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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창세기 11:1-9 요한복음 14:11-17)

by 【고동엽】 2022. 8. 18.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창세기 11:1-9 요한복음 14:11-17)  

예수님의 약속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배우면서 어려운 점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이름이 아니라서 주의를 기울여야 성경의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신 예수님, 성령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님을 아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안 계시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깊이 파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셨는데,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사셨던 예수님이 우리 교회 공동체 속에 들어오시도록 해주는 영이 있어야 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오늘 내 영혼에 오셔서 살아있게 해주는 ‘살리는 영’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 본문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얼마전 유력한 대선 후보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던 한 유명인사가 자신은 대선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고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측근 인사들의 반대로 기자회견 한번 재대로 하지 못하고 물러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 대선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소식은 충격이었고, 갑자기 할 일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이해 관계 때문에 맺어진 관계도 갑자기 끊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존경하는 사람과의 이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던 분과의 이별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큰 상처입니다.

5월 25일 돌아가신 피천득 선생 (1910. 4. 21. ? 2007. 5. 25.)은 교과서에도 실린 ‘인연’이라는 대표작에서 단 세번 만난 아사꼬라는 여인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부모와 직업과 가족까지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제자들이 느꼈던 예수님과의 이별의 충격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삼년 동안 먹고 마시고 자고 가르치고 배우며, 모든 일을 함께 했습니다. 함께 전도 여행을 했으며, 굶주린 5천명의 사람들을 먹여야 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놓고 함께 기도를 했으며, 모든 병을 고쳤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24시간 함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헤어지면서 정서적인 혼란, 삶의 목적 상실, 삶의 방향 상실,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충격에 싸인 제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야만 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먼저 예수님은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요14:12).

믿음을 변치않고 지키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일을 계속 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도리어 믿음을 굳게 지키는 사람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감당할 있다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둘째로 ‘기도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아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특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모두 응답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는 제자들을 떠났지만 이제 제자들은 기도로써 예수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제자들을 돕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성령님은 누구인가?

그러면 성령님은 누구입니까?


첫째, 성령님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保惠師, 파라크레토스)의 뜻은 법적 보조자, 즉 변호사(Advocate)와 위로자(Comforter)의 의미가 있습니다. 보혜사는 법적인 분쟁에서 법적 권세를 가지고 친구처럼 피해자를 돕는 존재입니다. 법적인 분쟁의 의미는 16장 8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법적 권위입니다. 물론 이 법적 권위는 인간 세상의 사법적 권위가 아니라 궁극적인 신적인 권위를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반대하는 세상의 권세와 싸우게 될 것인데, 보혜사 성령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세상과 싸우는 제자들을 도와서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요16:33).

보혜사를 또한 ‘진리의 영’ 이라고 하는 것도 복음을 거절하는 세상과 대립하여 싸운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복음 전파 사역에서 애쓰는 제자들을 격려하고 능력으로 돕는 분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피조물 속에 내재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하나님은 영으로 예수님과 함께 계셨고,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셋째, 성령님은 ‘하나님 어머니의 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어머니’란 말을 성경에서 읽어보신 일이 있습니까? 성경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만 있지 ‘하나님 어머니’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세계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든 역할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해하기 좋으라고, 아버지의 역할을 말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역할을 말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은 모두 남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와 간격이 없고, 더욱 친밀하고 부드러우며,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 상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어머니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령님은 어머니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다시 살려 주십니다. 성령님은 생명력의 원천이며,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점에서 어머니와 같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듯이 성령님은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며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숨을 내쉬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위로하시고, 도와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님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우리 각자는 성령을 받아야 영적인 생명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임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오늘 세례 받으시는 분들, 입교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성령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사람인 것을 본인들이 느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면서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도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살아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공동체 속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사람의 주장들이 난무하고 상식이 지배하고 사람의 다수결이 지배한다면 사람들의 공동체일수는 있지만, 아직 하나님의 공동체는 아닙니다. 교회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성령을 받아서 생명력을 가지고 성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공동체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은 생명력있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위로가 있으면 공동체는 자랍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질문합니다(행19).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에베소 교인들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에베소 교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성령님은 ‘아들의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일하셨듯이,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하).

성령님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시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다섯째, 성령님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내 안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우리는 나의 ‘인간적 자아’가 내 삶을 주도하게 하지 말고,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도록 우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내 자아가 내 인생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 주도적인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의 의미입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참된 생명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이 살아 있을 수 없듯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산 영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듭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성령에 눈을 떠야 합니다. 성령을 모르는 공동체에서는 한 사람의 주장과 다른 사람의 주장은 언제나 충돌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 조차도 한 사람의 상식과 다른 사람의 상식이 충돌합니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양심과 다른 사람의 양심이 충돌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성령이 없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회개로 부를 때, 하나님께서 변화로 부를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주도하는 공동체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일치가 있습니다. 약동하는 힘이 있습니다. 살아 움직입니다. 생명은 생명을 잉태합니다. 새 생명이 탄생하고,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고, 세례자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느껴야 합니다. 약동하는 생명력에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무감각한 신앙, 매너리즘에 빠진 생각들, 무기력한 신앙생활에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신앙 생활에 역동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기력한 신앙에서 역동적인 신앙으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생명의 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시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희망으로 넘칩니다. 성령님은 어머니처럼 새로 태어난 영혼들을 보살펴서 자라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한 개인을 다시 살아나게 하고,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고, 공동체를 생명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각종 은사를 주시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삶에 정열을 가지게 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님의 존재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지금 세상의 삶에 지쳐서 생명을 고갈한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생명을 충만하게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고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 교회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성령님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를 살려 주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우리를 고쳐주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여, 성령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 우리를 새롭게 하시옵소서. 우리를 성령과 말씀으로 새롭게 하옵소서.


신 앙 고 백 (사도신경) 다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설교 요약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성령님은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어머니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다시 살려 주십니다. 성령님은 생명력의 원천이며,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는 점에서 어머니와 같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듯이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며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주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와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아들의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일하셨듯이,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시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내 안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우리는 나의 인간적 자아보다는 성령께서 더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도록 우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내 자아가 성령님께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 주도적인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의 의미입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참된 생명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를 살려 주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소서! 우리를 고쳐주옵소서!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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