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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협동적 신앙
원 두우, 아펜셀라, 두 선교사들의 신앙은 또한 협동적 신앙이었습니다. 한 분은 장로교요, 다른 분은 감리교였으나 서로 협동하여 일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이 타고 오던 배가 점점 제물포 부두에 가까이 오니 처음에는 두 선교사가 서로 먼저 내리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말하기를“우리 미국의 예의로는 레이디 퍼스트(lady fist)인데 아펜셀러 부인을 먼저 내리게 합시다”그 후에 두 분이 같이 내렸다고 합니다. 이 협동적 정신은 내내 그들의 모든 선교사업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교파는 비록 다르나 모든 일에 피차에 협력하였습니다.
우선 선교사업에 피차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을 정하였습니다. 원래 인천 지방은 감리교 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해방 전 까지는 이 곳에는 감리교회만 있었습니다. 서울, 평양, 같은 대도시외에는 꼭 구역대로만 선교를 하였습니다. 또한 공통된 일에는 모두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일하였습니다. 곧 성경을 번역하는 일 찬송가를 출판하는 일, 주일 공과를 만드는 일을 연합하여 도왔습니다. 처음에는 병원, 학교까지도 다 연합하여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연합공의회를 조직하여 모든 것을 협력하였으며 동경 유학생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이 공의회에서 한번은 장로교 목사, 그 다음은 감리교 목사를 파송하여 공동으로 전도사업까지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때에 장로교회는 남·북 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네 교파의 선교사들이 왔으나 교회는 한 장로교회를 세웠습니다. 또 남·북 감리교회도 두 교파에서 선교사들이 왔으나 합하여 한 감리교회를 세웠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 개척 선교사들은 다 에튜메니칼 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개척 선교사들이 이렇게 지도하였지만 해방 이후 혼란기에 장로교회나 또는 감리교회가 몇 갈래로 분열된 것은 실로 서글픈 일입니다. 개척 선교사들의 협동적 신앙이 아쉽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기도하실 때에 하나되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다 똑같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비록 각각 다른 점이 있으나 주안에서 공통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습니다. 이, 목, 구, 비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한 몸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곧 예수 안에서 다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꼭 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공통한 일에 곧 전도나 사회봉사나 민족이나 국가를 위한 큰 일에 협력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개척자의 신앙>에서
252.사랑 장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 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요한 은“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요일 4:7-8)고 말하였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 장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고린도 전서 12장 마지막 절부터 읽어야 그 뜻이 더욱 분명합니다.“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2장에 사도 바울은 우리 믿는 이들이 받는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하여 말 하다가 모든 은사 가운데도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며, 또한 제일 좋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면서 사랑이 곧 더욱 큰 은사요 제일 좋은 길임을 가르칩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더욱 큰 은사인 사랑을 사모할 것이요,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좋은 길을 꼭 걸어야 합니다. 왜? 그 이유를 13장에 설명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잇습니다. 1절로 3절은 사랑의 우월성, 필수 성 곧 사랑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4절로 7절까지는 사랑의 본질 혹은 내용을 분석하여 자세히 가르칩니다. 그리고 8절로 13절까지는 사랑의 영원성 곧 사랑은 길이 폐하지 아니하고 영원함을 지적합니다. 13장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아무리 무슨 방언을 하고, 혹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언을 알고, 또 비록 하늘에서 쓰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으로 그 은사를 쓰지 못하면 쓸데없는 소리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도“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실 아무리 예언의 능력과 모든 신비를 깨닫는 지식을 가졌다 하여도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을 가졌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다시 말하면 아무리 많은 구제사업을 하고 심지어 순교까지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253.사랑의 은사
사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햇빛과 같습니다. 아무리 붉고 푸른 아름다운 꽃들이 많다고 하여도 빛이 없으면 그 꽃들은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소금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만반 진찬(珍饌)이 있을지라도 거기 소금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맛이 아니 납니다. 사랑은 모든 귀한 은사를 빛나게 하고 사랑은 모든 좋은 일을 더욱 만나게 하는 귀한 은사입니다. 아무리 다른 은사와 재능을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은사를 받지 못하면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는 누구나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 사랑 없는 전도, 사랑 없는 열심, 사랑 없는 선물, 사랑 없는 봉사(자선사업)는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는 꼭 받아야합니다. <제일은 사랑>에서
254.어부의 기쁨
해방 후 처음으로 남산에 모여 연합 부활절 예배를 드릴 때에 한 선교사가 그 옆에서 있는 원일한 박사에게 “만일 당신이 한국에 오지 않았던들 오늘 이 광경을 볼 수 있었을까요?”라고 하였답니다. 전도하는 이들에게는 어부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에도 낚시질하려 다니는 이들이 상당히 많아진 듯합니다. 얼른 보면 낚시질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낚시질에 미치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조금은 답답하다가도 큰 물고기 하나가 물려나오면 종일 답답하던 생각이 일시에 다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하여지는 모양입니다. 전도하는 이들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에 어떤 전도사가 큰 고기를 하나 잡았다고 기뻐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이 처음으로 당시 안주에 큰 실업가이시던 고한규 씨를 인도하였습니다. 만념에 우리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고한규 장로님을 여러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참 큰 고기였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 선생을 킴볼이라는 무명 전도사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분은 당시 무명 청년 한 분을 인도하였지만 그 후에 무디는 수십 만 의 영혼을 구원한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전도하여 믿는 그들이 장차 무슨 큰 일을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전도를 하는 이들만 이 영적 어부의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255.천국의 보병
마지막으로 전도는 현대 전쟁과 비슷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공군이 가서 적국의 중요한 군사시설을 폭격합니다. 그리고 해군이 또한 동원되어 적국에 가까이 가서 집중 함포(艦砲)사격으로 적의 요새를 파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공군 해군만으로 완전한 승리는 얻지 못합니다. 마지막에는 육군이 상륙하여 적진을 그리고 적의 영토를 점령해야 완전한 승리를 거둡니다. 전도에는 공군과 비슷한 것이 잇습니다. 곧 방송전도나 문서전도는 어디에서나 복음의 폭탄을 던져 악마의 아성을 깨뜨립니다. 그리고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와 같은 대중 전도집회는 마치 해군의 함포 사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만으로는 온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에도 육군 곧 보병이 필요합니다. 새로 믿으려고 하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인도하여 내는 이가 필요합니다. 기억합시다. 우리가 다 방송전도는 할 수 없습니다. 빌리 그레함 처럼 대중전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개인 전도는 할 수 있습니다. 곧 천국의 보병은 될 수 있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과 같이 “천사 같이 말못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그러나 누구나 내 집 근처에 다니면서 개인 전도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전도의 달에 우리 교우들은 누구나 다 보병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 12장 3절에 “많은 사람을 옮은 길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라” <전도자의 축복>에서
256.몸과 그 지체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서로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재능도 다르게 주셔서 다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다양성 가운데서 일치성을 찾아야합니다. 각각 지기 받은 은사대로 공헌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습니다. 일에 귀천이 없습니다. 피차에 존경하며 협력하는 가운데 교회와 민주사회는 발전합니다.
교육에 있어서 획일주의 교육은 민주사회의 장례를 위하여 크게 우려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나와 좀 다르다고 협력을 거부하는 태도, 또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줄 오해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듯합니다. 획일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257.상부상조하는 지혜
여러분은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한 번은 손과 발과 입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위에 대한 불평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여 결국 모두 위 곧 밥집에 음식물을 넣어주는 것밖에 무엇이 잇느냐? 위는 받아먹기만 하고 무엇을 하느냐? 그리하여 손과 발, 입 세 가지가 요새말로 스트라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손과 발은 먹을 음식을 가져도 안 오고 입은 삼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니 손과 발도 맥이 없어졌고 혀까지도 놀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길게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지혜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입니다. 지체끼리 분쟁이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는 화평해야 합니다. 상부상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에서
258.아브라함의 길
금년이 바로 미국의 독립 200주년 기념의 해입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어떤 남미의 한 정치가가 미국의 한 대사를 만나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당신나라의 조상들은 일찍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이 미주 대륙에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나라 국민들은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고, 물질까지 풍부의 얻었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말이나 우리 나라의 조상들은 물질을 얻기 위하여 이 대륙에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물질도 얻지 못하고 또 자유도 얻지 못합니다.”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는 조국의 발전과 민족의 중흥을 위하여 온갖 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경제개발이 필요합니다. 근대화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을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신면입니다. 정신 개발이 필요합니다. 신앙 운동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더 귀합니다. 소망도 더 귀합니다. 공의도 더 귀합니다. 최후 승리는 언제나 진리와 정의 편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태도, 롯의 삶의 태도,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와 세상 사람들의 태도와―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로 인생 길을 갑니까? 아브라함의 길을 걷습니까? 롯의 길을 걷습니까?
바른 가치관과 바른 선택이 필요합니다. 두 갈래 길이 우리 각 사람 앞에 놓여 있습니다. 또 우리 민족 앞에도 놓여 있습니다.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길을 걸읍시다. <아브라함과 롯>에서
259.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거룩 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오늘은 바로 종교개혁 459주년 기념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독일 뷔텐베륵크 교회에 95개 조항의 개혁안을 계시한 날입니다. 지금 읽은 로마서 1장 17절은 전 로마서의 주제요, 또 종교개혁의 구호입니다.
260.루터와‘빌라도의 사다리’
루터는 본래 가난한 광부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독실한 신앙의 가정으로 당시 천주교의 교훈대로 하나님은 진노의 신이요 그리스도는 엄한 재판장이며 구원은 성자 예수뿐만 아니고 성모 마리아 그리고 또 신부, 주교, 교황을 통하여 얻는다고 배웠습니다. 루터는 대학 재학시절에 중상을 당한 적도 있고, 중병으로 고생한 때도 있고, 한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험 등을 통하여 인생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폭풍우와 뇌성병력이 일어날 때에 길가에 꿇어앉아 “성 안나 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으면서 그 때부터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가서도 정신적 고민이 또한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교훈과 당시 천주교에서 가르치며 또 하는 일들이 다른 점들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교회의 교훈대로 아무리 선행을 힘써 보았으나 심령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그가 성경을 가르치게 되어 특별히 시편, 갈라디아서, 로마서 등을 연구하는 중 지금 읽은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곧“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는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비로소 확신과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가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다른 순례자들과 같이 선행을 쌓으려고 빌라도의 사다리라는 층계를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이 말씀이 홀연히 그 심령에 들려 곧 일어나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261.종교개혁 3대 원리
당시에 교황이었던 레오10세가 속죄표 판매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루터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95개조를 제시하면서 공개 변론을 하자고 도전하게 되어 당시 유럽을 뒤엎은 종교개혁의 봉화는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3대 원리는 신자로서 언제나 기억할 만한 불멸의 진리입니다.
(1)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2)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실의 표준입니다. 교회의 전통은 성경으로 판단하여 취사 선택해야 합니다.
(3)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신부, 교황, 마리아가 아닙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제사장의 자격이 있습니다. 여기 신앙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선언합니다. <믿음으로 살리라>에서
262.기회의 문
어떤 농부가 중병에 걸려 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눈을 뜨자말자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둘러앉았던 이들이 지금은 봄이라고 하니 큰 소리로“아 그러면 곧 일어나 씨를 뿌려야지”하였다고 합니다. 기회의 제한성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겨울은 때로는 갑자기 오기도 합니다. 특별히 금년 겨울은 갑자기 오는 듯싶습니다. 큰 눈이 이미 11월중에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천재는 갑자기 옵니다. 교통사고도 갑자기 일어납니다. 화재도 역시 그러합니다. 질병도 갑자기 올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은 갑자기 쓰러집니다. 죽음도 갑자기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의 문이 닫히기 전에 꼭 할 일을 해야합니다. <삶과 그 기회>에서
263.협동으로 얻는 승리
협동은 우주의 대원리입니다.
천문학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도 천체가 어떻게 운행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달은 지구를 돌고 지구는 태양을 돕니다. 이 우주는 모든 천체들의 협동 가운데서 그 질서가 유지됩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 손이 내리면 아말렉이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팔이 피곤해져서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좌우 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주니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협동을 통하여 큰 승리를 얻은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사람들은 직접 싸우고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였으며, 아론과 훌은 기도하는 모세를 도왔습니다. 여기에 인간과 인간의 협동이 있고, 또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264.협동은 생의 법칙
협동은 생의 법칙입니다. 성경은, 몸은 하나이나 지체는 여럿이 있음을 지적하여 가르칩니다. 이 지체는 각각 다릅니다. 귀와 눈이 다릅니다. 손과 발이 다릅니다. 입과 위가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다른 지체들이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서 몸이 살아갑니다. 만일, 한 지체라도 협동하지 않고 그 기능을 포기하면 몸은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협동은 생의 법칙이요, 생명은 절대 불가결의 요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생명 있는 유기체입니다. 교회 안의 여러 지체도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 교회의 생명은 유지되고 발전됩니다. 주님은“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하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265.협동의 위력
협동이 있는 곳에 큰 힘이 생깁니다. 물방울이 합하여 태평양과 같은 바다 가 됩니다. 큰 기선이나 군함도 뜰 수가 있습니다. 작은 티 끝이 합하여 태산이 됩니다. 모이는 곳에 힘이 생기고 서로 합하여 협동하고 하나님께서 협동하실 때에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합니다.“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갓을 굳게 지키라’또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 또 인간과 인간과의 협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이 협동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는 큰 승리로 나타날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협동>에서
266.솔제니친의 서한
최근 소련에서 추방된 유명한 작가 솔제니친이 그 정부에 보낸 서한 가운데 1917년 볼세 비기 혁명이후 소련 국내에서 숙청을 당한 국민이 6천6백만에 이르렀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숫자는 아마 제일 신비성 잇는 숫자입니다. 또한 무신론의 체제 곧 공산주의의 체제가 얼마나 포악하고 무섭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소련뿐만 아닙니다. 중공이나 북한이나 무신론자들의 독재 아래 사는 국민들은 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 아래 놓여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무신론자들을 어리석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사실, 무신론은 이론적으로 어리석은 이론입니다. 무신론이란 이론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입니다. 현대인간이 어떻게 감이 이런 이론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논증은 그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능히 성립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논증은 사실 전 우주와 우주의 역사를 탐색하여 논증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리석은 무신론자>에서
267.빌립과 나다나엘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 님에 대하여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앨은“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잇느냐”고 반박하였습니다. 아마 그 뜻은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날 리가 없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갈리리 사람인 나다나엘은 나사렛 사람인 빌립을 처음에는 좋게 여기지 않았음으로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갈라리 사람은 나사렛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의 편견에 치우친 반박에 대하여 빌립은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말하기를 “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빌빕을 따라 예수 님께 나아가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 결과는, 예수는 과연 만민의 구주이신 메시야인 줄을 나다니엘도 깨달아 알게 되어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말을 믿지 않는 나다니앨에게“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와서 체험하여 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혹 니다나엘처럼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이런 분에게 저 역시“ 와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곧 예수를 믿어 보세요.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기독교가 참 진리의 종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와 보라>에서
268.성경공부와 신앙 증진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공부하면 우리의 신앙은 자연히 장성하게 됩니다. 전에 유명한 부흥사 디 엘 무디 목사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나는 처음에 믿음을 더 얻기 위하여 기도만을 힘썼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 후 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온다는 성경구절을 읽고 공부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랬더니 믿음은 자연히 성장하게 되었다”
또 교회 역사를 보면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서 모든 위대한 신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 운동은 그 당시의 수도사로 있던 마틴 루터가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다하는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 이 종교 개혁이 위대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세기 이후에 선교 운동도 윌리암 캐리, 리빙스턴 같은 이들이 성경을 읽는 가운데“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들음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난 것도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는 하나라고 깨닫는데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교회의 사회 참여, 사회정의 운동도 역시 성경을 공부하는데서 곧 공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새롭게 듣는데서 일어났습니다.
에스라는 자기자신이 먼저 성경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또한 성경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준행(遵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은 매우 필요하나 아는 지식에만 그치면 안 됩니다. 그대로 준행 하여야 합니다. 사실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은 그대로 행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6장 16절에“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規例)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하였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장 8절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그러므로 우리 주님도 산상보훈에서“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269.현대 우리 교우들은 어떠합니까?
아마 우리 교우 가정에는 누구나 성경 한두 권은 가지고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성경을 읽는가 입니다. 연구하는가 입니다. 성경 위에 먼지는 없습니까? 어떤 분은 말하기를 오늘날 교인들이 성경 위에 앉은 먼지를 일시에 털면 해가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공부하기로 이 성서 주일에 결심하기를 바랍니다. <한 애국자의 결심>에서
270.참된 향기
장미는 그 모습이 아름다울뿐더러 향기가 또한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미를 더 사랑합니다. 백합도 역시 그러합니다. 모습이 아름다울 뿐더러 향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합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풀 가운데도 특별히 향기가 있는 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초향(草香)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대 지방에 가면 흔히 이런 향기 있는 풀을 동산에도 심고 방안에도 심습니다. 나무 가운데도 특별히 향기 잇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런 나무를 흔히 향나무라 합니다. 이런 나무로 향품을 만듭니다.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우리는 다 이렇게 향기를 좋아합니다.
옛날 솔로몬이 그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때에 외부는 물론 돌로 쌓았으나 그 내부는 향기가 나는 백향목(柏香木)으로 전부 입혔습니다. 그리해서 성전 안에 들어가면 언제나 향기가 있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전 안에는 향단이 있어서 그 위에 향기가 또한 성전 안에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271.예배의 향기
교회사를 읽어보면 동 로마 제국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노불에 그 유명한 성 소피아 예배당을 지으면서 돌을 쌓을 때에 회(灰)산물에 향을 섞었으므로 언제나 그 안에 들어가면 향기가 가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옛날부터 인간은 향기를 사랑해서 몸에 화장을 할 떼에도 향유를 썼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도 향품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 님이 탄생하실 때에 동방박사가 멀리서 와서 아기에게 경배할 때에도 황금과 유황과 물약 이 세 가지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여기 유황이라는 것은 지극히 귀한 동방의 향품을 의미합니다. 향기는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온 방안을 향기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향기는 거룩함과 순결함과 아름다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인격의 향기가 있습니다. 영혼의 향기가 있습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향기가 있어야합니다.
이미 말씀들인 대로 옛날부터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에 향품을 사용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향기를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구약시대에는 성전 안에 향단이 있어서 언제나 향을 피웠고, 자금까지도 오랜 역사적인 교파 가운데는 예배할 때에 향을 피우는 풍속이 잇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갔을 때에 어떤 주일에 친구의 인도를 받아 인도사람으로 조직된 교회에 가니 그 교회에서는 향을 많이 피우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실지로 예배 시에 향을 피워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교회의 전통과 예배의식을 따라 그 견해가 각각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려야합니다.
272.솔로몬의 지혜
옛날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사모하여 그를 방문할 때에 그의 지혜를 시험하여 보기 위해야 아름다운 꽃 화분 둘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꽃들은 꼭 같은데 실상은 하나는 산 꽃이요 다른 화분은 사람이 만든 꽃이라고 합니다. 이 시바 여왕이 화분 둘을 멀리 갔다 놓고 솔로몬 왕에게 어느 화분이 참 꽃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솔로몬 왕은 조금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있는 신하에게 말하기를“애, 동산에 나가서 벌과 나비를 몇 마리 잡아오너라”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그 신하가 벌과 나비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은 다시 말하기를“얘, 그 벌과 나비를 방안에 놓아 주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벌과 나비들은 그 방안에서 조금 날더니 금방 화분 있는 데로 날아갑니다. 그러더니 그 놈들이 한편화분에만 앉고, 다른 화분에는 한 놈도 안 앉았다고 합니다. 그때에 솔로몬 왕은 웃으면서 말하기를“저 벌과 나비들이 앉은 화분이 산 꽃이다”하였다고 합니다. 왜 벌과 나비들이 산 꽃에만 앉았습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곧 산 꽃에만 향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산 믿음이 있습니까? 참으로 예수를 믿고 그를 나의 중심에 영접하였습니까? 만일 이점에 분명치 못한 이가 있으면 오늘 저녁 중심에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산 장미가 됩시다. 죽은 장미가 되지 맙시다. 죽은 장미는 쉬 썩어서 더러운 냄새가 납니다. 산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성경에 보면 베다니 마리아의 믿음과 사랑의 향기는 지금까지도 온 세계에 널리 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에서
273.부활 주일의 선포
부활절은 온갖 불의에 대한 의의 온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의와 불의, 진리와 허위, 선과 악, 자유시상과 노예화사상, 광명과 암흑 세력의 투쟁의 마당입니다. 때로는 허위가 진리를, 악이 선을 이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북한 동포들은 아직도 유물론, 무신론 등 거짓 사상과 그 제도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불의와 암흑의 온갖 쇠사슬에 얽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언제까지 계속되지 않습니다. 한 조각 검은 구름이 때로는 밝은 해를 가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뿐입니다. 오래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불의가 의를 일시 이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뿐입니다. 의는 반드시 영구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절이 가져오는 첫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부활절을 선포하는 첫째의 영원한 우주와 인간의 진리입니다.
274.죽음과 부활
이 부활절은 인간의 죽음이 최후가 아니고, 무덤이 종착역이 아니고. 영원한 불멸의 존재이며 또한 이 영생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온다는 사실을 확증하여 주십니다.
나는 일찍이 북한에 있었을 때에 어떤 부인의 장례식을 주례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부인의 아들이 만주에 가서 살았는데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못하여 결국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다리든 아들이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그의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어머니 관 위에 엎디어 그 관을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며“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셔요”크게 부르짖었습니다. 그 애절한 음성이 내 귀에 지금도 쟁쟁합니다. 인생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습니까?“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겠느냐”하는 의문은 욥 이래 인간의 끊임없는 문제입니다.
지금은 바로 꽃이 피고 새싹이 굳은 땅을 깨치고 솟아나는 계절입니다. 인간의 최후는 영원한 암흑입니까? 인생은 이렇게 허무합니까? 실로 죽음은 인생의 가장 큰 의문이요 최대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한편 인간 심령의 깊은 속에는 영원에 대한 동경이 잇습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의 유명한 시구와 같이“인간은 그가 죽으려고 지음을 받은 줄로 생각지를 않는다”(Man thinks he was not made to die.)고 했습니다. <부활주일이 선포하는 3대 진리>에서
275.씨스틴 채풀’ 예배당
로마에 구경가는 사람은 로마시, 바디칸시티 속에 씨스틴 채플이라고 하는 작은 예배당을 찾아갑니다. 이 예배당은 작지만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16세기에 가장 유명하였던 미켄란잴로의 그림이 모든 벽에 걸러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그림은 보통 그림이 아니라, 창세기 1장부터 요한 계시록 마지막까지의 성경에 있는 중요한 장면을 여러 해 동안 그려서 성전 벽에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 예배당을 구경하려 갑니다. 천장 중앙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장면과 아담을 창조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에 닿을 때에 아담에게 생명이 있게 됩니다. 아담이 산 사람이 됩니다.
생명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산 것이 산 것을 낳습니다. 죽은 것이 산 것을 낳지 못합니다. 이 우주의 생명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무기물이 유기물을 만들지 못합니다.
276.생명 되신 그리스도
신약에 와서 4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님의 일대기(一代記)가 기록되었는데, 예수 님의 여러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었으나 한가지 찾을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주의해 보셨습니까. 예수 님께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하셨지마는 장례식 했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4복음을 다 읽어보아도 장례식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죽은 사람은 만날 때마다 꼭 살려주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습니다. 베다니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 된 것을 무덤에서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 님 자신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와 접촉하면 그냥 죽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1장 25절에“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사라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신 그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277.영원히 사는 삶
작년에 영국의 처칠 수상이 90평생을 살다가 서거했습니다. 몇 해 전에 세계적으로 존경받던 유명한 신학자요 의사인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역시 90평생을 살다가 아프리카 람바레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래도록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말(韓末) 한국사회와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었고, 일찍이 YMCA의 총무이셨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나이 퍽 많았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영국의 로드 죠지 같은 오래 사는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이 사람들은 말하기를 내가 건강하니 100세를 살겠다, 120세를 살겠다고 하는 말이 신문에 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본 어떤 청년이 연로하신 이상재 선생에게 가서 묻기를“누구는 얼마를 살겠고 누구는 얼마를 살겠다고 말하는데 선생은 얼마나 사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선생이 얼른 대답하는 말씀이“그게 다 사는 법을 몰라 그렇지, 나는 영원히 살 테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278.무디의 부탁
19세기에 미국에서 유명한 부흥사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무디라고 하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지금 빌리 그래함처럼 유명한 이였습니다. 이 분이 점점 나이가 많아 갈 때에 어느 곳에서 설교를 하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아마 오래지 않아서 여러분은 나에 대한 소문을 쉽게 들을 것입니다. 이 무디가 죽었다 하는 소문을 들을 것입니다. 혹 신문에도 나서 여러분이 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내가 미리 부탁하는 것은 그런 소문은 곧이 듣지 마세요.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내가 이 육신을 벗어 놓을 떼는 지금 보다 더 분명히, 더 똑똑히 , 더 깨끗이, 더 풍부하게, 더 행복하게 영원히 살 것입니다”이것은 사실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생명의 근본 되시는 예수 님을 믿고 그와 하나가 될 때에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이런 것도 구하고 저런 것도 구하지만, 요컨대 인간에게서 최고로 요구되는 것은 생명입니다. 왜 돈을 모으려고 합니까? 돈이 있어야 생명이 윤택하게 살 수 있어요. 왜 지식을 많이 얻으려고 합니까? 지식이 있어야 우리의 생명이 지적으로 풍부하지요.
예수 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목적을 요한 복음 10장 10절에 설명하셨습니다.“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부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도덕적 생명, 우리의 문화적 생명, 모든 방면의 생명이 풍부해집니다. 영원해집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와 같은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길, 진리, 생명>에서
279.파종과 수확의 원리
옛 날이나 지금이나 애굽은 나일강이 범람할 때에 식물인 곡식을 물위에 던져서, 관개(灌漑)를 해서 농사를 지으므로 물위에 던져야만 가을에 많은 수확을 얻게됩니다.
우리 한국과 같이 벼농사를 많이 하는 나라에서는 이 원리를 누구나 잘 아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봄에 나가서 물위에 떡의 자료가 되는 종자를 뿌립니다. 그래야 가을에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여기 이 말씀은 파종과 수확의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영적 세계에 있어서 선행과 봉사의 희생이 있으면 오랜 후에라도 응보가 있을 것이라 하는 원리인 것입니다. 이런 원리에 대한 확신은 우리 동양 사람들도 옛날부터 공통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해서 옛날부터 내러오는 속담 가운데,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쌓는 길에 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보편적인 인과 응보의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많은 주석(註釋)가의 말에 의하면 이 교훈은 이 원리를 가르쳐 줄 뿐 아니라 한 거름 더 나아가, 떡을 물위에 던진다고 하는 말은 물과 같이 무심하여 반응이 없는 곳에서라도 선행하고 봉사를 잘하면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을 때가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280.아름다운 미담
일제시대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신의주 거리에서 작은 상점을 경영하던 한 믿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본도 별로 없는 조그만 상점을 차리고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일본정부가 주동이 되어 만주(滿洲)국과 합작을 하여서 압록강 댐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 북한의 많은 전기가 다 거기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 삭주라고 하는 곳에 동양에서 제일 큰 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의주에서 작은 상점을 경영하던 이 청년이 그 땜 공사의 여러 물자를 용달(用達) 하는 책임을 맞게 되었습니다.
많은 물자를 사서 용달 하는 가운데 이 상점은 3, 4년 동안에 힘 안들이고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신의주 사람들은 다 놀랐지요. 그런데 그 배후에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미담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이 청년의 부친으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이 분의 아버지가 일찍이 촌에서 농사하면서 살았는데 한 번은 밭에서 나가 일을 하다가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후에 자기 강냉이 밭을 지나오는데, 그 밭에서 인기(人氣)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두운 때에 누가 남의 밭에 들어왔을까 이상하게 생각되어 그 밭을 헤치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한 젊은 여자와 10여 세 난 아이가 분주히 강냉이를 따서 광주리에 담고 있었습니다. 바로 도둑놈이 눈앞에 있었지요. 그래 가까이 가보니까 자기가 잘 아는, 그 동래에 사는 가장 가난한 과부인데, 이 과부가 자기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강냉이를 따고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 그의 생각에는 저들이 도적질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분하게 생각되었으나 곧 이 분의 마음 속에는, 그가 잘 믿는 분이고 후에 장로가 된 분인지라, 저 과부는 아무 것도 없는 과분데 얼마나 배가 고프면 강냉이를 따갈까 하는 불상한 마음이 생겨서 아무말하지 않고 어서 딴 것을 다 광주리에 담아 가지고 돌아가라는 말 한 마디밖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에도 얘기를 안 했고 동래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안 했습니다. 그 후에 그 부인이 그 곳에서 살다가 아이들 공부도 시켜야 하겠고 또 농사를 지어서는 교육비를 당할 수도 없고 해서 신의주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도 얼마 후에 그 동래를 떠났다고 합니다. 물론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근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일은 모릅니다. 그렇게 불쌍하게 자라난 과부의 아들이 그 후에 압록강 댐을 막는 일본 사람의 큰 회사의 사원이었더랍니다.
이 사원은 여러 가지 물건을 구매하는 책임을 맡았던 것입니다. 여러 상인 중에서 그 청부를 맡기는데, 이 청년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잘 모르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아무개 아들이라고 하는 얘기를 했더니 그 사원은 두말하지 않고 내가 당신에게 다 맡긴다고 하면서 그 청부를 맡겼다고 합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거칠고 각박하고 어지러울수록 우리는 남의 죄를 용서하는 용서의 떡을 이 거칠은 물위에 던질 줄 알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 님께서는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만 한 것이 아니고 자신도 친히 용서해 주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스테반도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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