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늑대와 개
몹시 굶주려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늑대가 어느 날 숲 속에서 반지르르 윤이 나고 살이 토실토실한 개를 만났다.
* 늑대: 넌 참 행복해 보이는구나!
* 개: 나랑 같이 가자.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너를 좀 봐. 너무 볼품없고 비참해. 그렇게 있다간 굶어죽고 말 거야.
* 늑대: 널 따라가면 난 뭘 해야 하는데?
* 개: 별거 없어. 가끔 사냥도 나가고, 집에서는 주인한테 잘 보이기만 하면돼. 그러면 주인이 귀여워해 주고 맛있는 음식도 갖다 주지.
* 늑대: (기쁜 마음으로 개를 따라가다 문득 개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보며) 그게 뭐야?
* 개: 이거?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내가 차고 다니는 목걸이일 뿐이야.
* 늑대: 목걸이! 그럼 넌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다는 말이니?
* 개: 늘 그런 건 아냐.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해. 대신 맛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잖아.
* 늑대: 그렇지 않아, 나한테는 무척 중요해.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을 준다고 해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자유와 바꿀 수 없어
2. 참된 자유
호주 시드니의 교도소에 수감된 한 죄수가 탈옥을 꿈꿨다. 그는 빵 배달차가 일정한 시간 교도소에 오는 것을 눈여겨봤다. 그리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은밀히 그 차 안에 숨어들었다. 차 안은 산소가 부족해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 온몸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됐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면 펼쳐질 자유로운 삶을 상상하며 고통을 꾹 참아냈다. 이윽고 차가 멈추었다. 그는 주위를 살핀 후 차에서 내렸다. 이제는 어떤 구속도 없는 행복하고 자유스런 삶을 살리라. 그러나 배달차가 도착한 곳은 인근 교도소 구내였다. 그는 곧바로 붙잡혀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가 자유를 소망하며 탈출한 곳은 결국 다른 감옥이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다른 감옥으로 탈출하는 어리석은 죄수일 수밖에 없다. 죄의 감옥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3.자유하게 하시는 주님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칼로 자기 목을 베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 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 청년은 전국에 있는 유명한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 보았지만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은 청년은 절망에 빠져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친척 중에 한 사람이 그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귀신의 억압에서 완전히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후 그는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고 해방되고 보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간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간증합니다." 라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정신질환에서 자유하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현재 그는 정상인이 되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원수 마귀가 성도들을 억압해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포로 된 상태에서 자유를 얻는 해방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4.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한 대통령
1837년 링컨은 ‘노예제도 폐지론자 규탄안’이 통과된 것을 보면서 자신의 한계를 느꼈지만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다. 링컨이 국회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노예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상대 후보인 민주당의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백인 노예 옹호론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을 교묘히 피하며 ‘다만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링컨은 그의 주장이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낙선했다.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대다수의 백인들이 더글러스를 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60년, 더글러스 의원과 다시 겨루어 대통령에 당선된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과 지혜를 구했다. 그리고 착실한 준비 끝에 1863년 1월 1일 마침내 노예 해방령을 선포했다. “하나님께서는 백인에게 자유를 주신 것처럼 흑인에게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날 즉시, 그리고 이후로 모든 노예들에게 영원히 자유를 선포합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흑인들 중 한 사람이 링컨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대통령 각하, 당신은 우리 모든 노예들의 구세주이십니다.” 링컨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세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 전광
5. 고귀한 자유
97년 05월29일 김포공항을 통해 주영희씨(49, 여)등 3명의 탈북가족이 입국했다. 이 곳에서 만난 주씨의 아들 홍진희씨(29). 홍씨는 4년전 귀순, 현재 대학생이다 .귀순자 가족이 탈북에 성공, 자유의 품에 안겨 가족을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피는 사선(死線)을 넘을 만큼 물보다 진했다. 자유의 고귀함을 알았기에 홍 씨는 귀순지원금 전액을 가족의 탈출자금으로 썼다. 그리고 「꿈꾸는것」처럼 만난 가족. 홍씨는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6. 코뚜레가 일한다.
어미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송아지가 자라 맏송아지가 농부한테 사정을 합니다. “저에게는 제발 코뚜레를 하지 말아주십시오.” 농부가 대답합니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텐데.” “아닙니다. 주인님, 그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코뚜레를 하지 않아도 곱절이나 일을 잘할테니까요.” 농부는 동생 송아지에게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맏송아지는 자신의 약속대로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에도 메고 쟁기도 끌었습니다. 코뚜레를 한 동생 송아지가 지쳐 쉴 때에도 더욱 힘을 내어 달구지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꾀가 나기 시작한 맏송아지는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뒷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맏송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행방을 묻는 동생 송아지에게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도 안하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지.”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 살아가는 삶이며, 결코 내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무엇인가에 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 강한 욕망, 술, 약물, 출세, 기분, 무서운 한에 끌려가는 사람 모두가 불행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매여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큰일을 당한 다음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7. 감옥에 울려 퍼진 찬송가
프랑스 황제 루이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에 널리 떨쳤다.하지만 그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신교를 박해했다. 특히 신교의 대표자였던 세오졸프를 ‘칙령 거역죄’라는 죄목으로 파리탑 위의 감옥에 가뒀다. 그해 부활절에 루이14세는 황제의 위엄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대를 거느리고 파리시가에 나서려고 했다. 감옥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세오졸프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찬송을 큰소리로 불렀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신 성령 증거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159장)라는 곡이었다. 이때 ‘왕의 왕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가사가 루이14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곧장 감옥으로 달려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후 그를 석방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다고 한다.누구든지 예수님 앞에서는 죄인이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의 구세주요 고집과 이기심이란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다.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 중 왕이시다.우리 모두 이런 믿음을 갖고 찬양을 드리자. /고수철 목사
8. 자유에 대한 착각
이런 현대 우화가 있다. 어떤 수감자가 감옥에서 간수에게 이빨이 아프니 뽑게 해달라고 요청, 이빨을 뽑았다. 며칠 후 이 수감자는 맹장제거수술을 요청했고 그대로 했다. 또 며칠 후 이 수감자는 이상이 있는 한쪽 눈의 제거 수술을 요청해 그렇게 했다. 나중에 이 수감자는 건강한데도 신체부분을 떼 내는 "의도적요청"이 있음이 드러났다. 간수가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수감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조금씩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갇혀 있는데도 "부분이탈"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사탄에게 수감되어 있으면서 착한 일을 조금하고 인격수양을 조금 쌓으면서 자유를 얻는 다는 착각, 진정한 자유는 복음과 진리 안에 있다
9. 자유를 지키라
본문: 갈라디아서 5: 1- 1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 자유 가운데는 여러 종류가 많습니다.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혹은 신교의 자유, 언론과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이와 같은 외적 자유가 아닌, 이 모든 외적 자유의 근본이 되고 이 모든 자유를 바로 쓸 수 있는 내적, 영적 자유를 의미합니다.
옛날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에 이방 신도들에게 특별히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 안식일, 음식을 구별하는 이런 모든 의식을 그대로 지키는지의 여부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이 옛부터 내려오는 허다한 의식을 다시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이나 돈, 정욕이나 악한 습관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슬을 벗어버리게 하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허물과 죄에 쌓인 사람은 살았다고는 하난 실상 그 영혼은 죽은 것입니다.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획은 죽은 육체도 다시 살려 생명을 주십니다.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 이 귀한 자유를 얻었음으로 지키고자 하는 열심히 있어야 하겠습니다.
* 기도- 우리 마음을 혼란케 하며 죄에 얽매이게 하는 것을 잘라 버릴 수 있는 절제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10. 자유를 얻은 새
본문: 고전7: 21-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인디안 부락에서 바자회가 열렸다. 모두가 사고 팔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한 농부가 메추라기 한 떼를 가져왔다. 그리고 새마다 발목에 줄을 매었다. 중앙에 막대기를 세운 동그란 쇠에다 모든 줄을 한 끝을 묶었다. 그리고 메추라기들은 원형 안에서 마치 노새들이 당밀 제분소에서 계속 뺑뺑 도는 것처럼 슬프게 계속 돌면서 걷고 있었다. 브라만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메추라기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모든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힌두교 사상을 독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조그마한 불쌍한 동물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그 브라만은 메추라기의 가격을 묻고 그 상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것들을 다 사겠소." 그 상인은 기분이 좋았다. 그가 돈을 받은 후에 그 브라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랬다. "자, 이제 그 새들을 다 놓아주시오." "뭐라고요 손님?" "내가 말하지 않았소. 새 발목의 줄을 끊고 그들을 놓아주란 말이오. 그 새들은 모두 자유케 해주시오." "아, 네 손님, 그렇게 하지요 그것이 손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요." 그 농부는 칼로 메추라기 다리를 묶었던 줄을 끊고 그 새들을 풀어 주었다. 무슨 일이 벌어 졌는 줄 아는가? 그 메추라기 떼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원형으로 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새들을 억지로 날려보내야만 했다.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 앉은 후에도, 그 새들은 행진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몸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아직도 묶여 있는 것처럼 원형을 계속 돌고 있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이 장면에 나오는 새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죄로부터 자유케 되고, 용서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족이 일원이 되었지만 자기 자신을 벌레나 짐승같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낮은 자존심은 사탄의 치명적인 심리적 무기이다(요 8:31-36, 사 61: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5:1)
* 기도: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시는 물질과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자유를 빼앗기지 않도록 지킬 능력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11.자유
새는 하늘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유로워집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가장 자유로워집니다.
꽃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자유로워집니다.
사람은 어디에서 가장 자유로워질까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로워집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은 마치
새가 날지 못하고 땅위에 있는 것과 같으며
물고기가 뭍에 올라와 있는 것 같으며
꽃이 꽃병에 있는 것과 같이 불완전합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해집니다. ⓒ최용우
12. 자유
하늘의 새가 창공을 자유롭게 날지만
새는 그 창공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다의 고기가 물속에서는 어디든지 자유롭게 헤엄쳐 갈 수 있지만
물고기는 그 물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부정하고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지만
사람들은 그 하나님에게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최용우
13. 자유롭게 사는 법
없는 것을 있는 척 하지도 말고,
있는 것을 없는 척 하지도 말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줄 아는 척 하지도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못하는 척 빼지도 말고
억지로 착한 척 하지도 말고,
억지로 힘쎈 척 하지도 말고
억지로 참지도 말고
억지로 존경받으려고도 말고
사람을 의식하면서 뭘 하지 말고
다만, 무슨일이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최용우
14. 무명의 자유함
작년 이맘 때 깊이 기도해야될 일이 있어서 양수리에 있는 어느 금식기도원에 한 주간 다녀왔었습니다. 방에서 자려면 숙박비를 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돈을 준비 못해서 차의 창문을 조금 내려놓고 차안에서 잤습니다.
셋째날인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툭 치며 “혹시 최용우 전도사님 아닌교? 맞지예. 햇볕같은이야기 만드시는..저 억수로 홈페이지에 자주 가는 팬이라예..”
후~ 세상에 내가 모르는 사람 중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얼른 세면장으로 달려가 세수하고 머리 감고 몸단장을 했지요.^^ 혹시 또 누가 알아 볼까봐... (그런데 그 뒤로는 한 명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ㅎ ㅎ)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한 사람이 되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번만 더 생각해 보면 그게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드러난 사람들은 매사에 대중들의 표적이 됩니다. 좋은 일을 하면 ‘생색낸다’하고 나쁜 일을 하면 사정없이 매도하는게 대중들입니다. 그래서 드러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과장된 제스추어를 취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삶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인기라도 떨어지면 죽지요.
수많은 길거리의 사람들 속에서도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무명의 자유함! 일등보다는 중간의 느긋함! 경쟁에서 벗어난 꼴찌의 편안함!
오 이 무명의 자유함을 가진 자의 행복! 오예 ~ ⓒ최용우
15.자유로운 선택
우리 집 뒤쪽에는 꽤 넓은 산밭이 하나 있습니다.
아침마다 상당히 많은 까치들이 곡식 이삭을 주워 먹기 위해 몰려들어 시끄럽게 떠듭니다. 살금살금 다가가면 어느새 알아차리고 푸드득 날아가 버리는 까치들.
날개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유스러운 일인지!
두 길이 있는데 두 길 중 어느 길로 가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두 길 중 한 길은 나쁜 길이라면 그걸 알면서 그 길로 가는 것은 자유라기 보다는 차라리 무지요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옳은 길을 선택하는 지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가정이 가난하고 환경이 나쁘다면 길은 두 가지.
첫째는 부모를 원망하며 조상 탓으로 세월을 낭비하는 길.
둘째는 가난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성실히 노력하며 사는 길.
두 길 가운데 어느 길이 더 아름답고 옳은 길입니까?
말할 나위도 없이 두 번째 길이 지혜로운 선택의 길입니다.
또 예를 들면, 가정이 부유하고 좋은 환경이라면 첫째는 자신이 잘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못사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기분내키는대로 게으르게 사는 길. 둘째는 부모님께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을 품고 불쌍한 사람을 도우며 더 열심히 살아가는 길.
날개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자유스러운 일입니다.
지혜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선택을 하게 합니다. ⓒ최용우
16. 나를 놔달라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의 한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한계를 알아보기 위해 15세 된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갖은 노력을 다해서 140여개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자기 생각에 따라 결합할 수 있도록 해보았습니다. 이 침팬지가 수화를 통해서 어떤 의사를 표현하는지가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표현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Let me out.” 나를 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당신들 때문에 귀찮아 죽겠으니 나를 좀 자유롭게 해달라는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란 짐승도 원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놀라운 실험결과입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어떠하겠습니까? 패트릭 헨리가 말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이고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진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소강석 목사(분당새에덴교회)
17.자유케 하라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가혹한 차별 대우를 받은 사람이 조선시대의 백정이다.백정은 기와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고 비단 옷도 입지 못하게 하였으며,공부도 못하게 하였고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다니게 했다.
이런 일을 안타깝게 여긴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 없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고종의 주치의인 의사 에비슨과 함께 백정들에게 전도했다. 첫번째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박성춘이다. 그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고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왕에게 탄원하여 마침내 1895년 6월6일 백정 신분을 철폐케 하였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1908년 6월 세브란스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 일곱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사람을 자유케 하는 일을 실천하는 자가 주님의 제자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하신 일을 이어서 해야 한다. 주의 영으로 더불어 내 자신이 먼저 자유인이 된 후에 악한 제도와 여러 가지 죄에 포로 되고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해야 한다.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18.하나님의 통치와 자유
성경: 시편 97 장 1 절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한 나라의 국민은 통치자가 누구냐에 따라 기쁨을 경험할 수도, 슬픔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독립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광복절은 환희에 찬 날이기도 하지만 이민족에게 유린당했던 치욕을 되새기게 해주는 날이기도 합니다. 한민족의 가슴 속에 맺혔던 한은 풀렸지만, 속박의 굴레에서 권리를 빼앗기고 절망과 한탄 속에 지내던 고통을 우리는 쉽게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광복절은 우리가 누구에게 지배받으며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음을 교훈해 줍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지식 등, 수많은 것들에 의해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사회에 자유가 없는 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기 보다는 자만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죄의 특성을 ‘자만’(pride)으로 묘사했습니다. 자만 속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이 기쁨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 기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광복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시편을 통한 매일묵상집
19. 참된 자유
한 조류학자가 깊은 산 속에서 앵무새 둥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름다운 노래를 듣기 위해 앵무새를 새장에 넣어 마당 한 쪽의 나무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어미 앵무새가 나타났습니다. 어미새는 새끼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다 주었고, 조류학자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새장의 앵무새는 죽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조류학자는 죽은 원인을 분석하고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어미새는 새장에 갇힌 자신의 새끼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는지 독이 든 과일을 조금씩 먹여 죽인 것입니다.
내 가족과 이웃의 희망을 내 기준과 잣대로 가뒤두지는 않는지요? 구속과 강요에 의한 삶은 우리 자신을 병들게 하지만,
새가 창공을 마음껏 날아다니듯 스스로 내 능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류 중 현 | 지하철 사랑의 편지 운영자
20. 완전한 자유인
알렉산더 대왕은 유언 속에 자기가 죽으면 손을 묶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풍습으로는 수의의 긴 소매 속에 손을 가리고 허리에 묶게 되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손을 묶지 말도록 유언한 것은 모든 조객에게 빈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의 손은 많은 민족을 정복하고 많은 나라를 굴복시킨 손이었습니다. 노획한 재물과 노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죽으면서 거지와 다를바 없이 빈 손이 된다는 것을 죽은 뒤에 실감 있게 교훈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우리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하sk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영접하고 영적인 노예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몇푼의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육성에 사로잡혀 사는 육신생활의 포로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거룩한 백성이며 왕같은 제사장들인 것입니다. 얽메여 포로 생활을 하지 말고 노예 근성을 온전히 버리고 자유인이 되셔야 합니다.
/송기현 목사
21. 진정한 행복
한 사람이 40년 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그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자랑했다. "이제 나는 걱정거리가 없어. 출근할 필요도 없지. 서둘 것도 없어. 직장상사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 사람은 행복을 전혀 모르고 있다. 행복은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이는 것이다. 사랑이란 매이는 것이지 서로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부나 자녀들도 서로 매여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노예"로 매일 때 참 자유를 누린다고 말한다.
22. 풀어 주려고 산 노예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를 해방하기 전, 뉴올리언스의 노예 시장에서 아름다운 흑인 혼혈 소녀가 경매에 붙어졌다.
경매자들은 평소처럼 입찰을 하다가 군중 속에서 들려오는 강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계속 가격을 높여 불렀고 경매는 그 사람이 1,450달러에 소녀를 살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사람은 북부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소녀는 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 너무 싫었다. 다음날 아침 그 사람은 소녀의 집으로 왔다. 소녀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과 함께 갈 준비가 됐어요."
그러나 그 사람은 웬 증서를 소녀에게 건네 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오, 난 당신과 함께 가길 원치 않소. 나는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당신을 샀소. 이걸 보시오. 이것이 당신의 자유를 보장하는 증서요."
소녀는 잘 믿기 지가 않아서 큰 소리로 외쳤다.
"나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샀다고요? 정말 자유의 몸인가요?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나요?"
"물론, 당신은 자유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소."
그러자 소녀는 기쁨에 차서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선생님, 남은 생애동안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저를 데려가 주시겠어요?"
드디어 소녀는 자유로운 봉사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의 종이 되게 하셨다.
* 참조: 고전7:21-24, 롬8;21, 고후3:17, 요8:32
23. 세기의 망명사건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딸이 1967년 4월 21일 미국으로 망명한 사실은 역사상 사건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망명을 결심한 이유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성인이 되어서 기독교를 접한 그녀는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죄악이며, 한 사람의 인간은 국가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 존중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우상적 지위를 누리던 스탈린이 국가적 역사적으로 매장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부재함'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믿음을 지키고자 망명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존재 근거와 가치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그녀의 삶을 새롭게 한 것이다.
* 참조: 요3:1-5, 행2:37-42, 행4:12, 갈3:26-28
24. 자유 농사
소련은 한때 집단 농장 체제를 실시하였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험적으로 정치범으로 구성된 소련 인구의 1%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가장 나쁜 땅을 사유지로 분배해 주었다. 박토에서 자유롭게 농사를 지어 그것을 먹게 한 것이다.
얼마 후 그 결과를 조사했는데. 실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소련의 전체 농업생산량의 27%가 그 박토에서 생산된 것이다. 감자는 62%, 우유나 쇠고기는 34%, 달걀은 47% 등등 종합 27%가 불과 1%의 정치범 농민들의 손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다. 통제와 자유가 생산에 끼치는 영향은 이만큼 달랐다.
* 참조: 요8:31-36, 요15:4-6, 딤전2:4, 14:6
25.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 캔들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캔들러는 의지력이 나약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금주선언을 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귀가하던 그는 벼락같은 마음의 음성을 들었다.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캐들러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내는 바로 그 시간 남편의 '금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 부부는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캔들러는 아내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안식을 얻었다. 그리고 알코올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기도의 능력으로 술을 끊은 것이다. 캔들러는 그때부터 수입의 10%를 철저히 헌금했다. 코카콜라는 창업선언이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인생은 결단의 연속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순간순간 결단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의 전환점에서 강인한 결단력을 보이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캔들러 역시 결단력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래 의지가 나약한 사람으로 번번히 술을 끊는 데 실패했던 사람이었다. 알코올의 포로가 되어 갇혀 있던 그에게 벼락같은 마음의 음성이 함께 영혼의 안식, 그리고 강한 결단력을 주어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신 분은 우리를 온갖 억압과 사슬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4:18,19) /국민일보(1999. 3. 4)
26. 어떤 삶을 살아야하나
해마다 6월은 아픔으로 다가와 아쉬움으로 사라진다. 아픔은 6^25동란을 말함이요, 아쉬움은 민족분단의 현실이다. 진정한 "자유"와 "애국"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하는 달이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네 가지의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 예배의 자유, 요구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자유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 점점 가열되는 대권경쟁과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굶주리는 북한동포들. 모두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첫째, 양심의 자유를 가진 사람이 돼야 한다. 성경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나니"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양심의 자유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사슬을 끊고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사회가 점점 더러워지는 이유가 뭔가. 그것은 양심이 더럽혀져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양심의 자유를 소유한 사람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다.
둘째,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자유를 육체를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 육체란 부패된 인간을 뜻한다. 인간은 남을 위해 봉사할 때 기쁨을 얻도록 창조됐다. 니체는 현대인들에게 두 가지 병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잃어버린 것을 모르는 병이라고 했다.
통제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사회는 급속히 오염된다. 늘어나는 청소년 비행과 일부 교사들의 촌지수수.."촌지 기록부"를 작성한 그 열정으로 우리의 희망인 청소년들을 가르쳤더라면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 됐을까. 삶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지도자로 불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셋째, 이웃을 위한 희생과 사랑실천이 요구된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종은 없고 상전만 있는 세상이어서는 곤란하다. 공의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웃에 대해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큰 사랑을 베풀리가 만무하다. 작은 냇물이 강을 이뤄 바다로 흘러들듯이 작은 사랑은 이 사회를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 된다.
끝으로 옳은 일에는 적극성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성경은 "만일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공동체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계속 물고 먹으려하는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데 있다. 일꾼은 점점 줄고 방관자와 불평꾼만 늘고 있다.
아놀드 토인비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민족들에게는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굳건한 단결력과 왕성한 활동력과 진실한 국민성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방관자들은 도망간다. 그러나 주인은 목숨을 걸고 국가를 지킨다.6^25동란이 발발했을 때 이 민족을 지켰던 사람이 누구인가.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인들이 바로 이 나라의 주인들이다.
6^25는 해마다 우리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부끄럽다. 선열들 앞에서 고개 들기가 민망스럽다. 사치와 향락과 방종과 이기주의로 가득 찬 병든 이 땅을 만든 공범이 되어 지금 초라하게 서있다."하나님, 한번만 더 이 민족을 사랑해 주시옵소서. 참다운 애국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국민의 마음을 온유하게 해주소서".
뜰에 나와 간절히 기도드린다. 하늘은 잔뜩 심술을 머금고 있다.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다. 쏟아지는 이 빗줄기가 제발 맹목적인 증오와 이기주의, 과욕과 향락 등 정신적 불순물들을 모두 씻어내 주었으면 좋겠다.
27. 자유의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타락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적 인간론의 기본 주제임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아 잘 알고 있다."그 원죄의 결과로 인해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로운 선택으로 선악간에 결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많은 토론을 낳았다.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인간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 이러한 자유의지를 다른 능력들, 즉 이성, 감성 등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의 부분으로서 부여받았다는 것이다.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였을 때,그는 과연 자유의지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타락한 것일까,아니면 예정론자들의 결정론적 주장처럼 이 타락조차 하나님의 전능하고 영원하신 뜻에 의하여 예정된 것이므로 인간 편에서의 자유의지는 없었던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타락한 것이 그가 창조시 누렸던 자유의지를 악의 방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며,하나님은 인간이 이처럼 가변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락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인간의 선택에 맡기고 그의 타락을 허락했다고 보는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을 참고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이나, 더 나아가서 그 전거인 후기 어거스틴적으로 경직화된 예정론에는 반대되는 생각이지만, 인간은 로봇 (ROBOT)처럼 아무 선택적 자유의지 없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로서 하나님의 뜻에 응답,동의할 수 있는 존재이다.비록 유전과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 제한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고, 인간의 인격의 자유는 선악간에 자신의 삶을 자유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웨슬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은 죄에 대하여 비난하시거나 책임을 물으실 수 있느냐고 논증하였다.
어거스틴의 경우, 우리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그의 초기의 글「자유의지론」에서 어거스틴은 마니교적 이원론과 결정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간이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할 것인지 미리 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후에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의 심각성에 따라 -사도 바울을 더 의존하면서 - 펠라기우스를 반대했던 입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거스틴을 좀더 전체적으로 보면, 그의 자유의지론은 은혜론과 상관관계 속에 있지, 전적인 배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자유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성려의 은사 속에서 인간이 은혜를 받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곧 참된 자유이다. (「영과 문자」). 자유 속에서 성장하는 인간은 사랑을 열쇠로 하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인 사랑 속에서의 인간의 책임적 응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그의 은혜와 협력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뜻한다고 보면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율적 단독성을 반대하는 것이지, 협력적 자유의지와 동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그러나 개신교의 전통에서는 자유의지에 대하여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따라서 루터나 칼빈은 노예의지나 예정론에 더욱 많은 신학적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조나단에드워즈와 같은 미국의 칼빈주의자에게서도 비록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인간이 본질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보며 하나님께서 악의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웨슬리를 포함한 이러한 예외를 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인간의 죄성과 전적 타락성을 강조하면서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28. 고귀한 자유
29일 김포공항을 통해 주영희씨(49^여)등 3명의 탈북가족이 입국했다.
이 곳에서 만난 주씨의 아들 홍진희씨(29). 홍씨는 4년전 귀순, 현재 대학생이다.
귀순자 가족이 탈북에 성공, 자유의 품에 안겨 가족을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피는 사선을 넘을 만큼 물보다 진했다. 자유의 고귀함을 알았기에 홍씨는 귀순지원금 전액을 가족의 탈출자금으로 썼다. 그리고 "꿈꾸는것"처럼 만난 가족.홍씨는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29. 몽고메리의 기적
1955년 12월 1일, 미국 몽고메리 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로자 파크스는 일을 마치고 잔뜩 지친 몸으로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는 백인이 앉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지만 파크스는 그 자리를 피해 흑인 지정석에 앉았다. 당시엔 인종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버스에도 흑인과 백인의 자리가 따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한 파크스는 자리에 앉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는데, 한참 뒤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좌석이 이미 꽉 차 있는 가운데 백인 한 명이 자리를 잡지 못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운전사가 파크스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이, 깜둥이! 어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란 말이야!"
파크스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화가 치밀어 오른 파크스는 인종분리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실은 곧 수많은 흑인들에게 전해졌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던 흑인들은 다음날부터 절대 버스를 타지 않았다. 아무리 먼길이라도 걸어다니거나 요금이 비싼 택시를 이용했다. 이 때문에 많은 흑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던 버스 회사들은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백인들은 흑인들을 상대로 더욱 심한 탄압을 계속했다. 하지만 흑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일년 뒤, 몽고메리 시에는 인종 차별이 없는 버스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 사건을 미국 전역으로 퍼져 버스뿐 아니라 많은 인종 차별법의 폐지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몽고메리의 기적' 이라고 불렀다.
30. 연약해 보이는 날개짓
지금 우리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의식과 신념"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어떤 농부가 쳐놓은 그물에 두 떼의 새들이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한 떼의 새들은 "자, 우리가 힘을 합해 날아 올라 그물을 버드나무 가지에 걸면 산다"고 외치며 동시에 솟구쳤다. 그러자 "연약해 보이는 날갯짓"이 큰 힘을 발휘해 조금 높은 버드나무 가지에 그물을 걸었고 새들은 살아났다. 그러나 한 떼의 다른 새들은 "우린 꼼짝없이 죽었구나"하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 모두 농부에게 잡히고 말았다.
31. 의심할 수 없는 것
2차대전 후 국제연맹을 발족,1937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영국의 정치인 세실은 노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결코 의심할 수 없던 한가지가 있었다면 그것은 경건하고 헌신적인 어머니의 삶이었다" 43년 만에 자유의 품에 안긴 김경호씨 가족 뒤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57세의 최현실씨. 중풍에 걸린 노쇠한 남편, 임신 7개월의 딸, 어린 손자 등 16명을 이끌고 4천 의 머나먼 길을 44일에 걸쳐 헤쳐왔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 가족을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32. 무기 없는 투쟁
간디(1869-1948)는 영국에 유학하여 변호사가 되자 아프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인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떠났다. 이 나라에서는 백임과 유색인종 사이에 큰 차별을 하고 있었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 도착하여 1등칸을 타고 여행하고 있는데, 차장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당신은 인도인 아냐? 이곳에서 나가줘. 여긴 백인 전용이니까."
"나는 이처럼 1등 차료를 사서 타고 있는데요."
"차표 같은 건 소용없어. 여긴 당신이 있을 곳이 아냐. 냉큼 나가지 못해?"
차장은 경관을 불러 항의하는 간디를 내쫓았다. 이런 억울한 차별대우를 변호사로서의 간디의 정의감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인간이면서 단지 피부 색깔의 차이로 이처럼 차별한다는 것은 말도 안돼." 이라하여 간디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세상의 관례와는 판이 하였다. 그것은 `비폭력, 비협력, 비복종'을 무기로 하는 투쟁이었다. 간디의 호소에 많은 인도인, 흑인들이 동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실천해 나갔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이 비폭력 투쟁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투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운동에 새로 가담하는 사람의 수가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남아프리카는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형무소도 초만원을 이루어 더는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형무소 재소자의 식비가 늘었다. 드디어 정부는 악법을 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간디는 23년 동안 이곳에서 운동하여 얻은 성과를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 활용하기 위해 1915년 고국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수없이 체포, 투옥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반영 비폭력, 대중 운동을 계속해서 앞장서서 전개했다. 드디어 1947년, 이 무기 없는 투쟁 앞에 대영제국은 패하고 말았다. 인도는 숙원인 독립을 쟁취했다.
33. 적과의 동침
뛰어난 미모를 가졌으나,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삶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여자였다. 문제는 이 여자의 남편이었는데, 변태적이었으며 아내알기를 노래개쯤으로 아는 남자였다. 게다가 잔인하고 폭군처럼 군림했으며 아내의 행동반경은 언제나 남자의 의사대로 제한되었다.
이들의 집은 도심지에서 상당히 떨어진 해변에 있었는데, 남편이 출근하면 아내는 마치 새장에 갇힌 새처럼 무료한 시간만 보냈다. 남편은 그녀를 사육했고 오로지 성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려 했다. 그러나 아내의 심중에 불타오르는 몸부림을 눈여겨 보지는 못했다.
어느 날 남자와 여자는 한밤중에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갔다. 이것은 남편의 취미였다. 배를 타고 얼마쯤 나갔을 때 예측치 못했던 풍랑이 일기 시작했고, 칠흙 같은 밤과 거센 파도 앞에서는 성능 좋은 요트도 일엽편주였다. 순간 무섭게 흔들리는 요트의 귀퉁이에서 안감힘을 쓰던 아내가 사라졌다.
간신히 집에 온 남편은 헤엄칠 줄 모르는 아내가 수중고혼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유품을 모아 관에 넣고 장례식을 치루었다. 남편은 이 무능하고 연약한 여자의 저 깊은 곳에 있는 생각까지도 지배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껍데기 뿐인 남편의 폭력과 소름끼치는 변태와 징그럽고 음흉한 삶의 굴레 속에 갇혀 있었으나, 그녀의 정신과 마음은 살아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타는 요트에서 밤 바다를 탈출의 기회로 삼기 위해 남편이 출근하는 사이 동네 YMCA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웠다. 마침내 디데이 칠흙같이 어두움 밤 그녀는 거센 풍랑 속에서 물결을 가르고 어둠을 뚫고 사라져 버렸다.
여인은 양로원에 있는 양모의 집에 가서 쉬고 있었는데, 남편은 여러 가지 정황과 흘려진 증거를 통해 그녀가 살아 있음을 감지했고 그녀의 곁으로 목 조르듯이 다가왔다.
결국 남자는 혼자 있는 그녀의 피를 말리며 다가섰다. 마침내 둘이는 엉켜 붙었고 그 와중에서 남편이 권총을 놓치고 그것을 잡은 여자가 남편의 심장을 향해 해방의 총탄을 박아 버렸다.
34. 홍콩 반환 이후의 신앙의 자유 문제
중국 정부는 홍콩 반환 이후 홍콩의 종교에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50만에 달하는 홍콩 기독교인들은 내년의 반환 이후 신앙의 자유 문제에 관해 우려하고 있는데, 지난 6월 말 홍콩을 방문한 중국 정부의 종교부 책임자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각 종교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북경 당국의 방침을 확인했다. 중국 정부는 당국에 공식 등록한 종교에 한해 자유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 정책이 홍콩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현재 외부 종교와의 연결을 반대하고 있는데, 지난 방문에서는 인터넷을 통한 타국 교회와의 연결 등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35. 양심의 자유
1811년 미국인 중 어떤 사람이 세금을 포탈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내내 고통당하다가 그 고통에서 놓임받기 위해 6불을 정부에 송금하며 자초지종을 고했다. 정부는 그 6불을 시발로 양심기금을 만들어 누구나 양심에 가책을 받은 사람이 있으면 그 기금에 넣도록 했다.
그러자 얼마 후 어떤 사람이 50불을 송금하며 25년 전에 세금을 포탈하여 양심에 가책을 받아오다가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어 감사하다고 하며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떤 감리교회 목사로부터 2백 불이 송금되어 왔는데 어떤 군인이 군복무 중 정부의 노새 한 마리를 훔쳐다 팔아먹었는데 양심의 가책을 받아 오다가 교회 목사에게 가지고 온 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미국 워싱턴 재무부에 송금된 돈이 160년간 3백만 불이 넘었다 비단 세금뿐만 아니라 자기가 받아서는 안될 돈을 받아 양심에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양심의 자유함을 받을 수 있는 돌파구가 생긴 것이다.
36. 참자유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미국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정권과 맞서기 위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살이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면서 "진정한 평안은 하나님의 공의대로 결단했을 때
온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12년 후 독재정권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강제수용소에 있었을 때 자유에 대해 이런 명언을 남겼다.
"자기의 욕망을 정화하는 훈련, 정의를 바로 실천하는 행동, 무력과 고독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37. 더 이상 감옥이 아니었다
유명한 탐험가 밥 바틀렛은 외국에서 많은 새들을 잡아가지고 돌아왔던 한 항해에 관해 말합니다. 많은 새들 중에서 한 마리의 새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새장을 발톱으로 할퀴는 것이었습니다. 망망한 대양 한가운데서 그 새는 결국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미친 듯이 기뻐하며 그 새는 날아가 창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바틀렛과 그의 동료들은 그 새를 영원히 놓쳐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새가 날개에 힘이 빠진 채 다시 배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맥이 빠진 그 새는 숨을 헐떡이며 갑판 위에 쓰러졌습니다. 그 새는 필사적으로 배를 다시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곳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고향이었으며, 깊고 끝없이 넓은 바다를 건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무엇인가에 얽매이기 전에는 사실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자유를 제외하고는 자유가 없습니다. 다른 모든 자유는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나를 당신의 포로로 잡으소서. 주님"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날이 우리가 불행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되는 날입니다.
38. 예수님의 노예
한 사람이 40년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그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자랑했다.
그는 "이제 나는 걱정거리가 없어. 출근할 필요도 없지. 서둘 것도 없어. 직장상사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 사람은 행복을 전혀 모르고 있다. 행복은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이는 것이다. 사랑이란 매이는 것이지 서로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부나 자녀들도 서로 매여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노예"로 매일 때 참자유를 누린다고 말한다.
39. 노예가 당신의 주인
한 수도사와 왕이 만났다.
왕이 관례에 따라 수행자에게 물었다.
"소원이 무엇이오?"
수행자가 대답했다.
"주인에게 소원을 말할지언정 노예에게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왕이 성을 내었다.
"그러면 내가 그대의 노예란 말인가?"
수행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제 노예는 아니지만 제 노예의 노예입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탐욕과 원망이라는 노예가 있는데, 그 놈들이 바로 왕의 주인이 아닙니까?"
40. 주인이 필요한 사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정신적 공황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신의 부재>는 <존재와 가치의 부재>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한때 해적에게 붙들려 노예시장으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노예로 팔려가기 위해서였다. 디오게네스는 노예시장에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옷을 잘 입고 돈이 많아 보이지만 <정신이 빠진 것>같은 부자 청년을 보았다. 디오게네스는 해적에게 말했다. "나를 저 청년에게 파시오. 저 청년에게는 주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41. 우리는 노예였다
매년 유월절이 되면 유대인들의 가정에서는 유월절 예식이 베풀어지고,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 민족 해방의 역사,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역사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승된다. 이스라엘 어린이들이 의식이 싹트면서 부모에게 처음으로 듣는 말이 바로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3천여 년 역사중 그 대부분이 바로 망국의 역사, 타향에서 쓰여진 유랑의 역사였으므로, "우리는 노예였다"는 말은 그들의 현실을 정확히 이름지어 부른 말이라 할 수 있다.
구약 시대의 어린이들 뿐 아니라,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어린이들도 일찍부터 부모들에게 자신들의 역사적 처지를 이름지어 부를 줄 아는 것부터 배운다. "우리는 노예였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는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니 이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 현실에 순응하자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그렇게 이름짓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변형시키고 극복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노예였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사고언어, 곧 생각하게 하는 언어다. 자녀에게 글을 가르치고 말을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질문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아이들이나 둔한 아이들을, 생각하게 하는 언어로, 일깨워서 현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 현실을 극복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배우는 어린이들은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자기들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인식과 반성을 동시에 하기 시작한다.
42. 어리석은 탈옥수
호주 시드니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가 탈옥을 계획했다. 그는 빵 배달차 속에 숨어들었다. 차는 출발했다. 아무도 조사하지 않았다. 그는 탈출에 성공했다. 조금 뜨겁고 먼지를 썼으나 자유의 몸이 될 것을 생각하면 그만한 고생은 문제가 아니었다. 한참 뒤에 차가 멈추었다. 그는 차 바깥으로 살며시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는 정말 실망했다. 빵 배달차가 도착한 곳은 다른 감옥소 구내였던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찾지만 결국 다른 감옥으로 옮겨간 어리석은 탈옥수처럼 참 자유를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돈의 노예. 명예의 종. 죄의 노예. 체면의 노예. 나쁜 습관의 노예. 전통의 노예가 되어 매어있는 경우가 많다.
43. 종과 주인
종은 자기를 즐겁게 하는 자가 아니라 주인을 기쁘게 하는 자이다
종은 자기 짐을 가볍게 하려는 자가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지는 자이다.
종은 주인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주인을 따르는 자이다.
종은 자기의 일보다 주인의 일에 우선권을 두는 자이다.
종은 요나처럼 자기 가고 싶은데로 가는 자가 아니라 땅 끝가지라도 주인을 따라가는 자이다.
44. 자유
자유를 한자로 표기하면 自由이다. 여기서 "스스로, 몸소, 저절로"를 의미하는 自는 본래 사람의 코를 정면에서 본 모양을 뜬 글자로서, 사람의 코를 가리키며 자기를 나타낸데서 유래하였다.
한편 由자는 "말미암을, 까닭, 행하다"등을 의미하는데 열매가 꼭지에서부터 나와 매달린 모양에서 그 뜻을 갖게 된 글자이다.
따라서 자유라는 말을 글자 풀이하면 "스스로에게 원인이 되다" 또는 "스스로 행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자유는 어떠한 것일까? 기독교인의자유에 대한 루터의 말을 들어보자. "크리스찬은 가장 자유 하다. 세상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은 가장 충성스러운 종이다. 세상 누구에게나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크리스찬의 자유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허락해 주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자유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식의 면허가 아니라 반드시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책임이 수반된 자유를 갖고 사는 것이 크리스찬이다. 사랑이 뒤따르는 자가 거기 있는 것이다.
45. 자유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는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러기에 미국의 민권운동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내겐 꿈이 있소. 그 꿈이 실현되어 자유의 종이 울리면 마을과 오두막에서, 도시와 모든 주에서 종이 울리고, 흑인이나 백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신교도나, 구교도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날에 손에 손을 잡고 '드디어 자유로다. 드디어 자유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감사하나이다. 우리는 드디어 자유로다'는 옛 흑인 영가를 불를 수 있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죠지아주 아트란타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드디어 자유로다. 드디어 자유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감사하나이다. 우리는 드디어 자유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46. 가장 오랜 투옥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사람은 누구이며 과연 얼마나 갇혔다가 석방되었을까? 미국의 포올 가이멜(1894년)은 뉴욕의 한 호텔에서 급사로 종사하던 17세 때에, 제 2급 모살죄로 투옥되었다가, 1980년 5월 7일에 85세로 뉴욕주 비이콘의 피시킬 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복역 기간은 68년 8개원 2일이었다.
68년 8개월 2일! 그 긴 세월 뒤에 풀려나 느끼는 자유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나 분명 그가 느꼈을 자유는 육체의 자유이지 결코 자기가 범한 죄로부터의 자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영적인 자유는 68년 8개월 2일간 옥살이를 하여도, 아니 그 두배나 되는 기간을 옥에서 보낸 뒤라 할지라도 결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7. 인간의 자유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서 신학자, 노예 해방론자인 호프킨즈(Samuel Hopkins)는 인간의 자유를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가 가장 자유입니다. 그러나 같은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오면 아주 부자유하게 됩니다. 그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라는 것도 인간 자신에게 구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어야 할 곳에 장소를 얻고 있을 때, 자유로운 것으로서, 주로 자유는 인간의 심혼이 어디에 두어져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기차는 철도 위를 달리고 있으니 재미가 없다든가. 답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입니다. 기차는 철도 위에 있어야만 자유이고, 배는 물위에서만 자유, 새는 공중에서만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심령은 어디에 있어야만 진정 자유일까요? 예수그리스도 안에 전적인 신뢰를 두고 사는 것에 의해, 우리들은 전적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핫또리 아끼라, 사람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 ----
48. 자유의 낱말뜻
1. 히브리어 데도르 - `빨리 움직이다'라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 ; `자유'따라서 유출의 `자연스러움' 그러므로 `깨끗한' ; 자유, 순수한
2. 헬라어 엘류데로오 - `자유롭게 하다'즉(상징적으로)(도덕적으로 의례적으로 혹은 인간적인 책임에서) `면제되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
압해시스 - `자유', (상징적으로) `용서', 구원, 탕감
3. 한자
타인에게 구속받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법률의 범위 안에서 마음대로 하는 말.
49.자유에 대한 성구
1. 사람이 어디에서 자유를 얻을 것인가?
(1) 죄에서 자유
롬6:18 -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6:22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이 되고
롬8:2 -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함
롬8:15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않음
(2) 율법 의식에서
갈3:13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갈5:1 -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엡2:15 -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육체로 폐하심
(3) 사탄(마귀)에게서 자유
창3:15 -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임
눅10:19 -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심
골1:13 -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심
히2:14 -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함
요일3:8 -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
(4) 죽음의 형벌에서
호13:14 -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
사25:8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임
고전15:55 -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히2:15 -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를 놓아주심
2. 자유는 누가 주는가
사61:1 - 복음이 자유케 함
요8:32 - 진리가 자유케 함
요8:36 - 그 아들 예수님께서
롬8:2 - 성령께서
고후3:17 - 주의 영이
3. 자유 주의와 생활
고전7:22 - 허락된 한도에서
고전8:9 - 약한 자에게 거친 것이 되지 않도록
고전10:29 - 판단을 받지 않도록
갈5:13 -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는 것
벧전2:16 - 하나님의 종과 같이 생활하는 것
50. 나사렛 사람들 (눅4:16-30)
예수께서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다. 이사야 61:1,2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했을 때, 나사렛 사람들이 분이 가득하여 동네 밖으로 예수를 끌고가서 밀쳐내리치고자 했다. 주님이 무슨 설교를 하셨기에 예수를 죽이려고 했을까?
1. 예수께서는 종교를 가진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사람의 수는 소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본문에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는 엘리야 시대에 과부가 많았지만 하나님의 선지자가 보냄을 받은 사람은 사렙다 과부 한 사람 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엘리사 시대에 문둥이가 많았지만 치료를 받은 사람은 수리아 사람 나아만 한 사람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구원받는 사람의 수는 소수라는 이야기이다. 즉 주님께서는 나사렛 회당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는다고 형식적으로 말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종교 형식을 행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므로 그들이 화가 난 것이다.
2.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 은혜스러운 설교를 했을 때, 그들은 "의원아, 너를 고치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네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다. 즉 주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이 전해진다고 했을 때 그들은 "가난한 네 집이나 부자가 되게 하라"고 조롱한 것이다. 즉 그들은 설교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은혜스러운 설교를 할수록 더 멸시하고 핍박한다. 주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은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3. 그들은 자유, 해방에 대하여 주님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 눌린 자를 육체적으로 이해했고, 물질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제나 사회활동 정치적 관심이 모두였다. 그러나 주님은 죄와 마귀와 사망에 눌린 자를 진리와 성령으로 자유케 하는 것을 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화가 난 것이다. 그들은 육체적 자유를 말했으나 주님은 영적 자유를 말씀하셨다.(고후3:17)
4. 그들은 인간을 자유케 하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18,19) 인간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 나사렛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신앙이 형식적이요, 육체적으로 이해함으로 주님과 틀려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주님을 주이려고 했다. 지금도 기독교 신앙에 틀린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의 사람들을 죽이고자 한다.
51. 그리스도인의 자유 (요8:31-36)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말씀했을 때, 주님의 자유란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반문함
1. 세상이 추구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의 형식에 불과하다.
세상 사람들의 자유란 권력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자유, 빈곤이나 빈부의 격차를 해소함으로써 오는 경제적 자유,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데서 요구하는 인권적 자유, 고통과 질병 등에서 자유하는 모든 불행에서의 자유,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이다. 물론 이러한 자유도 기독교의 관심 밖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근원적인 자유에서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2. 자유를 상실하게 된 원인은 인간의 범죄에 있다.
주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했다.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써 내적 능력을 상실하여 자아의식으로 위축 되어 자아라는 감옥에 감금되었고, 외부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단절됨으로써 궁핍하여 서로서로 경쟁하고 착취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함으로써 구조적으로 오는 자유의 상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자신과 이웃과 환경의 종이 되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36절).
주 에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시는 유일무이한 중보자이시다(딤전2:5). 하나님과 화목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거두어가신 생명과 무한히 공급되는 부요함을 주셔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됨.
4. 매일의 생활 속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하자
(1) 자신의 모든 삶을 선하신 하나님께 맡기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완전히 맡기는 데 있다.
(2) 성령과 친근히 하라.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주님의 영은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고, 닥쳐오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완전한 선택의 지혜와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주님으로 자유케 한다.
(3) 육체의 자유를 추구하지 말라.
육체적 자유는 방탕과 파멸을 가져온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인간의 이념적 자유와 육체적 자유를 구하는 데서 오는 비극이다. 예수 믿는 것을 구속으로 알고 마음대로 자유하려던 한 청년은 방탕아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찾았던 한 청년은 성실한 시민이 되었다. 아들이 자유케 할 때, 참으로 자유한다.
52. 진리가 너희를 자유(自由)케 하리라.(요8:31)
얼마 전 우리는 3.1절을 기념했다. 3.1절은 우리 민족이 자유를 달라고 외쳤던 운동의 날이다. 페트릭 헨리가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듯이 지유는 인간의 절대적 요구이다. 그런데 성경은 자유에 대해 진지하게 말씀하고 있다. 바로 요8:31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는 자유를 요구하는 인생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반문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고 합니까 ?」
이들은 자유라고 하니까 즉각적(卽刻的)으로 정치적 자유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죄를 범하는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중요한 진리의 가르침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여러형태의 구속이 있지만 죄의 구속은 더더욱 무서운 것이므로 이 죄에서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이 희구(希求)하는 외형적인 자유, 곧 정치 경제 육체등의 자유에 무관심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 모든 면에서 자유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이 모든 외형적인 자유보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에서의 자유없는 외적 자유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요8;35)
이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죄악과 구곳은 하나님앞에서의 죄에서 기인됨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준다. 실상 이 역사속에 죄가 깃들이고 있는 한 진정한 자유는 보장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인류의 역사는 자유화 운동의 반복인 듯 하다. 1215년에 영국이 유명한 대 헌장을 발표함으로써 왕의 압제(壓制)를 받던 백성들이 자유를 얻게된 일은 참으로 놀라운 자유화 운동이었다. 세계 제 2차대전 후에는 약소국가(弱小國家)들이 강대국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 지금도 세계는 자유화라는 구호아래 혁명을 거듭하고 있다. 그 자유는 얼마후에 또 다른 형태의 제도나
힘, 그리고 사람에 의하여 구속과 지배아래 놓여져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자유를 부르짖는 소리는 더 높아만 간다.
왜그런가 ?
이는 신학자 부르너가 지적했듯이 이런 모든 자유 운동은 자유 정의라는 구호아래 한사회를 철저하게 어떤 체제나 주의로 바꾸어 놓을지 모르나 그 주의나 체제를 이끌고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사회에 자유와 의가 없는 것은 근원적으로 사람과 국가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어기는 죄에서 기인된 것이다.
죄있는 곳에서 자유는 구속을 받기 마련이다. 죄의 성질과 특징에 대하여 미국의 신학자 니버는 「자만」 곧 프라이드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죄 곧 자만(自慢)은 권력의 자만으로 작용한다. 이 권력의 자만이 작용함으로써 사람은 자기만 높아질려고 한다. 그래서 이웃을 억누르고 구속한다. 자기가 높아지기 위하여 심지어 남을 죽이고 자유를 빼앗는다. 그러기에 진정한 자유운동은 죄에서의 자유를
동반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죄에서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한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 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14;34)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화 운동은 하나님앞에서 의로워 지는 운동 , 곧 죄에서 자유함을 받는 전도운동과 함께 추진되어 나가야 한다. 그때만이 영원한 자유가 깃들일 것이다.
이는 진리가 자유케하는 자유 곧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안아 약속된 자유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53. 그리스도인의 자유
하나님게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사실과 그 다음은 자유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처럼 만드시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만드셨다. 인간이 공기 없이 한 순간도 살 수 없듯이 자유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자유에는 크게 분류해 보면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그것은 정치적 자유이다.
헨리 페트릭은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말한바가 있다. 물론 이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를 말한다.
이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가.
일제 36년간 얼마나 많은 애국 지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피를 흘렸는지.
3.1운동때만 해도 7천 5백여명이 죽고 1백 30여만명이 자유 쟁취에 참가했다.
1956년 10월 폴란드와 헝가리 국민 각각 10여만명이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수 백대의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이 무차별 난사를 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여자들과 13-14세 어린 아이들까지 소련군 탱크에 매달렸다. 그들은
[UN은 무엇을 하느냐. 우리에게 용기를 다오. 우리는 무기도 없다. 다만 피만이 있다.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그들의 주면 국가들은 모두 다른 공산국가와 접경되어 도망할 길은 오스트리아 뿐이었다. 어머니들은 자기 사랑하는 자녀들 가슴에
[우리는 최후 1인까지 남아서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울터이니 이 아이들을 잘 돌보아 주시오]라는 꼬리표를 붙혀 국경까지 보내곤 했다. 참으로 처절한 싸움이었다.
결국 소련 탱크 앞에서 자유의 외침은 침묵 당하고 말았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
그러나 그 피 값은 헛되지 않고 체코와 헝가리는 30년 후 소련종주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시작했다. 참으로 자유란 소중한 것이다. 그러기에 피 흘리며 싸우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신 천하보다 더 소중한 생명을 자유와 맞바꾼 것이다.
둘째로, 종교적 자유가 있다.
종교적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 이상으로 소중하다. 성경은 신앙 자유에 대하여 4대 기본 원리를 가르친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았다.
인종, 빈부귀천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존재이다.
둘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
짐승과는 달리 사람은 불멸의 영과 하나님의 속성인 지혜와 진선미로 거룩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세째, 자유를 주셨다.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고 양심 위에 자유를 주셨다. 즉, 자유인은 창조함을 받았기에 자유는 사람의 기본 권리이다.
제퍼슨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자유를 주셨다]고 했다.
넷째, 사람은 평등하게 지음 받았다.
계급(階級)과 귀천(貴賤)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반된다.
이 지구상에는 같은 동족들 간에도 평등 원리를 위반하므로 계급적 차별로 갈등과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인도에는 4대 계급이 있는데 천민중에도 불가근,불가견,불가촉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병이 나도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이와 같은 인간에게 기본적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으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영적인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신것이다.
예수께서 사역 초기에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여 눈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14:18-21)라고 선포 하셨다.
예수님은 6백년전의 예언이 자기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적 영적 자유를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고 하셨다.
바울은 예수를 전하다가 체포되어 빌립보에 갇혔으나 그의 영은 자유로웠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하기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했다.
54. 참된 자유
정치적으로 고통받는 자를 풀어주는 것도 자유이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자유는 바로 내면에서 오는 자유이다.
우리는 복음과 접하기 전에는 세상의 초등학문과 사상에 사로잡혀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언제나 그것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의 사상 세계로 들어오면 초등학문의 허구성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게 되고 사상적으로 자유하게 된다.
55.물질에 자유하지 못한 사람
어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지 못하는 것은 내것은 어느놈이 들고서 좋아할 것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지기 대문이다]고 했는데
자유는 울화통이 아니라 새로운 소유를 향해 달려가게 하고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포기하게 합니다.
56. 자유
자유는 위대한 기독교적 단어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계 최고의 해방가로 묘사하고 있다.그분은 구약의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시면서 이렇게 주장 하셨다.
눅4:18-19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예수님이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와 눈먼 자와 눌린 자를 육체적 범주의 것으로 이해하도록 의도하셨든 영적인 범주로 이해하도록 의도하셨든아니면 그 둘 다이든 간에 그 생애 후기에 가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는 약속을 덧붙이셨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기독교적 자유의 투사가 되었으며 이렇게 강조하기도 했다.
갈라디아서 5: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최고의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57.자유와 용서
자유는 용서로부터 시작이 된다.
58. 자유의 개념
예수님은 언젠가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유대인들은 즉시 분개했다. 어떻게 감히 그가 자신들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향하여 반문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러므로 만일 죄책이 우리가 자유롭게 되어야 할 첫번째 예속이라면,죄는 그 두번째이다. ㄱ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구원과 마찬가지로 죄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어휘속에 있는 단어이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죄인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들은 죄를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과 같은 구체적이고 다소 감정적인 악행들과 연관을 시킨다.
그러나 죄라는 말은 그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죄는 [자기 중심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두 가지 큰 계명은 첫째로 온 생명을 다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몸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그 순서를 뒤바꿔 놓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첫번째로 놓고서 우리의 자율성을 하나님앞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그 다음 우리의 이웃을 두번째 위치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눈에 띠지 않는 어느 뒷 부분에 몰려 놓는 것이다.
자기 중심성은 지독한 폭군이 되어 나타난다. 이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밖에는 존재의미가 없다.
나 자신의 자아라는 좁고 어두운 골방에 홀로 앉아서 나는 자유인라고 외치는 가련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감옥들 중에서도 가장 담담하고 어두운 감옥은 바로 자기 중심성,즉, 자아임을 명심하자.
진정한 자유는 자아를 포기할 때 가능해 진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하신 것은 의미가 깊다.
59. 참된 자유
참된 자유는 에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만이 가능하다.
그것을 버린다거나 이탈한다면 그 때부터 우리는 참된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60. 자유 얻는 방법
의심과 감정이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숙녀는 이것을 행하는 매우 실질적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의혹이 떠오를 때면 그녀는 그 의혹에 관해 말해 주는 성경구절을 찾습니다.
그 구절을 종이에 옮겨 적어서 의심이 생겨날 때 그녀는 그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반복해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녀가 낙심해 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구세주로 맞아 들였을 때 너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고 확신하느냐.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스며들곤 합니다. 그럴 때 그녀는 성경에서 요일5:14―15 구절을 찾았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그녀는 이것을 베껴 쓰고 그 밑에
“1969년 1월 14일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이 나의 삶 가운데 들어와서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이 되시기를 원한다.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계획과 나의 삶을 위한 주님의 뜻과 합당하므로 들어주실 줄 믿는다”
라고 적었습니다. 그녀는 그 종이를 침실 거울에 붙여 놓고 의혹이 생겨날 때마다 그 종이 쪽지를 가르키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것이다. 나는 내가 거듭났음을 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셨음도 알고 있다. 내가 바로 그날 하나님 아들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했으니 다시는 방황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어떤 일에 죄책감을 느낄 때 그녀는 하나님께 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의 죄를 사하여 주셨는 가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면 그녀는 성경 요일1:9를 적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 아래에 그녀가 고백한 죄를 쓰고 날짜와 “할렐루야 내 죄가 사하여졌다”고 적어 넣었습니다. 점차로 그녀의 의심은 사라져 깨끗해졌습니다. 기도 응답과 날짜를 적어 놓고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키는 성경 구절을 써넣는다면 여러분은 의심과 감정에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이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61. 복종이 참자유
독일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는 어떤 날 밤 자기 강연에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야말로 참된 자유라고 외쳤다.
62. 박약제(博約劑)
퇴계 선생은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큰 그릇이 되라고 건물구조 자체를 공(工)자로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 전관에 '박약제'란 현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박약제'란 말의 뜻은
'박'자는 박사할 때의 박(博)자이고 '약'자는 절약할 때의 약(約)자입니다.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입니다. 이조 5백년 동안 유교의 예절이 너무 번거로워 백성들의 삶을 위축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퇴계 선생은 지나친 예절의 폐해를 살피시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넓히되 예절은 줄이라는. 삶의 큰 길에 대해 바로 가르쳤습니다.
이 '박약제'란 말을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봅시다.
학문을 넓히고 예절을 줄이라는 말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복음'을 넓히고 '율법'을 줄이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복음은 삶을 누리고 자유함을 얻는 정신이어야겠는데, 우리는 옛날 조상들이 예절에 너무 매여 인간성이 억압받았듯이 율법에 매여 즐거운 삶이 제한당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사실 자체는 고통에서 해방된 삶을 누린다는 뜻이며 어느 경우나 매임이 없고 막힘이 없이 당당하고 넓은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63. 빵과 자유
[빵없는 자유도 싫지만 자유없는 빵도 싫다]
2차대전 이후 폴란드 노동당을 이끌던 고물카의 말이다.
공산주의국가에서 빵이란 말의 의미는 지극히 상징적이고 이념적이다. 그들에게 있어 빵은 바로 그들의 경제 체제이며 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의 내용이다.
부의 균등분배라고 하는 그들의 이상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당연한 귀결로 노동의 댓가는 배급을 통해 보상받게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굶는 자가 없고 이것은 그들이 내세우는 최대의 자랑거리이며 그들이 말하는 평등사회의 본질이 된다.
그런데 고물카는 빵속에 자유라고하는 성분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유가 없는 빵을 배급받는 인간은 한낱 동물적으로 사육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흔히 공산국가에는 자유가 없고 자본주의국가에는 평등이 미흡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인류가 자유와 평등을 함께 누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으랴만 그렇지 못함은 두 체제의 한계성 때문이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탈이념적 조류속에 체제의 선택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으로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의 모색에 기존의 신앙은 변질되어 간다.
그리고 이같은 현상이 주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은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자유와 평등을 저울질해왔다. 전후 국제화 물결을 타고 그들의 울타리를 넘어온 자유를 통해 그들의 시혜적(施惠的)평등이 인간의 무한적 욕구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자유가 많다.
그들은 데모를 하든, 공부를 하든, 소주를 마시든, 디스코를 추든 마음대로다.
스승을 삭발하는 패륜에서 요즘은 자치학교다 무장봉기다 그야말로 멋대로다.
그들에게 자유란 일상의 공기나 물쯤으로 절실함이 없다. 그들의 눈에는 부쪽의 평등만이 크게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자유를 담보하고 지급받는 것임을 알지못한다.
그리고 북쪽에서 보장되는 유일한 자유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일임을 우리 학생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64. 자유를 얻은 새
인디안 부락에서 바자회가 열렸다. 모두가 사고 팔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한 농부가 메추라기 한 떼를 가져왔다. 그리고 새마다 발목에 줄을 매었다.
중앙에 막대기를 세운 동그란 쇠에다 모든 줄을 한 끝을 묶었다. 그리고 메추라기들은 원형 안에서 마치 노새들이 당밀 제분소에서 계속 뺑뺑 도는 것같이 슬프게 계속 돌면서 걷고 있었다.
독실한 브라만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메추라기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모든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힌두교사상를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조그마한 불쌍한 동물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그 브라만은 메추라기의 가격을 묻고 그 상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것들을 다 사겠소." 그 상인은 기분이 좋았다. 그가 돈을 받은 후에 그 브라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랬다.
"자, 이제 그 새들을 다 놓아 주시요." "뭐라고요, 선생님?" "내가 말하지 않았소. 새 발목의 줄을 끊어 그들을 놓아주란 말이요. 그 새들을 모두 자유케 해 주시오." "아, 네. 선생님, 그렇게 하지요. 그것이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요." 그 농부는 칼로 메추라기 다리의 줄을 끊고 그 새들을 풀어주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 메추라기 떼들은 계속적으로 원형에서 돌고있지 않은가? 결국 그는 새들을 억지로 날려보내야만 했다.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 앉은 후에도 그 새들은 행진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몸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아직도 묶여 있는 것처럼 원형을 계속 돌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 장면에 나오는 새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죄로부터 자유케 되고, 용서함 받은 하나님의 아들딸들로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지만 자기 자신을 벌레나 메뚜기 같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낮은 자존감은 사단의 치명적인 심리적인 무기이다.
65. .진정한 자유
어느 목사님을 통해서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한국인의 모습을 풍자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각 나라를 대표하는 열 사람이 배를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배의 수용 인원은 7명이었습니다. 7명인데 정원을 무시하고10명이 탄 것입니다.
배가 한참 항해를 계속하다가 물이 스며들어 오고 이 배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세 명을 이 배에서 내려놓지 않으면 이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음의 운명 앞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누가 양보를 해 줄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맨 처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대영국제국의 국민입니다. 제가 신사도를 발휘해서 여러분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다이빙을 해서 물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 다음에 또 누가 뛰어들 것인가를 눈치를 보는데 두 번째 사람이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메리카에서 왔습니다. 세계 최대 강국의 제가 양보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도 물 속에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사람이 벌떡 일어섭니다. 이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나서 갑자기 옆에 있는 일본 사람을 쥐어박더니 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말할 때마다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시켜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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