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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문 되신 예수/ 요 10: 1-10
유대의 양치기 풍속
유대 나라를 떠올릴 때면 우리는 목자들이 양을 이끌고 이 언덕 저 언덕을 넘어 다니는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목자와 양이 어울려 다니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고 합니다. 저도 성지 순례를 하면서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것과 같은 정경을 보고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도로가 대부분 차가 다니는 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많이 변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고 계시던 당시에는 예루살렘 주변과 갈릴리 일부 지역이 목초지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많은 목자들이 자기 양을 이끌고 다니며 풀을 뜯기고 물을 먹이는 평화로운 모습을 어디서든지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에 ‘왜 저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의아해 했을 정도였습니다.
목자들은 하루종일 양에게 풀을 뜯기다가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면 자기 양들을 몰고 공동 우리로 옵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개인 우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자들은 여러 가정이 공동으로 만든 우리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 공동 우리는 보통 돌담을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 만드는데,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떼들을 문으로 다 들이고 나면 그 문 옆에는 문지기가 있어 밤새도록 그 양들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하나 둘 나와서 문지기의 확인을 받고 우리 안에 들어가서 자기 양을 부릅니다. 수십 혹은 수백 마리 양 가운데서 눈으로 자기 양을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자기 양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그를 자기 목자로 아는 양들은 전부 그 목자 앞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참 멋있는 풍경입니다. 자기 양의 수가 조금 적은 경우에는 가끔 양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목자의 소리를 듣고 그 목자의 양들은 전부 모입니다. 이제 목자가 문을 나와 초원을 향해 가면 그 목자의 양들만 우르르 따라 나갑니다. 그러면 또 다른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배경을 알면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에 비유하신 뜻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막연히 짐작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진리가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서 왜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다시 한번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구원
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양의 문’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10절은 그 의미를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지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여기서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말은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시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일컬어 ‘양의 문’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7,80년이면 다 소진하여 없어지고 마는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육신의 생명으로는 영원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왜 육신의 생명은 영적 생명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영생으로 이어지지를 못할까요?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이 진리를 간단 명료하게 가르쳐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죽음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누구든지 구원받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서울시만 해도 하루에 463명의 어린애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매일 500여명의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의 씨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제 아무리 죄인이 아닌 것처럼 가장해도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있어도, 성자나 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해도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 가운데 갑자기 인물이 예뻐지고 맵시가 나는 사람을 보면 대개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아, 성형수술 받은 모양이구나.” 주저앉은 콧대가 우뚝 솟고, 옆으로 찢어진 실눈에 쌍꺼풀이 예쁘게 드리워진 것을 보면 “성형수술 받았구나. 어디서 받았니?” 하면서 부러워합니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아름답게 보이면 그것도 천국의 일면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에게서 태어날 자식입니다. 자신은 성형수술을 해서 코를 높이고, 눈을 크게 만들고, 광대뼈를 깎아내어 아름답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식만큼은 어쩌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성형수술을 받는다고 아기가 배속에서 성형수술을 받고 태어날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의 원래 모양을 닮아 납작한 코나 실눈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형수술로 흉한 모습을 감추려해도 자식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뱃속에서 교양을 배우고 나올 리도 만무하고, 죄인이 아닌 것처럼 특별한 옷을 입고 나올 수도 없습니다. 자녀들을 보십시오. 그들 역시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보십시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할 때 단순히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치러야 할 무서운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구원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나이가 얼마나 들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관이 없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은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문, 예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불꽃을 훔쳐올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5절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시체가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살아납니까? 우리가 시체에게 기대할 수 유일한 것이 있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힘이나 노력으로 영적 생명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으려면 그를 찾아와야 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즉 그 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썩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을 심어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우리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드디어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때 이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 확실히 믿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래서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나에게 오면 내가 영생을 주겠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데 여러분이 돌아서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 다 구원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주변 서초동 일대만 해도 90퍼센트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생명을 그들도 값없이 얻는 축복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양의 우리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담을 넘어가면 그는 강도요 절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보다 앞에 온 모든 사람을 일컬어 ‘강도요, 절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구약 시대에 온 모든 선지자들을 두고 강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눈을 뜨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무릎꿇고 절한 귀한 형제를 유대 나라 사회에서 축출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과 예수님 당시에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던 사람들을 두고 강도요 절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의 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심지어 목자라 해도 그 문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그렇다면 양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문 말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담을 넘어가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니라 강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데, 세상 사람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독선주의니 배타주의니 하며 기독교를 욕하고 비방합니다. 그들 생각에는 종교 다원주의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따라서 어느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좋겠는데, 기독교는 유달리 타종교를 배척하고 오직 예수만이 구원자시라고 주장하니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중에는 이런 독선이 싫어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것, 진리를 주장하는 것
카피라이터 이만재 씨가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여, 그것을 토대로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가 다 아는 상식적인 것들인데,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교회 가기 싫은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인 것 같다. 타종교, 타종파를 존중할 줄 알아야 내 종교, 내 종파도 존중받는다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그 이웃에 이웃 종교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특유의 종교 이기주의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안 간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과 ‘진리를 주장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타종교의 지도자들도 존경합니다. 우리는 불교 믿는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또 각 종교에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수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억지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종교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지 않느냐는 이런 값싼 이론 때문에 진주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돼지에게 던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중에 서로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당신 아내가 내 아내이고, 내 아내가 당신 아내이니, 기분 좋은 대로 삽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존경한다’, ‘사랑한다’, ‘관용한다’는 말 때문에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바보 같은 짓은 아무도 안 합니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몇 해전 성탄절에 불교 방송에서 스님 아나운서가 “세계의 성인 중의 하나인 예수가 탄생한 것을 축하합니다.”라고 축하 방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흥분한 어떤 카톨릭 신부가 요란스럽게 감사의 답례를 한 것입니다. 이 일을 두고 한 뉴스 앵커는 “드디어 모든 종교의 벽이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시발점이 시작되었습니다.”라며 흥분하여 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창시자들을 보십시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은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당당하게 인도할 권한을 가진 구원자가 예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양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바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말하는 것이 바른 진리라면 설혹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이나 미움을 받는다 해도, 심지어 순교를 당하게 된다 해도 우리의 주장을 굽히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훌륭한 장로였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 솔직하게 말하라.” 이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못된 놈, 참람하고 건방진 놈.” 하고는 야고보를 끌어다가 저 높은 벼랑에서 집어 던졌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순교를 당할 지라도 굽혀서는 안 될 진리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다.”라는 말만 들으면 비위가 상하는 분이 계십니까? 물론 관용이 많고, 너그러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진리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 손에 있는 보석은 가짜요.”라고 말하면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손에 있는 진짜 보석을 두고 “내 것은 진짜요!”라고 하는 주장은 아무리 해도 지나친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다.”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속이 좁은 것도 아니고, 배타적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바른 것을 말할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 사실에 대해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로 출입하는 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10절은 이것을 약간 다른 비유로 설명합니다. 10절 중간을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하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놓고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물에서 건져 주고는 “이제 당신 맘대로 하시오.” 하고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눕혀 둔 채 그 자리를 떠나는 냉혹한 구조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 지 잘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고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몸에 포도주와 기름을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이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내팽개치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약대에다가 그 환자를 싣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간호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공무상 부득불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어 환자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자기 대신 간호를 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는 손을 터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넘쳐날 수 있도록 계속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양의 문을 드나들면서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양의 행복한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십시오. 다윗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나를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2) 날마다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그 생명이 터질 것 같이 풍성해지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말을 오해하고는 예수님께서 만사 형통을 약속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단보다도 더 큰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를 믿었다고 만사 형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만사 형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만사 형통하게 되면 영적인 생명이 건강해 지기보다 병들어 버릴 가능성이 십중팔구로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사 형통하게 만들어 주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이런 찬송 가사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찬송의 원래 가사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찬송가를 작사한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라는 부인은 일생 동안 맹인으로 살면서 수천 편의 찬송시를 지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라고 칭송을 받는 분입니다. 원문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잘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이 찬송을 번역하는 사람이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불교에서 자주 말하는 식으로 “만사 형통 하리라”하고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세상에서 만사형통 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생명의 질적 차이
생명이라고 해서 다 같은 생명은 아닙니다. 생명에도 엄연하게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병상에서 고생하는 환자를 보십시오. 그는 숨만 깔딱깔딱 쉬고 있습니다. 생명이 틀림없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서 생명의 활력이나 풍성함, 능력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지칠 줄 모르고 뛰는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생명은 숨만 깔딱거리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활화산 같이 타오르는 생명력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일하고, 창조하는 생명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집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엄마가 주는 대로 잘 먹고, 힘차게 뛰놀기 때문에 그 생명이 터질 것처럼 풍성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이런 생명입니다. 그저 ‘숨만 발딱발딱 쉬다가 천당이나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그런 빈약한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을 때 잠깐 기도하는 것말고는 생명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으면, 그 생명의 풍성함을 맛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서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먹고 성령의 생수를 맘껏 들이키며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받으면 우리는 절대 숨만 깔딱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불안이나 두려움이 떠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자유함이 없습니까? 번번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게 끌려 다닙니까? 그런 대로 살고 있는데도 만족함이 없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아직 어린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이 어리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얻어야만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면 우리는 이팔청춘의 젊은이들과 같이 약동하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생명과 아울러 우리의 믿음 역시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설혹 내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우리 마음에서 평안과 만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유함이 있습니다.
어느 제자 반에서 저에게 카드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제자 반을 대표해서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들 모두의 생각을 담은 것 같습니다. 그 카드에 적힌 글을 읽으며 저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생겼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하루 하루를 살게 되었답니다. 한 때 가시로 생각되었던 고통까지도 이제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하는 것이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아도,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는 고통이 떠나지 않아도 그것이 우리를 억압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의 불을 끄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불안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모자라는 것이 많다 해도 자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최고 경지
이와 같이 우리의 생명이 풍성해져서 40대의 성인처럼 믿음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가진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몽땅 내어놓아도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무엇을 얻어서가 아니라 내 것을 다 주님께 드리고도 오히려 기쁨이 충만하고 평안과 만족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믿음의 최고 경지라고 할 것입니다.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목사님.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목사님도 그렇게 하시지 못하면서 왜 그러세요?” 그 말이 옳습니다. 저의 믿음도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의 수준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요즈음 저를 방문하는 선교사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분들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다 배울 만큼 배웠기에 이 사회의 어느 분야로 가도 제 몫을 할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위 말하는 세상에서의 출세도, 자녀를 공부 잘 시켜 일류대학에 들여보내겠다는 꿈도, 자가용을 굴리며 온 가족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삶도 다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아프리카나 중동 아시아, 혹은 동남아 오지로 가서 말라리아와 모기와 싸우면서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아직 30대 중반밖에 안된 사람인데도 그 얼굴에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가 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안식년을 하면서 살집이 없어서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도 그들의 눈빛이나 말에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기쁨의 광채가 서려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자기 것을 다 주님을 위해서 포기한 후에 누리게 되는 마음의 평안, 자유함, 만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찡그린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얻으려고만 하지 않습니까? “주여 주옵소서. 주옵소서.” 하다가 보니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안 준다고 조르고 있으니 그 마음에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까? 무슨 자유함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많이 받아먹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생수를 밤낮 없이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매일매일 받아먹다 보면 주님이 나에게 심어주신 생명은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도 “할렐루야.”하고 춤추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감히 이런 사람을 범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이 사람을 꺾어 놓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도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자유를 누리는 사람을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리며 아름다고 풍성한 하루 하루를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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