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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살전 5:18)

by 【고동엽】 2021. 12. 10.

감사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해마다 한번씩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감사절은 참 의미가 깊은 날입니다. 이스라엘은 3대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국가기념일이고 나머지 두 날은 종교적인 기념일입니다. 여름에 밀을 수확하여 맥추절을 지키고 가을에 포도와 감람유를 추수하고 수장절을 지킵니다. 감사절도 현장에서 1주일동안 축제로서 절기를 지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추수는 곧 하나님에 대한 보은입니다.

미국인들도 3대 절기를 지킵니다. 독립기념일과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입니다. 독립기념일은 일반적인 국가기념일이고 나머지 두 날은 종교적인 기념일입니다. 특히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추수감사절은 최대 명절로 건국시 조상들의 처절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며 지내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축제의 날입니다. 참 지혜있는 민족입니다. 오늘 감사절을 지킴으로 역사를 생각하고 지난날을 회고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추석이라는 감사절이 있기는 합니다. 우리 조상들도 막연하지만 농사를 다 지어놓고 하늘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전국 5만 교회들이 앞장서서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되어 우리나라도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인간의 모습가운데서 가장 성숙한 삶의 태도는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때입니다. 오늘은 감사는 없어지고 자꾸만 삭막해지고 원망이 많아지고 불평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모두 생각 없이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각 없이 살아가게 되면 불평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 없이 짓는 죄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망 죄와 교만 죄와 감사하지 않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요즘 내가 잘 믿었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잘됨이 없습니다. 그러면 원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 자신이 믿음이 가장 좋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교만죄입니다. 그래서 남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이런 교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조건이 너무나 많은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짓는 죄입니다. 모두 생각이 부족해서 짓는 죄들입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몇 가지 전제되어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지면 감사나 은혜를 모릅니다. 마음이 선해야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아는 자식들은 모두 마음이 선합니다. 강퍅한 자식들은 부모에게 늘 불평만 합니다.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삶도 마음이 선한 사람들이나 가질 수 있는 삶입니다. 마음이 맑고 선한 사람들이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갚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선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선하고 맑고 인심이 좋았습니까. 그때 사람들은 은혜를 알았고 그 은혜를 보답할 줄도 알았습니다.

옛날 어느 선교사님이 시골길을 차를 타고 갔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머리에 큰 보따리를 이고 갑니다. 그 모습을 본 선교사는 차를 세우고 할머니를 타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짐을 머리에 이고 앉아 있습니다. 내려놓으라고 해도 몸만 타는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태울 수 있느냐 하고 한사코 짐을 내려놓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맑고 깨끗합니까. 그 마음 어디에 간사함이나 악함이 자리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그 마음이 삭막하고 각박하고 이익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감사도 없고 보답도 없고 은혜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시대가 문제입니다. 사탄이 오늘 현대인들을 유혹하는 것을 보면 넘어지게 하고 부러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 마음에 가능하면 원망과 불평과 감사하지 않는 마음을 넣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무서운 마음입니다. 사람이 지극히 타산적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신앙도 타산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할머니는 예배시간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 주머니에 천 원짜리 돈과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만지작거리다가 목사가 설교를 잘하면 천 원짜리를 헌금하고 못하면 100원짜리 동전을 헌금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오늘날에는 무서울 만큼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탐욕을 줄이는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욕심 없이 살수는 없습니다. 지극히 적당한 욕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발전하게 하고 성취욕을 갖게 해 줍니다. 그래서 사람은 향상된 삶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그 성취욕으로 오늘의 세상을 만들어 살고 누리고 소유하고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사람들은 도대체가 마음에 만족함이 없이 늘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이것이 불행의 씨앗입니다. 이 비교의식이 있는 한 그 사람은 행복하거나 만족함의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북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이 없습니다. 비교되는 대상이 없습니다. 울안에서 살아가고 모두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비교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민도가 낮은 나라 국민일수록 행복지수는 높게 나타납니다. 보고 비교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중국사람들은 개방되고 상대적으로 잘 사는 사람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도 상당한 탐욕의 마음으로 갈등이 많아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연변지역을 돌아다니는 동안 그 순진한 조선족들을 모두 망가트려 놓았습니다. 그들에게 돈을 보여주었고 거드름을 피웠고 욕망을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가정이 파탄되고 조용하던 마음들이 모두 물욕과 잘못된 환상으로 물들여 있습니다.

옛날 우리들이 시골에서 살 때 얼마나 순수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때는 참 행복했었습니다. 이웃과 함께 형제애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사회가 산업화로 발전되면서 서로 비교되는 우열의 삶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가져도 누려도 소유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이 조절되지 않으면 그 마음에 결코 만족함이나 감사함의 마음이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병의 아가리가 작은 병 속에 손을 넣고 안에 있는 사탕을 욕심껏 한 움큼 쥐었습니다. 그리고 손을 빼려고 하는데 나오질 않습니다. 이 아이는 손이 나오지 않는다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면서도 손은 놓을 줄을 모릅니다. 그 아이는 병 안의 사탕을 적당히 잡지 않는 한 그 손이 빠지질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그 삶에 만족함이나 감사함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렌 켈러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를 겪으며 살았던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 사람은 그래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주일동안만 눈을 떠보는 것입니다. 내가 일주일동안 눈을 떠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세 가지를 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평생 몸을 아끼지 않고 희생과 헌신으로 살아가신 설리번 선생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찬란하게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보고 조용히 넘어가는 낙조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아침에 일터로 나가는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의 모습을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마음에는 그 여인의 마음보다도 훨씬 더 냉혹하고 삭막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찬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사람은 욕망을 조금만 줄이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아주 넉넉한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조절하며 살아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며 살아가게 되면 우선 마음에 자중하는 마음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하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마음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면 사람이 타락을 해도 정도가 있습니다. 넘어져도 아주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의식을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생활 속에서 감사한 조건을 찾아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금년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습니까. 교통사고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비행기 사고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홍수와 태풍의 사고, 인재는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사건사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너무 많은 사고들 속에 살아가는 동안 감각이 무디어져서 그 사고들의 위험을 느끼지를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많은 사고들 속에서 오늘까지 이렇게 안전하게 살아온 것을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을 그냥 지나칠 정도면 영적 감각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면 하나님의 섭리의식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식을 느끼고 살게 되면 우리의 삶에 자주 찾아오는 질고나 고난의 의미를 깊이 알게 되고 어려운 문제들의 해답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우리의 삶에 언제 태풍이 불고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엄습해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 그 의미를 모르면 감내해 나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것을 이기고 극복하는 데는 이 하나님의 섭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머리 숙여 감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청년은 “언젠가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가졌습니다. 그 마음이 꿈이고 비전입니다. 이 청년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던 중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 하나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족을 했습니다. 이 청년이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내 다리를 빼앗아 가시는가, 왜 내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던 중 문득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는 언젠가는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옛날의 꿈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과 내 꿈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에 이번 기회가 그 꿈을 이룰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으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다면 과연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깊이 생각하던 이 청년은 기도하던 중에 결단을 내리고 아프리카로 선교의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곳은 오늘의 콩고라는 아주 열악한 환경의 땅이고 식인종으로 불리는 인종이 들끓는 지역이었습니다. 배에서 내리려 하는데 식인종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 젊은이가 자신의 의족을 뽑아서 식인종들에게 던졌습니다. 다리한쪽을 받아든 식인종들은 서로 뜯어먹으려 했지만 고무다리가 씹혀질 리가 없습니다. 식인종과 문명인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문명인은 안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지만 야만인은 안되면 그것으로 생각을 접습니다. 그때부터 이 선교사는 씹히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 후로는 그를 신처럼 떠받들어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이 젊은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다리를 빼앗아 가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난제의 의문을 풀고 까다로운 문제의 해답을 알게 된 순간 그 젊은이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했고 기뻤고 감사했겠습니까.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기 “범사”라는 말은 헬라어의 “엔 판티”라는 말입니다. “모든 경우에, 항상, 언제나”라는 뜻입니다.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좋지 못한 일에도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 범사라는 말은 종교적인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범사의 감사입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고 무조건의 감사한 뜻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시는 동안 여러분은 좋은 일들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두 가지겠습니까. 가정적인 일, 사업적인 일, 자녀들의 일, 그리고 오늘까지 살아온 생존의 일 등, 생각해 보면 금년 한해도 감사했던 일들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 보다도 더 감사한 일은 여러분 중에 금년에 주님을 만나게 된 분들의 경우입니다. 여러분 중에 금년에 등록하고 세례 받고 주님을 새롭게 만나신 분들 이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 은혜인지를 알았으면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파스칼은 처음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체험한 순간 가슴이 저려오도록 눈물을 흘리며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소리 높여 외쳤다고 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예수를 만나고 그 은혜를 입고 나서 외치기를 “그립고 사랑스런 나의 주님이여”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인도의 성자 산다 싱은 주님을 만나서 은혜를 입고 외치기를 “주님 주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나는 무엇을 드려야 합니까”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첫 곡식을 추수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나무의 열매를 거두면 첫 열매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자식을 낳으면 첫 자식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양을 제물로 드릴 때는 많은 양떼 중에서 가장 건강하고 실한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추수를 해서 감사하는 감사절이 아닙니다. 일년의 삶을 감사하는 축제입니다. 일년의 삶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드리는 축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더 큰 감사의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2002년도의 감사절에 하나님의 따뜻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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