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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감사(다니엘 6:5-10)

by 【고동엽】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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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감사(다니엘 6:5-10)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놓기로 한 것이니이다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동물과 사람은 같은 점이 많습니다. 먹고산다는 것이나 또 그 생활 양식에 있어서도 비슷한 바가 많습니다. 특별히 본능에 있어서는 아주 같은 점이 있습니다. 생존 본능이나 생식 본능이나 혹은 서식 본능이나 귀소 본능 같은 모든 본능들이 동물과 인간이 마찬가지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인간입니다. 동물일 수 없고, 동물로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엄연히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니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엄연히 동물이면서도 동물같이 살아도 안되고, 동물같이 생각해도 안되고, 동물로 취급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역설적 생애입니다.

사람에게는 웃음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저 브라질 아주 밀림 속에 13년 동안 가서 그 원주민들에게 선교하던 선교사께서 한국 교회에 오셔서 보고 강연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여러 가지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전연 말이 통하지 않는 그런 원주민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한 아주 깨끗이 벗고 사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대화를 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선교사의 말씀에 의하면, 아주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전연 안 통하는 사람이라도 딱 만났을 때 저쪽에서 입가에 웃음을 띄우면 "아이쿠! 이제는 살았구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웃는다고 하는 것이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사람은 웃는다는 웃음이 아주 고귀한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반응과 응답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반응이란 영어로 리액션(reaction)이라 합니다. 응답은 리스판스(response)라고 합니다. 리액션과 리스판스는 같은 게 아닙니다.

동물은 다만 반응으로 삽니다. 사물에 대한 즉각적인 반사 작용을 나타내고 삽니다. 춥다, 덥다, 배고프다, 아프다, 이것은 반사이며 하나의 반응입니다. 어떤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응답이란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또 마음에 새기고 그 다음에 자기 것으로 이것에 대해서 응답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율적 응답입니다.

동물에게는 배고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어떻게 좀 다치면 "아야!"하고 꼭 반사를 냅니다. 이런 일은 동물과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픈 것과 고통은 같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픈 것은 반응이요, 고통은 응답입니다. 배고픈 것은 반응이요, 슬픈 것은 응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과 동물은 크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사물에 반사하며 살고 반응으로 살아가고 조건 반사로 행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적 반응 이상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결단하고 그리고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응답입니다.

감사란 응답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응답하는 이것은 결코 반응이 아니요 응답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면 원망하고 나으면 감사하고, 또 아프면 또 원망하고, 마지막에 죽을 때는 무어라고 하고 죽을 겁니까? 이것은 단순한 반응 작용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 깊이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오히려 일이 잘 될 때 또 한 번 생각하고 겸손합니다. 또 한 번 생각하고 회개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응답입니다.

내 신앙이 응답이냐 단순한 반응이냐를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본문에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갈 때 억울하게 붙잡혀 가게 된 포로 청년입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 갑니다. 그 노예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비참한 노예 생활 가운데서도 신실하고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아서, 마침내 그는 왕에 의해 기용되고 높이 등용되어 이제 메대 파사 나라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다리오 왕이란 메대 왕은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방백 120명을 두고 그 위에 그들을 다스리는 총리 3명을 두고 자기는 그 위에 앉아서 정치를 하는 구조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중에 다니엘이 더 출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다시 더 올려서 다니엘로 하여금 온 백성을 다스리게 할 그런 생각을 다리오 왕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방백들이 그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마침내 음모를 꾸미게 되어 어찌하든지 다니엘을 완전히 잡아 없애려고 하는 계획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원체 결백하고 온전한 인격의 사람이기 때문에 무흠해서 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들은 계책을 꾸밉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어서 이것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에게 충성을 가장한 조서를 올렸습니다. 그 조서 내용은 이렇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 누구를 막론하고 왕 이 외에 다른 신에게나 혹은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잡아다가 사자굴 속에 집어넣어서 죽이도록 합시다." 가히 충성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다리오 왕은 일단 조서에 어인을 찍어버렸습니다.

오늘 내용은 그것입니다. 다니엘은 이것이 무엇 때문이고 누구 때문이며 자기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전과 같이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걸고 오늘 본문대로 말한다면 "감사하였더라" 했습니다. 그의 감사는 참으로 위대한 감사였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죽을 줄 알고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자기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지고 억울하게 사자굴 속에 들어가서 사자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절대적 감사입니다. 이건 조건 반사가 아닙니다. 이건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요, 성공한다 실패한다는 문제도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아주 넘어선, 아주 초연한 절대적 감사를 드렸습니다. 상대적 감사를 드리는 자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사람을 보고 감사를 하는 사람은 다시 사람을 보고 원망하게 됩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이 용돈을 너무 많이 써서 남들은 2만원을 쓰는데 너는 왜 5만원을 쓰느냐고 말했더니 아들이 대답하는 것을 보세요. "내 친구는 십만원을 쓰는데요" 하더랍니다. 이게 상대적인 선입D봖TXT婉니다. 상대적인 선이란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잘 되면 감사하고, 안 되면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본다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보고, 불의한 사람으로 잘되는 사람, 악하고도 잘사는 사람, 갖은 못된 짓하고도 출세하는 사람, 오래 사는 사람,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이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런 상대적 감사란 즉각적으로 그 어느 시간에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사람보고 감사했으면 또 사람보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있다고 감사했으면 없다고 원망할 것입니다. 병 나았다고 감사했으면 다시 아프면 원망할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었다고 감사하면 이제 그 사업이 실패한다면 누구를 원망할 것입니까? 마지막에 죽을 때는 무어라고 하고 죽을 겁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 감사, 절대적 은혜, 절대적 신앙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감사는 믿음입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리고 감사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있는 바와 같이 다니엘은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세, 이것이 감사로 이끌어 줍니다. 사람을 보고 누구보다 낫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직선적인 만남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타인 지향적인 그러한 가치 평가란 또 다시 타인 지향적으로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한 번 직선적으로 마주 앉아서 생각해봅시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원망하든지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기도 없이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만남이 없이 진정한 감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데살로니가전서 5:16 이하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기쁨이 있고, 기도하는 기쁨에서 얻은 그 기쁨이 곧 감사입니다. 기쁨이 없는 감사가 어디 있으며, 기도 없는 기쁨이 무슨 기쁨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얻는 그 진실한 감사, 이것이 참된 감사를 유발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건망증이 심한 사람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에 되어진 일, 이것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이대로 내 생애가 여기서 끝이 난다 해도 지난날에 받은 은혜는 역시 은혜가 아닙니까? 어찌 오늘 어려운 일이 있고 고통이 있다 해서 과거에 받은 은혜를 전부 그대로 부정해 버립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좀 아쉽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난날에 받은 은혜는 역시 은혜요, 사랑은 사랑이요, 은총은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자! 생각해보세요. 고등학생이 가정 형편상 대학을 못 간다고 해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까지 키워 준 그 사랑을 다 부정해야 합니까?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욥은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가정을 잃었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시라." 오늘 내가 다 잃었지만 결국 주셨던 것과 누렸던 것은 사실 아닙니까? 과거의 은혜를 현재의 조그마한 불평으로 인해서 부정해 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질 때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나야 이대로 쓰러져 간다 해도 하나님의 주신 은혜는 여전히 은혜요, 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러한 신앙으로만이 절대적 감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 신앙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의로운 고통을 영광으로 선택했습니다. 죄와 타협하며 더러운 이득을 취하며 비굴하게 오래 살아가기보다 차라리 깨끗하게 이대로 사자굴 속에 죽어 가는 것을 그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소유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고, 더러운 이득보다는 영광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질적인 가치 평가 기준의 인생이 아니고는 감사치 못합니다. 참 감사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출세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바르게 살았습니다. 이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번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했습니다. 나는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고귀한 믿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더 크게 여길 때 비로소 진실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영광을 소유보다 큰복으로, 성결을 장수보다 더 큰복으로 그리고 부귀와 영화보다는 차라리 의로운 죽음을 더 복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감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은 항상 반복됩니다. 얻는 법만도 없고 잃어버리는 법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얻는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의 폭격에 의해서 영국의 어느 마을이 아주 초토가 되었는데, 아주 좋은 저택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폐허가 된 땅에 서 있는 내외분에게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위로하느라고 이런 말로 저런 말로 얘기를 합니다. "아주 다 잃어 버렸군요." "아주 다 없어지고 말았군요." 그 때에 남편은 아내를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다 잃어 버렸다고 말하지 맙시다. 당신이 있고 내가 있고 건강이 있고 그리고 이 땅이 있지 않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지혜가 있고 믿음이 있고. 이 폐허에 다시 집을 지을 때는 옛날보다 더 새 집을 지을 수 있지 않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소."

그렇습니다. 다 잃어버린 것 가운데서도 얻은 것이 있는 줄로 아는 사람, 더 크게 여기는 사람, 이 사람에게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가리켜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공주의 아들로 애굽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의 고난을 택하는 것을 그는 영광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쁨이요, 이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면 "전에 행한 대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에 행한 대로, 지금까지 늘 행해 오던 규례대로 그는 오늘 이러한 위기에도 또 한 번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 그것은 버릇됩니다. 원망하게 되면 자꾸 원망하게 됩니다. 불평하게 되면 자꾸 불평하게 됩니다. 그것은 끝없는 불평입니다.

감사도 역시 생활화되어야 하고 이것은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감사합니다. 또 항상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감사한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그런 생활 자세를 가지면 마침내 엄청난 사건을 만나도 "또 한 번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감사를 생활화해야겠습니다.

감사의 성품으로 다시 한 번 중생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할 때에 어떤 역경과 그리고 앞에 죽음이 온다 해도 또 한 번 진지한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알아야겠습니다.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자만이 그 신앙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래 일을 염려하는 사람은 어떠한 큰 은혜 속에서도 감사치 못합니다.

금년에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걱정이 많은 사람은 내년에 흉년이 들까봐 감사 못 합니다. 오늘 내가 받은 은혜는 큽니다. 내일, 모레는 어떻게 하나, 또 걱정이 되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 깨끗하게 위탁해 버린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참 감사를 드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과거에 감사하고 이대로 감사하고 죽는 그 자체를 영광스럽게 여겨서 또 한 번 감사했습니다.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고로 전례대로 하나님 앞에 또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 3:17을 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러한 감사, 이런 절대적인 신앙인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성숙한 감사를 드립시다. 단순한 반응이 아닌 응답의 감사를 드립시다.

나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생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행복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감사하는 자가 행복을 지닌 것입니다. 복이란 별게 아닙니다. 감사하는 그 순간이 복입니다.

많이 소유하고도 걱정에 매였으면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많이 벌고도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으면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감사하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사실은 모르고 믿고 그리고 무조건 감사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사자의 입을 막게 되었고 사자굴 속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그런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그는 깨닫고 그리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는 감사로 승리했습니다. 신앙인의 감사로 승리했습니다.

이 같은 생명력 있는 승리의 감사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적은 소득이 있을 때 감사하고 좀 무엇을 잃었다고 해서 원망하는 이런 낮고 천한 미련한 신앙의 사람들을 이제 한 번 더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얻든 잃든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진정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감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감사하게 하시고, 범사에 감사하여 그 감사로써 승리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신앙인의 감사(다니엘 6:5-10)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놓기로 한 것이니이다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동물과 사람은 같은 점이 많습니다. 먹고산다는 것이나 또 그 생활 양식에 있어서도 비슷한 바가 많습니다. 특별히 본능에 있어서는 아주 같은 점이 있습니다. 생존 본능이나 생식 본능이나 혹은 서식 본능이나 귀소 본능 같은 모든 본능들이 동물과 인간이 마찬가지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인간입니다. 동물일 수 없고, 동물로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엄연히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니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엄연히 동물이면서도 동물같이 살아도 안되고, 동물같이 생각해도 안되고, 동물로 취급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역설적 생애입니다.

사람에게는 웃음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저 브라질 아주 밀림 속에 13년 동안 가서 그 원주민들에게 선교하던 선교사께서 한국 교회에 오셔서 보고 강연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여러 가지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전연 말이 통하지 않는 그런 원주민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아니한 아주 깨끗이 벗고 사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대화를 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선교사의 말씀에 의하면, 아주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전연 안 통하는 사람이라도 딱 만났을 때 저쪽에서 입가에 웃음을 띄우면 "아이쿠! 이제는 살았구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웃는다고 하는 것이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사람은 웃는다는 웃음이 아주 고귀한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반응과 응답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반응이란 영어로 리액션(reaction)이라 합니다. 응답은 리스판스(response)라고 합니다. 리액션과 리스판스는 같은 게 아닙니다.

동물은 다만 반응으로 삽니다. 사물에 대한 즉각적인 반사 작용을 나타내고 삽니다. 춥다, 덥다, 배고프다, 아프다, 이것은 반사이며 하나의 반응입니다. 어떤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응답이란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또 마음에 새기고 그 다음에 자기 것으로 이것에 대해서 응답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율적 응답입니다.

동물에게는 배고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어떻게 좀 다치면 "아야!"하고 꼭 반사를 냅니다. 이런 일은 동물과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픈 것과 고통은 같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픈 것은 반응이요, 고통은 응답입니다. 배고픈 것은 반응이요, 슬픈 것은 응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과 동물은 크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사물에 반사하며 살고 반응으로 살아가고 조건 반사로 행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적 반응 이상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결단하고 그리고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응답입니다.

감사란 응답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응답하는 이것은 결코 반응이 아니요 응답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면 원망하고 나으면 감사하고, 또 아프면 또 원망하고, 마지막에 죽을 때는 무어라고 하고 죽을 겁니까? 이것은 단순한 반응 작용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 깊이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오히려 일이 잘 될 때 또 한 번 생각하고 겸손합니다. 또 한 번 생각하고 회개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응답입니다.

내 신앙이 응답이냐 단순한 반응이냐를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본문에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갈 때 억울하게 붙잡혀 가게 된 포로 청년입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 갑니다. 그 노예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비참한 노예 생활 가운데서도 신실하고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아서, 마침내 그는 왕에 의해 기용되고 높이 등용되어 이제 메대 파사 나라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다리오 왕이란 메대 왕은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방백 120명을 두고 그 위에 그들을 다스리는 총리 3명을 두고 자기는 그 위에 앉아서 정치를 하는 구조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중에 다니엘이 더 출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다시 더 올려서 다니엘로 하여금 온 백성을 다스리게 할 그런 생각을 다리오 왕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방백들이 그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마침내 음모를 꾸미게 되어 어찌하든지 다니엘을 완전히 잡아 없애려고 하는 계획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원체 결백하고 온전한 인격의 사람이기 때문에 무흠해서 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들은 계책을 꾸밉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어서 이것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에게 충성을 가장한 조서를 올렸습니다. 그 조서 내용은 이렇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 누구를 막론하고 왕 이 외에 다른 신에게나 혹은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잡아다가 사자굴 속에 집어넣어서 죽이도록 합시다." 가히 충성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다리오 왕은 일단 조서에 어인을 찍어버렸습니다.

오늘 내용은 그것입니다. 다니엘은 이것이 무엇 때문이고 누구 때문이며 자기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전과 같이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걸고 오늘 본문대로 말한다면 "감사하였더라" 했습니다. 그의 감사는 참으로 위대한 감사였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죽을 줄 알고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자기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지고 억울하게 사자굴 속에 들어가서 사자의 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절대적 감사입니다. 이건 조건 반사가 아닙니다. 이건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요, 성공한다 실패한다는 문제도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아주 넘어선, 아주 초연한 절대적 감사를 드렸습니다. 상대적 감사를 드리는 자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사람을 보고 감사를 하는 사람은 다시 사람을 보고 원망하게 됩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이 용돈을 너무 많이 써서 남들은 2만원을 쓰는데 너는 왜 5만원을 쓰느냐고 말했더니 아들이 대답하는 것을 보세요. "내 친구는 십만원을 쓰는데요" 하더랍니다. 이게 상대적인 선입D봖TXT婉니다. 상대적인 선이란 해결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잘 되면 감사하고, 안 되면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본다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보고, 불의한 사람으로 잘되는 사람, 악하고도 잘사는 사람, 갖은 못된 짓하고도 출세하는 사람, 오래 사는 사람,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이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런 상대적 감사란 즉각적으로 그 어느 시간에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사람보고 감사했으면 또 사람보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있다고 감사했으면 없다고 원망할 것입니다. 병 나았다고 감사했으면 다시 아프면 원망할 것입니다. 사업이 잘 되었다고 감사하면 이제 그 사업이 실패한다면 누구를 원망할 것입니까? 마지막에 죽을 때는 무어라고 하고 죽을 겁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 감사, 절대적 은혜, 절대적 신앙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감사는 믿음입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리고 감사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있는 바와 같이 다니엘은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세, 이것이 감사로 이끌어 줍니다. 사람을 보고 누구보다 낫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직선적인 만남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타인 지향적인 그러한 가치 평가란 또 다시 타인 지향적으로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한 번 직선적으로 마주 앉아서 생각해봅시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원망하든지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기도 없이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만남이 없이 진정한 감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데살로니가전서 5:16 이하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기쁨이 있고, 기도하는 기쁨에서 얻은 그 기쁨이 곧 감사입니다. 기쁨이 없는 감사가 어디 있으며, 기도 없는 기쁨이 무슨 기쁨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얻는 그 진실한 감사, 이것이 참된 감사를 유발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건망증이 심한 사람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에 되어진 일, 이것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이대로 내 생애가 여기서 끝이 난다 해도 지난날에 받은 은혜는 역시 은혜가 아닙니까? 어찌 오늘 어려운 일이 있고 고통이 있다 해서 과거에 받은 은혜를 전부 그대로 부정해 버립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좀 아쉽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난날에 받은 은혜는 역시 은혜요, 사랑은 사랑이요, 은총은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자! 생각해보세요. 고등학생이 가정 형편상 대학을 못 간다고 해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까지 키워 준 그 사랑을 다 부정해야 합니까?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욥은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가정을 잃었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시라." 오늘 내가 다 잃었지만 결국 주셨던 것과 누렸던 것은 사실 아닙니까? 과거의 은혜를 현재의 조그마한 불평으로 인해서 부정해 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 중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질 때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나야 이대로 쓰러져 간다 해도 하나님의 주신 은혜는 여전히 은혜요, 또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러한 신앙으로만이 절대적 감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 신앙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의로운 고통을 영광으로 선택했습니다. 죄와 타협하며 더러운 이득을 취하며 비굴하게 오래 살아가기보다 차라리 깨끗하게 이대로 사자굴 속에 죽어 가는 것을 그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소유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고, 더러운 이득보다는 영광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질적인 가치 평가 기준의 인생이 아니고는 감사치 못합니다. 참 감사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출세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바르게 살았습니다. 이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번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했습니다. 나는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고귀한 믿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더 크게 여길 때 비로소 진실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영광을 소유보다 큰복으로, 성결을 장수보다 더 큰복으로 그리고 부귀와 영화보다는 차라리 의로운 죽음을 더 복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감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은 항상 반복됩니다. 얻는 법만도 없고 잃어버리는 법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얻는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의 폭격에 의해서 영국의 어느 마을이 아주 초토가 되었는데, 아주 좋은 저택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폐허가 된 땅에 서 있는 내외분에게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위로하느라고 이런 말로 저런 말로 얘기를 합니다. "아주 다 잃어 버렸군요." "아주 다 없어지고 말았군요." 그 때에 남편은 아내를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다 잃어 버렸다고 말하지 맙시다. 당신이 있고 내가 있고 건강이 있고 그리고 이 땅이 있지 않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지혜가 있고 믿음이 있고. 이 폐허에 다시 집을 지을 때는 옛날보다 더 새 집을 지을 수 있지 않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소."

그렇습니다. 다 잃어버린 것 가운데서도 얻은 것이 있는 줄로 아는 사람, 더 크게 여기는 사람, 이 사람에게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가리켜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공주의 아들로 애굽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의 고난을 택하는 것을 그는 영광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쁨이요, 이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면 "전에 행한 대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에 행한 대로, 지금까지 늘 행해 오던 규례대로 그는 오늘 이러한 위기에도 또 한 번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 그것은 버릇됩니다. 원망하게 되면 자꾸 원망하게 됩니다. 불평하게 되면 자꾸 불평하게 됩니다. 그것은 끝없는 불평입니다.

감사도 역시 생활화되어야 하고 이것은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조그만 일에도 감사합니다. 또 항상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감사한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그런 생활 자세를 가지면 마침내 엄청난 사건을 만나도 "또 한 번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감사를 생활화해야겠습니다.

감사의 성품으로 다시 한 번 중생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할 때에 어떤 역경과 그리고 앞에 죽음이 온다 해도 또 한 번 진지한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알아야겠습니다.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자만이 그 신앙 속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래 일을 염려하는 사람은 어떠한 큰 은혜 속에서도 감사치 못합니다.

금년에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걱정이 많은 사람은 내년에 흉년이 들까봐 감사 못 합니다. 오늘 내가 받은 은혜는 큽니다. 내일, 모레는 어떻게 하나, 또 걱정이 되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 깨끗하게 위탁해 버린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참 감사를 드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과거에 감사하고 이대로 감사하고 죽는 그 자체를 영광스럽게 여겨서 또 한 번 감사했습니다.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고로 전례대로 하나님 앞에 또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 3:17을 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러한 감사, 이런 절대적인 신앙인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성숙한 감사를 드립시다. 단순한 반응이 아닌 응답의 감사를 드립시다.

나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생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행복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감사하는 자가 행복을 지닌 것입니다. 복이란 별게 아닙니다. 감사하는 그 순간이 복입니다.

많이 소유하고도 걱정에 매였으면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많이 벌고도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으면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감사하면 그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사실은 모르고 믿고 그리고 무조건 감사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사자의 입을 막게 되었고 사자굴 속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그런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그는 깨닫고 그리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는 감사로 승리했습니다. 신앙인의 감사로 승리했습니다.

이 같은 생명력 있는 승리의 감사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적은 소득이 있을 때 감사하고 좀 무엇을 잃었다고 해서 원망하는 이런 낮고 천한 미련한 신앙의 사람들을 이제 한 번 더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얻든 잃든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진정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감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감사하게 하시고, 범사에 감사하여 그 감사로써 승리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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