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웃! 선한 이웃'되기! (눅 10:25-37)
유대인들은 본래가 성이 없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부터 구약의 이름은 단 한 명도 성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신약으로 와서 마태로 시작하여 요한으로 끝날 때까지 성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왜 성이 없을 가요?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그 땅을 지파 별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지파들끼리 모여서 살았습니다. 흩어져 살다가도 희년의 나팔이 울려 퍼지면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 와서 다시 뭉쳤습니다. 한 가족관계입니다. 그래서 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이 생겼습니다. 성이 제일 먼저 생긴 유래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에 쳐들어 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밤새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을 가장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가?' 드디어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자기 신상을 세우면 유대인들이 가장 괴로워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제사장들에게 '내 신상을 성전 안에 세우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패전국의 제사장들이었지만 그들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칼로 목을 베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성전 안에서 대왕의 신상을 세울 수 없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신앙인의 자세인가? /할/
이 소리를 듣고 알렉산더 대왕이 노발대발하면서 제사장들을 죽이려고 하자, 이 때 제사장들이 기발한 제안을 내 놓았습니다. '왕이시여! 우리가 성전 안에 신상을 세우지 못 하는 대신에 너무나 좋은 선물을 대왕님께 드리겠나이다'
대왕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는 '알렉산더'라는 성을 붙여 주어서 대왕의 이름을 영원히 기리겠습니다'
대왕은 흐뭇하게 여기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제일 먼저 생긴 성이 '알렉산더'랍니다. 유대인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 중심의 민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을 그렇게 천재 민족으로 축복하셨습니다. /할/
▶전 세계에서 가장 정치가 바로 되어 있고 선진국이며 신사의 나라가 영국입니다. 민주주의가 영국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원래 신사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영국은 원래 바이킹, 즉 해적이었습니다. 북 게르만족이라고 하는데 A.D. 8세기에서 10세기에 노르웨이, 덴마크, 영국의 템즈강 지역을 점령했고,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영국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킹들이 머리가 대단히 우수했습니다. 그들이 훌륭한 후손을 키우기 위해 고민하다가 훌륭한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나 교육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 여성들을 도둑질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억지로 끌려와서 해적들의 아내가 되었지만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훌륭하게 양육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해적이었지만 어머니의 훌륭한 교육으로 아들은 신사가 되어, 오늘날 영국이 신사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교과서였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와서 세운 학교가 있습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톤은 모두 이들이 성경공부하기 위하여 세운 학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 최우수 대학이 되었습니다. 이 학교들이 300년 간 미국의 교육을 주도하고 세계 선교를 이끌고 있습니다. 성경공부, 탈무드 공부는 최고의 공부요 천재 교육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게 됩니다. /아멘!/
▶한 정원사가 도랑에 심겨진 가시나무 한 그루를 뽑아다가 자신의 정원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러자 가시나무가 가시만 뾰족한 쓸모 없는 자진을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에 옮겨진 것이 무척 당황하면서 정원사에게 따졌습니다.
'나는 가시나무인데 내가 장미꽃 동산에 옮겨지면 어떻게 하느냐? 나는 장미꽃 나무가 아닌데…' 그러자 주인은 '내가 나의 손에 의해서 달라질 것이다.'고 하면서 가시나무를 '싹 뚝' 잘라서 장미꽃 나무를 접을 붙였습니다.
가시나무가 '아이고 나는 가시나무인데요? 장미꽃 나무를 내게 접붙이면 어떻게 해요?' 정원사가 '있어봐라. 시간이 지나면 알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봄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가시나무인데 싹이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웠습니다.
'와! 희한하네요. 나는 가시나무인데 장미꽃이 피었네요' 정원사가 '이놈아, 이제는 가시나무가 아니라 장미꽃으로 접붙였기 때문에 장미꽃이다. 이제 너는 장미 나무가 되었다.' 그때 사람들마다 '아! 장미나무 아름다운 꽃을 피웠네'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옛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접붙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와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할/아멘!/ 그렇다면 새사람이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참된 이웃, 좋은 이웃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 곁에는 항상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우리 곁에는 항상 이웃이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이웃이 있으면 행복하지만, 나쁜 이웃이 있으면 굉장히 불행하게 되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친구 등이 모두 함께 사는 불가피한 이웃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좋은 이웃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할/
①본문의 배경을 보겠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본문 25절에 보면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입니다.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께 접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
그 율법사의 반응에 예수님도 율법적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십니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지대에 있고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한 70km 떨어진 낮은 지대에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상을 더듬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리고는 오아시스로서 농축산물이 풍부하고 여기에서 수확한 농축산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올라와서 팔아서 돈을 전대에 가득 채워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많은 사람들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여리고로 가는 길은 비탈지고 구불구불한 길입니다. 그 길은 광야와 바위가 많은 지역을 통과하는 위험한 길이었으며, 사방에 동굴들이 많이 있어서 주님 당시 이전부터 이후까지 오랫동안 강도들이 은신하여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덮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못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도 이 강도들이 매복해 있다가 습격해서 돈을 빼앗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사람도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해서 돈을 잔뜩 돈주머니가 넣어 가다가 강도를 만났을 것입니다. 또 강도가 서로 돈을 빼앗으려고 하고 뺏기지 않으려고 하는 통에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나 강도들이 무장을 하고 달려드는데 이길 수가 없습니다.
돈도 뺏기고 옷도 찢어지고 온통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거반 죽게 되어서 길거리에 던져 버리고 강도들은 떠났습니다. 그는 피투성이 속에서 해는 쨍쨍 쪼이고 몸은 고통스럽고 죽게 되었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 기다리다가 있는데 한 제사장이 곁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성경에는 강도가 도와달라고 한 기록은 없지만, 분명히 애원을 했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유대의 율법을 수호하는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강도 만난 이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대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역할은 꾸짖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지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는 이웃을 비난하고 벗기고 할퀴고 먹칠하고 짓밟는 것뿐이지 율법주의자가 이웃을 돕지는 않습니다.
율법은 돕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 제사장이 지나고 난 다음에 너무나 낙심한 이 강도 만난 사람은 절망적으로 허덕이고 있는데 이번에는 레위 사람이 총총걸음을 가지고 뒤를 따라 옵니다.
레위인은 의식을 행하는 자입니다. 의식은 율법을 행하는 제사장을 도와서 여러 가지 형식과 예식을 집행합니다. 성막을 치고 성전 뜰에 여러 가지 기구를 정비하고 정돈하는 의식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식을 행하는 자는 종교의 의식을 행할 뿐 내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성막만 치고 우리가 이곳에 번제단이나 물두멍이나 갖다 놓고 재단에 여러 가지 제기를 갖다가 준비하면 되었지 그 내용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내용인 의로움과 사랑과 믿음에는 무관심한 자들입니다.
실제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롬12:15-16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레위인은 전혀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도 만난 사람은 영락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근처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 마음속에 사랑과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율법주의자 같이 비평하지 아니하고 의식주의자 같이 무관심하지 않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이 사람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그 당시에는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기름은 햇빛이 쨍쨍 쪼이고 살갗이 타니까 살갗이 유하게 하기 위해서 기름을 바르고 포도주는 마시기도 하고 상처 입는데 부어서 병균을 살균하기도 했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치료를 했습니다.
기름으로 상처를 부드럽게 하고 포도주로 소독하고 그리고 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두루마기를 찢었습니다. 붕대를 만들어서 아픈데 감아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집에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주었다고 본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상황을 말씀하신 뒤에 예수님께서 그 율법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참 이웃이냐?'고 묻자, 이 율법사가 하는 말이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자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본 비유는 끝이 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를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서부터 본문이 시작됐지요. 이 율법사는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비유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할/
우리가 여기서 조심히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기 이웃은 착한 일을 하는 이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려주는 이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웃은 강도 만난 자가 아닙니다. 강도 만난 자를 살려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좋은 이웃, 선한 이웃입니다. 예수님이 이 율법사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당부입니다. /믿/
사실 우리 모두는 인생 나그네길에서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에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마음에 상처를 입고 한이 맺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고,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파탄되고, 인생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슬픈 사연들을 우리가 종종 봅니다.
여러분! 강도 만난 사람을 누가 살렸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우리도 선한 이웃, 좋은 이웃으로 그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아멘!/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고 '자비'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가리켜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마리아인이 품었던 긍휼과 자비의 마음과 행위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다고 지적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으로도 얼마든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엄중히 경고해 주고 있는 그런 메시지입니다. /할/
②본문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본문의 비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을 합니다.
여기 강도 만난 한 사람은 아담, 즉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강도는 사탄과 마귀를 상징하고, 예루살렘은 낙원, 하늘 나라를 가리킵니다.
여리고는 세상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타락으로 보았고, 그리고 제사장은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로, 레위인은 예언자들로 보았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기름과 포도주는 성령의 기름과 십자가의 보혈을 가리키는 것이고, 두 데나리온은 성부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막은 교회요, 주막집 주인은 목사요,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막에 대하여 는 뒤에서 더 깊히 알아보려고 합니다. /할/
㉡오늘 본문을 보면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⑴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 있는데 이는 강도입니다. 강도는 안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 온 인류는 강도 만난 자들인 것을 기억하십니까? 언제 만났습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인류는 강도를 만났습니다.
곧 사탄이 우리의 강도로 등장합니다. 마귀는 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요10:10절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도적이 누굽니까? 도적은 마귀요, 마귀는 살인잡니다. 요8:44절에 보면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했습니다.
⑵또 만나나 마나한 사람이 있는데, 누구입니까? 제사장과 레위 인입니다. 유익도 손해도 없는 평범한 만남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전에서 하나님을 전문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과 예배를 이끌어 가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조되는 인물들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적으로 볼 때나 사회적으로 볼 때 그 당시 가장 존경받아야 할 지도급 인사에 해당하고, 사마리아인은 가장 멸시받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이 두 계층의 사람을 동열에 놓고 비교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⑶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이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표가 누구라고 했지요? 우리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아멘!/
인생 길 가는데 험하여도 이런 분 만날 수만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길이 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강도를 만나서 건강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생명을 잃기도 하며 탄식하고 울고 있습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강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이 도적을 맞기도 하고, 행복한 가정이 강도를 만나서 울기도 합니다. 사업에 강도를 만나고, 건강하고 평안한 심령이 강도를 만나 근심 가운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여러분! 인간 누구에게나 강도를 만날 위험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인생행로 도처에 원수 마귀의 정략이 있고 계략이 있는데 걸리면 바로 강도 만난 자가 됩니다. /믿/아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원인이 역사 속에 있습니다.
다윗 왕조는 솔로몬이 죽은 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으로 분리가 됩니다. 북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인데, 앗수르에게 멸망합니다. 그리고 100년 후에 남 유다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게 멸망합니다.
앗수르는 인종 말살정책을 써서 사마리아에 있던 인구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다른 나라에 있던 인종을 사마리아에 배치합니다. 사마리아에 일부 남아 있던 유대인과 이주해온 사마리아들이 통혼함으로서 혼합 종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가장 경멸받은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 후에도 주전 6세기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는데 이때 유대인들이 이 계획에 참여하려는 사마리아인들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혼혈 인이라고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별도로 성전을 세웠는데 유대인들이 이를 주전 128년에 파괴시켰습니다.
또한 주후 1세기에는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 경계에 있는 마을에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던 유대인이 살해당하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로 몰려가서 주민을 대량학살한 일이 있었으며, 사마리아인들은 유월절에 죽은 사람의 뼈를 성전 뜰에 뿌려 놓아 성전을 모독하여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하였고, 영생을 얻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그들의 성전을 짓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지역을 가려면 중간에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 지경을 통과하는 것도 싫어서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우회하여 다니곤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을 철천지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생각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거의 패거리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느냐,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어떤 지방 출신이냐를 두고 사람들이 갈라서는데, 이제는 '강남이냐 비 강남이냐'로 사회 계층 간에 갈등이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극단적으로 한 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패거리 문화가 아직도 이 땅에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왕따 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디에 끼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죽어 가는 강도 만난 이웃, 버림받은 유대인을 살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편을 가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운 나라에 사는 우리의 형제요 자매임을 알아야 합니다. /할/
㉣여기서 우리가 27절의 말씀을 한번 집고 넘어가는 것이 신앙의 큰 유익이 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잘 묘사된 용어는 '예배'입니다.
교회는, 성도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는 '내가 예배를 통하여 어떻게 그 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배보다 더 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스타가 되고 장관이 되고 세상이 알아주는 인물이 되었다 할지라도 바빠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주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배보다 우선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늘 말합니다 만은 우리의 사명은 예배와 선교입니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본문의 중요한 주님의 가르침 속에 보면, 상처난 영혼을 주께로(주막으로) 인도하는 것(전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선한 이웃은 '상처난 양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를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믿/ 세상의 관심은 얼마나 섬김을 받느냐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우리 주님도 막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이 질문에 대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아멘!/
신학자 '본 훼퍼'는 '예수님은 이웃을 위해 존재했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주장할 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됩니다. /할/
요일22: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아멘!/
▶20세기에 가장 존경받은 분은 든다면 '알버트 슈바이쳐'박사입니다. 이유는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세 때 '30세가 될 때까지는 예술과 학문에 정진하고, 30이 넘으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의 결심대로 30세 때 아프리카로 들어가 흑인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 봉사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손이 통나무를 잘라 병원을 짓는 손으로 변했습니다. 병든 몸을 만지던 그 손이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인술의 손이 된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질 때 말이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가 말하기 때문입니다. /믿/
㉥강도를 만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서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요, 말씀이 있는 곳이며, 은혜가 있는 곳이요, 축복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거기를 떠났다가 불행을 만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내려갔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사업이 내려가도 안됩니다. 건강이 내려가도 안됩니다. 신앙이 내려가면 정말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할/
성경에는 내려갔다가 불행하게 된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창12:10절 이하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바로에게 그의 마누라(부인)를 빼앗길 뻔했습니다.
룻1장에 보면,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내려갔다는 말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성도는 신앙이 절대로 내려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내려가고, 기도 생활이, 감사 생활이, 봉사 생활이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조심해야 합니다. 강도 만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두 길이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이 있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길 중에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인생은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사마리아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삽니다. /할/
▶어떤 분이 이렇게 비유를 했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 만나 피 흘리며 죽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석가가 지나가면서 피 흘려 죽어 가는 사람에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공자가 지나가면서 '군자는 대로 행인데 조심해야지' 그러면서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다음엔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보시고, 가까이 오셔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려고 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자신의 피를 쏟아 강도 만난 자를 살리시고 자신은 죽었다는 비유로 '강도 만나 찢긴 영혼을 살리신 예수'를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묘사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할/
㉦이 세상사에는 살리는 운동이 있고, 죽이려는 운동이 있습니다.
인류가 한 일은 살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여 서로 죽이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살리러 오셨고, 마귀는 죽이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마귀는 인류를 타락케 해서 멸망으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지금 인류는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진 채 매 맞아 거반 죽게 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이 광경을 제사장도 보고, 레위인도 보고 지나갔습니다. 사실 이들은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에게 살린 만한 능력이 없고, 강도 만난 자의 상처를 치료할 약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율법으로는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사마리아인에게 있는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 싸매고 돌보아 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의 보혈만이 우리가 살아날 수 있고, 주의 성령으로만이 살아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요10: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면서 '이렇게 나쁜 사람이 있는가? 어떻게 피하여 자나갈 수 있는가? 지도자들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몰아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도를 만난 자를 싸매 줄 것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가진 것이 있었는데 곧 포도주와 기름입니다. 포도주는 주님의 보혈이요, 기름은 성령입니다.
또 말씀드립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사마리아인으로 비유해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씀하셨고, 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예표하고 계십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인류를 살리기 위해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일입니다. 아무도 강도 만난 자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지 못했습니다.
공자도 못했고, 석가도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이 없습니다. 피 흘려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성령의 기름부음 만이 사망에 빠진 인류를 살려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병든 자를 건강하게 살리십니다. 불의하고 악한 자를 의롭게 살려 놓습니다. 또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해서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으면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났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림'을 하러 오신 분입니다. 살림은 '살리다'의 준말입니다. 교회는 인간과 세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시작하신 살리는 일을 계승받은 곳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림을 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목회는 예수님의 살림을 하는 것인데, 바로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건강, 가정, 사업, 자녀들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적마다 예수님은 세운 종을 통하여 당신의 살림을 대신 하십니다.
어머니는 가정의 살림을 맡으신 분이요, 기업가는 회사의 살림을 맡은 자요, 교육가는 학교 살림을 맡은 자요, 정치가는 나라 살림을 맡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분야의 살림을 맡아 섭리하십니다. 그 살림을 교회를 통해서 세우신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하고 계십니다. /믿/
▶오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에게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바르고, 싸매어서 어디로 데리고 갔습니까?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③주막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⑴여기서 주막은 오늘날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맡겨 주신 사람들을 돌보는 곳입니다. 교회는 주막집입니다. 예수님은 이 주막집에 그러니까 우리 참 행복한 교회에 사람들을 맡기셨습니다. 지금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창세전에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때가 되어 교회에 맡겨진 사람들이 성도 여러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이 다 강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의 강도를 만나 주막에 왔고, 어떤 사람은 사업에 강도를 만나 다 망해 버리고 주막에 왔고,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환경에서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주막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아온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에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성령님이 인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할/
그런데 여러분! 주막에 왔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에 강도 만난 자가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 주막으로 인도되어 깨끗하게 치료받고 살아난 것처럼, 예수 앞에 나온 우리들도 오늘 여기 예배의 현장이 기적의 현장이 될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할/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어떤 형편에서든지 강도 만났다 할지라도 오늘 이 자리가 치료받고, 해결 받고, 능력 받고, 축복 받는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⑵목사는 주막집의 주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하여 주막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한 것은 사마리아인이요, 주막집 주인은 그를 돌보고 있습니다. 제사장도 가고, 레위인도 사라졌습니다. 사마리아인도 떠났습니다. 떠났다는 말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주막집에 맡기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의 기름을 인류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지금 교회는 주막집에 되어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막집 주인은 목사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참 행복한 주막에 맡기신 것입니다. /믿/아멘!/
⑶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음식을 먹고 가는 곳입니다.
옛날 주막집은 지나가는 길손들이 잠시 쉬어 가는 곳이요, 술을 마시기도 하고, 길을 묻어 가기도 하고, 음식을 사 먹는 곳으로 나그네들에게 꼭 필요한 곳입니다. 주막집이 현대화 된 것이 여관이요 호텔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곳에 주막집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여기서 쉬어갑니다. 사마리아 인은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하고 주막집에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이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여기 사마리아인이 떠나면서 말한 '내가 돌아올 때까지'란 어느 때입니까? 분명히 주님께선 재림하여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할/
⑷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주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떡을 먹이는 일입니다. 교회에 찾아온 성도들을 말씀의 떡을 먹여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생명의 떡을 먹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이 떡은 먹고 죽지 않는 영생의 떡이요, 이 떡을 먹는 자마다 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떡집)에서 나셨고, 인간의 밥이 되어 주시려고 구유(밥통)에서 나셨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강도 만난 나그네가 와서 말씀을 먹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소생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믿/아멘!/
⑸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쉬어가며 안식을 얻는 곳입니다.
나그네들이 먼 길을 가다가 피곤하면 주막집을 찾아가 쉬고 갑니다. 또 비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지면 이곳에서 쉽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쉬어 가는 곳이요, 비바람을 피하는 곳입니다. 인생 나그네들이 천성을 향하여 갈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친정 집과 같아야 합니다. 옛날 여인들은 시집살이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때 여인들이 친정 집에 가서 어머니 품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댁으로 올 때 푸짐한 선물도 가지고 돌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여러분들도 교회 오셔서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먼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많이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 기름진 것을 받아 가지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손에 축복을 들고 돌아가야 합니다. 병든 자는 건강을, 낙심한 자는 용기를,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은 하늘의 소망을 얻어, 가슴에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우고 가야 합니다. /아멘!/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할/
⑹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술을 마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신령한 주막입니다. 주막집은 술 취한 사람들이 많아야 소문이 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참 행복한 주막에 성령님을 보내시어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인색한 사람도 술 마시면 후해집니다. 주막집 주인은 나그네들이 주막에 와서 술 마시고 흥겹게 놀다가기를 원합니다. 목사는 여러분들이 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기를 원합니다.
술은 새 힘을 줍니다. 술을 마시면 강하고 담대한 힘이 솟아납니다. '네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강하고 담 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 기었느니라' 이런 힘이 새 술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 되는 세상!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됩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해야 합니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합니다. 노래를 하게 하고, 춤을 추게 합니다. 술은 놀이마당을 제공해줍니다. 한마디로 술 취하면 세상 살맛이 나듯이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모든 것이 똑 소리납니다.
그래서 '성령 받으라! 성령 받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행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힘으로도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으나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할 수 있느니라' /아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회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배가 바로 드려져야 하고, 강도 만난 자의 주막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던 길 멈추고 주막인 교회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세상살이 지친 자들이 여기 참 행복한 주막에 와서 쉼을 얻고 용기를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먼저 믿는 우리가 돌보아야 합니다. /믿/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좋은 이웃, 선한 이웃, 참된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도 만난 자를 주막으로 인도한 사마리아 사람이 참된 이웃입니다. 한번 따라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할/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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