편이 옆에 서 있더군요. 그래서 "이 사람은 왜 왔소?"라고 물으니 "목사님, 그러지 마세요, 하루에 두 번씩이나 찾아온다구요"라고 여집사님이 말합니다. 와서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다 했더니 "너 죽지 마라, 너 죽으면 나 큰일난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여집사님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 말이 고마워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너 죽지 마'라는 말이 사랑한다는 소리입니다.

사랑한다는 표현도 가지가지입니다. 이것도 병이 주는 것입니다. 병 때문에 비로소 남편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또 그 남편도 아내의 사랑을 깨닫고 소중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병이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가게 합니다. 지금까지 가던 길을 돌려서 다른 길로 가게 합니다.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병은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돈이 있다고 자랑하겠습니까, 명예가 있다고 자랑하겠습니까, 얼굴이 예쁘다고 자랑하겠습니까? 모두 하찮은 것이요 소용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코가 높아도 코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높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듯 모든 것을 부정하고 겸손해지게 하는 것이 바로 병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병은 우리에게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합니다. 이제는 의지할 데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물론 치료는 의사가 하겠지만 그것 역시 의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약 먹어서 다 낫는다면 죽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행동이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들었을 때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회개를 통하여 겸손하고, 정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를 통하여 영혼이 깨끗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병이 들었을 때에는 그 몸을 고치기에 앞서, 이것이 말씀임을 상기하고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병을 고치는 일이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앞서 영혼이, 속 사람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3:16)"-우리의 병든 것은 몸이지마는 우리의 관심사는 영혼에 있는 것입니다. 속 사람에 있습니다. 속사람을 깨끗하게 하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구석구석 깊이 감추어진 것, 그 동안에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것, 관심 밖에 있었던 것까지 모두 생각해가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16)"-병든 자는 회개와 함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지고 정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4:3)"-야고보는 정욕에 매이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깊이 회개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깨끗해지고, 모든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심지어는 살고자 하는 욕심까지도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깨끗한 영혼, 깨끗한 동기, 깨끗한 소원이 될 때에 비로소 기도가 응답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할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의 본문은 참 회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고하며'의 헬라어 원문은 '고백'을 뜻합니다. 영어로는 confession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할 것입니까? 물론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성직자에게 고해야 합니다. 가톨릭에는 '고해성사'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 고해성사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듯 성직자에게 고함으로써 자기의 죄 문제를 같이 의논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라고 중보의 기도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우리 신교의 입장에서는 '죄를 고하며'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합니다. 첫째, 개인의 죄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즉 나의 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 그 사람은 나를 원망하고 무척 아파하고 있는데 나는 혼자서만 기도합니다. 이것은 백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그에게 가서 '미안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앞서 그에게부터 가서 죄를 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런 것이라면 어떤 회개도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으러 갈 때에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누군가가 생각하거든 빨리 그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화해를 청한 연후에 예물을 바치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나를 원망하고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외면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죄를 고하며 사해주시기를 재촉합니다. 진실로 회개하려고 한다면 먼저 그에게 가서 'I am sorry'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는 하지 않고 하나님만 붙들고 죄를 사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이것은 그릇된 자세입니다.

이래서는 양심의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병이 된다면 그 병 역시 낫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빌레몬서를 보십시오. 이 편지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써 보낸 것입니다. 오네사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는 주인 빌레몬의 물건을 훔쳐서 도망을 칩니다. 운좋게 잡히지 않고 로마까지 도망합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을 만나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을 위해서도 많은 봉사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빌레몬의 집으로, 즉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엎드려 잘못했다고 빌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그에게 편지를 써줄 테니 가지고 가서 그의 처분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만약 로마에서 일평생을 살아간다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바른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걸리는 병도 많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이른 상처를 주었다면 반드시 찾아가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내 말이 잘못되었습니다. 내 행동이 잘못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고하며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교회에 고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이런 잘못을 했습니다'라고 고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잘못을 고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앉아서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는 그 한마디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교회는 용서할 것입니다. 아니, 벌써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고한다고 하는 고백이 있기 전에는 결코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1907년은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이 일어난 때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고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처럼 교회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1907년이 한국교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흥운동은 맨처음 원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당시 우리의 교회는 여러 악조건과 나름대로의 문제점으로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원산에 있는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로 부흥되지 않는 교회와 그밖의 많은 문제로 속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장로, 교인들이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문제는 자꾸 쌓입니다. 교회는 자연히 부흥되지 않고 지체되기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같이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한 장로님이 벌떡 일어나더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교회에 이런 잘못을 했습니다. 이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라고 고하면서 교회 앞에 자복을 했습니다. 뒤를 이어 선교사가 일어납니다. "아닙니다. 부지런하지 못한 제 잘못이 큽니다. 저는 교인들을 원망했고……"라고 회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내 잘못입니다'라는 회개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그때에 비로소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평양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1907년의 부흥운동이 일어난 계기이며 배경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앞에 "분명히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용기 있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 고백 없이 "왜 용서해주지 않는가"하며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인데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잘못해놓고 누가 누구에게 뭐라 할 수 있습니까?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숨김이 없이 서로 고백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지는 맙시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남의 죄를 흉보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내가 잘못한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에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가 있고, 때로는 주의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공개는 부덕을 이룹니다. 고백이란 아무 죄나 고하는 것이 아니요, 모든 가정 이야기나 사사로운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는 것도 아닙니다. 고백을 하다보면 어떤 때에는 은근히 자기과시를 하게 되고, 자기자랑에 빠지게도 됩니다. 회개한답시고 자기교만에 빠지고, 남의 죄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덕이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고백은 분명히 내가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을 때에는 찾아가서 이야기하거나 불러다가 이야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이러한 잘못을 했다면 숨이 넘어가기 전에라도 불러다가 말해야 합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것은 내 잘못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에 잘못한 것이 있을 때에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고해야 합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는 그런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말씀은 '서로 고백하라'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는 고백 받고, 누구는 지적하고, 누구는 비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서로 다같이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서로서로'가 바로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요,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 봉사하라, 서로 섬기라, 서로 발을 씻기라……' '서로서로'라는 말씀이 성경에 무려 35가지나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자신의 잘못을 고해서 풀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내 신명이 자유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으로 맺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깨끗해야만 병 낫기를 위하여 드리는 내 기도도 응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병 고쳐 주십시오"라고 하는 간절한 소원은 별 효력이 없습니다. 병에는 그것을 통하여 내게 주시는 말씀의 역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내 영혼을 먼저 깨끗하게 해야만 그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매를 맞을 때에 왜 맞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왜 때리느냐고 대드는 것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 속에 말씀이 있고, 뜻이 있고, 의지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숨겨진 의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응답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될 때에 서로 짐을 나누게 되고, 모든 엉켰던 마음이 풀리게 되고, 영혼이 자유 하게 되고, 서로 신뢰하고 서로 간격이 없는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고, 화평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내 영혼이 깨끗해지면서 내 한마디의 기도가 곧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서로 기도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도 중보의 기도를 했으며, 모세도 여호수아도 에스더도, 그 밖의 많은 예언자들도 백성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증보의 기도를 했습니다. 본문말씀 역시 상호 중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AB를 위하여, BA를 위하여, 건강한 사람은 환자를 위하여, 환자는 건강한 사람을 위하여 서로서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이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어서 깨끗한 영혼이 된, 구원받은 공동체의 기도는 효력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의인의 예로 엘리야를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17)"-엘리야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요,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요, 아브라함 역시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일으켜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쳐주자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라고, 바울은 허메(헤르메스)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야단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이를 말리는데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14:14,15)." 베드로도 앉은뱅이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함을 보고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존경하므로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베드로는 고넬료의 초대로 그의 집에 갔을 때에도 자신에게 절로써 예를 갖추는 그에게 "나도 사람이라(10:26)"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특정인은 없습니다. 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입니다. , 믿음으로 기도하고 깨끗한 영혼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그 기도가 상달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누구의 기도는 들어주고 누구의 기도는 안 들어준다는 법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기도로써 36개월 동안 비가 안 오게도 하고, 또 기도로써 비가 오게도 열매를 맺게도 했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에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게도 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는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엘리야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말씀도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17)"라고 그의 평범성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엘리야의 기도는 항상 응답이 됩니까? 믿음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고, 고백하며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16)"-여러분, 엘리야처럼 믿음을 가지고 늘 기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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