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삶(빌 4:4-8 )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2.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삶> 빌4:4-8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사람들 가운데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첫째는 꼭 있어야 할 사람이고, 둘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며, 셋째는 없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 셋 중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당연히 첫째 부류에 속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고, 적어도 셋째 부류에는 속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할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며, 없어야 할 사람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꼭 있어야 할 사람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과 없어야 할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소금과 빛이 지니는 속성들이 그러하듯이 유익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의 존재가 남에게 또는 사회 전체에 유익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또 달리 표현하면 "남을 행복하게 하느냐 아니냐"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다 추구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 그것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더 값진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남을 불행하게 하고, 그것도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며 사는 것보다 더 혐오스럽고 악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말 한 마디에서부터 행하는 모든 일마다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저 사람은 멀리서 쳐다만 봐도 마음이 즐거워져"라든가, "저 분은 가까이 다가가 한 번 보기만 해도 은혜로워"라든가, "그 분의 웃는 모습이나 미소만 바라봐도 난 행복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복되고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는 말마다 하는 일마다 남을 불쾌하게 하고 상처를 주며 여러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전체에게 해를 끼치는 삶은 가장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 사람? 밥맛없어"라든가, "그 인간?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 이름 꺼내지 마, 나 열 받아"라든가, "그 사람하고는 그저 상종 않는 것이 최고야"라든가, "그 인간은 그저 조용히 사라져주는 것이 우릴 돕는 거야"라는 소리 듣는 것보다 더 불쌍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물론 때로는 잘 하려고 한 것이 본의 아니게 남에게 크고 작은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만 보면 끊임없이 남에게 불쾌감과 고통을 줄 일들을 고안해내고, 그로 인한 남의 불행을 보고 성공이나 한 듯이 즐기며, 그것으로 자신의 행복을 삼는 심히 비뚤어진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저주받은 인생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비극은 아무리 알아들을 만큼 그들의 잘못을 일러줘도 알아듣고 돌이키기는커녕 갈수록 더 마음이 강퍅해지고 완악해지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닌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결코 크게 힘이 들거나 큰 돈이 들거나 대단한 학식이나 준비가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남에 대한 작은 관심과 이해와 겸손과 고운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거기서 나오는 작은 미소, 작은 친절, 작은 양보, 작은 정성 하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밀고 들어간 문을 뒤따르는 사람을 위해 잠시 잡고 기다려주며 던지는 작은 미소 하나가 이 사회를 밝고 희망있는 사회로 여기게 만듭니다. 잘 했다는 칭찬 한 마디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수고 많이 했다는 한 차례의 격려포옹이 사람을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며 모든 누적된 피로와 지나간 고뇌를 단숨에 날려보낼 수 있습니다. 몇 일 전, 집에 밤새도록 전기가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성냥을 어디에 두었는지 아는 식구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집안에서 거의 움직일 수조차 없이 불편하다가 드디어 촛불 하나를 켤 수 있었을 때 그 작은 촛불 하나의 유익함과 고마움을 새삼스럽게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 어두운 세상은 우리의 작은 불빛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새삼 의미있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해 아주 적절한 답을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 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했습니다. 늘 기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늘 찌푸리고 있고 입만 열면 항상 불만과 불평뿐인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또 괜히 실없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이유가 확실하고 이기적이지 않을 때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은 돈을 잃었는데 혼자 떼돈 벌었다고 기뻐하고 있다면 과연 그 기쁨이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쁨은 언제나 그 근거를 주 안에 두고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남들과 꼭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거나 오히려 더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 때문에 늘 기뻐하는 사람이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관용"이라고 번역된 원문의 단어는 학자들이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번역하기 힘들어하는 단어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정의와 정의보다 더 좋은 어떤 것"(justice and something better than justic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칫하면 관용을 정의를 희생시키는 너그러움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관용은 정의를 희생시키지 않으며 또한 정의가 사람을 희생시키거나 상하게 하지 않도록 만드는 지혜와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얼마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힘든 일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지녀야 하는 것이기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6절에서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안심시키고 행복하게 합니다. 만나기만 하면 늘 묻지도 않는 온갖 근심 걱정 염려를 늘어놓는 사람은 남을 피곤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짜증나게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남의 염려까지 들어줘야 한다면 행복해지려던 마음이 가라앉고 맙니다. 그러나 염려해야 할 일이나 상황 앞에서도 철없이 태평인 사람 또한 남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 것은 염려할 일이 없어서도 아니고 철이 없어서도 아니라,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한 후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한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입니다. 모든 일을 다 하나님께 아뢰며 그가 해결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와 함께 염려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절 말씀 가운데 보면 기도를 하되 "감사함으로" 하라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께 믿고 맡기고 다 아뢸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며 기도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둘째는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실 줄을 확신하며 기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놀라운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본문 7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러한 마음과 생각의 평강이야말로 남을 행복하게 하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8절은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비결을 한꺼번에 여러 가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한 것입니다. 즉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 받을 만한 것, 칭찬 받을 만한 것, 덕이 되는 것, 기림을 받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열심히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무엇에든지 참되며" 했는데, 여기서 참되다는 것은 신실하고 그래서 신뢰를 받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신실하고 믿을만한 사람을 알고 있고 갖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까?

 

 

 

"무엇에든지 경건하며"라고 한 데에서 "경건하며"라고 옮겨진 말은 존경할 만하며, 품위있고, 가치있고, 고상하게 진지함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언제나 존경할 만하며 품위있고 고상하며 매사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무엇에든지 옳으며"에서 "옳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할 도리를 다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힘쓰며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에서 할 도리를 다하는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했는데, 여기서 정결하다는 것은 순수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로의 접근을 가능케 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순수한 것을 말합니다. 티없이 말고 순수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했습니다. 남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심성과 사람됨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를 보기만 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은 정말 모든 사람을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또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했습니다. 하는 모든 일마다 좋은 평판을 들을 수 있게 행하는 사람은 또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했는데, 모든 종류의 뛰어남과 칭찬받을 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 받을 만한 것, 칭찬 받을 만한 것, 덕이 되는 것, 기림을 받게 하는 것들을 열심히 생각하고 행한다면 우리는 분명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글을 쓸 때가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빌립보 교인들은 박해의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였기에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더욱 값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상황이 아니지만, 아니 그러기에 더더욱 우리는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금년 교회의 표어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로 내건 새문안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당신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있는 세상입니다", "새문안교회 같은 교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안으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새문안교회 전체가 행복하고, 밖으로는 새문안교회가 있는 것만으로도 한국이 행복해지는 그런 날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말사전에 "새문안적인"이란 말이 오르고 그 의미 가운데 하나로 "남을 행복하게 하는"이란 낱말풀이가 실린다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에게는 보람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후대들에게 오늘 새문안의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며 살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 이것은 한낮 꿈이 아니라 2002년의 우리의 삶의 목표요 우리의 신앙의 실천강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