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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이기는 영적 비결(고린도전서 10:13).

by 【고동엽】 2026. 1. 18.

시험을 이기는 영적 비결(고린도전서 10: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시험”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어떤 시험은 눈에 보이는 유혹의 얼굴로 다가오고, 어떤 시험은 마음의 바닥을 흔드는 염려와 낙심의 옷을 입고 찾아옵니다. 또 어떤 시험은 관계의 틈을 벌리고, 어떤 시험은 고독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너는 혼자다”라고 속삭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피하고 싶지만, 성경은 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시험은 인간의 길 위에 실제로 존재하며, 믿음의 사람도 그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두려움을 키우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복음의 약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시험의 현실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의 현실을 직시하되, 그 현실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 크게 선포합니다. 세상은 시험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버텨라, 네가 강해져야 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쁘시다. 그러므로 네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드신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영혼의 운명을 가르는 차이입니다. 믿음의 길은 ‘내가 할 수 있다’의 길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다’의 길이며, 구원의 은혜는 단지 시작만 은혜가 아니라, 끝까지 은혜로 우리를 지키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첫 진실은, 시험이 늘 낯선 얼굴로만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시험이 매우 인간적이라는 뜻입니다. “나만 이런가요?”라는 고립감이 시험을 더 크게 만듭니다. 죄의 유혹이든, 불안과 분노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든, 상처가 만들어낸 왜곡된 자기방어든, 그것은 인류가 오래 겪어온 흔한 전장입니다. 시험은 종종 “너만 이래”라고 속이며, 그 거짓말로 우리를 부끄러움의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성령은 오늘 말씀으로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십니다. “그 시험은 네가 처음 겪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너는 홀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의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신다.”

그렇다고 해서 시험이 가볍다는 말이 아닙니다. 시험은 실제로 사람을 부러뜨립니다. 시험은 사랑을 식게 만들고, 기도를 메마르게 하고, 말씀을 멀게 하며, 작은 타협을 ‘괜찮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시험은 한 번의 큰 폭풍보다, 반복되는 잔비처럼 영혼을 젖게 하고, 결국 심령을 눅눅한 절망으로 무겁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험을 “감당”이라는 단어와 함께 말합니다. 시험은 감당해야 할 전장입니다. 그런데 감당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결심입니까? 우리의 수양입니까? 우리의 성품입니까? 아닙니다. 본문은 감당의 근거를 우리 안이 아니라 하나님께 둡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미쁘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변덕스럽지 않으시다는 뜻이며, 약속을 헛되이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며, 당신의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분처럼 오르내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성취처럼 흔들리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것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보존하심으로 계속되며,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심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순간에도 구원의 실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실을 꽉 쥐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실을 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기 힘으로 간신히 붙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단단히 붙들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감당 못 하겠습니다. 이미 무너졌습니다. 이미 넘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본문은 ‘신자는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시험이 클수록, 그리고 내가 약할수록 더 선명히 드러나는 복음의 논리입니다. 감당이라는 말은 ‘완벽하게 이겨서 티끌 하나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끝내 믿음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넘어짐이 있어도 회개로 돌아오게 하시고, 상처가 있어도 치유로 이끄시고, 눈물이 있어도 위로로 품으시며, 다시 걷게 하시는 은혜가 바로 “감당케 하심”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허락”이라는 단어를 우리 마음에 박아 넣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이 우연히 터진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은 때로 우리에게 어려운 진리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없으면 우리는 시험을 ‘무의미한 폭력’으로만 해석하게 됩니다. 주권의 진리는 시험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시험을 무너뜨릴 절망으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의 숨은 우상을 드러내시고, 의지하던 모래성을 무너뜨리시며, 그리스도만이 반석이심을 새기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의 자만을 꺾으시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자신을 구원자 삼는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은혜의 손으로 우리를 낮추시되 버리지 않으시고, 찢으시되 죽이지 않으시며, 깨뜨리시되 다시 세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험을 주권 아래 두신다는 말이, ‘그럼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은혜는 무책임의 핑계가 아니라, 거룩의 능력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마취가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며 순종으로 일으켜 세우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시험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피할 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피할 길”이야말로 시험을 이기는 영적 비결의 핵심입니다. 세상은 시험을 “정면돌파”로만 말하지만, 성경은 때로 “피하라”고 말합니다. 유혹을 피하라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지혜이며, 성화의 실제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도망한 것은 겁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다윗이 마음을 방치한 자리에 죄가 들어왔듯이, 마음의 문지기를 세우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지성의 일입니다. “피할 길”은 우리를 죄와 타협시키기 위한 우회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시는 “피할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황이 마술처럼 사라지는 비상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상황을 바꾸지 않으시고, 우리를 바꾸십니다. 같은 환경 속에서도 죄에 끌려가던 마음이, 은혜로 고개를 돌이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피할 길은 단지 외적 탈출이 아니라, 내적 전환입니다. 죄의 달콤함이 커 보일 때,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더 크게 보이게 하시는 눈의 전환이 피할 길입니다. 절망이 목을 조를 때, 약속의 말씀이 폐부를 파고들어 숨을 쉬게 하는 것이 피할 길입니다. 분노가 불길처럼 번질 때, 성령의 오래 참으심이 마음에 비를 내려 불을 끄는 것이 피할 길입니다.

피할 길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 이유는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시험에서 건져내시는 구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은 말씀을 비틀어 유혹했고, 배고픔과 인정욕과 권력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흔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고, 아버지께 절대적 순종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는 단지 ‘예수님은 위대하다’는 감탄을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승리는 우리를 위한 대표의 승리입니다. 우리 대신 순종하신 순종, 우리 대신 이기신 승리, 우리 대신 의를 이루신 의로움이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시험 앞에서 단지 “나도 해 보겠다”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다”는 사실 위에 섭니다. 시험은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지만, 복음은 우리의 정체성을 못 박습니다. 우리는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마음은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비결은 비밀 주문이 아니라, 복음의 길을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걷는 습관입니다. 시험은 갑자기 번쩍이며 오지만, 넘어짐은 대개 천천히 준비됩니다. 반대로 승리도 갑자기 떨어지는 번개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길러지는 열매입니다. 말씀은 시험 때만 꺼내는 소화기가 아니라, 평소에 심장에 흐르게 해야 하는 피입니다. 기도는 급한 순간에만 누르는 버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호흡입니다. 교회는 위로가 필요할 때만 찾는 장소가 아니라, 성도가 서로의 믿음을 지켜주는 언약 공동체입니다. 성례는 단지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눈에 보이게 붙들게 하는 약속의 표징입니다.

또한 시험을 이기는 길에는 정직함이 있습니다. 죄는 어둠을 사랑하고, 시험은 숨김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은혜는 빛 가운데서 강해집니다. 믿음의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회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회개는 감정의 자책이 아니라, 방향의 전환입니다. “주님, 제가 지금 이 유혹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주님보다 이 죄가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제 눈을 열어 주십시오. 제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정직하게 무릎 꿇는 순간, 시험의 독은 힘을 잃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심령을 품으시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한 가지 예화를 드리겠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오랜 기간 반복되는 습관적 죄로 괴로워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이번만”이라는 말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체념이 되었습니다. 신앙은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패배감이 눌러앉아 있었고, 기도도 점점 짧아지고, 예배도 형식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깨달은 것은, 시험이 올 때마다 자신이 홀로 싸우려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시험이 오면 혼자 견디지 않기로. 주님의 몸 된 공동체 안에서 빛 가운데 걷기로. 그분은 신뢰할 만한 동역자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했고, 매주 말씀과 기도로 점검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일상의 작은 “피할 길”을 만들었습니다. 유혹이 강해지는 시간대와 장소를 피했고, 스마트폰 사용 습관을 바꾸었고, 마음이 허기질 때마다 즉시 짧은 시편 기도를 입술로 올렸습니다. 처음 몇 주는 여전히 흔들렸지만, 이상하게도 ‘넘어짐의 빈도’보다 먼저 바뀐 것이 있었습니다. 넘어져도 즉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졌고, 죄를 합리화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확신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분은 어느 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시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피할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쁘시다는 것이 실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승리의 결입니다. 완벽의 자랑이 아니라, 은혜의 실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시험을 대하는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시험이 오면 먼저 두려워하며 자신을 탓하는 대신,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다.” 시험이 오면 먼저 내 의지를 점검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시험이 오면 먼저 환경을 원망하기 전에, 먼저 피할 길을 찾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신다.” 그리고 그 피할 길의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시험을 이기신 분이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요, 성령을 보내어 우리 안에서 거룩을 이루시는 주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을 이기는 영적 비결은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믿음”입니다. 시험은 늘 하나님 자리를 빼앗으려 합니다. 쾌락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고, 사람의 인정이나 성공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고, 내 감정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고, 심지어 내 절망을 하나님 자리에 앉힙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시 고백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선하십니다. 주님만이 만족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이 고백이 가슴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발걸음으로 내려갈 때, 우리는 시험을 단지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로 ‘감당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감당의 끝에서 우리는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하게 됩니다. “주께서 나를 여기까지 지키셨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노래이며, 이것이 복음의 승리입니다.

설교요약

고린도전서 10:13은 시험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하심을 선포합니다. 시험은 인간에게 보편적이지만, 하나님은 성도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시험과 함께 반드시 “피할 길”을 내어 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피할 길은 단지 상황의 제거가 아니라, 마음의 전환과 믿음의 길(말씀·기도·공동체·회개)이며, 그 중심에는 시험을 대신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은혜가 있습니다. 개혁주의적으로 볼 때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보존하심에 근거하며, 승리는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 복음의 실제로 주어집니다.

묵상 포인트

  • 지금 제 마음을 가장 강하게 흔드는 시험은 무엇이며, 그것이 제게 “너만 이래”라고 거짓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고백이 제 삶에서 실제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 제가 ‘정면돌파’만 고집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피할 길’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넘어졌을 때 제게 필요한 것은 자책입니까, 회개입니까, 혹은 복음의 재확인입니까?
  • 시험의 순간에 제가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은 무엇입니까(쾌락, 인정, 통제, 감정, 두려움)?

강해

본문은 네 층의 복음적 논리를 가집니다.
첫째, 시험의 보편성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이라는 표현은 시험이 신자에게도 일어나는 인간적 현실임을 말하면서, 동시에 고립감의 거짓말을 깨뜨립니다. 고립은 죄의 온상입니다. 성도는 “나만”의 감옥에서 나와, 말씀 안에서 보편적 전장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확실성입니다. 중심 어구는 “하나님은 미쁘사”입니다. 해결의 열쇠는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향성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고,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존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주권적 제한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무제한으로 풀어놓지 않으시고, 성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시험이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성도는 시험 속에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넷째, “피할 길”의 제공입니다. 하나님은 시험 자체를 제거하시는 방식만이 아니라, 시험의 순간에 순종으로 빠져나갈 출구를 내십니다. 그 출구는 말씀의 기억, 기도의 도움, 공동체의 권면, 도피의 지혜, 환경의 절제, 즉각적 회개의 길로 구체화됩니다. 이 모든 길은 결국 그리스도께로 향합니다.

주석

이 구절은 고린도 교회의 우상제물·방종·자기확신 문제를 배경으로,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앞 절의 맥락)와 “그러나 절망하지 말라”는 위로를 결합합니다. 경고만 있으면 율법주의적 공포로 흐르고, 위로만 있으면 방종으로 흐릅니다. 본문은 경고와 위로를 복음 안에서 한데 붙여 성도의 실제 성화를 세웁니다.
또한 본문은 시험을 “완전히 차단”하기보다 “감당”과 “피할 길”이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이는 신자의 성화가 일회적 완성보다, 은혜 안에서의 지속적 싸움임을 보여 줍니다. 성화는 공로 경쟁이 아니라, 은혜의 통치 아래에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입니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시험”에 해당하는 단어는 **πειρασμός(페이라스모스)**로, 문맥에 따라 ‘시험/시련’과 ‘유혹’의 폭을 가집니다. 즉 외적 압박(시련)과 내적 끌림(유혹)을 함께 포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단지 “힘든 일”만이 아니라, 죄로 끌고 가는 영적 전투까지 포함합니다.
  • “사람이 감당할”의 뉘앙스는 시험의 성격이 인간에게 낯설지 않음을 말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성도의 한계를 아시고 다루심을 시사합니다(하나님의 섭리적 배려).
  • “미쁘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πιστός)**을 가리키며, 이 구절의 핵심 주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윤리적 처방이 먼저가 아니라, 신적 성품 선언이 먼저입니다.
  • “감당하지 못할”은 단순한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끊어질 정도의 파괴를 하나님이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위로로 읽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 “피할 길”은 ἔκβασις(엑바시스) 계열의 의미로 ‘빠져나갈 출구/탈출의 길’이라는 뉘앙스를 가지며, “함께” 주신다는 표현은 시험과 출구가 동시에 주어짐을 강조합니다. 즉 시험이 닥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출구를 준비하신 분으로 계십니다.
  • “능히 감당”은 인간의 자력만을 찬양하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출구를 따라 순종하도록 주시는 은혜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어-구약) 참고 주제 연결

구약의 “시험/시련”은 종종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멸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믿음을 드러내고 연단하여 언약적 의지처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시험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냈고, 동시에 만나와 반석의 물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냈습니다. 본문은 그 구약적 패턴을 신약 교회에 적용하여, 시험 가운데서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금언

  • 시험은 내 약함을 드러내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 약함 위에 집을 세우십니다.
  • 피할 길은 상황의 마술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마음의 방향 전환입니다.
  • 넘어짐이 끝이 아니라, 회개로 돌아오는 길에서 은혜의 손이 더 분명해집니다.
  • 믿음의 승리는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께서 지키셨다”라는 고백으로 완성됩니다.

신학적 정리

  • 하나님의 섭리: 시험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하나님은 시험을 제한하시고 목적 있게 사용하십니다.
  • 성도의 견인: 신자의 최종 보존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 그리스도의 대표성: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 승리는 신자의 구원과 성화에 실질적 근거가 됩니다.
  • 은혜와 성화의 관계: 은혜는 순종을 무효화하지 않고, 순종을 가능케 하는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주제별 정리

  • 시험의 종류: 유혹(죄로 끌림), 시련(압박), 내적 시험(불안·분노·정욕·자기연민)
  • 시험의 전략: 고립(“너만”), 합리화(“이번만”), 절망(“이미 끝”), 지연(“나중에 회개”)
  • 하나님의 대응: 제한(감당 불가 금지), 동시 제공(시험과 함께 출구), 동행(은혜로 감당케 함)

목회적 정리

  • 정죄보다 회복: 성도를 무너뜨리는 것은 시험 자체보다 “정죄의 독”인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은 죄를 가볍게 하지 않되, 회개자를 눌러 죽이지 않고 살립니다.
  • 공동체의 역할: 고백과 중보와 권면은 “피할 길”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홀로 싸우는 전장은 패배 확률을 높입니다.
  • 습관의 재구성: 유혹의 시간·장소·루틴을 파악하여 작은 도피의 길을 만드는 것이 성경적 지혜입니다.
  • 즉시성의 신앙: 넘어졌을 때 오래 뒹굴지 않고 즉시 돌아오는 속도가 성화의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시험의 순간마다 먼저 고백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 유혹을 ‘대화’로 풀지 않고 ‘도피’로 끊겠습니다. 눈을 돌리고, 자리를 옮기고, 손을 멈추겠습니다.
  • 말씀 한 구절을 시험의 칼로 준비하겠습니다. 특히 마음이 무너질 때 반복해서 붙들 한 약속을 정하겠습니다.
  • 혼자 숨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동역자에게 정직하게 나아가겠습니다.
  • 넘어졌을 때 자책의 늪에 머물지 않고, 회개의 길로 즉시 돌아오겠습니다.
  • 무엇보다, 제 승리의 근거를 제 결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두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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