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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요한복음 1:14-18(예배 설교)

by 【고동엽】 2021. 12. 10.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모든 종교사와 철학사와 구별되는 딱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육체와 물질계에 대한 끝없는 긍정입니다. 육체와 물질세계에 대한 끝없는 긍정이 기독교를 참 하나님의 계시로 보게 만듭니다. 이 세계에서 육체의 세계, 물질의 세계 이런 물리적인 세계들을 환영, 그림자와 같고 허상이라고 주장한 것은 범아리안 종교의 특징입니다. 범아리안 종교의 특징은 그리스종교와 인도종교입니다. 그리스종교와 인도종교의 특징은 물질계와 육체세계의 비영속성에 관한 강조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세계, 우리가 육체로 누리는 이 모든 세계, 고통 그다음에 땅에서 일하는 것, 먹고 사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만 있는 제한적인 현상일 뿐이고 이제 육체를 훨훨 버려버리고 다른 존재로 산다면 먹고 사는 문제, 육체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육체와 물질의 세계를 덧없는 것으로 보는 세계가 범아리안 종교 철학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세계가 영이 거하실 궁극적인 처소이며, 영이신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자기 존재를 영이신 상태로 두지 않고 육체의 세계 속에 와서 살겠다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것은 성경과 히브리종교의 특징입니다. 완전히 다르죠? 이렇게 다른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물질적인 육체의 종교, 거룩한 유물론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거룩한 유물론입니다. 왜 거룩한 유물론이냐? 물질이 영의 궁극적인 표현이라고 봤기 때문에, 제가 배고픈 사람에게 영으로 사랑하지 않고 빵을 나눠줘야만 나의 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남녀끼리 사랑을 나눌 때 정신적으로 손을 잡지 않고 진짜 손을 잡습니다. 육체로 손을 잡습니다. 정신적으로 입맞춤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입맞춤을 합니다. 왜? 정신적 입맞춤보다 육체적 입맞춤이 더 궁극적이기 때문에, 영이 가장 궁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은 육체를 매개하는 길밖에 없고 물질을 매개하는 길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영우위론적 종교가 아니라 물우위론적 종교, 육체우위론적 종교, 이것이 요한복음의 놀라운 특징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말씀에서 육신으로 즉각 이동한 사람입니다. 말씀, 관념 상태의 그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즉각 표현하는 것, 이것이 성육신적인 신앙입니다. 성육신적 신앙은 뭐죠? 예수의 가장 깊은 비밀을 육체와 물질로 표현하는 것 이게 요한복음적입니다. 요한복음적인 건 이런 거죠, 내가 돈이 많이 있는데 권대익 형제가 굶주리고 있습니다. 내가 대익형제에게 문자를 날립니다. 대익형제 굶주리지만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로 막 립서비스를 합니다. 이런 건 매우 말씀적이고 관념적입니다. 그런데 내가 굶주린 대익 형제에게 가서 만두를 사서 주면서 같이 나누면서 그 빈 배를 채우는 것이 요한복음적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적이란 말은 육체 매개적, 물질 매개적 그다음에 행동적, 실천적인 것이 요한복음적이다. 요한복음적 사랑은 반드시 물질로 매개되어야 됩니다. 물질로 매개되어야만 요한복음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3장 18절에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육체 매개적 물질 매개적 영우위론이 아니라 물우위론 육체우위론적 사고방식만이 기독교이고, 기독교는 제일 마지막에 혼백의 나라가 아니라 신령한 육체를 입고 사는, 하나님의 육체를 입고 사는 그런 시대가 온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 속에서 나온 종교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감당할 수 없는 진리이고 계시의 수준인 겁니다. 그럼 오늘날 왜 기독교는 육체노동을 허드렛일로 여기고 육체노동을 노예화시키고 왜 모든 좋은 것들은 정신적 이론을 다루는 사람이 다 가졌을까? 왜 그랬을까? 러시아 혁명 초창기에는, 볼세비키 혁명 초창기에는 육체노동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장관들도, 처음에는 초대 외무부장관 트로츠키도 육체노동자의 옷을 입고 국제회의에 갔습니다. 그만큼 모택동 김일성 모두가 모든 관료들에게 일 년에 넉 달 동안 지방 공장과 농장에 가서 일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그걸 하방이라고 합니다. 하방이란 말은 고급관료들을 넉 달 동안 현장에 가서 육체노동을 하게하고, 김일성 종합대학생들 넉 달 반을 육체노동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김일성종합대학생들은 네 달 반을 인민의 품에 가서 인민과 함께 흙을 만져야 됩니다. 이게 하방입니다. 그래서 숙청되었을 때 사회주의는 감옥에 가두지 않고 감옥 대신에 육체노동교화소라는 곳에 가서 일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사회보다 노동징벌이 많습니다. 육체노동이 많아요. 그래서 육체우위론적 사고, 물질우위론적 사고, 이게 히브리 종교, 기독교종교 이 모든 참 계시 종교의 특징입니다. 범아리안종교의 특징은 불교와 그리스철학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대표적인 것은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의 30여 편의 대화편이 있습니다. 이 30여 편의 대화편 중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에 우리 기독교의 복음서에 수난사화에 해당되는 수난기사.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일주일 동안 보냈던 수난주간의 기사를 모아놓은 것, 우리 복음서의 그 수난기사와 똑같은 맞먹는 플라톤의 대화록이 네 편이 있습니다. 그 네 편 이름이 뭐냐면 에우튀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이렇게 네 편입니다. 파이돈이란 작품은 가장 긴 작품인데 사형당하는 그날, 새벽부터 사약을 받아서 죽는 장면까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파이돈 편이 영혼불멸성과 육체경시 사상의 집대성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사상임과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구술한 것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이 피타고라스의 사상이면서 플라톤의 사상이면서 불교의 화엄종사상이면서 모든 불교 사상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는데요. 이 책은 지금 숭실대학교 1학년 철학교양강좌의 교재입니다. 그리고 숭실대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대학의 철학 교재는 대개 이런 책으로 시작됩니다. 이 책 중에서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돈을 주고 노예시장에서 사다 들인, 노예시장에 팔려 있는 엘리스라는 나라의 청년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자기 강사료 받아가지고 몸값 지불하고 최종 제자로 거느렸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스승의 죽는 장면을 그대로 봤고 스승의 모든 그 마지막 말씀을 노트에 필기하듯이 해서 채록을 한 겁니다. 그래서 이 네 권은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마지막 한 달 동안의 집중적인 대화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간 있으면 한 번 읽어 보세요. 이 책 다 읽지 마시고 제가 여러분께 한 번 만지게 해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적으로는 만져야 됩니다. 읽기 전에 만지는 것이 먼저 있고 나서 읽게 되거든요. 저는 원래 제 책을 만지도록 함부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저와 특별한 호의와 우정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 번 살짝 만지도록 하는데, 1부 예배 마치고 나서 졸지 않는 사람에게 무료로 만지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이 책 297쪽부터 306쪽까지가 절정입니다. 몇 구절 읽어보겠습니다. ‘몸은 우리를 욕정들과 욕망들 두려움들 그리고 온갖 환영과 하고 많은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우게 하고서는 진실로 진실로 우리가 몸으로 해서 속담 그대로 도무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지. 아닌 게 아니라 전쟁들과 불화들 그리고 싸움들이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몸이네. 이 몸으로 인한 욕망들 때문이지. 재물의 소유 때문에 모든 전쟁이 일어나지만 재물의 소유 이것 또한 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 결국 몸을 보살피다가 일생동안 종노릇 하고 마는 거네. 이 몸으로 인해 모든 불행이 수난과 혼란이 일어나네. 몸으로 인해서 참된 것을 볼 수 없게 되면서, 몸과는 전혀 같이 지낼 수도 없네. 철학은 일생동안 몸의 욕망과 속박으로부터 건져냄을 받는 운동이니까 내가 죽는 것은 내 철학의 완성이네. 따라서 나는 죽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고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이 내 구원일세.’ 이렇게 하면서 사약을 받아먹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몸에 대한 이 끝없는 멸시, 몸은 죽고 혼은 영원히 불멸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몸과 혼을 하나로 봅니다. 몸이 죽으면 혼도 죽는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영혼불멸설이 아닙니다. 이런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사도바울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도바울이 육체를 멸시하는 그런 표현이 로마서 6장과 7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6-8장에 플라톤적 육체사상과 유사한 표현이 나타나는데, 플라톤과 유사한 육체경시 사상이 로마서 6-8장에 나타나지만 플라톤적 육체경시 사상이 아닌 걸 자세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뜻 보면 그리스도에 대해 언뜻 보면 육체, 이 몸뚱아리 자체가 모든 불화와 모든 모순과 모든 죄와 욕망의 근원인 것처럼 말하는 본문이 몇 개 있기 때문에 읽어드립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리스적인 그런 육체경시사상에 가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은 죄악된 자아가 몸을 통해서 죄를 짓는다는 뜻이었지, 절대로 그리스적 철학으로 몸의 경시사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6장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때 죄의 몸은 뭐냐면 육체가 아니라 죄악된 인격, 이런 뜻입니다. 죄악된 인격으로서 인간의 개별적 존재를 표현할 때 바울은 몸이란 말을 썼습니다. 바울이 몸이란 말을 쓸 때 플라톤적 소크라테스적 몸이 아닙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이 말은 죄악된 자아가, 이런 뜻입니다. 그 다음 6장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사사로운 욕망에, ‘순종하지 말고’ 이것이 또 육체경시사상 같은데 이때 이 몸은 뭐냐면 이 몸뚱이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자아, 부서진 자아, 타락한 옛 자아, 인격 통째로 이걸 가리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몸이 그리스적 표현양식과 비슷하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도 영혼불멸설을 기독교의 사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혼불멸설이 아니에요. 우린 다 죽는 겁니다. 죽고 부활하는 겁니다. 우리 영이 죽고 부활하는 겁니다. 부활하지, 내가 지금 이대로 있다가 오는 거 아니에요. 내가 내 영이 안 죽고 있다가 오는 것 아니에요. 그럼 내가 부활도 아닙니다. 죽은 것도 아닙니다. 완전히 망각되고 완전히 없어지는 겁니다. 없어진 그 옛 자아가 부활하고 소생하는 것이지, 영원히 보존되는 불멸이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영혼불멸설을 장신대학교 어떤 교수는 가르칩니다. 총신대 다 가르칩니다. 아니에요. 부활이에요. 우리 영과 육체 몸은 다 죽어요. 다 썩어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부활시키셔서 우리 인격적 동일성을 보존하는 부활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 영혼이 불멸하는 게 아니에요. 6장 19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육신이 연약하다 이때도 육신이 우리 옛 자아입니다. 그 다음에 7장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이때 이 지체는 중립적인 우리 몸을 가리킵니다. 이때 말하는 지체는 우리 몸을 가리킵니다. 이 지체란 말이 플라톤이 말한 몸과 같은 말이에요. 그 다음에 로마서 7장 23절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때 이 지체는 바로 또한 플라톤이 말하는 그 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 몸도, 내 영과 같이 내 몸은 내가 죄악된 행동을 하면 내 몸도 기억을 합니다. 내가 도둑질을 하면 이 손이 내 혼과 함께 도둑질을 기억합니다. 도둑질을 기억하는 것은 내 정신만이 아니라 내 몸도 같이 도둑질을 기억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도둑질한다는 말이 육체도 죄에 가담합니다. 영은 죄에 가담하고 육체는 영혼에 비해 종노릇만 했다? 아닙니다. 똑같이 가담합니다. 그 다음에 8장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때 이 몸은 지체와 같은 뜻입니다. 육체입니다. 그야말로 육신입니다. 이때는 죄악된 자아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때 이 몸도 플라톤이 말하는 그 문제가 많다는 그 몸입니다. 로마서 6장과 7장에 말하는 몸은 죄악된 인격을 가리키고 로마서 12장과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지체라는 말은 그야말로 중립적인 몸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은 우리의 영적 타락이 육체를 죄에 가담시켰다고 보지만 육체자체가 죄의 근원이라고 보거나 육체 자체가 내 영을 속박시키는 그런 근원적인 모순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플라톤적 영혼이분법을 가진 종교가 워치만 니의 이단입니다. 워치만 니란 사람의 책이 <생명의 말씀사>에서 수백 권 번역돼 나왔습니다. 이 워치만 리의 사상의 핵심은 영은 타락하지 않았고 육체만 타락했는데 타락한 육체가 영을 눌렀기 때문에 영을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참 거듭남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쓴 책을 the release of spirit, 이런 책입니다. 영의 해방, 영의 풀려남, 그게 아닙니다. 영과 혼과 육체가 타락했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 옛 자아가 타락하자마자 내 영, 혼, 육체 모두 다 타락했다고 보는 것이 전적타락입니다. 워치만 니의 종교는 지금 현재 지방 종교라고 하는 이단 단체에 관련돼 있습니다. 그런데 워낙 세가 없기 때문에, 이 단체는 지금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이단은 이단인데 너무 책이 많아서 조사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조사 중인 이단이라고 돼있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영을 불멸의 순서로 보고 육체가 모든 걸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봅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과 성경은 육체는 영의 궁극적 진리를 가장 생생하고 가장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가 내가 죄악에 타락했기 때문에 내 폭력의 도구가 되고, 내가 죄악의 병기가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육체자체는 하나님의 합당한 선물로써 합당한 선물인데 우리 타락한 자아가 육체를 그릇 쓰는 것이 문제이지, 육체 자체를 죄의 근원, 한계, 피조물의 모순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육체와 물질세계에 대한 끝없는 긍정이 되고 육체노동자가 갑자기 너무 중요하고 육체로 봉사하는 사람은 요한복음으로 봤을 때 신적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던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께 육신을 입혀달라고 순종하는 그 말씀이, 순종의 극강체를 드리기 위해서 육신까지 입는 모험을 감당하는 순종을 했다는 겁니다. 이 표현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이 이해할 생각을 하지 말고 믿기만 해야 합니다. 이해하려 들다가 실족합니다. 계시의 섬광으로 제 영혼과 마음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옛날에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틈틈이 성경을 읽었지만 정말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학적 언어는 거의 이해되지 않았고 순전히 동화 같은 이야기만 기억에 남았습니다. 야곱이 밤새도록 씨름한 이야기, 이건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도깨비 이야기와 똑같았기 때문에 딱 그것만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옛날에 문상을 다녀오다가 밤새도록 씨름을 했는데 그 다음날 가보니 허수아비였더라, 이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밤새도록 처녀귀신과 싸움을 했는데 집에까지 따라온 그런 것만 기억났지, 모든 의미 있는 신학적 진술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해가 되는 순간 계시의 태양이 하루 종일 중천에 떠서 20대 청춘인 내 마음속에 의미 있게 깨닫게 해주는 그런 계시의 태양이 비췄을 때는 이런 어려운 말들이 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빛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안 되는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은 여러분이 이해하는 수준만 읽고 계셔야 해요. 이걸 한꺼번에 많이 알려고 하면 다쳐요. 그래서 오늘은 다 이해 안 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표현은 울림이 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했다는 단어 자체가 구약에서 큰 울림이 있는 단어로써 장막을 쳤다는 말이거든요. 말씀이 우리가운데 장막을 쳤습니다. 이걸 읽는 순간 구약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벌써 장막을 쳤는데 그 장막 안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다는 기사를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출애굽기 40장 34-35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여호와의 성막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하나님의 성막이 이스라엘 가운데 치자마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열왕기상 8장 11절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성전낙성식을 할 때 기도하는 순간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는 말, 성막 안에 있는 가득 찬 영광이 성전으로 이동했죠? 그런데 여러분 성막 안에 가득 찬 영광은 원래 어디에 있는 영광이죠? 그 영광이 어떤 산에 강력하게 임했죠? 최초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야생 어느 산에서 경험했어요? 시내산에 가득 찬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찬 영광이 되었고, 성막에 가득 찬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찬 영광이 되었다가 이 영광이 에스겔서 11장에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죠? 여호와의 성전을 떠났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저 이스라엘 민족을 떠났어요.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자마자 보통 국가가 되어버렸어요. 이스라엘 민족은 보통 국가가 되어버려서 국제정치의 흥망성쇠의 원칙에 속수무책으로 규정당하고 박해받는 나라가 되어버렸어요. BC 586년부터 예수님 올 때까지 약 600년간을 이스라엘 민족은 보통국가가 되어버렸어요. 예언자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BC 586년부터 예수님 올 때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증거인 예언자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예언자, 즉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라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거예요. 양진일 목사님과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적법하게 대언한다면,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 말씀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구약식으로 말하면 우리 가운데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우리가운데 예언자가 중계하는 하나님 말씀이 더 이상 나에게 들려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통치권 바깥에 내버려둔 자가 되는 거예요. 그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갔었는데, BC 586년에 성전이 망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가 버렸는데, 그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계심을 폭발적으로, 잊힐 수 없는 강력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그대로 예수의 육체 안에 왔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 주장은 너무나 중요한데, BC 586년부터 약 60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를 기다리며 그 땅에 살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BC 586년부터 예수님 올 때까지 누구를 기다리며 그 땅에서 흩어지지 않고 살았죠?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것은 무슨 목적 때문이에요? 다윗의 후손 메시아가 올 것을 믿고 살았으면 누구의 사실상 통치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에요? 메시아가 올 것을 믿었다면 그들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누가 사실상 지배한 거예요? 오지 않았지만 오실 메시아의 지배를 받았죠? 600년간 오실 메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니까 사실상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 땅에 살아남고 율법에 순종했으니까 메시아가 그들을 통치한 게 맞죠? 그런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600년간 이스라엘 민족을 지탱시켰단 말이에요. 그 지탱시킨 메시아가, 영광이 예수 육체에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이 600년간의 구원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 감격은 나눠질 수 없는 감격이고 납득도 안 되는 감격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600년간 떠나있던 여호와의 영광의 회복과 복귀를 선언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의 육체는 무엇이죠?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일어나요. 성전에서 가장 많이 선포되는 게 무엇이죠? 우리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뭐가 일어나요? 제사 드리면 뭐가 일어나요? 화해와 죄사함이 일어나죠? 치료가 일어나죠? 예수의 육체는 무엇입니까? 예수의 육체를 잡자마자, 옷자락을 잡자마자 치료가 일어나죠? 예수께서 죄사함을 선포했죠? 성전에서 토라를 가르쳤죠?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순종의 도를 가르쳤죠? 토라, 예수는 걸어 다니는 성전이었죠? 예수는 걸어 다니는 성전이 된 거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한때 인간의 장막 가운데 가득 찼던 그 영광의 역사를 예수 안에서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했다는 말은 책 읽을 때 자세히 읽으세요. 스케네오라는 동사, 장막을 치다, 테드네클, 이런 뜻입니다. 정확하게 그 단어를 씁니다. 고린도전서 5장 1절 ‘우리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그게 나오죠? 왜 육신의 장막이냐면 이 장막은 이렇게 생겼잖아요. 이 장막은 중심에 기둥이 서 있다면 텐트가 되지만 이 기둥 하나만 뽑히면 와르르 무너지죠? 너무 덧없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장막이 기둥이 뽑히자마자 풀썩 주저앉으니까, 인간이 마치 있는 듯하다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이 그런 장막처럼 보이니까 그런 메타포가 생긴 겁니다. 장막, 육신의 장막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장막이 쳐져 있죠? 우리가 죽어버리면 이 몸은 무엇이 돼요? 우리 몸은, 축구했던 제 몸은 뭐가 돼요? 막 패스해달라고 소리 질렀던 제 몸은 뭐가 돼요?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 어제 양진일 목사님과 1시간 반 동안 축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돼요? 존재하는 듯하다가 너무 덧없게 끝나버리는 인간 삶의 덧없음, 그게 육신의 장막이라는 표현이에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육신 안에 장막을 치고 오셨는데, 그 육신의 장막을 보니까, 그 하나님의 영광을 프리즘에다 비추니까 은혜와 진리였어요.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부서진 피조물에 대한 끝없는 너그러움이에요. 은혜라는 말은, 지금 제가 두 개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탁목사이고 한 사람은 정전도사인데, 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과목을 들었던 목사님이고, 한 사람은 모세오경 과목을 들었던 장신대에서 학점교환으로 온 전도사님인데, 이메일이 둘 다 이런 겁니다. 교수님 제가 출석도 많이 못했고 30일까지 교회 일이 바빠서 도저히 하나님의 도성에 대한 과제물을 못 내겠습니다, 저에게 F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탁목사님은 그동안 자세도 훌륭하고 출석은 그 동안 몇 번 빠졌지만 그것은 순전히 파라오 같은 담임목사님 덕분이고 자발적으로 빠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B학점을 줄 테니까 6월 29일까지 페이퍼를 내면 안 되겠느냐? 한참 생각하더니, 아닙니다, 저에게는 F를 내리심이 합당합니다, 아직까지 F를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다음에 정전도사님한테는 이렇게 왔어요. 교수님 제가 경건훈련을 은성수련원으로 4박 5일 동안 가야 합니다, 제가 모세오경 이 과제물을 해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C학점만 주어져도 은혜가 깊다고 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B제로를 줄 테니까 6월 29일까지 해내십시오, 아마 엄청 지금 눈물로 감격할 겁니다. C줘도 좋다고 했는데 B제로를 준다고 했기 때문에, 이게 교수가 베풀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피조물의 모든 한계 때문에 오는 연약함,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연약함, 결심대로 살지 못함, 모질게 말하고 후회함, 내가 내 존재에 대해서 느끼는 모든 부끄러움을 다 상쇄하는, 내가 이전에 저질렀던 모든 죄를 잊어버릴 만큼 새 사람 되게 만드는 갱생의 힘입니다. 은혜는 용서가 아니라 갱생시키는 용서입니다. 은혜의 힘은 갱생에 있습니다. 제가 만일에 이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학점만 주면 저는 무원칙자가 됩니다. 그러나 제가 그들에게 학점을 미리 주고 좋은 페이퍼를 받아내면 그들은 갱생을 해야 합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재창조를 가져다주는 너그러움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한 무조건의 용서 아닙니다. 우리가 전두환을 용서하려면 전두환이 용서받았다면 새 전두환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유들유들한 그 느글거리는 전두환 말고 전두환이 용서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참된 전두환이 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전두환 씨로 바뀌어야 은혜를 받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진정한 은혜보다는 힘이 있는 자에 대한 율법과 원칙의 방치를 한 겁니다. 이건 어떤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가득 찼는데 예수님이 받았던 영광을 가만히 보았더니 한없는 너그러움과 한없는 재창조의 권능이 많더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새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영적 지도자가 되고, 세리가, 탐관오리가 거룩한 공무원이 되더라는 거죠.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그다음 진리는 무엇입니까? 갱생된 자를 하나님 안에 강력하게 속박지우는 겁니다. 이때 진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동여맴, 성경에서 진리라는 말은 동여맴, 동여매다, 히브리어 에메크 라는 말이거든요. 에메크라는 말이 알레테히아로 바뀌었거든요. 알레테히아, 그리스말에서는 감추어졌던 것에서 드러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다움을 계속 유지함, 인격적 통일성과 통전성을 결국 유지하는 게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양진일 목사님이 정직한 사람이면 계속 정직한 상태에 있는 게 진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적 개념에서 요한복음적 개념에서 진리는 은혜 안에 갱생된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동여매져서 결속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나님과 강력하게 속박되자마자 나머지 모든 것들로부터 풀려난다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속박이 나머지 모든 것들로부터 풀려남, 해방이니까, 진리를 안다는 말은 무엇이죠? 진리와 속박함에, 진리 안에서 속박됨에, 내가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진리에 속박된 자가 된다면 나는 자유로워진다, 이런 뜻입니다. 첫째 예수님 안에서 발산되는 영광을 보았더니 갱생시키는 은혜와 결속시키는 은혜가 집중되어 나타났다, 우리가 그 영광을 분광기에 비춰보니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였다, 그런데 이 은혜와 진리는 한 번만 오는 게 아니라 계속 샘솟는 은혜였다, 예수 안에 있는 은혜는 샘솟는 은혜였다, 1장의 표현이, 가린 안티 카이토스, 안티라는 말은 어판이라는 말이에요. 안티라는 말할 때 그 앤티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 이 충만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어떤 참혹한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됨을 포기하지 않을만큼 충만한 것, 여러분 부모가 자식이 어떤 반역을 하더라도 부모님의 자비를 잃지 않을 때 그건 충만한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을 보니까 그 충만은 인간의 어떤 반역도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의 성품을 파괴하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아무리 악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해도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은 부서지지가 않더라는 겁니다. 이건 너무 은혜로운 거예요. 이건 인간의 악한 죄, 인간이 아무리 죄 많은 역사를 일으켜도 하나님이 원래 계획했던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건설돼요. 그 말이에요. 인류역사의 마지막은 은혜가 지배해요. 인류 역사의 마지막은 인간이 가져온 참혹한 핵전쟁이 지배를 하지 못해요. 핵전쟁, 이런 모든 인간의 무한 탐욕들 그 탐욕들을 상쇄시키고 이겨버리는 하나님의 갱생과 은혜가 세계 역사의 마지막이 된다는 말이에요. 충만한 데서 받는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이건 굉장한 낙관주의입니다. 우리가 직접 피부로 경험할 때는 인간이 너무 탐욕적이서 실망이 되고 탄식이 되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궁하신 다함없는 자비를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탐욕과 인간의 죄를 볼 때는 이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 말은 뭡니까? 갱생시키는 역사가 계속 되더라, 그래서 모세종교는 최후통첩 종교인데 예수 종교는 갱생의 종교이고, 최후통첩을 무효화시키는 율법의 상황선언 끝에도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에 대해서 최후통첩적인 최후선고적인 죽음 종교가 아니라 끊임없는 새 출발을 가능케하고 새 창조를 가능케 하는 은혜의 무진장한 역동성이 있는 종교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닮았다는 말은 은혜 위의 은혜를 경험하여 은혜 위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이런 것이 무엇입니까? <레 미제라블> 1부, 미리엘 신부 편에 나오는 이 미리엘 신부라는 사람이 바로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미리엘 신부는 장발장의 도덕적 세리성, 짐승스러운 야수성, 도둑놈적인 어두운 면을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미리엘 신부는 자기도 한때 타락한 젊은이였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 개발돼 있었습니다. 자기 은촛대를 훔쳐서 체포된 사람을 보고 경찰관에게 말합니다. 이보게 이 사람이 훔친 게 아니네, 내가 선물로 준 것이네, 그에게는 죄가 없네, 그를 감옥에 가둬서는 안 되네, 끊임없이 우리가 아는 형벌마저도 재해석을 해버립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죄와 탐욕 역사 앞에 마음이 상해버리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비난을 많이 하고 인간에 죄에 대해서 너무 실망이 깊어지면 내 안에 있는 사랑이 메말라버립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너무 공격적이고 너무 사나워지는 그 마음을,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로 밀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 위의 은혜를 믿어서 갱생, 재창조의 순환을 믿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묵시록적인 심판주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다 쓸어버리면 좋겠다, 이런 나쁜 마음, 우리 기독교인 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계속 저주를 퍼붓는 사람, 이 문명 쓸어버려라, 도시 다 불 타버렸으면 좋겠다, 강남 다 지옥으로 꺼져라, 이런 식으로 우리 안에서 염라대왕급적인 언어가 터져 나오는데 그건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무궁한 은혜에 대한 묵상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이 너무 지쳐서 우리 마음이 너무 강퍅해져서 그런 거거든요, 그러면 또 안 돼요. 우리가 아무리 대의를 행해야 하고 또 교회 갱신도 해야 하고, 이 지구 생태계도 지켜야 하지만 우리가 이런 지구 생태계를 지키려고 남을 비난하다가 내 마음이 사하라 사막처럼 강퍅해져버리면 우리는 또 그들에게 피해를 입는 거거든요. 너무 나쁜 놈과 싸우자고 나쁜 놈만 묵상하다가, 한겨레신문만 계속 보다가 내 마음이 계속 강퍅해지면 내가 결국 그들에게 공격을 받아서 방사능피폭을 경험하는 거예요. 하루 종일 나쁜 놈만 묵상하면 안 돼요. 그래서 성경을 묵상해야 해요. 성경에서 무얼 경험해야 할까요? 충만한 것을 받아야 해요. 은혜와 은혜를 경험해야 해요. 은혜와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지금 분명히 우리 대한민국 불 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는 혐오감을 가지고 내가 예배에 왔더라도 대한민국을 향한 자비를 고요히 요청하는 이것이 겸손한 것이고, 이것이 예배인 것이고, 이것을 마땅히 기독교인이 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실망이 많고 냉소가 많고 좌절감과 분노와 한이 많은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하나님 당신이 만든 창조 세계가 이렇게 악한 탐욕자들에 의해서 분탕쳐 지고 파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죽은 하나님인 것처럼 간섭도 안한 것처럼 보여서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 분노를 터트리다가 우리 마음이 강퍅해진 것을 경험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 안에 거했던 은혜와 진리의 영광이, 갱생과 진리 대속의 그 영광이 가향공동체에 가득 빛나서 우리가 갱생되고 하시고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지게 하시고 사랑이 가득 차게 한 후에 저들을 세상에 파송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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