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유자 바울! (고전 9:1-2)
사람들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국가로부터 '언론의 자유, 종교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여러 가지 자유를 보장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를 억압받고 빼앗길 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상 적인 것에도 자유를 귀히 여기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심지어는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생명도 불사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바울이 외친 ‘나는 자유자’라고 한 이 자유도 세상 적이고 정치적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요8;34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도 참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 그는 누구인가?
①‘내가 자유자가 아니냐’(1) 그는 참 자유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를 보면 이 자유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싸운 흔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만큼 자유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육신의 속박에서 자유 함을 얻는 그런 자유가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자유인 ‘엘류데로스’라는 자유인데 이를테면 율법에서부터 심지어는 죽음의 문제까지를 초월하는 그런 자유를 말합니다.
⑴바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 했습니다. 그는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유대교의 특징은 계율이 많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생활 지침서인 탈무드를 보면 모두 613가지의 계율이 6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라'는 계율이 248가지고 '하지 말라'는 계율이 모두 365가지나 됩니다. 이 수많은 계율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자유를 속박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을 못 하도록 묶어 놓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 이 모든 계율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모두 집어던지고 ‘나는 자유자다’라고 외칩니다. 이를테면 613가지의 율법의 옷을 모두 던지고 예수의 옷 한 벌만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⑵진정한 자유는 주안에서의 자유입니다. /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신으로부터 자유하고, 육신으로부터 자유하고,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고 심지어는 죽음의 문제로부터도 자유’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해야 합니다.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죄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죄는 모든 것으로부터 불화를 일으키게 합니다.
㈁죽음의 문제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예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물질로부터도 자유해야 합니다. 물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물질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탐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자유해야 합니다. 살다 보면 취미 생활도 해야 하고, 친구도 많이 사귀어야 하고, 모임이나 직함도 가져야 하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혼자 있는 시간을 빼앗기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조차도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절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많은 시간을 묵상 기도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⑶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옵니다!
빌 클린턴은 2000년 8월19일에 그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 시카고 '빌 하이벌스' 목사가 주관하는 미국교회 목회자대회에서 4,500명의 목사님이 모인 그 자리에서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에 대한 회개고백을 했는데 그 말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생각이 자유롭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대통령까지 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 은혜를 모르고 사니까 내가 죄를 짓게 되고 얽매였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생각의 자유가 왔다, 용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하원의 탄핵을 받으면서 괴로워했지만 내게 진정한 자유가 없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 앞에 나의 허물을 고백함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여러분, 현직대통령이 4,500명의 목사님들 앞에서 이런 신앙고백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큰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⑷성령으로 자유하라! 고후3:17절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할/
⑸자유 자는 죄의 종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 말아야 합니다. 갈5: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⑹진정한 자유는 주님이 주실 때 완전합니다. 요8: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할/
②그는 ‘예수의 참 제자’이었습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 이 말은 소속이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의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갈2;20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는 자신의 가치를 예수를 위해서 사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정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쁨으로 매일 때인 것입니다.
한 여인의 행복은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 매일 때 주어집니다. 한 남자의 행복도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구속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여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을 때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고 방종입니다.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가정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 기꺼이 매일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매임으로, 그리고 그에게 완전히 속박되어 사도가 됨으로써 그는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살든지 죽든지 예수님을 위하여 산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시원한 인생입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분명하고, 뜨겁고, 확실하고, 언제나 앞서가는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의 값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니까 허무에 빠지고 방종에 빠지고 무질서한 삶을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③그는 완전히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는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신앙 인은 신앙의 대상을 만나고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가리켜서 사도가 아니라고 시비했습니다. 당시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사후에 개종해서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도성에 대한 시비가 늘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한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만나는 것’입니다. 그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때 확신과 자신감과 분명한 자세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는 자신 있게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어디 가서나 당당했습니다. 자신감에 꽉 차 있었습니다. 소신 있게 살았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 정도는 이미 초월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 자유인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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