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성공과 행복! (고후 6:8-10)
현대인들에게 가장 화려한 단어는 뭐니뭐니 해도 성공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성공은 오늘 현대인들의 우상이고 삶의 목적이고 꿈입니다. 성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가고 소망 있게 살고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패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옛말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지만 실패는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라고 꿈꾸는 성공개념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성공개념은 너무 보이는 것에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너무 양으로 따지고 높이로 평가하고 길이로 재고 크기로 화려함으로 평가하려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 양으로 크기로 재니까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실패자로 간주해 버립니다. 얼마나 큰 문제입니까. 그래서 가지면 더 가지려 안달하고 적으면 실패자로 간주되어 스스로 낙오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면 심한 상실감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 중에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상실감 때문입니다. 3성 장군이 전역을 할 때 그때 기분이 3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기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한 성공의 개념, 만족함, 행복의 기준은 지극히 정신적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고 값지고 귀한 것은 모두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보다 깊고 값지고 소중한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온다는 말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것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양적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참 값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이고 근거이고 권위이고 목적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위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또 은사입니다. 은사도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얻고 나서 나머지 조건들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것을 얻고 보니 나머지는 전혀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또 사모함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람의 값은 존귀함에 있습니다. 이 존귀함은 어떤 외형적 자격으로는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외형적 자격이나 조건은 이를테면 좋을 뿐입니다. 높은 자리, 많은 돈은 가지고 있으면 이를테면 좋을 뿐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행복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이왕이면 좋은 것일 뿐 행복이나 만족함이나 존귀함에 절대적인 요소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못생김의 아름다움이 더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정말 못생겨서 늘 비관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왜 나를 이렇게 못생기게 만드셨습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못생긴 대신 150세까지 살게 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 50세 때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얼굴을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다음 해 죽었습니다. 죽어서 그 천사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왜 150세까지 살게 해 주겠다고 하더니 벌써 오라느냐' 천사가 자세히 보더니 '당신이 그 여자냐, 얼굴이 예뻐져서 모르고 잘못 부른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물론 우수께 이야기지만 행복과 기쁨의 삶은 잘생김이나 넉넉함이나 젊음이나 화려함과는 상관도 없습니다. 진정 행복의 원천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내 마음에 채우고 내 영혼에 채우고 그렇게 채워진 나를 발견할 때 그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값이 있고 멋이 있는 인생이 됩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고 만족함이고 기쁨이고 성공한 인생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제시한 '진정한 값, 소중함, 성공, 승리의 모습'이 무엇인가?
①'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사람들은 황당하게 들리며 속이는 말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말들은 세뇌(洗腦)이지 사실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도 성경의 약속들을 체험하게 될 때 그 말씀이 참된 것임을 밝히 알게 됩니다.
②'세상에서 무명하나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유명은 화려함, 나타남, 보임, 올라감, 누림, 군림 등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이것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 것은 영적 내면적인 성숙함이고 영적 부요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당시 바울을 볼 때 참 한심하게 보았습니다. 세상 적으로 얼마든지 화려하게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던 바울이 어느 날 그것들을 다 버리고 초라하게 전도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바보 같은 사람으로, 한심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뒤에서 쑤군쑤군하는 소리를 듣고 바울이 '나는 세상에서 무명하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명하다' 여러분은 이 같은 간증의 뜻을 알겠습니까? 이것이 바울이 제시한 소중한 삶의 내용입니다.
③'세상에서는 죽은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살아있으나 죽은 자나 마찬가지라고, 또 마치 미친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그 깊은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초라하게 살아가는 바울의 모습을 보고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참 무서운 규정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전도자들이 이런 경우에 힘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전도자로 헌신했다가도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 의기소침하고 때로 주저앉게도 됩니다. 세상이 모두 외형적인 화려함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데 그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이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끔 어떤 모임에 가보면 모두 화려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크게 사업을 하는 동창, 그에 비하면 현실적으로 나는 아주 초라하게 전도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화려한 삶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느껴지거나 부럽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많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조건들을 다 포기하고 이 길을 걷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듣자니까 사람들이 '이제 바울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하고 말합니다. 너무 초라한 그의 행색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세상적인 이 기준을 신앙적으로 재해석하고 재 규정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과감하게 그 규정, 그 기준을 재해석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는 죽은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살아 있는 자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결단은 자기부정이 없으면 내릴 수 없는 결단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이 결단을 내리는데 주저하면 세상과 결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자기부정에 무서운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일본의 내촌감삼은 일본이 자랑하는 지성인입니다. 그는 천황숭배시절에 일본 제일고보의 교사였습니다. 고보는 일본에서 일류 고입니다. 학교 경축식 날 천황숭배의식이 거행될 때 모두 그 참배에 참여해야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는 상당한 용기입니다. 그 시대에 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부정해야만 하는 용기입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에서 매국노라고 침을 뱉었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언론은 연일 타도에 나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표 냈습니다. 그것은 이미 각오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으로 떠나 맨해튼 거리에서 음식장사를 했습니다. 아주 초라한 행색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기자들이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이런 초라함을 자초했는가' 그때 그는 의연하게 이렇게 대답하기를 '나는 부귀와 영화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명예도 원치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 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그것을 지금도 믿습니다. 고로 나는 현재의 평안을 위해서 우상에게 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바로 이 고백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죽은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있는 자입니다.' 얼마나 당당한 고백입니까? 이것이 예수 안에서 변화 받은 사람의 가치관이고,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할/
④'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쯤 감옥에서 한숨쉬고 고민하고 근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한숨쉬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옥을 마치 내 안방처럼 더 좋게 조용하게 앉아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나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다'라고 말합니다.
⑤'나는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부자들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고가품은 언제나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몇 십억씩 되는 아파트는 불티나게 팔려나갑니다. 그런데 없는 사람은 또 철저하게 없습니다. 그래서 비관하고 자살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너무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비교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가졌으면서도 늘 빈곤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중국의 호적이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동서양의 행복 관은 다르다, 괜히 서양문화가 들어와서 갈증만 심화시켰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가진 것이라고는 전무했습니다. 가정도 없고 집 한 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누구보다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난한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신앙 인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영적인 풍부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할/
이 영적 은혜를 입고 보면 이 눈이 뜨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영적 은혜를 입고 이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하셨고 우리는 가진 것이 없어도 누구보다도 부하고 다 가진 사람처럼 살게 하셨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언제나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드셨고, 세상에서 무명한자 같으나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자를 만드셨고 우리를 이렇게 높이시고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이 존귀함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
빌리그램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평생 세 번 유혹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공화당에서 상원의원이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부통령이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어느 부자가 돈을 들고 와 큰 대학을 설립할 테니 와서 총장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유혹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평생 전도자로 살다가 죽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부요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고 기쁨이 있는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수준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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