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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표적 - 신학적 해석 요6:16~21

by 【고동엽】 2022.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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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BIvH24ys8U

◈폭풍우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표적 - 신학적 해석   요6:16~21    

    

본문 <폭풍우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 표적은  (마14:22-33, 막6:45-52, 요6:15-21)

 

<풍랑을 잔잔케 하신 표적>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마8:23~27, 막4:35-41, 눅8:22-25)

                                                                                                              

◑배경

 

요한복음 6장에는 크게 3사건이 나옵니다.

 

 

*5병2어 기적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요6:1~13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폭풍 속으로 예수님 걸어오심 요6:14~21 (본문)

*(이튿날 무리들이 가버나움으로 건너 옴) 생명의 양식 설교 요6:22~끝

 

5천명을 먹이신 기적 후에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요6:14~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분위기를 알아채시고 이를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6:15

앞서 제자들을 재촉해서 호수 건너편 벳새다로 보내십니다. 막6:45

아마 예수님은 혼자 조용히 은밀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마14:22, 막6:45)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치 제자들을 군중들과 떼어놓기라도 하듯

재촉하여 제자들을 가버나움으로 보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스스로 떠나가는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요6:16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진술이 다른 것 같지만, 유추하면 이렇습니다. 

 

이제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이 마치고, 또 해도 지는 상황입니다. 그 날 상황 종료입니다.

제자들은 집이나 본부, 근거지인 호수건너편 벳새다로 돌아가려 했고

그러자 예수님은 '이왕 가려면 빨리 가라'고 재촉하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본문인 요한복음을 근거해서 유추하면,

마치 군중들과 같은 생각을 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자

반발이라도 하듯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만나를 먹고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애굽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히브리인들처럼,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그러나 떠나온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본론 :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 본문의 신학적 해석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 (영어성경에 3~4마일) 쯤 떨어졌고   *꽤 먼 거리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어서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때는 밤 4경이라 했습니다. 막6:48

유대인은 밤을 네 경으로 나누는데, 4경은 마지막 밤, 그러니 가장 깊은 때입니다. *3시~6시

그러니 제자들이 밤1경에 떠났다고 볼 때, 6~9시간 가량, 밤새 풍랑에 시달렸고,

호수 건너편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던 상황입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9:8)라고 하셨듯이,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드디어 나타나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6:20)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개역 '내니 두려워 말라'

KJV 'It is I (나다)' 라고 되어있는데

헬라어에 '에고 에이미' I am 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실 때 사용하신 워딩으로 유명하죠.

'나는 포도나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등

 

본문에서 '내니' 를 그저 '나야 나!' 라고 보지 않고,

예수님의 메시야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에고 에이미' 워딩으로 봅니다.

이 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다.

 

주제를 먼저 말씀드리면,

'나는 나다'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자기의 어떤 메시야적 정체성을 드러내셨느냐?

'죽음의 강을 건너시는, 죽음을 정복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본문을 통해서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자 사도요한의 의도라는 것이죠. 

 

    참고로,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의 근거는 출3:14로 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요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곧 (어느새)” 목적지인 가버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14:32, 막6:51에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배에 타지 않으십니다.

 

어쨌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자

“어느새”(즉시, 갑자기) 목적지에 가 닿도록 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이요,

-“나다”라고 스스로 밝히심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함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풍랑 위를 걸으신 예수님> 표적이 기록된 의도는

우리는 쉽게 성경을 실용적으로,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제자들의 문제 해결, 우리 신자들의 난처한 곤경을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 그리스도'

이렇게 해석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신학적 교육을 안 받으면,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특히 요한복음이 '표적'으로 가득 찬 책이며,

사도요한이 본문의 이 표적을 기록하면서 의도한 바는, 즉 본문의 주제는

<죽음을 지나, 천국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바다'는 종종 죽음을 상징합니다.

성경에도 '유리바다'가 나오죠. 계15:2

천국이 있는데, 그게 바다 건너편에 있습니다.

그러니 천국으로 가려면(지옥도 마찬가지고요) '바다를 건너야' 당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달해서, 위성사진으로 지구를 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고대인들은 '바다'를 '죽음'과 결부시켜 생각했습니다. 자연적인 추리이죠.

바다 너머에, 바다 끝에.. 어떤 저 세상이 있다고 생각했고,

신약성경이 쓰여진 당시인 헬라 사람들도

그 고대 문헌에 보면 죽음을 종종 '강, 바다을 건너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쉽게 건너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만

신약 당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는'일은, '죽음의 강, 죽음의 바다'를 건너는 일로

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적어도 6시간 이상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바다 건너편 원하던 목적지에 전혀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1) 물 위를 걸어오셔서 - 자연 뿐만 아니라 죽음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

2) '내니' (에고 에이미) - 나는 구약부터 계시된 하나님 이라고 하시면서

3) 풍랑 속의 배를 “즉시” 건너편 육지에 이르게 해 주셨습니다.

 

   '배는 <곧 immediately>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6:21

 

즉 모든 인간이 건너야 하는

그 죽음의 바다를,

쉽게 건너게 해 주시는, 능력을 가지신 그리스도... 이것을 본문이 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은 '현세적 문제 해결의 능력자 그리스도'를 믿고 싶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바는,

또한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는 바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절대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죽음의 문제에서 해결해주시고

그 풍랑치고 폭풍우 치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 찬양드립니다!

 

 

이 본문이 지금 젊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겠지만

지금 중환자 실에 누워있는 분들에게 이 본문을 들려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너무나 기뻐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 은혜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병행구절인 마14장을 보십시오.

 

이 구절도 '현재적 곤경 해결,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14: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가 의심해서 '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해상구조대, 119'의 역할을 하셨다는 게 아니라,

본문의 의도는, 사람들은 구원을 의심하여 물에 빠질 수도 있는데

예수님은 결국 '건져주신다'입니다.

 

또한 우리가 바다 건너편 천국에 이르는 길은풍랑이 치는 바다와 같이 매우 섭고 혼돈하는 바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의 바다를 건너도록 도와주시고

손을 내밀어, 물어 빠진 베드로처럼,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특별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심을 밝혔을 때,

다른 이들이 다 떠나갈 때에도

(이들은 오병이어 다음 날, 호수 건너편에서 떡을 먹고자, 기적을 보고자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을 사림인 제자들은,

예수님이 호수를 건너게 해 주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남았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68

 

 

 

▲전후 관계

그렇다면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요6:1~15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이어지는 본문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6:16~21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5병2어 표적이 단순히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신 구제가 아니라

그것이 성찬의 예표요, 예수님의 십자가, 즉 몸이 떼어지는(찢어지는) 사건을 예표한다는 내용은 

'뗄 때 역사가 나타난다(클릭)'을 참조하십시오.

 

그러니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이어지는 본문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곧 “믿음”으로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튿날 무리들이 가버나움으로 건너 왔는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설교하십니다. 요6:22~끝

 

이렇게 예수님은 언제나 '영생'에 초점 맞춰 설교하시고,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 새벽에 (혹은 전날 밤에)

예수님이 호수 위로 걸어오셔서

자기들의 고향에(천국에) 안전하게 돌아오게 해 주신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죠.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6:68

 

이렇게 구원받을 사람들인 제자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바다를 건너게 해 주신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예수님 곁을 결코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이, 지금 죽음을 앞두고 있고

또한 언젠가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가야 할 우리들에게

참으로 소망의 마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렇게 물 위를 건너신 사건이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고 볼 때

오늘도 우리의 삶은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유월절 passover 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도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독수리가 바람에 몸을 태우듯 흔들림에 자신을 태우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여행을 할 수 있기에,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며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있기 마련인 고통과 좌절에서도

언제나 “믿음”과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7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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