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강 글자를 해석하지 못하는 술사들(5:7-9)
5:7-9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여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바벨론의 벨사살 임금에게 큰 위기가 임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왕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머리 숙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벨사살 임금은 그렇치 못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했던 거룩한 기명들을 가져다가 거기다가 술을 부어 마셨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독했습니다. 벨사살 임금은 마음이 높아 있었고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것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종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줄 줄 아는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멸시하지 말고 하나님의 것들을 귀하게 사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벨사살 임금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에 바벨론의 헛된 신들,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행여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을 찬양하는 우리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벨사살 임금은 교만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오히려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술잔치를 베풀어놓고 귀족들 일천 명을 초대했습니다. 자기가 영광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롯 임금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충이 먹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버려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도 내가 영광 받으려고 하지 말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했다"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낮추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마음을 높였던 벨사살 임금을 벌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왕의 몸과 마음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7절을 보십니다. "왕이 크게 소리하여." 비명을 질렀습니다.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을 다 불러오게 했습니다.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바벨론 박사들을 불러와서 두 가지를 요구를 했습니다. 첫째로,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이 글자를 먼저 읽으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글자가 무슨 의미인지는 둘째치고 먼저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어야지요. 그 다음 두번째로,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마치 그 옛날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을 꾸고 나서 "먼저 꿈을 말하고, 그 해석을 내게 말하라"고 했듯이 "먼저 글자를 읽고, 그리고 나서 그 해석을 내게 보여라"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다니엘이 그 글자를 읽었습니다. 뭐라고 읽었습니까?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아람어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다니엘서도 아람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얼마든지 아람어를 읽고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박사들이 그 아람어를 읽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아마 같은 아람어라도 글씨체가 조금 특이하게 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똑같은 한자라도 초서체로 흘려 쓰면 보통 사람들이 읽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아람어라도 초서체로 흘려 써놓으면 보통 사람은 읽기 힘듭니다.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누구든지 가능케 하면 세 가지 특권을 준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자주옷을 입히고." 예나 지금이나 자주 색깔은 왕을 나타내는 색깔입니다. 왕의 색입니다. 동양도 그렇지 않습니까? 중국 북경에 가면 옛날 왕들이 살던 성이 있습니다. 무슨 성이라고 합니까? 자금성이라고 합니다. 왕을 상징하는 색깔입니다. 자주옷을 입히겠다고 하는 것은 왕복을 입히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에 8:15을 보면 왕이 쓰는 금 면류관을 쓰고, 자주옷을 입고서, 즉 왕복을 입고 왕 앞에 나타날 때에 바사의 수산 성의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면서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누구입니까? 누가 자주옷을 입었습니까? 모르드개였습니다. 하만은 자기가 그렇게 될 줄 알고 왕에게 권했었는데 자기가 죽이고자 했던 모르드개가 자주옷을 입고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요즘은 너나할것없이 다 금목걸이를 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고, 아무리 권세가 크다 해도 금목걸이는 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하사한 사람, 왕이 드리워준 사람만 금목걸이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창 41:42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구 이야기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왕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서 그의 손에 끼워주었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그리고 금사슬로 그의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 요셉입니다. 왕이 걸어주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사슬로 목에 두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한 영예입니다. 영광입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일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다니엘서 5장에서는 바벨론 도성을 다스리는 왕이 벨사살 왕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보면 벨사살 임금의 아버지 나보니두스라는 사람이 바벨론의 마지막 임금이었습니다. 이 나보니두스가 군사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습니다. 원정을 떠난 지 일년이 지났습니다. 자기 아들 벨사살에게 바벨론 도성을 통치하도록 위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치리자는 사실 누구입니까?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실제 왕입니다. 그 다음 둘째 치리자는 누구입니까? 벨사살입니다. 그 다음 셋째 치리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벨사살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를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소리겠습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는 자가 하는 소리입니다. 그날 밤이면 바벨론이 멸망당하고 마는데 셋째 치리자가 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주옷을 입고 금사슬을 건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이 지나면 끝인데 말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딩 짓고, 돈 많이 벌고, 권세 있고,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여러분, 다미엔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다미엔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 하와이 옆에 있는 조그만 몰로카이 섬에 가기로 했습니다. 이 섬은 문둥병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거기서 일평생 나환자를 돌보면서 보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환자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짜내서 자기 몸에 수혈했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문둥병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 다미엔은 나환자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다미엔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이 세상에 올 때 빈 몸으로 빈손으로 온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도 철저하게 남긴 것 하나 없이 빈 몸으로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큰 상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이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썼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남기려고 애를 쓰지 말고 다미엔처럼 철저하게 빈 몸으로 갈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최대한 노력해서 더 많이 주를 위해서 쓰고 돌아갈 수 있는, 그래서 하늘 나라에서 큰 칭찬과 상을 받으시는 우리 승동의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을 보십시다.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벌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인데 세상 사람을 부른다고 해결이 됩니까? 소용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때에 따라 어려운 문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을 만난다고 해결이 됩니까?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박사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에 보니까 결과가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라고 했습니다. 더 크게 번민했다고 했습니다. 6절에 보면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라고 했는데 이제 믿었던 바벨론 박사들이 해결하지 못하니까 번민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다. 사람을 믿으면 더 번민합니다. 꼭 낙심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해 주고, 용서해 줄 대상은 되지만, 사람을 믿으면 꼭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의지하고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6절에도 그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술을 마셔서 벌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창백해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바벨론 박사들이 들어왔을 때 얼굴의 빛이 본래의 색깔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박사들이 해결해 주리라 생각하면서 안도의 한숨의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던 박사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그의 낯빛이 다시 변하였습니다. 더 창백해졌습니다. 핏기가 사라졌습니다.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이제는 왕뿐만 아니라 거기에 참석한 귀인들도 다 놀랐습니다. 틀림없이 바벨론 박사들이 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박사들이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엄청나고 무섭고 두려운 일들이 생길 것이라 생각되어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도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내 힘으로, 세상적인 방법에 의지해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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