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 목적. 용기
행 8:1-8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지난 주간 몇일간 일본을 잠시 다녀왔습니다. 한일간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년례모임으로 일년에 한차례씩 모여 서로 미래를 준비하고 현실문제들을 논의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금년에는 일본에서 모일 차례라서 일본에서 모였습니다. 이번 모임의 주제가 “민족주의와 한국교회”라는 주제였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지난날 일본의 한국에 대한 압제에 모아졌습니다. 원래 한국에는 민족주의가 없었습니다. 한국인은 누구를 침략하고 지배하고 전쟁을 일으킨 일이 없는 민족입니다. 그저 소박하고 순진하게 농사지으며 욕심없이 살아온 민족이고 법 없이도 사는 민족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하게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이 나라를 강점하면서부터 우리민족이 독해지고 사나워졌습니다. 일본의 압제를 받으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리니까 고양이에 몰린 쥐가 독해지듯 우리민족도 독해졌습니다. 그래서 “내 나라를 되찾자, 주권을 회복하자” 해서 나선 것이 민족주의 경향을 조금 띄게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국기독교가 우리도 이대로 있을 수 없다 해서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어 마침내 한국 기독교도 본의 아니게 강해지게 되었고 투사적인 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민족이 달라진 것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민족이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그때 압제를 받으면서 우리민족은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순진하게 살아가는 것으로는 안된다는 것 알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오늘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강하게 만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도 조용히 기도나 하고 있으면 안되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비로소 행동하는 신앙으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 깨들음과 힘이 오늘 한국교회를 부흥시키고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고난을 당하면서 “조용히 내 땅만 지키며 사는 것이 다가 아니다”하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오늘 우리나라가 세계화로 눈을 돌리게 된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러분, 때로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의지를 강하게 하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삶의 체질을 강하게 하고 더 넓은 세계를 보게 하는 안목을 갖게 하고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어본 사람은 새로운 생존법을 터득하고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고난받은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이 고난을 통하여 새로운 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일본을 방문하면서 일본 목회자들과 진지한 대화를 하는 중에 몇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일본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우선 “일본은 기독교가 너무 약세”라는 것입니다.
일본 기독교는 너무 약세입니다. 도시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십자가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한국 상황과 너무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하고 말하면 일본 목회자는 한결같이 “그것이 일본의 약점입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일본인들의 삶의 목적이 의문시 되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초월개념이 없고 절대개념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잘 살아도 그것이 삶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은 삶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하고 소망과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초월개념이 없는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어떤 확고한 목적이나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일본의 고민일 수 있습니다.
수년전에 로마교황이 일본을 방문해서 어느 대학에 가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하면서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하고 강조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대학생 한명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하나님을 믿지않아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의 수준입니다. 거기 어디에 목적이 있고 꿈이 있고 미래를 맡길만한 소망이 있습니까. 기가 막히는 아주 철없는 대답입니다. 그 대답을 듣고 교황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그 이상의 양식을 먹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참 너무나 성숙한 백성이고 행복인 민족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예수가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굉장한 재산이고 은혜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소망이 있고 꿈이 있고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또 거기에 삶의 초점이 있고 목적이 있고 삶의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활력을 주고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고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노후대책이 다 준비된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삶에 자신감이 있듯이, 미래에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삶이 밝고 여유가 있듯이 신앙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은연중에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런 삶입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일본 교회의 고민”입니다.
지금 일본기독교가 상당히 중요한 고민 한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황숭배신앙입니다. 일본의 기독교는 지금까지 천황숭배신앙이 잘못되었다고 항의도 하고 반대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싸울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무력감이라고 합니다. 상대가 너무 강합니다. 싸우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너무 힘겨워 지쳐있고 무력감에 좌절한 채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일본기독교가 당면한 가장 큰 고민입니다.
현재 일본의 기독교 상황은 아주 초라하고 빈약하고 보잘것이 없습니다. 기독교 인구가 전국민의 1% 1,100만명 입니다. 이 숫자는 교회 평균 30명꼴입니다. 이 작은 숫자 가지고는 목회자들 스스로가 바벨론제국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정부조직과 맞서서 싸우기가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일본교회가 지니고 있는 약점이 또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교회가 영성보다 이성과 지성을 지나치게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일본기독교는 도덕이나 질서정신이나 윤리나 지식이나 이론면에서는 상당히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교회는 소수지만 성숙했다는 평가는 받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질서만 잘 지킨다고 다 입니까.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윤리적으로는 성숙했는데 그런데 영적인 힘이 없고 열정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일본기독교는 우리나라 보다 기독교 역사가 10년이나 더 오래되었는데도 교회가 초라하고 빈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목회자들도 자신감이 없고 파워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일본기독교가 처한 현실입니다.
이렇게 현재 일본기독교가 약체로 존재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기독교 역사 150년 가운데 신앙때문에 순교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목회자들은 이 문제만 나오면 할말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요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역사가 이렇게 중요하고 풍토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집안분위기가 자녀들의 생각과 태도와 의식과 습관과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듯이, 환경이 사람의 의식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듯이 지난날의 역사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1만명의 순교자를 냈습니다. 중국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 천주교 신자들은 당시 강한 가족제도의 제사제도와 충돌하여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까. 순수하게 신앙때문에, 목적이 너무나 분명하니까 목숨을 내놓고 믿고 신조를 따르다가 죽어갔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당해서 죽으니까 1941년 교황 피우스 12세의 칙령이 내려왔습니다. “조상제사는 민간의식에 불과하니 수용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1만명의 순교자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개신교는 또 어떻습니까. 영국 출신 토마스 선교사가 1865년에 평양근방으로 상선을 타고 들어와 전도하다가 대동강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합니다. 오늘은 그 자리에 납치한 미국의 프에불로호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일제때 제암리교회의 순교사화는 순교사의 극치를 이룹니다. 또 6,25때 납북자와 순교자는 얼마나 많이 냈습니까. 기독교는 일당 백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100개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은 성경의 증언이고 분석이고 해석입니다. 우리민족은 죽음의 역사를 체험한 민족이고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고 희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후손들인 오늘 우리들도 신앙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이같은 순교와 희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체질이 조용하고 순진하던 민족성이 이제는 아주 강해지고 격정적인 체질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오늘 예수를 믿어도 극성스럽게 믿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다가 핍박을 받으면 모면하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선교사들이 현지의 고난을 다 알면서도 도전해 나갑니다. 죽기를 한하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데모를 해도 그냥 안합니다. 사생결단으로 합니다. 죽기를 한하고 합니다. 얼마나 신나게 합니까. 그래서 외국사람들이 데모를 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싱겁습니다.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데모를 해도 전쟁하듯이 실감나게 합니다. 그래서 외국 언론들은 전쟁난줄 알고 취재하려 듭니다. 우리는 그것이 지극히 보통인데 말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우리민족의 강점입니다. 이 체질이 마침내 일터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6,25때 산산이 부서진 이 나라를 50년 만에 일구어 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체질이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민족이 전 세계 안 들어간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체질이 마침내 교회로 옮겨졌습니다. 이 체질이 한국 기독교를 일구어 냈습니다. 여러분 산속의 기도원을 가 보십시오. 언젠가 명절 때 산상집회를 갔는데 설날인데도 사람들이 강단까지 가득 메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 어느 나라가 이런 나라가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체일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기독교에는 이런 체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일본교회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교회의 고민은 “천황숭배문제”입니다. 일본교회가 반대하고 규탄을 하는데도 정부는 꿈적도 안하고 들은 척도 안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목사님들은 소수의 한계를 느끼고 지치고 벽이 너무 크다는 것을 느끼고 좌절한 채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스스로 주저앉고 싸울 용기도 전의도 상실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압력을 넣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얼마나 한심한 상황입니까.
우리나라는 일제 때 일본에 항거하고 피 흘렸어도 영적인 뒤받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 국민들이 나서서 함께 싸웠고 싸울 목적과 명분이 분명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일본교회는 자신감도 없고 힘도 없고 지쳐있고 거기다 소수입니다. 그리고 “용기도”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일본기독교가 처한 복잡한 상황입니다. 그러면서 자꾸만 한국에서 압력을 넣어달라고 합니다. 국사교과서 문제도 일본기독교가 나서서 떠들어 보았지만 정부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중국과 한국에서 거세게 항의하자 꼬리를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일이 언제나 주변에서 떠들어서 될 일입니까.
문제는 일본교회가 용기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용기는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는 환경이 만들어 줍니다. 박종철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비명에 죽자 어느 날 갑자기 투사가 되었습니다. 아들이 비명에 가기 전에는 조용히 묻혀 살던 촌로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비명에 죽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갑자기 투사가 되어 정부와 군부를 상대해서 싸우는 투사가 되었습니다. 환경이 주는 용기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목사들은 그런 용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70여세 된 목사님들은 미련 버리고 죽을 각오를 하고 나서 보라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사 몇 명만 죽어보라 그러면 주변 국가는 물론이고 세계여론이 일어나서 압력을 넣을 것이 아니냐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 각오나 희생이 없이 무슨 싸움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융성은 고난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역사에서 기독교가 융성했던 시기를 보면 한결같이 수난기, 고난기, 환란을 거치는 동안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죽임을 당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안주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민족만을 사랑하신다.”하고 이방인을 짐승처럼 여겼고 사마리아인을 아주 부정하게 보았습니다. 그렇게 교만하고 자만하고 우월감을 가진 채 안주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안주함입니다. 안주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계로, 더 넓게” 입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안주하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스데반을 제물로 죽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고 검거령이 내려집니다. 안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순간 비상이 걸려 엉겁결에 야반도주해서 사마리아지방으로 도망을 가서 숨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사마리아는 죽어도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자 사마리아도 받아들여 그곳에 가서 숨습니다. 숨어서 복음을 증거하고 간증하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전도지가 확산되고 넓어졌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뜻입니다. 본문을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로 들어가서 전도했다고 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전도하니까 사마리아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믿는 자들이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십자가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삶은 짐을 지는 삶입니다. 이루는 삶입니다. 전파하는 삶입니다. 구현하는 삶입니다. 표현하는 삶입니다. 성취하는 삶입니다. 전투하는 삶입니다. 싸우는 삶입니다. 달려가는 삶입니다. 창조하는 삶입니다. 나아가는 삶입니다. 개척하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가다가 고난이 있으면 포기하지 않고 넘어가는 삶입니다. 힘들어도 넘어가면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서 새 길을 여셨습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입니다.
여러분, 안주하는 삶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삶입니다. 포기하는 삶입니다. 회피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냥 놔두지를 않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그런 용기의 삶이고 십자가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삶에 섭리하시고 관여하십니다. 얼마나 신나는 생활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이고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이런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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