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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레이스 구츠내리 목사
전에 미국에 호레이스 구츠내리란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대학생 시절에 무신론자로 자처했습니다.“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지도 못하겠어”이런 의심 가운데서 그 이는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 “내가 무엇을 믿을 수 있나?”가만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우주에 계신 것은 분명히 모르겠지마는 이 세상에 의와 불의가 있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그래서“나는 꼭 의를 행하겠다. 어디서나 꼭 의만 행하겠다”고 결심하고 의의 길을 따라 갔다고 합니다.
결국엔 하나님도 믿게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심이 날 때, 밑바닥에 들어가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것을 진실히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테카르트란 불란서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 이 분의 인식론을 보면 그는 안다는 모든 것을 의심했습니다. 우리는 오관(五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아는데 이 오관이란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 속에서 생각하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지 않아요.“나는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마치 캄캄한 밤에 작은 등불을 가지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이 적으니 내 주위의 대여섯 자밖에 안 비칩니다. 그러나 그 대여섯 자만되는 그 불빛 안에서라도 길을 바로 가세요. 그러면 그 등불이 다시 다섯 자를 비치어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옳은 길을 바로 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내가 확실히 믿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마의 의심과 신앙>에서
212.진효부에 대한 이야기
우리 동양에 유명한 진효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진나라 땅에 어떤 여자가 출가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남편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먼 나라에 가게되었습니다. 남편이 가면서 하는 말이“내가 먼 나라에, 위험한 곳에 가는데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업은즉 내 늙은 어머니를 잘 봉양해 주시오”하고 부탁합니다.
이 젊은 부인은 약속을 했습니다. 그 후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정 식구들이 와서, 그렇게 기다릴 것이 뭐냐 어서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시집을 가라고 합니다.
그 때에 이 여자가 하는 말이“남편 대신에 늙은 어머니를 부양하는 것은 의(義)요, 남편과 약속을 지키는 것은 신(信)입니다. 사람이 의리와 신의를 버리면 사람이라고 할 것이 뭡니까? 부모님이 정 그러시다 면 나는 이 자리에서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더 권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젊은 여자는 나이 많은 시어머니를 종신(終身)토록 잘 모셨다고 합니다.
그 뒤에 나라에 알리는 바가 되어서 천자가 큰 효부의 표창을 했다고 합니다. <나오미와 룻의 가정>에서
213.양심의 부속이 빠진 로보트
전에 어떤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사방으로 다니며 연구를 해서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버튼만 누르면 사람이 움직이게 만들어 놓고는 여러 친구들과 유명한 과학자들, 정치가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축사도 했겠지요. 여러 가지로 예식을 한 다음에 버튼을 눌렀어요. 아 그러니까 사람 만들어 놓은 것이 우물우물합니다. 눈을 번쩍 뜹니다. 눈을 굴립니다. 아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앉습니다. 일어나 섭니다. 보니까 키가 9척이요 또 얼굴을 잘 만들어서 미남인 아주 진짜 같은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데 인공 인간이 어정어정 기어 나옵니다. 과학자와 그 부인이 서 있는 곳까지 어정어정 오더니 손을 번쩍 들어 다짜고짜로 과학자 머리를 내려칩니다. 단번에 쓰러wu 죽었습니다. 아 그러더니 과학자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정치가니 과학자의 친구니 모두가 혼비백산이 돼서 사방으로 도망합니다.
이처럼 그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한 가지만은 실패를 했다고 그럽니다. 뭔고 하니 그 속에 양심을 못 넣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스운 예기지마는 현대 문화의 풍자입니다.
현대문화가 모든 인간의 외부적인 것은 다 만들지마는 인간 속의 양심은 못 넣어 준다는 말입니다. 과학은 새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과학시대와 정신 혁명>에서
214.직각(直覺)적 지식
어떤 지식은 직각적으로 압니다. 모든 예술에 관한 지식은 직각적으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 서바나에 우나무너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요 그 분은 철학자이지만 그이가 스스로 간증하기를“나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각적으로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테니슨의 시에“내게는 하나님의 숨결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가깝다. 내 손과 발보다도 더 가깝다.”그저 느껴져서 아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체험이란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아는 분도 계시지마는 참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 직각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 요한 웨슬레라는 감리교을 세운 유명한 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올렌스벤치란 곳에서 몇 사람이 모여 예배하는 곳에 가서 예배보는 가운데 갑자기 자기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설교하는 사람이 대표로 읽는데 그것을 듣는 가운데 갑자기 그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요한 웨슬레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215.직감적 요소
직감적 요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계시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내가 묵상을 하는 가운데 성령을 내가 직접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접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바로 이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이 어떤 이론을 가지고 반대를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는 직접 하나님을 만나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 눈으로 하나님을 만나 보았기 때문에 신앙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지 분명히 모르겠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사람은 아직은 하나님을 실제로 믿어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믿어보면 압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기도 전에 기도하면 응답이 될는지 안 될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역시 믿음 없는 자세입니다. 의심 않는 믿음은 기도하는 데로 이루어지리라는 분명한 확신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결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다운 기도를 해보세요.
216.한 번은 보았나?
전에 우리가 프리스턴 신학교에 다닐 때 구약성서 과 교수 가운데 딕 윌슨 박사라는 유명한 구약의 권위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성질이 좀 별납니다.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공부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조용할 때 공부하느라고 그랬겠지요.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40여 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이 선생은 새벽 기도회에는 못나옵니다.
사실 일찍이 가르치는 시간이 없어요. 늘 늦게 일어나니까요. 3시까지 공부하고 자니까 일찍은 못 일어나지요.
제가 갔을 때, 나이가 많아서 학교에도 별로 나오지 않고 자기 서재의 알락 의자에 앉아서 늘 흔들흔들하면서 앉아 있으면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선생을 찾아갑니다. “윌슨 박사님 우리는 박사님에게 성경에 대해서 의심 나는 것이 몇 가지 있어서 좀 무르려왔습니다.”“아 그래 무슨 의심이 있는가?”그러면서 넌즈시 이걸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자네들 성경에 의심이 난다고 하는데 성경을 한 두 번쯤 읽어보았나?”하고 물어봤습니다.“성경을 볼 시간이 있나요 성경을 보지 못했습니다.”“한번은 보았나?”“한 번도 못 봤어요”자 그러니까 윌슨 박사가 눈을 부릅뜨면서“이 사람들아 내가 머리는 남들보다 못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40년 동안 밤 10시부터 3시까지 성경을 공부했는데 내가 공부한 결과는 믿을만한데 자네들은 한번도 안 보고 와서는 의심난다고 질문이니 말이 되는 가? 가서 두어 번 읽고 그 다음에 외서 물으라고 그 다음엔 토론이 될 거야”고 했습니다.
여기 가만히 보면 성경이 의심 난다는 사람들 대게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선 성경을 읽어보고 그대로 해보세요. 그러면 성경이 옳은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217.무신론 증거는 불가능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다 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리석습니다.
무엇이 있다고는 논증하기에는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되지마는 없다고 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우리 한국에 갈매기가 있나 없나 토론한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없다고 하거든요.
있다고 하는 사람은 인천에 내려가서 바닷가에 갈매기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있다고 하면 증명이 돼요. 하자만 한국에 갈매기가 없다고 하려고 해보세요. 인천에 가서 다 살펴보고 없다고 해도 진남포에 있는지, 용암포에 있는지, 마산에 있는지, 알아보세요? 다시 말하면 한국 전토를 다니기 전에는 한국에 갈매기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주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단 말이요. 우주에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하려면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별도 다 다니고 우주를 다 다녀보기 전에는 없다는 증명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걸 보니 한 마디로 말해서 됩니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또 이 무신론이라고 하는 관념은 부정적 관념이올시다. 관념 가운데는 두 가지 관념이 있는데 긍정적 관념과 부정적 관념이 있습니다.
가령, 빛은 긍정적 관념이올시다. 어두운 것은 부정적 관념이올시다. 참은 긍정적 관념이올시다. 거짓된 것은 부정적 관념입니다.
여러분, 왜 어둡다는 관념이 생겼는지 압니까?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거짓되다는 관념이 생기는 지 압니까? 참이 있으니 생겼습니다.
왜 무신론적 관념이 생긴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런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신론적이란 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게신 것을 분명히 증명해 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신론자들을 환자라고 했습니다. 병자들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태양 빛이 혁혁(赫赫)하지마는 도무지 앞 못보는 소경들에게야 태양 빛이 보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의지로 생각하든지 직감으로 생각하든지 실험을 해보든지, 권위의 말을 들어보든지 분명한데 왜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까?
자기 마음에 죄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두렵단 말입니다. 병이 나서 이런 입장을 결국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훌훌 털어 버리고 하나님을 한 번 믿어보세요. 그래서 직접 입으로서 맛을 보아 아는 것처럼 내 것을 만드세요. 예수를 내 마음에 영접하고 그 분의 뜻대로 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변함없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많은 지식은 신앙을 통해서도 옵니다. 믿을 만한 권위자나, 경험해본 앞선 신앙인 들을 통해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도 교과서가 있습니다. 그 교과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성경책입니다. 이 성경책은 종교의 믿을 만한 사람들이, 다시 말하면 선지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이 자기가 생각하고 안 지식, 자기네가 직감적으로 안 지식, 자기네가 체험으로 안 지식을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들의 말을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모든 종교의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권위라고 하는 것은 방면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의학계의 권위요, 어떤 사람은 법학 계의 권위요, 각각 권위가 다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그 방면의 권위자에게 가서 문의해야 됩니다.
사도들은 종교계의 권위자입니다. 선지자들은 종교계의 권위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방면에 제일 많이 공부도하고, 생각도하고, 체험도하고 경험이 있는 여러분 교회의 목사님께 가서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18.하나님의 발자취
전에 어떤 사람이 사하라 사막을 지나갑니다. 약대를 타고 지나갑니다. 날이 저물어서 오아시스라고 샘이 있는데 천막을 치고 하룻밤은 자게 되었습니다. 약대를 바깥에 매어놓고 여행하는 사람과 약대를 몰고 온 사람과 함께 자게되었습니다.
자려고 천막에 들어갔습니다. 약대를 몰고 온 사람이 자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기도를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다 한 다음에“
자내 지금 뮈 했나?”
“나 기도했네”
“아 누구한데 했는가?”
“아 하나님한테 했지”
“자네 하나님 보았나?”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보지 못 했어”
“하나님 음성을 들어보았나?”
“못 들어보았네”
“하나님 만져 보았나?”
“못 만져 보았네”
“아 그럼 자네 하나님 있는 줄 어떻게 아나? 그거 미련한 일 아닌가?”
아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단 말입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냥 그날 밤은 잤어요.
그 다음 날 아침에 두 사람은 천막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그 여행하던 사람이
“아하 간밤에 약대란 놈이 끈이 풀어져 우리 천막을 몇 번 돌았구먼”그런단 말이요.
이 말을 듣고 약대 주인이
“당신이 약대가 밤에 도는 것을 보았소?”
“아니 나는 그걸 보지는 못했소”
“그럼 발자국 소리를 들었소?”
“아 난 그것도 못 들었소”
“그럼 만져 보았소?”
“아니 못 만져보았소”
그러니까 “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어떻게 몇 바퀴 돌았다는 것을 아오”하니까“하하 이 사람이 모래밭의 발자국을 봐, 이 모래 밭에 발자국이 빙 돈 것을 보니 분명하지 않나”그 때 마침 동쪽하늘에 아침해가 떠올라서 눈이 부시게 아름답게 된 경치를 가리키면서 약대 주인이 말합니다.
“여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발자취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기독교 우주관>에서
219.‘비유티 이즈 스킨 딮’
미국 속담 가운데‘비유티 이즈 스킨 딮’(Beauty is skin deep.)즉 아름다운 미인이란 피부 두께만큼 깊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저 그 가죽만큼 아름답다는 말이요. 가죽 베껴 놓으면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얼굴만 반반하고 번듯하다고 얼른 결혼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배후와 가정과 성품과 교양과 모든 것을 잘 살펴서 결혼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청년 시대에 있어서 특별히 배우자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마는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견지에서 내가 어떤 길을 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220.클리블랜드 대통령과 그의 친구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두 사람이 가까운 친구입니다. 언제나 함께 다니고 함께 먹기도 하고 함께 자기도하며 아주 가까이 지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젊은 시절에 좋지 못한 길을 가고 안 갈 때도 가고 죄도 많이 짓고 지냈답니다. 어떤 주일 저녁에 둘이 좋지 못한 노름하는 곳, 댄스 홀 같은 데를 갔던 모양인데 지나가다가 마침 예배당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의 설교 게시판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지금 죄를 지으려 가는 길인데 기분이 언짢아졌습니다. 한 친구는 놀려갈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가자 거니 말자 거니 하다가 끝내 둘이 갈라졌습니다. 한 청년은 그대로 놀려가고 한 청년은 집으로 돌아오는 체하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해서 도대체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고 혼자서 예배당에 들어갔답니다. 맨 뒤에 앉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긴 예기할 것 없이 이 청년은 예배당에 들어와서 온전히 회개하고 몸은 예수 님께 온전히 바치고 변화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 후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정치방면으로 나가서 끝내는 미국의 대통령 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을 합니다. 모든 신문이 대통령 취임 기사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미국의 유명한 교도소에 어떤 늙은 죄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취임했다는 신문보도를 보면서 홀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합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이 사람이 30년 전에는 내 친구였는데 그 어느 때 나와 갈라지고는 전혀 만나 보지 못했는데 이제 이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나는 일생을 교도소에서 죄로 말미암아 감옥생활 중에 죽게 되었으니 이런 분한 일이 어디 잇느냐”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 합니다.
인생의 갈림길이 많다고 하지마는 간단히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좋은 길입니다. 신앙생활은 얼른 보면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면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이 얼른 보기에는 좁은 길입니다. 왜냐, 그리스도를 따라가려고 하면 나를 이겨야 합니다.“나를 이기고 따라 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얼른 보기에는 좁은 길입니다. 왜? 신앙생활은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먹을 것도, 먹을 줄 알지만 먹지 않아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마실 것도 해로우면 안 마시는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길은 참으로 좁은 길인 듯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면 때로는 핍박을 밭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마지막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청년과 그 선택>에서
221.트로이 성 함락
서양에는 트로이 성의 함락에 대해 옛날부터 내려오는 시가 있습니다.
옛날에 트로이 성은 아주 튼튼하고,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래 어떤 원수든지 그 성을 훼파(毁破)해서 점령한 원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는고 하니 이 성이 바닷가에 건축돼 잇는데 한 번은 아침에 나가보니 바닷가 모래 위에 이상한 말이 척 서 있단 말입니다. 가서보니 아주 아름답게 보이는 말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말이 바다 속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였는지 경사라고 그 말을 여럿이 메어다가 트로이 성 어디에 둔 모양입니다.
그 날 밤에 어떻게 됐는지 압니까? 그 말은 사람이 만들어 칠한 말인데, 그 말의 배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압니까? 요새 말로 소위 간첩들이 몇 놈 엎디어 있었습니다.
그 간첩들이 밤에, 남들이 다 잘 때 뱃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나와서 성의 문을 활짝 여러 놓고 그 기회에 원수가 밀물처럼 들어가서 트로이 성을 점령했다는 얘기입니다.
시험에 빠지는 것이 이렇습니다 속아서 입니다.
혹 신문에 보면 어떤 도둑놈은 잘 때 들어와서 마취제를 뿌려 놓고 다 가져갔다고 합니다. 자다가 우리의 영혼이 다 도적 맞을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넘어질까 조심하라>에서
222.겸손한 손
바리새교인이 성전에 들어가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한 겸손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223.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
겸손한 과학자가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이작 뉴톤의 유명한 얘기를 여러분이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 우주에 대한 진리, 우주의 진리에 대한 나의 지식이란 저 바닷가에서 자갈돌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 보다 더 적거나, 혹 비슷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는 겸손합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입니다”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어떤 늙은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성경을 그저 그대로 읽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와 신학교에 가서 철학을 배우고 비 종교학을 배우고 성경 비판서적을 배우게 될 때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성경을 그대로 못 믿었다. 그러다가 지금 와서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아서 이제는 그저 성경 그대로 믿는다”
224.고개가 숙여질 만큼
전에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병원을 처음으로 지을 때 손수 일을 하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 옆에 흑인 청년이 하나 그저 서 있습니다.
그저 서 있을 것이 아니라 나하고 같이 일하자고 했습니다. 그 때 이 흑인이“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나는 공부한 사람인데 그런 일은 안 합니다. 일은 공부 안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하는 말이“나도 학생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소.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합니다”고 했습니다.
어떤 여자는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소제하기도 싫어하고 그릇 씻기도 싫어한다는 얘기가 혹 들립니다.
사실 어떤 분은 대학 출신인 까닭에 취직 못하는 이가 더러 있습니다. 대학 출신으로 막일이야 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나 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더하시오. 많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열매 하나도 없는 가라지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 있습니다. 열매 많은 벼이삭은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가 숙어질 만큼 공부를 더해야 합니다.
225.단테의 연옥 구경
단테《신곡》가운데 단테가 한 번 은 연옥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등에다 무거운 돌을 가득 지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잇습니까?”그 대답하는 말은“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너무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낙원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겠기에 그 연습을 하느라고 저 모양입니다”
거미리 허리 좀 굽히는 것을 배웠다면 얼마나 좋을 법했습니까. 사실 어떤 분은 너무 교만해서 예수를 못 믿는 분도 있습니다.
“아 예배당에 가보니까 여자들도 오고 무식한 것도 오고 아이들도 모이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델 가서 앉아 있는 단 말이요. 박사들과 장관들이 혹 모였다면 또 모르지만”합니다.
교만해서“남의 공로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니, 내 공로로 구원을 얻어야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한 이의 특색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무슨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너무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습니다.
넷째는 불평이나 불만이 없습니다. <겸손>에서
226.자족의 성취
지족가락 무탐즉우’우리가 자족(自足)의 비결을 배워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잇는 것입니다. 자족의 비결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 동양의 성현도 이 자족에 대한 교훈을 많이 했습니다. 가령 《경행록》이란 책에 ‘지족가락 무탐즉우’(知足可樂 務貪卽憂)라는 말이 있습니다. 족한 것을 알면 가히 즐거워할 수 있고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만 더 한다는 뜻입니다.
혹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지족자는 빈천하여도 영락이요 부지족자는 부귀라도 역운이라’족한 줄을 아는 사람은 빈천하여도 또한 즐겁게 살고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부귀한 자리에서도 늘 근심만 한다는 뜻입니다.
또 이러 말도 했어요.‘지족상족(知足常足)이면 종신불욕(終身不辱)하고’족할 줄을 알아서 항상 족하게 여기면 종신토록 몸에 욕됨이 없고,‘지지상지(知止常止)면 종신 불치(終身不恥)라’지체할 때를 알아서 항상 자제하여 행하면 그는 종신토록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자족을 배우라고 권면합니다.
227.디오게네스의 명언
전에 스토익파에 디오게네스라고 하는 위대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생토록 몸에는 짧은 바지 하나만 걸치고 살았고 집도 없이 밤에는 산기슭에 가서 나무통 속에서 잤다고 합니다. 한 번은 헬라의 왕이 이 성자를 찾아보려고 왔습니다. 성자의 형편을 본 왕은“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대로 내가 다 들어줄 터이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 해 보시요”하고 말하니 이 분이 하는 말이“나는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소 그저 왕께서 지금 내 앞에 서 게시니까 햇빛이 가리워 지니 다만 좀 비켜서 주시오”라고 대답했답니다.
“욕망을 죽이라”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좀더 아주 극단으로 나가면서 모든 감정을 제거해 버리라고 할 뿐 아니라 애정의 감정까지도 제거해 버리고 자기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관심하게 되기까지 모든 감정을 없애 버리라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228.소극적 방법의 자족
스토익 학파의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에픽테투스란 사람은 이렇게 예를 들어 가르쳤습니다.
“가령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쓰는 그릇이나 컵이 하나 깨어진다고 하자, 그러면‘그까짓 것 깨지면 어떤가 나는 거기에 관심이 없노라’고 얘기하라. 그러다가 가령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가 죽거든‘그까짓 것 죽어도 난 관심 없어.’그러다가 자기 다리가 부러지든지 팔이 상해도‘아, 그까짓 것 어때, 나 상관 안 해.’마지막에는 심지어 자기가 가장 가까운 이가 불행하게 되어도 혹은 세상을 떠나도‘난 상관없어, 난 무관심이야’이렇게 대답할 때까지 무관심 상태에 들어가라. 그러면 자족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목석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실 그런 까닭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또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또 감정을 제거하는 소극적 방법으로 자족의 마음을 성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가족의 비결>에서
229.약한 인간
대학생들 가운데 하기 농촌 계몽대로 나갔다 와서 보고하는 이들의 글을 읽어보니 농촌에는 한국의 삼대 악이 있는데 그 첫째는 과음, 즉 술을 많이 먹는 것이고 둘째는 도박, 즉 노름하는 것이며 셋째는 미신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230.술은 일만 죄의 어머니’
옛날부터 내려오는 아랍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잇습니다. 한 번은 악한 마귀가 어떤 아랍 사람에게 와서“당신에게 앞으로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 액을 피하려면 내가 말하는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귀가 대답합니다.“하나는 당신의 종 가운데 하나를 죽이든지 또 하나는 당신의 아내를 때리든지 나머지 하나는 큰 술병을 가지고 와서 한 병 다 먹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생각해보니 죄 없는 종을 죽일 수도 없고 살림 잘하는 부인을 때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그 술이나 먹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술병을 받아 잔뜩 먹고 취하자 공연히 트집을 잡아 가지고 아내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종이 보다 못해 기가 막혀서“죄 없는 부인을 왜 때립니까?”하며 나서다가 그는 “네놈이 뭐기에 나에게 대들어”하며 때리니까 매를 맞고 그만 죽었습니다. 그러니 술 한 병 받아먹고서는 아내도 때리고 종까지 죽인 셈 이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술이 영향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술은 일만 죄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술 먹고 협잡합니다. 술 먹고 음란한 일 합니다. 술 먹고 부정부패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231.자기를 정복 못한 알렉산더
전에 알렉산더 대제가 서른 살 때에 온 세계를 정복하였으나 그 다음엔 더 정복할 나라가 없어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루 저녁은 친구를 모아 놓고 요새 말로 대포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마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독으로 말미암아 쓰려져 죽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천하는 정복했으나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절제와 극기의 덕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절제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중국 사람들은 술을 더러 먹어도 술 주정하는 것을 못 봅니다. 제가 세계 여러 도시를 많이 다녀 보았지만 다 술 먹는 사람들일 텐데 우리 한국처럼 술 먹고 거리를 비틀거리며 다니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서울 거리를 다녀 보세요. 특별히 저녁거리가 어떠한가 다녀보세요. 문화인이라고 할 수 없는 광경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들의 이 약점을 잘 알았기에 선교사들과 선배 목사님들은 우리 교회 안에서는 특별히 금주 단연(斷煙)을 엄격히 실행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선교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은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금주 단연의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맑은 새 물결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에도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전통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바울의 선교와 벨릭스>에서
232.변화된 자들
여기 천주교를 부흥케 한 로욜라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기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방면으로 공부했습니다.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만 전쟁터에서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왼쪽 다리를 전혀 못쓰게 되었습니다. 오랜 동안 치료하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사모하게 되면서 온전히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기사가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 을 생각해 봅시다. 만년에 로마 관헌에게 핍박을 받아서 자기 교회에서 쫓겨나고, 멀리 불모의 섬인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여 굴속에 홀로 있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화(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요한 은 육신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오히려 심령의 눈은 더 밝아졌습니다. 육의 귀는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의 신령한 귀는 더 밝아져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어서 결국은 오늘까지 남은 요한 계시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들에게 미치는 화를 오히려 복이 되게 하십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하나님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바리새인들, 제사장, 서기관들의 시기 증오, 모략, 가룟 유다의 배신, 빌라도의 무책임한 공판, 이런 인간의 죄로 말미 아아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부활이 있게 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해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큰 구원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필 목사님을 기억하시지요. 그의 간증을 들으신 분이 많을 거예요. 우리 교회 홍순열 권사 님의 주인이올시다.
우상필 목사는 원래 일제 시대에 일본서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오래 있던 분입니다. 그 분 말대로 은행에 있으면서 오래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폐결핵에 걸려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 후에 목사가 되어 여러 해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올시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당하는 슬픔이나 고통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재난이라도 선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전화위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의 생활이 다 그래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전화위복의 역사에는 인간적 조건이 있어요. 그것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당해야 이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재난이나 화가 와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여기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큰 슬픔, 어떤 큰 실패, 어떤 큰 화를 당할 때에 승리하는 길이 우리에게 있어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꾸준히 믿고 의지하고 요셉과 같이 꾸준히 나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서 전화위복을 가져옵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일을 당했다고 실망하고 불평하고 자포자기하면 그 재난으로 말미암아 아주 파멸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다만 시간문제입니다. 어떤 때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는 하나 마지막에는 전화위복으로 바꾸어 줍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에서
233.헌신하는 신자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주님의 헌신 정신을 계승하여 언제든지 우리 주를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나병자를 불쌍히 여겼고 이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제가 청년시대에 성 프랜시스 전기를 보고 놀란 것은 이 프랜시스가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길을 걸어가더니 문둥병자가 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자기 옷을 벗어 그 문둥이에게 주고 그 문둥병자가 입었던 옷을 자기가 바꿔 입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성 프랜시스는 전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문둥병 자를 치료해주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근대에 와서도 성 미디안은 하와이 몰로카이란 섬에 가서 문둥병 자를 위하여 봉사하고 전도하다가 자기 끼지도 문둥병자가 되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병원을 먼저 설립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들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정부가 이런 일을 착안하기 전에 먼저 나병자를 위하여 병원을 설립한 것이 선교사들입니다. 대구에도, 전주에도, 여수에도 나병자를 위하여 병원을 설립한 것은 선교사들입니다. 유명한 순교자 손양원 목사 같은 이도 일생토록 여수 나병원에서 봉사도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 세 사람의 선교사를 태국에 보냈는데 두 사람은 목사고 한 사람은 의사입니다. 의사 송애근 박사는 지금 태국 쳄마이라는 곳에 있는 태국에서 제일 큰 나병원에서 천여 명이나 되는 나병자들을 고쳐주고 있습니다. <제 4계명>에서
234.혀의 진단
터어키안의 속담에는“혀는 검보다 실상은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파사인의 속담에는“혀가 길어지면 생명이 짧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라비아인의 속담에는“네 혀가 네 목을 베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칼은 쓸수록 더 무디어지나 혀는 쓸수록 더 날카로워 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진찰 받으려 가면 의사들이 혀를 보자고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혀를 보고 여러 가지 병을 알아내는 모양입니다. 이따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혀를 내 밀고 혀의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혀는 어떠합니까.
몇 주일 전 영국의 호픈 목사께서 설교하실 때에 자기의 나라 예복을 입고 목에 줄을 드리우고 선 모습을 여러분께서 보신 줄 압니다. 같은 교파의 어느 목사가 그런 예복 차림으로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친 다음 강단을 내려올 때 어떤 부인이 가위를 들고 와서“목사님 목에 드리운 줄이 너무 길어서 보기 흉하니 좀 잘라봅시다”하는 것이었습니다.“꼭 잘라야겠습니까?”“그렇고 말고요”“그렇다면 자르지요”드디어 그 여인은 잘랐습니다. 그 때에 목사가 넌지시 하는 말이“내가 자매 님의 조언을 이루어 주었는데 자매 님도 저의 소원을 하나 이루어주시지요?”하고는 호픈 목사는“자매 님의 혀를 좀 내미시오. 그 혀가 너무 길어 보이니 좀 잘라봅시다”하고 말했습니다 혀가 너무 길어서 여기 저기 왔다갔다하면 너무 곤란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도 귀는 둘을 만들고 입은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보니 말을 적게 하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석(私席)에서도 말을 많이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석(公席)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데로 말은 적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실수가 적습니다. 특별히 풍설을 전하지 말 것입니다.“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출 23: 1)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무족언이 천리행’(無足言 千里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풍설은 눈공과 같아서 굴러갈수록 커집니다. <제 9계명>에서
235.입이 찢어져 죽은 뱀
일제 시대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분이 들에 나가보니 조그만 뱀이 큰 두꺼비를 물고는 삼키지를 못해서 입이 찢어져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형사에게 잡혀가서 죽도록 고생을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이 하던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본이 한국을 삼키고 만주와 중국을 삼키기는 했으나 두꺼비가 너무 커서 결국은 일본 제국이 죽었습니다. 탐심으로 인해서 결국은 일본이 망했습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이렇게 망했고 히틀러의 독일이 이렇게 망했고 오늘의 월맹이 이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그 결과 명약 관화(明若觀火)합니다. 개인이나 나라나 이 탐심에 끌려가다가 망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236.욕심이 땅보다 두껍다
톨스토이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농부에게 하루는 큰 부자가 와서“당신 지금부터 힘껏 뛰어서 내 농장을 돌고 오면 그 전부를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했습니다. 농부는 되도록 넓게 돌아서 해질 무렵에야 출발점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불행 이도 지쳐 죽고 말았습니다. 장사하면서 무덤 파는 이들이 둘러서서 하는 말이“이 사람에게는 땅 반 평이면 넉넉하구먼”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탐심을 경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욕심이 땅보다 두껍다”는 말이 있습니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넣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 들으십시오. 나이가 많아질수록 욕심도 커 간다고 합니다. 동양의 성현들도 나이 많은 다음에 계지재득(戒之財得)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특별히 얻는 일에 대하여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237.도금을 한 피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옛날 다윗 때부터 내려오던 훌륭한 피리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이 피리의 소리를 듣는 많은 예배 자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 피리를 건사하는 이가 그것을 보다 잘 보존키 위해 전부 금으로 도금을 했던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그 아름답던 소리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제 10계명>에서
238.주기도문의 거룩 해설
초대 교회 당시 예루살렘에 유명한 시릴이란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목사가 주기도문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본래 거룩하시다. 기도의 뜻은 본래 거룩치 못해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할 때에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고 우리가 거룩한 일을 할 때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까닭이다”
옛날 알랙산드리아에 있던 사이프리안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기도의 뜻은 그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여지게 하여 달라는 뜻이다”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항상 여러 가지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할 기도는“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제일 자랑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달라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에서
239.순수한 기도
로마서 8장 28절을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굳게 믿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240.시인 힛키어의 ‘영원한 선’
미국의 시인 가운데 힛키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유명한 시 가운데‘영원한 선’(Eternal Goodness) 이라고 하는 시가 잇습니다. 거기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나는 모르노라 어디 그의 섬들이 솟았는지 그 넓은 종려나무 가지가 공중에 퍼졌는지. 다만 내가 알기로는 그의 사랑과 보호 밖으로 내가 표류할 수 없음이라”인간은 작은 배를 타고 망망한 대해에 떠다닙니다. 어디에 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디에 넓은 종려나무 가지가 나타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표류해 갑니다. 그러나 신앙 있는 사람은 분명히 아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의 범위를 떠나서 표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신앙 가운데서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 있던지“내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241.토마스 아 켐피스의 기도
중세 시대의 유명한 성자 가운데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기도문이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을 때 들어보십시오, “오 주여, 주께서 더 나은 길을 아십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데로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이나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원하시는 것만큼 또 주께서 원하실 때에 주시옵소서 꼭 주님은 존 귀를 위하여 나에게 행하시옵소서. 주께서 보내시고 만사에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주의 손에 있사오니 바퀴처럼 마음대로 돌리옵소서. 나는 주의 종이올시다. 무엇이나 명령대로 하겠나이다. 나는 나를 위하여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시여, 오직 온전히 가치 있는 주의 종만 되게 하여 주옵소서” <뜻이 이루어 지이다>에서
242.꺼지지 않는 불
존 번연이 지은《천로역정》이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거기 이러한 얘기가 있습니다. 한 기독도가 어떤 방에 들어가 보니 방 옆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불을 끄려고 물을 퍼붓고 있으나 불은 꺼지지 않고 그냥 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저 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가
이상해 가보니 어떤 점잖은 분이 병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 그 뒤에서 계속해서 그것을 부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이 안 꺼집니다. 이 악하고 음란하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의 강한 신앙의 불길과 우리 교회의 성령의 불길이 꺼지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성령께서 계셔서 은혜를 충만히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신을 믿사오니>에서
243.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요리 문답 14문을 보면“죄가 무엇이뇨”라고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거기 대해서 “죄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또는 어기는 것이라”고 분명히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인간들은 다 죄인들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 가운데 하늘 나라에 가보았습니다. 하늘 나라에 가보니 천사가 큰 책을 그의 앞에 갔다 놓습니다.“이것이 무슨 책이냐?”고 물어보니까 “그 책 가운데는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첫 장을 들추니까간 글자로 가득 씌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당신이 세상에 살 때 행동으로 지은 죄입니다”라고 합니다. 그 다음 둘째 장을 들쳐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첫 장 보다 더 잔글씨로 가득 씌어져있습니다.“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어보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당신이 세상에 살 때 말로 지은 죄들입니다.”라고 합니다. 말로 지은 죄는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 더 많은 모양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 장을 들어다 보니까 둘째 장 보다 더 잔글씨로 더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천사의 대답이“이것은 당신의 마음가운데서 생각으로 지은 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는 더 많습니다. 그리고 한 장을 또 들추어보니 이것은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고 새까맣습니다“이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까“이것은 당신의 마음입니다.”하는 것이 천사의 대답입니다. 예레미아 17장 9절에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마태복음 15장 19절에“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비방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성이 부패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인간성이 부패함으로 인간의 지성이 어두워졌습니다. 인간의 정서와 감정, 생활도 더러워졌습니다. 인간의 의지도 부패하고 약하여졌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올시다. 존 칼빈 같은 이를 그 당시 사람들은 성자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서의 첫 머리에 보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세리와 같이“나를 불쌍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신조입니다. <회개와 사죄>에서
244.예수 님을 못박는 나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어떤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봅니까? 우리는 무엇을 자랑합니까? 전에 화란의 유명한 예술가 렙브란트라고 하는 분이 사람들이 예수를 못박는 십자가의 광경을 그렸는데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예수를 십자가 못박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 자신의 얼굴도 있습니다. 곧 렙브란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된 것은 자기의 죄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죄도 속량 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다 이것을 깨닫습니까? 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것입니다. 곧 여기 앉은 우리 하나하나 곧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은 피 흘리셨습니다. <나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에서
245.꿀벌의 교훈
제가 일찍이 10여 년 전에 대서양에 있는 서인도 여러 섬 중 바르바도스(Barbados)라는 섬에 교역자 수양회 인도 차 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들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양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이 처음으로 그 섬에 와 보니 사방에 들꽃이 많은 것을 보고 이 곳에서 양봉을 하면 잘 되리라 생각하여 꿀벌을 갔다 놓았더니 처음에는 조금 꿀을 모아들이더니 나중에는 그 섬에서는 꿀을 저축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이 벌들이 꿀을 안 만들고 그 곳 주민들을 쏘기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일하지 않게 되면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사실 인간은 일하는 가운데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향상과 발전이 있고, 사실 일을 통하여 현대의 모든 문화가 창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본래 누구나 일하고 살게 만들었고 일하고 먹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 “누구든지 일하기 잃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246.신성한 일
모든 일은 신성합니다. 이것이 곧 성경의 교훈입니다. 일을 대체로 두 가지 종류로 곧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온전히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왜? 아무리 정신적 노동이라도 육체의 노력이 필요하고 아무리 육체적 노동이라도 정신의 노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머리를 바로 쓰면서 노동을 하여야 능률이 생깁니다. 그런데 대체로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 정신적 노동은 존경하나 육체의 노동을 천이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희랍의 유명한 철학자 풀라톤이나 로마의 유명한 학자 시세로 같은 이도 육체노동은 종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재래 한국 사회에도 이와 같은 관념이 많았습니다. 이 육체 노동도 꼭 같이 신성하다는 사상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왔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와 농민들이었습니다. <기독교와 근로자>에서
247.믿음의 유언
히브리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곧 모세는 애굽을 떠나는 그 저녁에 앞으로 그 민족의 해방을 받을 뿐더러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평안히 살 것을 믿었습니다. 곧 그는 자기 백성이 장차 온전한 해방을 받는데 대하여 추호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세의 믿음입니다. 역사는 모세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과연 유대인들은 해방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에 대한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과연 역사의 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조국통일에 대하여는 추호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모세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를 향하여 나아갈 때 뒤에서 애굽군대가 따르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혔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을 때 바다 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모세의 신앙>에서
248.역경 중에 얻는 미덕‘인내’
인내는 평안한 곳에서는 얻지 못하는 덕입니다. 역경 중에서만 얻을 수 있는 미덕입니다.
전에 제가 들으니,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 종족들은 내한성, 곧 찬 것을 견디는 성격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열서, 곧 더운 것을 견디는 힘은 약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항상 추운 곳에서 사는 까닭이라 합니다. 이와 반대로 남양군도나 아프리카에 사는 토인들은 내열성은 강하나 내한성은 약합니다. 그 이유는 항상 역시 그들은 늘 열대지방에 사는 까닭입니다. 대장장이의 손은 뜨거운 것을 잘 견딥니다. 그 이유는 항상 뜨거운 것을 만지는 까닭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우리는 얼굴을 항상 내어놓고 다닙니다. 얼굴의 피부는 내한성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추운 공기와 접촉하는 까닭입니다. 바람이 불어야 나무 뿌리가 깊이 들어가 나무가 튼튼하다고 합니다. 고통, 질병, 슬픔, 위기, 역경, 곧 여러 가지 환난을 통해서만 이 귀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곧 인내를 이루는 것입니다
249.인내는 영혼의 연단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새 번역에는 품격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곧 인내는 세련된 품격을 이룹니다. 거칠 은 바다의 노한 물결이 숙년 된 수부를 만듭니다. 거칠 은 세상의 온갖 풍파는 세련된 품격을 조성합니다. 예방 주사의 원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방주사란 약화된 병균을 혈액 속에 집어넣어 백혈구로 하여금 싸워 훈련을 받게 하여, 훈련된 백혈구는 진성(眞性)병균이 들어와도 능히 싸워 이겨냅니다. 많은 훈련을 받는 이가 승리하는 운동 선수가 됩니다. 많은 전쟁을 격은 군인을 백전 노장이라고 합니다. 위험한 전쟁의 많은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상승의 군인이 되게 합니다.
들은즉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제작할 때에 가장 좋은 나무를 택할뿐더러 같은 나무에서도 특별히 북편에 있던 부분으로, 곧 가장 찬바람을 맞은 부분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환난을 많이 받은 영혼이 그 인내와 세련된 품격을 통하여 제일 아름다운 생의 음악을 연구합니다. <환난에서 소망으로)에서
250. 용감한 여자 개척자
지금부터 8년 전 독일 서백림에서 세계 복음화 대회가 모였을 때 본 한 광경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남미에 있는 오카(Auka) 족 대표가 단 위에 나타났습니다. 이 오카족은 남미 밀림지대에 자기네들끼리만 살던 원시인입니다. 문명과 전혀 접촉이 없는 야만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약 10년여 년 전에 청년 5명이 비행기를 타고 그들에게 전도하려고 들어갔다가 모두 학살당하였습니다. 그후에 학살당한 한 부인이 홀로 그들 종족들에게 다시 들어가 그들을 도우며 점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녀 지금은 그곳에도 교회가 서고 그 대표가 복음화 대회에 온 것입니다. 청년 여자의 모험적 신앙이 최후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개척 전도자에게는 이 모험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아니 생명까지 바치려는 결심을 가진 개척자들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는 소위 과학이 발전된 시대라고 하나 가장 악한 사람들이 많은 기독교인을 미워하는 무신론자, 유물론자들이 가장 많은 위험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철(鐵)의 장막, 죽(竹)의 장막이라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뚫고 들어가 복음을 침투시키려는 이 모험적 신앙을 가진 젊은 개척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모험 신앙을 가진 용감한 기독 청년을 부르십니다.“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름에 응답할 이사야와 같은 청년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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